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정원 푸른사상 소설선 44
배명희 지음 / 푸른사상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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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작가의 작품집이다. 하지만 작가는 지난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와인의 눈물'이란 작품집이 있다고 한다. 본 작품집은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안정되고도 웅숭깊은 문체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특별히 에로틱한 문장도 자주 보이기도 하는데 솔직히 그 부분은 좀 놀라기도 했다. 


물론 이 놀라움은 나 개인적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문장을 접하면 세 가지 정도로 놀라게 된다. (그것은 실례일지 모르겠는데) 저자가 초로의 삶을 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라웠다. 뭐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보통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금욕주의자가 되지 않나? 그러다 보면 아무리 작가라고 해도 성애적 표현도 좀 줄거나 에둘러 표현할 것 같은데 상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직설적이다. 그러다 보니 작년 말에 읽은 누구라고 하면 알만한 모 작가가 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책에서, 작가라면 성애적 표현을 건너 뛰거나 축소해서 표현하지 말라는 취지의 가르침이 생각이 났다. 그러면서 난 어쩌면 소설가는 되지 못하겠구나 했다. 솔직히 영화를 보든, 소설을 읽던  난 그런 표현들이 불편하고 어색하다. 그런 내가 그렇게 쓸 일도 없지 않겠는가. 아무튼 저자의 문체나 표현이 좋아서 자연스럽게 밑줄 긋게 되는 문장도 꽤 있었다. 이를테면,


라면 용기에 젓가락을 넣는 순간에는 모든 구별이 사라졌다. 그가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부자인지 가난뱅이인지 상관없었다. 모든 것은 뜨거운 국물 속에 녹아들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심장에 차곡차곡 쌓인 소외감과 불만이 더운 국물을 삼키는 동안 희미해졌다. 누군가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는 것처럼 편안해지는 거였다. ('광장' 12p)  

또는 이런 문장은 어떤가?

내게는 이미 한도가 넘은 신용카드, 그에게는 내 손을 넣어줄 빈 주머니가 있었을 뿐이다. ('엄마의 정원' 90p)


이런 은유적이며 사유적 문장을 볼 수가 있어 저자가 정말 소설에 진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작품 저마다 짙은 고독과 쓸쓸함이 베여있어 답답한 마음이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어떤 작가든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연대를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작가가 40대를 산다면 꼭 40대의 시각으로 글을 쓰고, 60대면 60대 다운 시각과 정서를 가지고 글을 쓴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하긴 하겠지만, 그래서 나 개인적으로는 독자로서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작가가 있는데 그건 고 박완서 작가다. 즉 나는 20대 초반 또는 10대 말쯤에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때 또 작가는 한창 열심히 작품을 써 내기도 했다) 박완서 작가가  글 잘 쓴다는 건 알겠는데 그 나이에서 오는 사고의 폭을 좀처럼 따라잡지 못했다. 그런 채 작가는 노년까지를 자신의 작품 속에 그렸을 것이고,  나는 그 무렵부터 작가를 잊기 시작했을 것이다. 근데 참 이상하지. 청(소)년 때는 중년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중년이 노년을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지금 박완서 작가의 작품이 가장 기대가 된다.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지.)


저자의 작품은 노년의 삶을 정면에서 그리거나 어떤 식으로든 작품 속에서 표현해 주고 있는데 지금은 너무 절절하리만치 이해가 간다. 그건 당연하다. 청년은 노년을 잘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중년은 곧 도달하게 될 삶이고 우리의 부모가 이미 도달한 삶이기에 예사롭지가 않다. 


어쨌든 그러면서 작가는 인간 전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인종차별의 문제라든지, 푸어 하우스의 문제, 재건축과 왕따의 문제 등등을 날카롭고도 노련한 문체로 다루고 있다. 작품을 읽으면서 역시 작가는 이렇게 사회 전반을 돌아보면서 소외의 문제를 대신 읊어주는 얼리버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한편 드는 생각은,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작가의 책이 과연 얼마나 알려질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나마 한류의 영향일까 아니면 매스컴의 영향일까. 우리나라 작가들이 국내외에서 나름 선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젊은 작가나 문청 때부터  이름을 널리 알려 온 일부 작가의 일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가 힘든 것 같다. 보통 작가의 글은 나이 들수록 농염하고 잘 쓸 수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건 또 어쩌면 작가의 체력과도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젊은 작가들은 집중력도 좋고 왕성하게 글을 쓸 수 있지만, 나이 들수록 글은 신중해지는 것 같다. 건강도 예전만 같지 않고. 그러니 젊은 작가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일견 당연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꼭 일반적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엔 좀 의문이 남기도 한다. 중노년의 작가도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걸 수시로 보여주고, 문학이나 출판계도 그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다. 


