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보다 별로다. 괜찮았다. 좋았다. 말 많았던 <신과 함께>를 보았다.

이 영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난 좋게 봤다. 글쎄, 생각 보다 별로란 말을 염두해 둔 덕분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썩 괜찮은 측면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난 우리 영화가 아직도 건재함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이 영화는 그 영역을 한층 확장시켜 나간 것 같아 좋았다. <전설의 고향>이나 <구미호> 같은 호러 영화나 만들 줄 알았지 본격 저승 세계를 다룬 적이 있었나? 내 기억엔 없지 싶다. 이는 주호민 작가의 원작 웹툰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감독이 누군가 했더니 <국가대표>, <미녀는 괴로워>등을 만든 김용화 감독이다. 그런 일련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면 선택하는데 후회할 것 같지는 않다.

 

영상이 다소 만화적이긴 하지만 풍부한 상상력과 CG가 그럴 듯하다. 얼핏 주인공이 자홍 역을 맡은 차태현 같기도 하지만, 사제복 같은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이승과 저승을 왔다갔다 하는 하정우에 좀 더 비중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정우를 많이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옷을 그렇게 입으니 쫌 멋있어 보이기도 한다.   

 

사제복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원래 복식사에서 보면 치마는 처음 남자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그건 카톨릭 신부들의 상징이기도 하다. 나도 어렸을 때 한때는 카톨릭 신자였던 관계로 사제복을 입은 신부를 자주 볼 수가 있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내가 다녔던 성당의 주임 신부님이 배가 적당히 나온 할아버지 신부님이였다. 그런데도 사제복을 입으면 배가 가려지면서 좀 멋있어 보이기는 했다. 그러니 젊고 풍채가 좋고 지적인 신부님이라면 어쩔뻔 했겠는가. 성당 미사실 한쪽 귀퉁이의 속죄소에 여신도들이 줄을 서지 않았을까?ㅋ

 

앞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주호민의  웹툰<신과 함께>를 영화화한 것이다. 제목만 언뜻 들으면 영화 <신과 함께 가라>가 생각이 난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쯤 봤는데 물론 서로 전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이 영화를 아직 안 봤다면 한번쯤 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미 봤다면  말나온 김에 한 번쯤 더 볼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만든 영화다. 물론 두 영화는 아무런 연관성은 없다.

 

오히려 영화를 보다보면 데이비드 핀쳐 감독이 쵸서의 캔터베리 서사사에서 7대 죄악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던 <세븐>이 생각나기도 한다. <신과 함께>도 7가지 죄악이 나온다. 그런 점은 같지만 <세븐>은 서양식으로 인간의 죄악을 다루었고, <신과 함께>는 동양식으로 다루었다. 또한 <세븐>은 영계를 다루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실적이며 그로테스크한 것이 갈수록 포악해지고 죄악에 둔감한 인간의 죄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수작이다.

 

주호민 작가는 언제 또 우리 신화를 탐독했을까. 그도 그렇지만 감독이 각본도 맡았는데 원작 그대로 하지않고 자기식의 새로운 인물을 창조했다. 이를테면 원작에서 주인공의 직업은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영화에선 소방관으로 좀 더 역동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불에 갖힌 소녀를 구하다 사고로 죽어 저승에서 재판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이야기의 설정 자체도 흥미롭다. 저승법에 의해 49일 동안 7가지 죄악에 의거한 재판을 한다. 살인,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 천륜.  이렇게 7개의 지옥에서 7번의 재판을 무사히 통과한 망자만이 환생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게다가 염라대왕은 저승차사 세 명, 강림(하정우)과 혜원맥(주지훈), 덕춘(김향기)에게 천 년 동안 49명을 환생시키면 그들 역시 인간으로 환생시켜 주겠노라고 한다. 그러니 19년만에 나타난 마지막 49명째가 될지도 모르는 소방관 자홍(차태현)에게 거는 기대는 상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최승이 단테의 <신곡>을 소설로 풀어 쓴 3부작이 생각났다. 지옥과 연옥에 관한 부분은 읽었지만 천국은 책만 사 놓고 아직 읽지 못한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리고 역시 <단테의 지옥여행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테의 지옥여행기>도 충분히 무섭긴 하다. 특히 구스타브 도레가 그린 삽화가 내용의 으스스함을 더한다. 물론 영화도 충분히 지옥답다. 그 무서운 지옥을 어떻게 보여주느냐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어차피 이승은 물질계지만 지옥은 사후 세계다. 죽어보지 않고서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그곳을 갔다오거나 말거나 영계는 우리의 관심사인 건만큼은 사실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나는 사후세계에 대해 관심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면 뭐에 관심이 많아서 보게될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죽고 난 후 그 영혼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있지 않을까? 이건 아무래도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임엔 틀림없는 것을 것이다.  

 

내가 이 영화에 꽂힌 것도 오래 전 나의 아버지가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는 오빠가 통과했을지도 모를 곳에 대한 상상 때문이기도 하다. 나 역시 죽으면 통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내세관이 기독교적 관점과 동서양의 그것이 조금 다르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가리지만(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선 살아있을 때 얼마나 착하게 살았느냐에 촛점을 맞춘다. 아무래도 이런 스토리는 권선징악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이런 스토리 때문에라도 세상이 조금이라도 착해진다면 바라건대 이런 이야기는 자꾸 나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너무 그래도 관객들은 식상해 하겠지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진행 방식도 마음에 든다. 원래 이야기는 이건가 싶으면 저것이고, 저것인가 싶으면 새로운 무엇이 나오는 것이 좋은 이야기 방식이다. 그건 충분히 흥미롭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보게 만든다. 세 명의 차사는 저승 재판에서 자홍의 옳음을 계속 증명하고 응원해야 하지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자홍 역시도 까 보면 잘한 것이 하나도 없는 죄인이다. 그래서 판관들은 할 수만 있으면 자홍의 죄를 들추어 그를 지옥으로 보내고 싶어한다. 그래서 벌의 구렁텅이에 빠질 것만 같지만 또 그럴 때마다 옳음이 증명되 극적으로 구제를 받곤한다. 만화 같지만 흥미롭다.

