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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정의란 무엇인가?
이상하리만치 딱딱한 책이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당당하게 올린 이유가 무엇인가?
일단 저자의 이력이 화려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누가 뭐라고 해도 20대에 하버드의 교수가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출판사도 이 점을 다분히 의식했는지 정의란 무엇인가를 선전할 때 저자의 화려한 스펙을 가장 앞세웠다.
다음으로 우리 사회의 부조리 때문이 아닐까? 한미 FTA, 촛불 집회에 대한 강압적인 탄압, 용산 참사 등 민주화된 시대에는 일어날 수 없을 법한 굵직한 사건들이 요 몇년 사이에 일어났다. 사람들은 투표의 소중함에 대하여 철저하게 깨달았고, 그 어느 때보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공통적으로 드는 생각이 무엇이겠는가? 다름 아닌 정의일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로운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인가? 우리 사회는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딱딱한 이 책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만든 동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두가지 이유가 정말 상반된다는 것이다. 저자의 화려한 스펙에 현혹되었다는 말은 나도 저만큼 성공하고 싶다는, 혹은 성공한 사람들이 대접을 받는 이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테고, 정의에 대한 고민은 지금가지 우리가 추구했던 성공이 결국은 잘못되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일테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닌가? 그러나 민주화의 주된 세력이었던 386에 의해서 승자독식과 사교육이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었다는 사실을 떠 올린다면 그다지 새로운 사실도 아닐 것이다.
어찌되었든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고, 그의 인기에 기대어 생명윤리를 말하다라는 책이 나왔다. 여기에서 멈추기에는 지금가지 띄워놓은 샌델의 인기가 아가운 것일까? 결국 "왜 도덕인가?"라는 책이 숨가쁘게 나왔다. 숨가쁘게 출판되었다는 말이 정말 맞을 것이다. 만약 이 책이 딱 3달만 뒤에 나왔어도 이렇게 비상한 관심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샌델이라는 이름값에 휘말려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고, 읽게 되었다. 다 읽고 난 평을 한 마디로 하자면, 정의란 무엇인가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공리주의와 개인주의의 입장을역사적으로 살펴보고 시민의 덕성을 함양하는 정의에 대한 태도를 설파했다면 이 책은 정의가 실행되어야 하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으로 도덕을 보고 있다는 점이 약간 다르다면 다를까?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미 파악했듯이 샌델은 공리주의적인 입장도, 그렇다고 개인주의적인 입장도 지지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중립적인 가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정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장은 결국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생명 윤리를 말한다에서는 생명 공학을 통한 인간 강화가 공동체에 새로운 불평등을 낳을 것이며, 그 결과 공동체가 심하게 위협받을 수 있다는 논지의 주장을 폈다. 이 책에서 샌델은 그렇다면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한다.
샌델은 도덕이란 결국 공동체를 지탱하는 공동체의 가치체계라는 말을 한다. 정확하게 그러한 표현은 사용하지 않지만 마지막가지 읽고 난 후 누구나 갖게 되는 생각이다. 왜 도덕이 중요한가? 도덕은 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을 규정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샌델의 말을 들어보자.
정의가 구성원 자격에서 시작되는 사회에서는 분배만 염려해서는 안된다. 구성원 자격을 함양하는 도덕적 상황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P.173)
도덕적 상황이란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자격을 부여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도덕의 이러한 역할이 있은 후에 비로소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토론하고 고민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의에 대하여 말했다. 왜 우리 공동체가 정의롭지 못한가? 왜 부의 성장과 분배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왜 사회는 상위 1%를 위해 움직인다고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는가? 왜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말하는가? 이 모든 논쟁의 출발점은 결국 공동체의 구성원은 누구인가에 맞추어 질 수밖에 없다. 나와 수준이 비슷하지 않다면, 생각이나 정치적인 입장이 비슷하지 않다면 기꺼이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색깔론, 영호남, 386. 88만원 세대 등 지속적으로 계급을 분화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고민이 없이 함게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솎아 버리는 편협한 태도에 있지 않은가? 도덕을 말하는 것은 이러한 편협한 태도에 대한 반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발견하게 해준다는 것만으로 이 책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하겠다. 물론 이 책이 정의란 무엇인가와 상당부분이 겹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들어간다는 전제하게 말이다.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자격을 함양하는 도덕을 이야기하면서 샌델은 마지막으로 경제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옮아간다.