사실 독자의 입장에서 전반적으로 저자의 문장이나 필력은 인정하지만, 그 짙은 고독과 쓸쓸함은 감당하기가 좀 힘들었다. 독자는 단순하다. 심각한 거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조금 더 다른 논점과 관점에서 독자의 시선을 끌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약간의 아쉬움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작가의 건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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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4-01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문학에도 많은 작가가 나오는데 그들의 글을 제대로 못읽어내는게 좀 미안할 때가 많아요. 스텔라님처럼 이렇게 읽어주는 분이 있어 이렇게 또 새로운 작가를 만나기도 하네요. 라면용기 속 젓가락의 표현 참 좋네요. ^^

stella.K 2023-04-02 18:25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래요. 우리나라 작가를 우리나라 독자가 애정해주지
않으면 누가 사랑해 줄까요? 그런데도...ㅠㅠ
표현 좋죠?^^

moonnight 2023-04-02 0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tella. K님^^ 저도 같은 지점에서 나는 소설가는 못 되겠구나 생각했었네요. 물론 될 능력부터 전혀 없지만서도요 ㅎㅎ^^;;;;;
죄송하게도 첨 들어보는 작가와 책이에요ㅠㅠ;;;;

stella.K 2023-04-02 18:28   좋아요 0 | URL
ㅎㅎ 원래 능력이 없겠습니까?
마음이 없는 거겠죠.
제가 글공부했을 때 에로틱하게 쓸려고 하니까 진짜 쓰더라구요.ㅋㅋ
하지만 다시 못하겠더라구요.ㅠㅠ

페크pek0501 2023-04-02 09: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텔라 님이 리뷰다운 리뷰를 쓰셨다고 봅니다. 잘 쓰셨네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 중 잘 쓰는 작가들이 많지요. 그럴 경우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건 실력만 필요한 게 아니라 운이 따라야 한다, 겠지요. 잘 쓰는 것과 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별개 문제인 듯.
대중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갖추기도 쉽지 않고, 문장이 좋으면서 감동과 재미를 선사하는 것도 쉽지 않죠. 그래서 특히 소설은 늘 고지에 자리 잡은 무엇으로 여겨지곤 해요.
해서 소설을 좋아하지만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너무 어렵거든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stella.K 2023-04-02 19:02   좋아요 1 | URL
잘 쓰는 것과 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별개라는 말
백번 동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작가들은 조금이라도 그 거리를 좁힐 가능성이
많겠지만 나이든 작가는 그런 거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내가 쓰고 싶은대로
쓸 수 있는 장점이 더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어찌보면 우리나라 작가는 조금 더 이기적이 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눈치 보지 않는 작가.
에효, 말은 이렇게 해도 쉽지 않겠죠?
중요한 건 꺽이지 않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2023-04-02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02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르바나 2023-04-02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명희 작가님이 스텔라님의 이 리뷰를 보면 힘이 불끈 나겠는데요.
자고로 자기를 알아주는 분이 최고니까요.
문학지망생들 최고의 등용문이었던 신춘문예를 통과하는 많은 분들 중에서
문예지에서 다시 작품을 청탁받아 다음 작품을 출간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을 보면
소설가로 일가를 이루기도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기는 알라딘 이달의 리뷰도 아무나 뽑히는게 아니니까요.^^

stella.K 2023-04-03 15:58   좋아요 1 | URL
아유, 그 무슨…ㅎ
그런데 그런 말이 있긴하더군요, 좋은 작품을 쓰기보단 많이
써 보라고. 그게 결국 작가를. 만드는 거라고요.
사실 관심을 받지 못하면 위축되서 안 쓰게되기도 하거든요.
그걸 뛰어넘기가 참 쉽지 않은 거 같아요.ㅠ

레삭매냐 2023-04-03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보니 오래 전에 나온
천명관 작가의 <고래>가
서구에서 다시 평가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아
요.