 

          

 

그런데 아무래도 영화를 짠하게 하는 건 자홍의 동생이 죽기 전 어머니와의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모르긴 해도 이제 대표 어머니 역은 나문희에서 자홍모 역을 맡은 예수정으로 넘어간듯도 하다. 이 배우는 맡는 역마다 약하지만 강한 어머니상을 맡는다. 이 영화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어찌보면 가장 한국적인 어머니상을 보여주지 않나 싶기도 하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것도 자홍이 죽기 전 어머니를 뵙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책이 깔려있다. 무엇보다 이 어머니는 말을 하지 못한다. 게다가 첫째인 자홍뿐만 아니라 곧이어 둘째 아들도 총기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처량함을 예수정 배우는 잘도 연기했다. 그러니 그런 어머니를 두고 이승을 떠난 두 아들의 마음은 또 어떻겠는가? 가끔 꿈에 죽은 사람이 보이곤 하는데 이를 두고 현몽이라고 하는가 보다. 둘째 아들 수홍이 어머니를 위로한다고 꿈에 나타나는데 그때 어머니의 혀가 풀리고 모자가 얘기를 하는데 순간 뭉클했다. 나도 가끔 아버지와 오빠가 꿈에 보고 울다가 깨곤 하는데, 현몽이란 정말 있는 걸까? 

 

관객을 안타깝게 하는 건 자홍이 죽기 전 언젠가는 누룽지 기능이 되는 전기밥솥에 편지를 넣은 어머니를 위한 선물을 전하지 못한 것인데 그걸 보면서 역시 어머니는 밥으로 대비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우리나라 인사법 중에, 밥은 먹었냐, 밥은 먹고 다니냐 뭐 이런 것인데 그 질문을 남자가 할 땐 밥을 사 주겠지만, 여자 그것도 어머니가 하면 그 어머니는 꼭밥상을 차려온다. 못 먹고, 못 살아서라고 생각했는데 오래도록 그것이 지배하는 걸 보면 그것 이상의 뭔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밥은 모성의 하나로 대비되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물론 여기선 누룽지지만. 자홍모는 누룽지를 잘 만드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것을 자홍은 전기밥솥이 대신하길 바란다. 역시 인간이 기계를 이기지 못하는 것 같다. 또한 영화든 드라마든 모성 이야기를 하면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것도 있다.   

 

영화는 정말 꿈 같은 것이긴 한가 보다. 자홍이 7가지 심판을 다 통과를 해서 드디어 환생 티켓을 따낸 것 같은데, 역시 염라대왕은 그냥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거 웬만하면 세 명의 저승차사에게 환생할 기회를 줄 일이지 후편을 예고하며 끝나니 역시 이번 생에서도 환생은 어려운 듯 싶다. 기대가 되긴 하는데 이런 거라면 16 또는 8부작 정도하는 시리즈물로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환생이란 게 참 그렇긴 하다. 어쨌거나 그렇게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 환생을 한 누군가는 이번 생을 살고 있다면 세상은 조금 나아져야 할 것도 같은데 여전히 죄에 매여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 보다 그냥 극락왕생이 낫지 않나? 저 저승차세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만할 이유가 있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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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4-21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인 가구 인구가 늘어나도 ‘어머니=집밥’으로 연결된 모성을 강조하는 프레임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가정’에 대한 향수를 소환하는 소재로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쓰일 거예요.

stella.K 2018-04-21 13:27   좋아요 0 | URL
그건 뭐 거의 이야기의 법칙이지.
그런 엄마가 또 좋은 엄마잖아.
자식이 잘못하고 들어와도 암말 않고 밥상 차려
밀어 주면 이 세상 다른 사람은 다 욕해도
엄마만은 나를 믿어주는구나. 그래서 세상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것 아니겠어?
결국 내편, 나에게 힘을 주는 사람의 상징이 엄마라서 그런 것 같아.^^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은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지금은 내용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읽을 당시도 우리나라에 베스트셀러란 말에 혹해서 본 거지 하루키가 좋아서 읽은 것도 아니다. 20년도 더 지났으니 지금 다시 읽으면 또 어떨까 하다가도 영 다시 볼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 <상실의 시대>가 언젠가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역시 영화로도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런 걸 보면 난 하루키를 안 좋아하긴 하는가 보다. 그러다 어제 갑자기 볼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는 IP TV에서 이달 말 서비스 종료를 한다니 볼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감독이 트란 안 홍이다. 예전에 <시클로>란 영화를 만든 사람. 그런 줄 알았러라면 진작 챙겨 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그 영화를 괜찮게 본 기억이 있어서.

 

이 영화에 대한 평은 그냥 좋게 말해서 평작 정도가 되는 것 같은데, 스토리는 어떨지 몰라도 영화는 스토리만 보는 건 아니지 않는가? 종합 예술인만큼 난 감독이 기본적으로 영화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시클로>는 솔직히 내용은 거의 생각이 안 나는데 녹색과 노란색의 배색을 즐겨 강조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영화도 그랬다.

