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이며 약간은 어렵다던 줄리언 반즈의 원작 영화가 언제 나왔었구나.
읽어 본 사람들은 작품은 다 읽었을 때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 읽게 만든다고 하던데
영화도 그럴까 했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인다.
물론 또 봐도 상관은 없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잖는가?
남에게 은혜 받은 건 물에 새기고,
상처 받은 건 돌에 새기고.
이 영화는 그것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상대는 어떠할까?
누군가에게 상처 준 걸 기억은 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래서 남에게 상처주고 어떻게 뻔뻔하게 잘 사냐고 이를 갈기도 하지.
그것은 전자든 후자든 인간은 이기적인 본성이 있기 때문이고
기억은 언제나 내게 유리한 쪽으로 편집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때 나를 좋아했던 연인이 다른 사람 그것도 친구를
좋아한다는데 화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럴 경우 사람마다 반응하는 게 조금씩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당장 마음은 아프지만 이성적이라면 사랑도 선택이니
그 선택을 존중한다며 쿨하게 보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속 주인공은 그렇게까지 쿨하지 못했다.
두 번째나 세 번째 사랑이면 가능했을지 모르겠지만 첫 사랑이다.
어떻게 쿨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게 컨셒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봐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주인공은 또 꼭 사랑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사랑과 우정을 오가는 것도 같다.
(아닌가? 이러면 영화도 책처럼 다시 봐야하는 걸까?)
어쨌든 그럴 때 주인공은 쿨하게 연인을 보내 줬어야 했다.
그래서 실제로 둘의 만남을 축하한다고 잘 해 보라고 축하 엽서를 보내려고
우표까지 붙였는데 순간 돌변해 찢어 버린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천박한 말로 둘을 희롱하고 저주하는 말을 편지로 써서 보낸다.
과연 그러면 속이 후련할까?
당장은 그럴지 몰라도 훗날엔 그런 자신을 후회할 것이다.
자신의 인격이 바닥이란 걸 증명하는 꼴이고, 깨닫고 나면 오히려 더 비참할 것이다.
그만큼 사랑은 치명적이다.
하면 더 없이 좋지만 그 끝은 괴롭고 처절하다.
그것은 사랑의 깊이만큼 반비례한다.
그러니까 그런 편지를 써서 보냈겠지.
미성숙하기도 하고.
그래도 영화속 주인공이 파파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살아갈 수 있었던 건
세월이 약이고, 망각 또한 약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월과 망각에 그 첫 사랑의 실패를 묻어버리지 않았다면
괴로워서 한 시도 못 살았을 것이다.
잃어버린 사랑과 자신의 인격이 바닥인 것을 증명한 그 행동은 잊지 못한다면
앞으로 그 많은 날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며
그 다음에 찾아오는 사랑과 결혼 기타 등등을
어떻게 다 감당하며 살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 영화 분명 주인공이 미성숙하고 잘못했다는 건 알겠는데
너무 주인공을 코너로 몰고 간다는 느낌이다.
여자도 내가 볼 때 그다지 성숙해 보이진 않는다.
주인공이 싫어 떠난다면 떠난다고 이별을 정식으로 통보하고,
충분히 자신으로 인해 상심이 클 옛 애인을 다독거려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긴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렇게 옛 애인으로부터
잔인하고도 무지막지한 편지를 받을 이유는 없다.
물론 요즘 데이트 폭력에 비하면 약하긴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파파 할아버지가 된 주인공이 지난 날의
과오를 다시 만난 옛 애인에게 따져 묻고 네가 그러지만 않았어도
내가 그런 편지는 안 보냈을 거라고 자신의 잘못을 덮어 씌우고
합리화하지 않아 다행이다.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 인간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여자도 꽤 오래도록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러니까 노년이 되어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그처럼 쌀쌀 맞은 거겠지.
그래도 뭐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라도 사과는 받았으니 그나마 다행이고 복은 아닐까?
이미 말했지만, 세상에 자신이 용서를 구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살아가는 중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영화는 보여준다.
보다보면 역시 젊음이 좋긴하다 싶기도 하다.
그 미성숙하고 덜떨어진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젊다는 이유만으로 역대로 세상의 모든 이야기꾼들은
젊었을 때의 이야기를 다루길 좋아했다.
노년 그 자체로는 별로 얘기가 나올 게 없거든.
산전수전을 이미 다 겪고난 훈데 뭐 그리 할 말이 있겠는가?
그래서 약간은 서글프다.
자신의 이야기를 해도 젊은 때 이야기를 하지
늙은 현재를 얘기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표정도 감정의 씀씀이도 젊을 때만 못하다.
뭐 그걸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
그만큼 단순해졌다는 뜻이기도 하지 않을까?
젊은 사람이 단순하면 말미잘이라고 욕을 먹지만
늙은 사람이 단순하면 초탈하다고 봐준다.
나쁘지 않은 일이지.
주인공의 노년의 모습도 나쁘지 않다.
누구는 원작만 못하다고 하는데
원래 원작을 능가하는 영화란 없다.
아직 원작을 읽지는 못했지만 영화 자체만으로 봤을 땐 볼만하다.
사실 이제와 말이지만, 원작과 비교하는 건 자유지만
무엇이 무엇보다 좋다 나쁘다를 얘기하는 건 의미가 없어 보인다.
감독이야 원작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화할뿐인데
그냥 그러면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뭘 어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