좋은 책이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독자들에게 널리 알
려지지 않아 사장되는 책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책과 독자와의 만남 그리고
흥행, 어쩌면 운명일 지도요.

독자는 단순하다, 공감합니다.

stella.K 2023-04-03 17:52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맨부커상 인터내셔널인가 후보에 올랐다는 얘기들었는데 아직 발표 안났나요? 읽어보진 않았지만 시나리오
를 썼던 사람이라 잘 썼을 것 같아요. 한강 작가 이후 좋은 소식이 들렸으면 합니다.^^

yamoo 2023-04-04 14: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크님이 리뷰쓰신 엄마의 정원이네요. 스텔라 님두 읽으셨나봅니다. 배명희 작가가 글을 잘쓰는가 봅니다. 글을 잘쓰는 것과 소설 작품이 좋은 건 저는 별개로 생각하는 1인지라..
서사가 없고 문체만 좋은 한국 작가들을 많이 봐서뤼..--;;

한국소설은 더이상 읽지 않기에 이 소설이 좋은지 안좋은지 확인할 길이 없네요...단지 스텔라 님 리뷰로 좋은 건가 보다..생각하고 있겠슴돠~~ㅎㅎ

stella.K 2023-04-04 18:41   좋아요 1 | URL
그래도 우리나라 작가를 많이 사랑해 주세요.ㅠㅠ ㅋ
 
부활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6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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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세 번째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초등학교 때였다. 당연 어린이 세계명작 뭐 그런 정말 아이들 눈높이에 맞혀 나온 것을 읽었고, 두 번째는 성인이 되어서였다. 근데 이상하지. 성인이 되어 읽으면 더 의미 깊게 읽을 것 같은데 어릴 때 읽었을 때 보다 별 감동 없이 읽었던 것 같다. 그때는 또 소설이 시큰둥해져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지금 다시 읽고 나니 '역시 톨스토이!' 속으로 탄성을 지르며 읽었다. 그리고 자꾸 어린 시절 이 작품을 읽었던 때가 생각났다. 


비록 어린이 세계 명작이라고 하지만 읽는데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었던 걸 보면 출판사가 나름 편집을 잘한 것 같기도 하다. 더구나 그 시절은 내가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하고, 동시에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때이기도 해서 더 의미 깊게 읽지 않았나 생각한다. 카튜샤와 네흘류도프의 사랑도 두근거리기도 했지만, 뭔지는 모르겠지만 웅숭깊은 톨스토이의 문장이 인상 깊어 계속 따라 읽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모름지기 작가는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 하는 일종의 문학의 전범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이후 난 이러저러한 변화를 겪으며 요 모양 요 꼴이 됐지만, 그래도 그 시절은 정말 타락하기 전의 카튜샤처럼 순수했던 것 같다.  

(그때 톨스토이를 계속 파기 시작했더라면 지금쯤 괜찮은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는데...ㅠ)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읽은 '부활'은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인정해야 하는 건 톨스토이의 사고는 정말 방대하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철학과 법학, 신학의 바탕 위에 고통받는 민중과 귀족들의 이야기를 그야말로 산성처럼 쌓아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나의 일천한 사고가 그것을 다 쫓아갈 수 없음이 아쉬웠다. 하지만 전반적인 느낌은 뭔가 머리가 쨍하고 차가워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런 독서는 실로 얼마만인가, 내가 톨스토이를 너무 잊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부끄럽게도 난 장편은 '부활' 밖엔 읽지 못했고, 몇 편의 단편을 읽은 게 전부다. 그의 주요 작품은 손도 못 댔다. 뭐 할 말은 없지만 점점 고전에 대한 진입장벽이 만만치 않고, 새로운 책은 항상 정신 못 차리게 나오고 있으니 늘 순위에서 밀린다.)           

기억이란 놈은 참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을 다시 펼 쳐들자 예전에 읽었던 이미지들이 하나하나씩 떠올랐다. 특별히 카튜샤의 약간의 사시. 그동안은 가끔씩 머릿속에만 빙빙 돌더니 읽기도 전에 그녀에 대한 인물묘사가 떠오른다. 그리고 자주 눈에 뜨였던 몇 개의 단어들도. 