 

아무래도 영화를 보면서도 하루키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그의 동명 소설을 읽었을 때 친구에게 일본 소설은 백치미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중에 생각을 고쳤는데, 백치미가 있다면 이 소설에 있는 거지 일본 소설 전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소설에 백치미가 있다고 느낀 건 우린 보통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그렇게 노골적으로 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의 소설만큼 노골적으로 하는 것도 처음 보는 것 같다. 물론 포르노 소설이라면 이해하겠지만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순수 소설 아닌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한다는 게 백치 같았다. 

 

화자인 와타나베는 하루키의 페르소나라는 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이고, 언제나 그렇듯 작가의 초기 작품은 자전적이라는 건 하루키도 피할 수 없는가 보다. 하지만 작품에서 중요한 건 와타나베 보단 나오코에 무게 중심이 더 실리는 것도 사실이다.

 

나오코의 고민은 그런 것이다. 사랑과 섹스는 다른 것이냐는 것. 그도 그럴 것이 나오코의 애인겸 와타나베의 친구 기츠키가 자살을 했다. 그건 나오코에게 크나큰 상실의 아픔이었겠지만 놀라운 건 기츠키가 죽기 전 나오코는 그와의 섹스를 성공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이 있었다. 사랑하는데 왜 섹스가 안 되는 것인가? 그런데 반해 와타나베와는 사랑은 아니지만 섹스가 가능했다.

 

별 걸 다 고민한다 싶기도 한데 아직 갓 스물도 안된 소녀라면 고민할만도 하겠다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과 섹스를 따로 분리시키기도 하지 않는가? 그래서 사랑은 어렵지만 섹스는 욕구를 푸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오코가 조금 더 크고 세상에 좀 더 영악해지면 이게 가능한 줄도 모르겠다. 자기 자신을 놔버린다는 의미에서. 그런데 아직도 그것을 그렇게 고민한다는 건 그만큼 그녀의 영혼이 순수하다는 뜻도 되는 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이 또 부담스러운 건 문화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일본은 20세 미만의 청소년도 필요에 따라선 섹스를 하기도 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어쨌든 법적으론 금하고 있다. 섹스를 양지에서 다루는 것이 더 건전하고 안전하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음지에서 다루길 좋아하니 이렇게 소설로 다뤄도 민감해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오코는 애인이 죽은 때문인지 심한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했고, 사랑과 섹스를 분리하지 못해 결국 사랑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결국 자살하고 만다.

 

정말 사랑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할까? 그 보단 섹스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는 거겠지. 나오코가 다른 종류의 사랑을 알았더라면 그런 비참한 최후는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비해 와타나베는 어찌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현실주의자처럼 보여진다. 또한 하루키는 잘 알려진대로 성에 있어서만큼은 지극히 건전한 보수주의자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하루키의 체험을 바탕으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을 보면 그가 왜 지극히 건전한 보수주의잔지 알 것도 같다.

 

또한 영화를 보면 자연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이 많은데 문득 에덴 동산을 생각했다. 에덴 동산에 있는 아담과 하와. 어쩌면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에덴에 있는 또 다른 아담과 하와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거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정치와 경제를 논할 수 있을까, 사화 전반에 관한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하와가 탄생된만큼 서로의 성이 다른 것에 대한 얘기 밖에 더 했을까? 그리고 어디를 자극해 주면 좋아할 건지 즉 서로의 성감대를 연구하는 것 밖에 더 있을까?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대화도 그런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를 보자 하루키 코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왜 이후의 작품에서도 그처럼 성에 대한 묘사가 빈번했는지 말이다. 그는 언젠가 읽은 한 인터뷰  기사에서 자신은 성에 대해 지극히 보수적이지만 소통의 기재로 다루길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다. 어떤 작가가 성에 대한 얘기를 다루기만 하면 무조건 변태로 의심하는 건 어쩌면 성의식이 낮아서는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뭔가 불편했던 사놓고 읽지 못한 하루키의 일련의 작품들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트란 안 홍이 그의 작품을 영화화 하기 위해 무려 4년을 설득했다고 들은 것 같다. 감독의 인내와 끈기도 대단하지만 역시 하루키란 생각이 든다. 그가 영화를 싫어한다고 들어보지 못한 것 같은데, 내가 역시 하루키란 건 그 특유의 보수적인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는 같은 문인들과의 교류를 일체하지 않으며, 잡지를 보거나 기고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 한다고 했을 때 불편해 했을 거란 건 일견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아마 그의 작품이 영화화 되는 건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이 작품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내가 볼 때 <상실의 시대>는 영화화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만큼 표현했다면 잘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감독 좀 띄워주면 안 되나? 그동안은 알게 모르게 하루키의 소설 보단 그에 관한 책을 더 많이 읽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모르겠는 걸 이 영화에서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능해졌다는 게 새삼 신기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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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8-03-26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도 시간의 차이가 있고 공유하는 시간, 그와 부딪히는 시간이 필요한 듯해요. 영화는 보지 못했네요. 책도 하도 오래전에 읽어 감흥이 가물가물합니다

stella.K 2018-03-26 16:50   좋아요 1 | URL
ㅎㅎ 그러게요. 뭔가를 이해한다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동안 왜 그렇게도 그가 끌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 기회되면 보세요.
보시는 것만으로도 잊었던 소설에 대한 기억이
다시 떠오를 거예요. 영화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cyrus 2018-03-2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이 ‘넘사벽‘이라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저도 몰랐고, 오늘 처음 알았어요. ^^;;

stella.K 2018-03-26 17:01   좋아요 0 | URL
헉, 정말...?! 난 알긴 알았는데 볼 생각을 안하고 있었지.
감독과 서비스 중지만 아니었으면
언제까지나 몰랐을 것 같아.