진보주의 개혁의 분산화 및 전국화 이슈는 1912년 우드로 윌슨과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대결에서 극명히 나타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해의 선거운동에서 가장 의미심장했던 것은 양 진영 지도자들이 공유한 가정이었다. 한쪽에는 브랜다이스와 윌슨이, 반대쪽에는 루즈벨트와 크롤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수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정치 및 경제 제도가 자치에 필요한 도덕을 장려하거나 훼손시키는 경향에 따라 평가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제퍼슨과 마찬가지로 그들 시대의 경제정책이 어떤 부류의 시민들을 만들어낼지 우려했던 것이다. 그들의 방식은 서로 다를지언정 똑같이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논의했다.
한편 우리 시대의 경제적 논쟁은 진보개혁주의자들을 분열시킨 주제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들은 경제구조에 관해 고심하고 민주정부를 어떻게 경제력 집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지 논의했다. 반면 우리는 전반적인 경제 생산에 관해 고심하고 어떻게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동시에 번영의 결실에 폭넓게 접근할 수 있을지 논의한다. 뉴딜정책 후반기에 시작된 성장과 분배의 정치경제학은 1960년대 초에 정점에 달해 마침내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P.280)
과거 정치인들이 왜 그렇게 거대화된 다국적 기업에 대한 견제에 골몰했는가? 그것은 거대화된 기업, 막강한 권력을 획득한 기업은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기업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들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정책을 고수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의 권력에 대항하여 국가에 권력을 더 집중시키는 방법을 택했다는 차이만 있을 분이지 모두 다국적 기업이 획득한 권력에 대하여 경계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고삐풀린 기업은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고 물질만능주의를 최우선의 가치로 만들어 버린다. 기업의 권력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증발해 버리고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성장과 분배의 매커니즘뿐이다. 물론 그 매커니즘도 선성장 후분배라는 조삼모사식으로 바뀌어 버렸지만 말이다.
말이 어려운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자랑스런(?) 삼성을 생각해 보면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해진다. 일제 잔재 청산, 반민족 특위, 피해 보상과 같은 도덕적인 가치들은 잘 살아보세라는 말 한마디에 힘을 잃고 말았다. 성장을 위해서는 그것들은 함구해야 하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머릿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을 입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반동분자로 몰려 철저한 처벌을 받았다. 이런 정책을 펴면서 국가는 어떻게 해서든 재벌을 통제하려고 노력했으나, 그 시도는 철저하게 실패로 끝나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처럼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 버렸다. 기업이 정부를 위협하는 단계를 넘어 정부의 모토마저 기업에서 정해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최후의 보루이자, 사회 안전망인 공동체를 상실하게 된다. 여전히 공동체는 존재하지만 그 공동체에 붙어 있기가 지극히 어렵다. 이제 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던 입장도, 인간을 절대적인 기준이요 목적으로 삼던 철학도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시장에서 만인을 위한 만이의 투쟁만이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이 먹고사니즘에 올인한 결과이다. 국어, 영어 , 수학에 올인하면서 도덕 교육과 윤리, 철학을 경시한 결과이다.(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나도 고동학교 시절 윤리, 철학 시간에 자습이라는 명목하에 국영수 공부할 것을 강요받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잘 먹고 잘 살지만, 그 어디에도 만족은 없으며, 인정이라는 훈훈함도 없다. 사회 안전망이 사라지니 기업에 의해 운영되는 보험사가 활개를 친다. 이젠 개인의 미래마저 기업에게 담보물로 잡혀 버린 것이다.
케케묵은 이야기같은 도덕, 공동체의 공동의 가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인 판단과 철학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생각과 한 가지 이념으로 뭉쳐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개개인의 생각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다만 끊임없이 인간다움에 대하여 생각하고 고민하는 모습만 같은 뿐이다. 왜 도덕인가? 공동체를 유지하게 해주는 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