어렸을 땐 다른 건 관심이 없었고 오직 카튜샤와 네흘류도프가 사랑을 이룰 것인가 말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지금은 로맨스나 멜로엔 별관심이 없지만, 그 시절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여자 아이가 그것에 관심이 없다면 다른 무엇에 관심을 두겠는가. 결국 카튜샤와 네흘류도프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꽤나 아쉬웠다. 카튜샤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함께 유형지까지 동행했는데 그쯤 되면 아름다운 엔딩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세상은 반드시 노력한 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그래서 세드엔딩이나 열린 결말도 있다는 걸 한참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난 그런 결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 영화나 소설을 접하면서 세드엔딩이나 열린 결말이 해피엔딩 보다 사람의 뇌리에 더 오래 남는다는 걸 알았다. 


만일 이 작품을 해피엔딩으로 했으면 이렇게 삼독까지 할 생각을 못했을 것 같다. 이건 확실하다. 무엇보다 내가 이 작품을 보는 눈이 예전과 달라졌다. 물론 이미 결말을 알고 읽기 시작한 것도 있지만, 네흘류도프의 모든 선한 노력으로 카튜샤와 사랑을 이룬다면 결국 그가 한 여자를 구원했다는 얘긴데, 그러면 이 이야기는 한낱 그렇고 그런 가부장 소설이 되었을 것이고, 톨스토이도 반페미니스트까지는 아니겠지만 한낱 보통 작가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그것도 남자가 여자를? (물론 난 여자가 남자를 구원하는 얘기도 좋아하지 않지만) 그럴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착각이고 허세일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남자는 한 여자를 정복했다는 생각으로 바뀔 것이다. 내가 너를 그 모든 불행에서 구원했어. 하며 상대를 자기에게 굴종시키려 하지 않을까. 경제적 환경적 구원은 진짜 구원이 아니다. 그러면서 사랑과 구원을 결혼에 결부시키면 이야기는 최악이 된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고 또 하나의 시작이다. 어린 시절 읽는 동화마다, 남자와 여자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해피엔딩은 얼마나 가식적이고 무책임한 결말인가.  


만일 이 이야기도 둘이 결혼했다면 어쩔 뻔했을까. 네흘류도프 자신이 지은 죄가 있으니 처음엔 무한 인내하겠지. 카튜샤는 카튜샤대로 처음엔 고맙고 행복해 하지만 끊임없이 남자의 사랑을 확인하려 들지 않을까. 그러다 서로 지치고 불행해지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한 결말을 상상할 수가 없다. 오히려 둘이 사랑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이야기는 더 풍성해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특별히 톨스토이는 카튜샤를 당대 그저 그런 여자로 그리지 않고 결말에 도달할수록 꽤 실존적인 인물로 그렸다. 열악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자기 스스로를 선택하는 인물로. 물론 그 배후엔 네흘류도프가 있어 가능했다. 카튜샤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면 그렇게 받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 사람 없이 못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구원이라고 하지 않는가. 또한 네흘류도프에 대한 용서도 가능했다.     


그도 그렇지만 역시 이 작품은 네흘류도프의 의식의 변화를 쫓아가는데 방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절 결혼하지 않은 도련님(귀족 남자)이 하급 여자를 취해 욕망을 채우고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는 건 어디에도 없다. 사실 이 작품은 어찌 보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다. 물론 그래서 있을 수 있는 이야기 소설이겠지만. 솔직히 계급을 떠나 사랑했던 사람을 그것도 까맣게 잊고 있다 우연히 10년 만에 법정에서 만났다. 그런데 상대가 부조리한 상황에 놓여있다. 내가 네흘류도프라면 어디까지 도와줄 수 있을까? 처음엔 일말의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몇 번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나름 무죄 박면을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곧 한계를 느끼고 어느 때가 되면 스스로를 놔버리지 않을까. 그래. 난 할 만큼 했어. 그리고 한동안 괴로워하다가 이내 동정하다 차츰 멀어지겠지. 가진 건 돈 뿐이니 상대가 유배지로 떠날 때 넉넉한 돈을 쥐어줄 수도 있다. 그리고 곧 미련 없이 잊겠지. 그녀와 난 처음부터 안 맞는 상대였어하며. 