내가 더 놀란 건 하루키가 이렇게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음에도
하루키를 이해한다는 건 쉽지 않다는 거야.
이 영화 보니까 또 좀 알겠더라구.
이해한다는 건 좋은 일이지.
남자들이 소설 좋아하기는 흔한 일은 아닌 것 같아.^^

꼬마요정 2018-03-26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클로... 양조위가 나와서 보고 감독 이름을 확인했던 영화였죠. 건조한 듯 한데 물기 가득한 녹색 같은 영화였어요.. 뭔가 비정하면서 알 수 없는 기분..

저도 하루키는 이해가 안 간다고 해야 하나요, 안 맞다고 해야 하나요.. 그런 느낌인데 영화를 보면 다를 수도 있겠네요. 도전! 해볼랍니다. 감독이 맘에 들어요^^

stella.K 2018-03-26 17:12   좋아요 1 | URL
헉, 양조위가 시클로에 나왔군요.
오래된 영화라 누가 나왔는지도 기억도 나지 않네요.
요즘 양조위에 꽂혀서 그가 나왔던 영화를 보고 있는 중입니다.
<상성:상처받은 도시>를 얼마 전에 보고
오늘 오전에 <무간도>를 조금 봤는데 마저 봐야겠죠.
양조위는 정말 멋있는 배우 같습니다.
<색,계>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거기서 매력적으로 나오잖아요.
이 배우는 나이 들수록 점점 더 멋있어지는 것 같습니다.ㅋ

영화 내용은 재미없을 수 있어요.
근데 영상이 좋고, 하루키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꼬마요정 2018-03-26 17:35   좋아요 1 | URL
아아.. 상성도 재밌게 봤어요. 무간도는...정말... 그 눈빛이... 황부장이었나요, 그 분을 보던 그 눈빛이 아직도 생생해요. 화양연화 꼭 보세요. (보셨을 것 같지만) 전 완전 반했죠. 사실, 제가 양조위에 꽂힌 건 의천도룡기부터였지만요^^;

stella.K 2018-03-26 18:10   좋아요 0 | URL
ㅎㅎ 아, 네네.^^

서니데이 2018-03-26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실의 시대는 80년대에 나온 책인데, 영화가 2010년작이네요. 이 책은 워낙 유명해서 예전에 영화로 나왔을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하루키 원작으로 영화나 드라마가 된 것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트란 안 홍 하면 <그린 파파야 향기>를 먼저 떠올리는데, 그 영화 포스터 때문일거예요. 영화는 내용소개 보고 좋아할 내용이 아닐 것 같아서 안 봤는데도, 꼭 그 영화가 먼저 생각이 나요.
오래전에 상실의 시대를 읽었으니까, 지금 읽으면 많이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영화 재미있다고 하시면 저도 나중에 한 번 볼게요.
stella.K님, 즐거운 월요일 좋은 하루 보내세요.^^

stella.K 2018-03-26 17:16   좋아요 1 | URL
ㅎㅎ 재미 없어요. 스토리는요.
근데 영상으로는 나름 잘 찍었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그린 파파야...근데 전 그 영화 못 본 것 같아요.
언제고 봐야겠어요. 시클로도 다시 보고.
거기에 양조위가 나온다네요.
아마 양조위 유명해지기 전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 이 배우에 꽂혀있거든요. ㅎㅎ

서니님도 오늘 하루 마무리 잘 하십시오.^^

2018-03-26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3-26 18:12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시니까 영화로라도 보시란 말씀도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남자들분이 소설 잘 안 읽잖아요.
이해합니다.ㅋㅋ

포스트잇 2018-03-26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실의 시대는 하루키 소설들 중에서도 예외적인 소설이고, 아마도 하루키가 애정하는 작품은 아닐겁니다. 그걸 영화화하겠다니 더더욱 싫어했을 것 같습니다.

stella.K 2018-03-26 18:01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감독이 4년을 설득했다잖아요.
대단하죠. 역시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니...
하루키를 어떻게 설득했을까요?
그게 궁금해요.^^

포스트잇 2018-03-26 18:23   좋아요 1 | URL
트란안홍이니까요, 그나마..ㅎ

레삭매냐 2018-04-03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닥다리 세대라 그런진 몰라도
<노르웨이의 숲>보다는 왠지 <상실의 시대>
라는 제목이 더 마음에 듭니다.

소설팬들은 그렇게 영화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더라구요.

전 작년에 읽었는데 그다지 감흥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하루키에 대한 호불
호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stella.K 2018-04-03 19:42   좋아요 0 | URL
그렇죠? 상실의 시대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어요.
그나마 영화는 이미지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사실 저도 영화 보단 소설을 믿는 편이긴한데
그렇더라도 이 영화는 평가절하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좀 아쉽더군요.

shinok 2018-05-15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늦은감이 있지만 댓글 한번 달아보아요 ^^

전 중.고등학교 시절 저 책을 읽고 자살한 젊은 층이 많다며 선생님께서 만류하셨던 기억이 더 강렬합니다. 그래서 대학교 시절 읽었죠... 근데 20년 가까이 되니 기억이 그닥 .. 그래도 짧은 장면은 기억은 나는데... 하루키를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희안하게 잘 읽힙니다. 그래서 많이 읽은편인듯합니다. 이걸 읽고 다른걸 읽으면 사실 그 사람이 그사람이고 그 인물이 그 인물인듯 섞입니다. 당연한거겠죠??

그래도 하루키의 책을 계속 손에 드는 이유는 달이 뜨면 그의 책 이야기 속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그리고 수도원 사진을 보면 그 또한 그의 책에서 본 장면이 ... 각인이 된것처럼 또 피어올라요.

