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은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지금은 내용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읽을 당시도 우리나라에 베스트셀러란 말에 혹해서 본 거지 하루키가 좋아서 읽은 것도 아니다. 20년도 더 지났으니 지금 다시 읽으면 또 어떨까 하다가도 영 다시 볼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 <상실의 시대>가 언젠가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역시 영화로도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런 걸 보면 난 하루키를 안 좋아하긴 하는가 보다. 그러다 어제 갑자기 볼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는 IP TV에서 이달 말 서비스 종료를 한다니 볼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감독이 트란 안 홍이다. 예전에 <시클로>란 영화를 만든 사람. 그런 줄 알았러라면 진작 챙겨 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그 영화를 괜찮게 본 기억이 있어서.
이 영화에 대한 평은 그냥 좋게 말해서 평작 정도가 되는 것 같은데, 스토리는 어떨지 몰라도 영화는 스토리만 보는 건 아니지 않는가? 종합 예술인만큼 난 감독이 기본적으로 영화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시클로>는 솔직히 내용은 거의 생각이 안 나는데 녹색과 노란색의 배색을 즐겨 강조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영화도 그랬다.
아무래도 영화를 보면서도 하루키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그의 동명 소설을 읽었을 때 친구에게 일본 소설은 백치미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중에 생각을 고쳤는데, 백치미가 있다면 이 소설에 있는 거지 일본 소설 전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소설에 백치미가 있다고 느낀 건 우린 보통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그렇게 노골적으로 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의 소설만큼 노골적으로 하는 것도 처음 보는 것 같다. 물론 포르노 소설이라면 이해하겠지만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순수 소설 아닌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한다는 게 백치 같았다.
화자인 와타나베는 하루키의 페르소나라는 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이고, 언제나 그렇듯 작가의 초기 작품은 자전적이라는 건 하루키도 피할 수 없는가 보다. 하지만 작품에서 중요한 건 와타나베 보단 나오코에 무게 중심이 더 실리는 것도 사실이다.
나오코의 고민은 그런 것이다. 사랑과 섹스는 다른 것이냐는 것. 그도 그럴 것이 나오코의 애인겸 와타나베의 친구 기츠키가 자살을 했다. 그건 나오코에게 크나큰 상실의 아픔이었겠지만 놀라운 건 기츠키가 죽기 전 나오코는 그와의 섹스를 성공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이 있었다. 사랑하는데 왜 섹스가 안 되는 것인가? 그런데 반해 와타나베와는 사랑은 아니지만 섹스가 가능했다.
별 걸 다 고민한다 싶기도 한데 아직 갓 스물도 안된 소녀라면 고민할만도 하겠다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과 섹스를 따로 분리시키기도 하지 않는가? 그래서 사랑은 어렵지만 섹스는 욕구를 푸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오코가 조금 더 크고 세상에 좀 더 영악해지면 이게 가능한 줄도 모르겠다. 자기 자신을 놔버린다는 의미에서. 그런데 아직도 그것을 그렇게 고민한다는 건 그만큼 그녀의 영혼이 순수하다는 뜻도 되는 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이 또 부담스러운 건 문화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일본은 20세 미만의 청소년도 필요에 따라선 섹스를 하기도 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어쨌든 법적으론 금하고 있다. 섹스를 양지에서 다루는 것이 더 건전하고 안전하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음지에서 다루길 좋아하니 이렇게 소설로 다뤄도 민감해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오코는 애인이 죽은 때문인지 심한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했고, 사랑과 섹스를 분리하지 못해 결국 사랑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결국 자살하고 만다.
정말 사랑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할까? 그 보단 섹스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는 거겠지. 나오코가 다른 종류의 사랑을 알았더라면 그런 비참한 최후는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비해 와타나베는 어찌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현실주의자처럼 보여진다. 또한 하루키는 잘 알려진대로 성에 있어서만큼은 지극히 건전한 보수주의자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하루키의 체험을 바탕으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을 보면 그가 왜 지극히 건전한 보수주의잔지 알 것도 같다.
또한 영화를 보면 자연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이 많은데 문득 에덴 동산을 생각했다. 에덴 동산에 있는 아담과 하와. 어쩌면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에덴에 있는 또 다른 아담과 하와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거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정치와 경제를 논할 수 있을까, 사화 전반에 관한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하와가 탄생된만큼 서로의 성이 다른 것에 대한 얘기 밖에 더 했을까? 그리고 어디를 자극해 주면 좋아할 건지 즉 서로의 성감대를 연구하는 것 밖에 더 있을까?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대화도 그런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를 보자 하루키 코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왜 이후의 작품에서도 그처럼 성에 대한 묘사가 빈번했는지 말이다. 그는 언젠가 읽은 한 인터뷰 기사에서 자신은 성에 대해 지극히 보수적이지만 소통의 기재로 다루길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다. 어떤 작가가 성에 대한 얘기를 다루기만 하면 무조건 변태로 의심하는 건 어쩌면 성의식이 낮아서는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뭔가 불편했던 사놓고 읽지 못한 하루키의 일련의 작품들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트란 안 홍이 그의 작품을 영화화 하기 위해 무려 4년을 설득했다고 들은 것 같다. 감독의 인내와 끈기도 대단하지만 역시 하루키란 생각이 든다. 그가 영화를 싫어한다고 들어보지 못한 것 같은데, 내가 역시 하루키란 건 그 특유의 보수적인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는 같은 문인들과의 교류를 일체하지 않으며, 잡지를 보거나 기고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 한다고 했을 때 불편해 했을 거란 건 일견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아마 그의 작품이 영화화 되는 건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이 작품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