사랑은 확실히 미친 짓이라고 하지만 네흘류도프는 정말 미쳤다.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특별히 물려받은 땅을 농노들에게 나눠주고 카투샤와 동행하지 않는가. 책에서 거듭 반복해서 네흘류도프의 말은, 카투샤는 아무런 죄 없이 누명을 썼고 나는 그녀의 누명을 벗겨주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라. 충분히 네흘류도프의 입장을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하나 같이 정당히 하라는 식이다. 


사실 사람들의 그런 반응은 그도 어느 정도 짐작했을 것이다. 소설에서의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점잖은 편인데 그건 아무래도 톨스토이의 개인적 취향을 반영한 것도 같다. 실제로는 더 현실적이고 가혹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건 어떤 사람에겐 근간을 흔들어 놓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듣는 데에서만 머무는 경우도 많다. 작품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 무서운 변화는 그가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 남들을 믿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그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들을 믿기 시작한 것은 자기를 믿고 사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을 믿으면서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안이한 기쁨을 찾는 동물적 자아를 언제나 거슬러야 했다.  남들을 믿으면서 살면 해결해야 할 문제란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모든 게 이미 다 해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언제나 정신적 자아를 거스르고 동물적 자아를 위한 방향으로 해결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을 믿으면서 살면 항상 사람들의 비난이 따랐으나, 남들을 믿으면서 살면 사람들의 칭찬이 따랐다. (1권, 80~81p)

바로 여기서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잠자고 있는 양심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지는 대로 살면 편하긴 하겠지만 대신 진정한 자유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일생에 한 번은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대로 살아 볼 필요가 있다. 그걸 외면하면 자기 생의 마지막날에 후회할 것 같다. 물론 그렇게 했을 때 적지 않은 파장과 비난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훗날 후회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네흘류도프는 그 내면의 소리를 기꺼이 들었고 실행했다. 그것도 다른 것도 아닌 사랑을 위하여. 그나마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우린 네흘류도프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그것의 결과가 아니라 행동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톨스토이의 페르소나다. 

톨스토이가 독실한 신자지만 원래 그렇게 독실했던 건 아니었다. 그도 50세까지는 방탕한 삶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다 훗날 회심하고 독실한 신자가 되었는데 그래서일까, 네흘류도프에게서 톨스토이의 그림자가 느껴지기도 하고, 잠깐 등장하다 사라지는 인물 속에서도 역시 그가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그는 그다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지 않은 것도 이 작품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가 무슨 작품을 쓰고 저작권을 포기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아내는 거의 죽을 듯이 난리를 쳤다고 한다. 작가가 저작권을 포기한다는 게 그렇게 경을 칠 일인 줄 몰랐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서 작가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보여준다. 

작금에 들어서 우리나라 드라마와 영화는 자꾸 교회와 교인을 희화화하고 있다. 급기야 최근 대박을 터트린 한 드라마에서 이점을 지적하며 우려하는 목소리를 낸 것으로 알고 있다. 서양 고전은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거의 대부분이다. 즉 다시 말하면 그 고전을 썼던 작가들은 끊임없이 신 즉 하나님과 인간의 이해와 화해를 모색했다. 어차피 신의 관점에서 인간은 타락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인간의 이야기 속에서 이것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타락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신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니까. 나는 소설가를 비롯해 이야기를 다루는 모든 스토리텔러들이 이것을 다시 한번 직시해 주길 바란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작품 속에 교회를 회화화하든 진지하게 표현하든 했으면 한다. 톨스토이 같이 오래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 속에 구원이 무엇인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작품을 썼다. 오늘날의 스토리텔러들에게 과연 그런 진지한 고민이 있기나 한 걸까?                       


...... 인간은 인간이 교정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유일한 합리적 해결책은 무익하고 해롭고 비도덕적이며 잔혹한 짓을 멈추는 짓이다. 당신들은 지난 수 세기 동안 당신들이 범죄자라고 규정한 사람들을 처벌해 왔다. 그래서 범죄자들은 사라졌는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형벌 때문에 더욱 타락한 범죄자들의 수가, 또 인간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판사, 검사, 예심판사, 간수라는 범죄자들의 수가 불어났을 뿐이다.' 네흘류도프는 그럼에도 사회와 질서가 그나마 유지되는 것은 인간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합법적 범죄자들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부패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서로 동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권, 335p)