생각해보건데 전 하루키를 좋아하진 않는데....이미 그에게 동요 되어버린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상실의 시대‘ 총탄에 맞은것과 같은 저 겉표지를 간직한채 아직도 제 서재에 꽂혀있는데..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제가 다시 읽을 일보다는 자라나고 있는 제 딸아이가 다시 읽을듯합니다.그냥 나중에 읽고 서로 대화하고 싶어서... 그 어떤 소재로건 아이와 대화하고 나누고 공감하고 때론 배척해도 좋으니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으로....

stella.K 2018-05-16 14:58   좋아요 0 | URL
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상실의 시대는 좀 허무주의가 짙긴하죠?
요즘에도 소설책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해요.
어떤 선생님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조건 막는 것 보단
같이 토론을 하셨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하긴 외설적인 표현도 많았으니...

정말 하루키는 욕하면서도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이제 읽지 말아야지 해 놓고도 어느 샌가 모르게
한 두 권을 읽게되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난 사람이란 생각도 듭니다.^^
 

너의 간을 먹고 싶어. 뭐 이러면 대충 감이 올 것이다. 인간이 되려다만 구미호의 이야긴가 보다 했을 것이다. 근데 하필 하고 많은 장기 중에 췌장이라니. 췌장과 관련된 질병을 앓다 사망한 사람과 그 유가족이 알면 좀 뜨악하지 않을까?

 

일본 관객은 어떨지 모르지만 실제로 우리나라 개봉 당시 관객과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 작은 소동이 빚어졌나 보다. 나도 제목이 하도 독특하여 요 근래 보았다. 사실 이 영화는 원작을 바탕으로 했고, 언제나 그렇듯 표지 디자인은 어느 정도 그 책이 가지는 이미지를 반영하느니만큼 벚꽃 만발했던 것으로 보아 생각처럼 무서운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소녀의 감성을 저격하는 영화라 제목이 과연 어울리기나 한 건지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다. 그러고 보니 이런 소녀 감성 저격 영화는 또 얼마 만에 보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 영화는 그 나름대로 보는 맛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과도기를 겪는 걸까? 최근 개봉된 영화들이 시원치가 않다. 이 영화도 고만고만하다. 하긴 예전부터 일본은 애니메이션 강국이고 영화는 우리나라만 못하다는 평이 있긴 했다.

                

                             

 고만고만한 영화는 또 참 애매하게 중간에 끊기도 뭐하다. 특별히 감동스러운 것은 아닌데 그래도 뭔가 씹어볼만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이제 겨우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사쿠라는 시한부 인생을 산다. 그런데 이 아이는 어쩌면 그리도 밝고 맑은 심성을 가졌는지. 얼마 후 죽는다기 보단 잠시 선녀가 인간 세계에 왔다가 곧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싶게 흔히 있을 법한 캐릭터는 아닌 것 같다.

 

아픈 것도 정확하게 어디가 아픈지도 모른다. 어떤 관객은 섣부르게 췌장암 아니냐고 했다가 눈총을 받았나 본데 정말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췌장쪽 병을 앓는 것으로 나온다. 이러면 시나리오는 과학이라고 부르짖는 전문가들로부터 비난의 물결이 쇄도했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영화로 나온 걸 보면 이건 그냥 맥거핀이라고 할 수 밖엔 없을 것이다. 사쿠라의 간지도 그렇다. 도무지 병자 같지가 않다. 영화 말미에 가면 사쿠라의 정직한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는데 밝고 맑고 환한 캐릭터는 실상 그녀의 성격임에 분명하지만 그런 그녀도 죽음 앞에선 두렵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인간은 없다.

 

영화가 소녀 감성을 제대로 저격했다고 한 것은, 소녀들의 로망중 하나는, 어느 아프지 않는 이름 모를 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사는데 운명의 남자와 비극적인 사랑을 하다 그의 품에서 죽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대가 우락부락한 짐승남일 수는 없다. 잘 생겼지만 뭔가 여리고 모성본능을 자아내는 남자여야 뭔가 합이 맞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으로 낙점된 키타무라 타쿠미란 배우는 그런 역할을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연기는 그만그만한데 그 이미지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미소년 시절 필이 약간 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둘이 펼치는 영화 내용은 역시 고만고만해서 굳이 줄거리는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너무 건전한데다 신파적이기도 해 내용을 얘기하는 순간 바로 스포일러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다만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의 췌장을 먹으면 그 영혼이 그 사람 안에서 산다는 속설을 의미하는 거였다. 영화는 남녀 주인공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그들의 모든 행동과 심증은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췌장을 먹어 달라는 말이 안 나올 수 없지 않은가?

 

사쿠라가 마지막 죽는 것도 극적이라기 보단 작위적이긴 하다. 일본도 몇 년 전부터 묻지 마 살인이 유행인가 보다. 그런데 사쿠라는 비록 짧지만 제 명에도 죽을 수 없는 운명이었나 보다. 묻지 마 살인에 그나마 짧은 생을 단축했다. 그러니까 영화는 사쿠라가 자신이 사랑했던 나래이터겸 남자주인공 시가에게 남긴 공병문고란 그녀의 일기겸 편지를 사후에 읽게 하기 위한 의미로도 보이는데 그것을 보면서 역시 사람은 말과 글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칼이고 방패인 것이다. 사쿠라는 소년을 사랑함에도 그것을 차마 입 밖으로 얘기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알아 달라는 듯 일기장에 짧은 기간 동안 그를 알았던 것에 대한 감사가 들어있다. 말로 할 수 없으니 글로 남긴 것이다.

 

사실 사쿠라가 공병문고에 시가에게 했던 말이 오글거리긴 하다. 정확히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너로 인해서 나의 마지막이 즐거웠다는 뭐 그런 메시지를 남겼는데 하긴 영화나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멋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게 흘러가는 중에 뭐 하나가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거나 대사가 귓가에 맴돌거나 가슴에 박히면 것이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그 작품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즉 나는 사쿠라의 이런 신파에 걸려든 것이다.

 

내가 있어서 누군가의 삶이 덜 힘들고 조금 덜 외롭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하는 인생은 아닐까? 5년 전 나의 오빠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문득 들은 생각은 사람은 정말 죽기 위해 사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백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백세까지 살게 되기를 바라진 않았다. 못해도 60만 넘겨 살아도 덜 안타깝고 덜 슬펐을 것 같았다. 어떻게 마이클 잭슨이 죽은 나이와 같이 죽을 수 있을까? 난 이상하게도 오빠의 죽음을 두고 그 어느 것에도 위로를 받을 수 없었지만 그나마 이게 위로라면 위로였다.

 

오빠가 죽고 나서 난 건강에 더 민감해졌다. 그건 꼭 오빠와 같은 나이 죽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엄마를 생각하면 오빠는 확실히 불효자임엔 틀림없다. 어쩌자고 엄마를 두고 자기가 먼저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오는 길은 순서가 있어도 가는 건 순서가 없다지 않은가. 그러니 오빠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사는 날 동안 이렇다 할 병도 없이 건강했으니. 아무튼 난 적어도 엄마 보단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자신이 먼저 가는 슬픔을 겪게 하는 건 오빠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생각은 나만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말은 안 하지만 우리 가족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사는 동안 사람은 다른 사람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최대한 걱정과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나부터 건강하고 바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가졌던 죽기위해 사는 것인가란 질문이 아니라 살아주기 위해 사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 사쿠라의 소년에 대한 감사가 성립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너무 지나치게 그것을 의식하며 살 필요는 없다. 소년은 사쿠라에게 자신이 그런 의미인지도 모르고 그냥 있어줬을 뿐이다. 상대가 의식할 정도가 된다면 그건 고마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변태가 되는 것이겠지.

 

영화가 신파 같고 어찌 보면 도덕 교과서를 보는 것도 같다. 보면서 일본은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도 영화를 다 만드는구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영화 보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우리가 학교 졸업하고 또 어디 가서 도덕 교과서를 보겠는가?

 

영화가 지나치게 보물 찾기식이어서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도 아쉬움이긴 하다. 그런 것만 잘 넘길 수 있다면 그럭저럭 볼만은 하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것에 있지 않을까? 그것에 충실한 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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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8-03-24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는 패스했구요 최근에 본 일본 영화는 나미야백화점의 기적이였습니다. 역시 도덕교과서적이고 신파적이긴 한데 의미는 있었어요. 죽음과 관련해서 삶과 관련해서. 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쌍생아겠죠. 오빠분 이야기는 님 책에서도 읽고 찡했는데 그게 다 공부라는 김사인 시 ‘공부’가 뜬금없이 생각납니다. 전 아직 그런 공부 못해봤네요. 언제인가 하게 되겠죠.

stella.K 2018-03-25 19:11   좋아요 1 | URL
아, 김사인의 그런 시가 있었군요.
저도 한번 읽어봐야할 것 같네요.

최근 일본 영화에 대한 느낌은 저만 그런 거 아니죠?
이 영화도 그렇고, 언젠가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란 영화도 봤는데 별로더라구요.
나미야 백화점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보면 자잘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영화로 만드는 걸 보면 그런 영화 정신은 필요해 보이기도 한 것 같구요.
고맙슴다. 읽어주셔서.^^
 

역시 스웨덴 영화는 낮설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가 많이 접하게 되는 영화는 우리 영화를 비롯해 허리우드와 아시아 메이져 영화, 서유럽 몇 개국으로 한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도 볼 영화들이 너무 많아 권역을 넓히지도 못하겠다. 그나마 스웨덴 영화가 눈에 띄기 시작한 것 수년 전 <렛 미 인>의 선전 때문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이렇게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권 영화를 낮설어 하는 건 그것이 주는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배우들 역시 특별히 아는 바가 없어서는 아닐지? 그나마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미카엘 니크비스트란 배우는 다소 풍채도 있고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 친근감마저 준다. 하지만 여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노미 라파스란 배우는 코에 피어싱을 하고 몸에 문신을 한 것이 전사 같은 모습을 했다. 좋게 말해 전사지 세상에 대해 잔뜩 적대감을 품은 모습이다. 이런 역을 맡은 배우를 단번에 좋아하기란 쉽지는 않아 보인다.

 

하긴 2009년도 영화를 가지고 왈가왈부한다는 게 시대에 뒤쳐진 느낌이긴 하다. 그동안 스웨덴을 비롯한 동유럽권 영화가 우리나라에 나름 꽤 소개되지 않았을까? 그러니 이제와 낮서니 어쩌니 하는 건 내가 게을렀음을 자인하는 것 밖엔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뒤늦게 나마 이 영화를 볼 생각을 했던 건 문학동네에서 최근 다시 복간된 <밀레니엄> 시리즈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와 원작이 다소 다를 수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튼 영화는 원작을 바탕으로 했을 테고, 영화를 보고 책으로 읽을지 말지를 결정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영화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던가.

 

총 4부작이라지만 한 부, 한 부에 붙힌 제목도 범상친 않아보인다. 그에 따라 영화는 현재 3부작만 나온 모양인데 네*버 평가에 따르면 1부를 제외하곤 이렇다할 흥행은 보지 못한 것 같다.

 

뭐 영화는 그럭저럭 볼만은 하다. 내가 또 스릴러라지만 퇴폐적인 요소는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마냥 좋아라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만했다는 건 잘 만들었단 말과도 같은 말이다.

 

앞서 여자 주인공에 대해서 언급을 했지만 이 여자 확실히 좀 자신을 사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남의 삶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 막 사는 것 같다. 확실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성적 취향도 양성애를 보이는 것도 같고, 나중에 남자 주인공과 섹스 후 다음 날 남자가 해 준 음식을 먹는데 토마토 케첩을 얼마나 많이 뿌려 먹던지. 병의 반 이상이 앉은 자리에서 없어졌다. 그것도 알고 보면 설탕 덩어리라던데. 그뿐인가? 기회있을 때마다 담배를 피워댔던 것으로 아는데 지금이야 젊어서 모른다지. 늙으면 다 독되고 병 된다.

 

그런데 난 이 영화에서 딱 두 장면에 꽂혔다. 하나는 여자가 어디를 가는데 하필 한 패거리의 건달들한테 걸렸다. 그것도 무슨 지하 횡단보도를 지나가는데 부딪친게 화근이었다. 건달들  4명과 싸우는데 남자 4명은 여자 17명과 맞먹는다. 즉 17대 1과의 싸움. 그런데 여자 주인공 리스베트 결코 밀리지 않는 싸움을 한다. 물론 여기저기 다 터졌지. 남자 장정 넷이 휘두르는데 멀쩡하면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터지는데도 끝까지 악랄하게 싸워 결국 승리를 쟁취한다. 그건 비교적 영화 초반에 흘렀는데 순간 이 영화 끝까지 봐야겠다는 굳은 다짐이 생기더라. 세상 보기 좋은 구경 중 하나가 싸움 구경이라지 않던가? 싸움은 역시 백중세로 이기는 것 보다 힘들게 이길 것 같지 않은데 이기는 게 보는 맛은 더 있다. 측은하기도 하고 어째쓰가 하는 짠한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더구나 남자들이다. 아무리 건달이라지만 쪼잔하게 여자와 지나가는 문제로 시비가 붙어 싸울 생각을 하다니. 몇 마디 하고 지나가도 되겠더만. 그래서 그들을 두고 하는 말이 더 있지. 똥파리라고.

 

그런데 이 리스베트 갈수록 더 매력적이다. 스스로 문제해결을 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사실 그녀는 범죄자로 교도소는 나왔지만 보호관찰 대상이다. 근데 그녀를 보호관찰하는 관찰사가 천하에 다시없는 변태 시정잡배다. 리스베트의 약점을 노려 돈을 갈취하고 성상납을 요구한다. 하지만 리스베트는 처음엔 순순히 당해주는 척하지만 역으로 헛점을 노려 다시는 나쁜 짓 못하도록 철저한 응징을 한다. 오죽하면 그의 살에 나는 변태라고 문신을 다해줬을까? 당연 아프다고 난리 부르스를 추는데 보는 나도 처음엔 어머머머 얼마나 아플까 하다가 이내 쾌재를 부르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또 그런 나를 보고 스스로 놀랐다. 아니 내가 남의 고통을 보고 이토록 쾌재를 부르다니. 착각이겠지만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모기 한 마리도 제대로 못 죽이는 차칸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남의 고통을 보고 쾌재를 부르는 걸 보면 그렇게 회개를 해도 미쳐 다 쫓아내지 못한 악마의 본성이 남아 있음이다. 어떻게...ㅠ 

 

물론 같은 여자라면 아무리 천벌을 받을 죄를 지었어도 그렇게까지 쾌재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필 내가 이 영화를 본 때가 모든 것은 깔떼기로 통한다는 미투운동이 한창인 요근래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는 느낌이 어땠겠는가. 마침 이 영화 전편에 깔린 내용 역시 성폭력이다. 아무튼 리스베트가 자신의 보호관찰사에게 나는 변태다란 문신을 새기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렇게는 못할망정 앞으로 모든 여자들에게 전기충격기 착용 의무화를 법으로 지정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여자들은 어떻게 그 많은 세월을 남자들한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아무런 법적 대응도 보호도 못 받고 살아왔던 걸까? 지금이야 미투운동 때문에 성폭력이 얼마나 줄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또 한풀 꺽이면 언제 어디서 고개를 들지 알 수가 없다. 그럴 때도 세상이 달라졌겠거니 하고 맘놓고 살아도 되는 걸까? 알다시피 성폭력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아는 사람한테 당한다. 남성들의 짐승 같은 본능은 어쩔 수 없다고쳐도 거기서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다고 모든 여성들이 이 영화의 리스베트처럼 전사가 되야하는 걸까? 그럴 수 없다. 그럴 때 전기충격기 하나 정도는 몸에 품고 달려드는 짐승의 모가지나 거시기에 전기충격을 가해 자기 몸 하나 정도는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 조금 더 노련하면 신고 시간까지 확보하면 더 좋고. 아무튼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구.

 

영화 속 리스베트를 보면서 여성도 강해질 필요는 있겠다 싶다. 지금 남자들 중엔 미투운동을 꽤나 못 마땅하게 여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평소 때 뭐하고 이제와 미투운동한다니까 생난리냐고. 글쎄, 지금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우리 여자들도 이렇게 해 보는 것이 이번 생엔 처음이라. 확실히 영화속 리스베트처럼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이 되야할 것 같다. 정말 그런 세상이 왔을 때도 그런 말 할 수 있는 남자들이 얼마나 될지 두고 볼 일이다. 

 

영화는 퇴폐적이면서도 우아하고, 뭔가 묵시적이도 한 것이 보는 맛이 남다르다. 책으로 볼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 그런데 주인공 이름이 독특하긴 하다. 리스베트라니. 뭔가 리스펙트의 이미테이션 고유 명사 같기도 하고. 우린 앞으로 이런 전사 같은 여자를 존경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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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3-17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레니엄이 영화가 2개이라고 알고 있는데, 누미 라파스 나오는 스웨덴 영화 보셨나봐요.
저는 책은 보고 영화는 안 봤는데, 페이퍼 읽으면서 영화는 책보다 무서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북유럽 책들은 인명과 지명이 낯설어서 금방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읽다가 한번 더 찾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밀레니엄도 그렇고, 요 네스뵈나 다른 북유럽 작가들도요.
stella.K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stella.K 2018-03-18 14:00   좋아요 1 | URL
앗, 네이버에 보니 3부작까지만 나와있네요.
미국판도 있긴 하지만 평은 스웨덴 것만 못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4부작은 안 만들었을까요?
아무래도 흥행이 저조해서 4부작까지는 만들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걸까요?

영화를 보면 책으로는 잘 안 보게되는 것 같아요.
책이 훨씬 좋을거라고 생각됩니다.
맞아요. 북유럽이 지명이나 인명이 낮설어서.
그래서 저도 <렛 미 인>을 읽으려다 포기한 적이 있어요.
요 네스뵈 좋다고 하던데 저도 읽기는 좀...

cyrus 2018-03-17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폭력, 성추행의 가해자 대부분이 피해자의 지인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남자들이 의외로 많아요. 이렇다보니 가족 내 성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해요.

stella.K 2018-03-18 14:03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미투운동을 타고 가정내 성폭력도 곧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 보다 훨씬 더 끔찍할 것 같다.ㅠ

저어니 2018-03-18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성년자 라면 몰라도 성폭력을 당한 장소가 호텔 또는 여관등 폐쇄된 공간이라면 이미 그건

성폭력이 아니라고 본다. 상관이 부른다고 상관 혼자있는 호텔방으로 업무거리를 들고 보고하러

갔다? 상관이라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하부직원은 철저히 계산했을 것이다. 재수가 없으면 내 인생은 지금부터 탄탄대로야 했겠지.

그런데 왜 미투했나? 계산에 차질이 생긴것이다. 공식이 더 복잡해졌을 수도 있고. . .

위에 올라온 배우의 검고 깊은 동공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가 아닌 <밀레니엄>을 읽고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수입] Loving Vincent (러빙 빈센트)(한글무자막)(Blu-ray)
Cinedigm / 2018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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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다림 끝에 이 영화를 봤다.

영화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흐가 어쩌면 타살됐을지도 모른다는 가정하게 그의 삶을 다시금 반추하고 추적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단순히 생각해서 고흐를 연상시키는 정교하게 그린 애니메이션? 또는 그래픽 노블 뭐 그런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실사 영화에 편집 과정에서 고흐의 화풍을 덧입힌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여기에 여러 명의 화가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것은 전에 보았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13점을 가지고 만든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을 연상시키기도한데 그보다는 좀 더 진화한 방식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어쨌든 실사 영화에 고흐 화풍을 덧입혔으니 그 작업이 만만치 않았겠다 싶다. 영화속 장면과 고흐의 그림을 조화하도록 짜임새 있는 스토리가 인상적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 영화에 드린 공력이 어느 정돈지 알 것도 같은데 나 개인적으론 약간은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고흐풍의 순수 그래픽 노블 같은 질감을 기대했는데 실사 영화에 그림을 덧입히니 그림도 아닌 것이 영화도 아닌 것이 뭔가 어정쩡한 느낌이다. 나만 이런가?

 

고흐를 가리켜 고독한 영혼의 소유자라고 많이 추켜세우던데, 타살됐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에서 시작된 영화는 결국 고흐의 고독만을 더 확연히 부각시키고 끝나버린다. 요즘 추세는 외로움과 고독은 다르다며 고독을 찬양도 한다만, 뭐든 지나치면 독이라고 그것도 적당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고독을 즐겼던 사람은 또 있는데 그건 철학자 니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행복한 삶을 산 것도 아니다. 우린 고흐나 니체가 나름 행복한 삶을 살을 것이라며 섣불리 그들의 삶을 평가하는 걸 조심하고 있는데 그것은 후대 사람의 경의를 표하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고, 실상 고독은 그렇게 즐거운 것은 아니다. 물론 고독이 해롭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홀로 있음으로 해서 영혼의 성숙을 이루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이 주는 만족도 한계가 있는 법이고. 

 

영화 말미에 돈 맥클레인의 공전의 히트곡 '빈센트'가 나오면서 고흐의 일종의 프로필 같은 것이 그의 그림과 함께 흐르는데 상당히 인상적이기도 하거나와 놀라운 것은 그가 죽기 전 8년 동안 800점의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당 2점이 채 안되는 건데 실로 엄청난 작업량이다. 그걸 보면서 내가 또 알아야 할 것은 난 너무 게으르다는 것. 고흐의 고독 후에 오는 게 이거였다니. 이 영화가 잔인한 걸?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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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3-11 12: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흐에 관심 있어서 고흐에 대한 책을 읽은 적 있는데 다작에 놀랐었지요.
뛰어난 예술가들은 재능은 기본이겠지만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노력파라는 거죠.
하루키도 그렇고. 어쩌면 노력이 재능보다 우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요즘 듭니다.
노력이 재능을 키우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stella.K 2018-03-11 18:48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런데 전 너무 게으른 것 같아요.
재능이 없으면 노력이라도 해야하는데...ㅠ
전 아무래도 짧고 굵게 보다 가늘고 길게 살 것 같아요.ㅠ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