이것은 톨스토이의 도전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어떠한 작품에도 구원과 사랑을 말하고자 했던 그. 그의 고민이 어떠했을지 우리는 다 알 수가 없다. 단지 조금이라도 알고자 원한다면 그의 작품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한 가지 부언하자면, 톨스토이의 작가 연보를 보면서 그가 부모를 모두 이른 나이에 여의였다는 것이다. 흔히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비교하기 좋아하는데 그중 하나가, 그들을 부자와 가난한 자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자인 톨스토이 보다는 가난한 도스토예프스키가 더 서민적이고 자기와 맞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부모가 없고, 도스토예프스키는 가난했지만 부모가 성인이 된 후에도 생존했던 것으로 안다. 사람의 부재와 경제적인 가난. 어떤 것이 그 사람의 삶과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지, 나아가서 글 쓰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모르겠다. 요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그런 구분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 톨스토이는 톨스토이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도스토예프스키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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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3-22 22: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2년전쯤 읽었는데 벌써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스텔라님 리뷰에서 부활에 대한 이런 심오함 것들을 많이 표현해주셔서 아무래도 다시 읽어야겠어요^^

stella.K 2023-03-23 11:27   좋아요 2 | URL
ㅎㅎ 기억이란 놈은 페페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약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툭하고 나올테니 걱정마십시오. 고전이 참 읽고나면 뿌듯한데 왤케 안 읽어지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부활은 읽는데 시간이 거려서 그렇지 정말 좋았어요. 저도 2, 3년후에 다시한번 읽어 볼 생각입니다.^^

니르바나 2023-03-23 0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는 학교앞 만화방에서 만화책에 코박고 있을 때
스텔라님은 어릴 때 부터 톨스토이를 읽으셨다니 진짜 떡잎부터 다른 독서인이셨네요.
김지안 님의 책, <네 멋대로 읽어라>가 그렇게 해서 탄생했군요.
3월의 리뷰로 기대해봅니다.^^

stella.K 2023-03-23 11:33   좋아요 2 | URL
독서도 질량보전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 같더라구요. 어렸을 때 독서한다고 어른되서도 하게되는 거 아니고, 어릴 때 안 했다고 성인되어서도 안하고 그렇지는 않은거 같더라구요. 제가 책을 내게된 건 정말 행운이었죠. 저는 만화를 지금도 못 본답니다.ㅠ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희선 2023-03-23 02: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등학생 때 이 소설을 처음으로 보셨군요 저는 초등학생 때 톨스토이 알지도 못했네요 지금까지도 읽은 게 단편소설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톨스토이는 단편소설 읽었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한편도 못 봤어요 둘 다 대단한 작가겠습니다 달랐기에 다른 소설을 썼겠지요


희선

stella.K 2023-03-23 11:41   좋아요 2 | URL
그때 그런 어린이 세계명작이 나와주지 않았다면 한참 후에나 읽었을 겁니다. 그때 책 한권 값이 페이퍼북으로 350원이었어요. 문방구에서 팔았는데 3권 사면 천원에 해 줬거든요. 희선님 상상이 안 가시죠? 그런 시절이 있었답니다. ㅋㅋ 지금 그런 책 못해도 7, 8천원은 줘야할걸요?ㅋ

transient-guest 2023-03-23 1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놓고 아직 읽지 못한 고전이 많이 있습니다. 톨스토이도 분명히 완독을 거쳐 여러 차례 다시 읽고 싶은 작가인데 언젠가 시작한다면 ‘전쟁과 평화‘로 하고 싶습니다. 오드리 햅번, 그리고 나타샤 왈츠로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stella.K 2023-03-23 11:48   좋아요 2 | URL
앗, 톨스토이를 아직 안 읽으셨나요? 하긴 저도 부활외엔 그의 주요작품은 영화로 봤죠. 책과 영화는 같은게 아닌데. 기왕 동력 받은김에 저도 전쟁과 평화를 읽고싶긴한데 워낙 장편이라 읽다가 포기할까봐 좀 그게 염려가되긴 하더군요.
꼭 한번 읽으십시오.^^

yamoo 2023-03-28 14: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걸 작년에 읽었는데...예상을 깨고 매우 매우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명불허전이란 말은 이 작품에 너무도 잘 어울린다고 봅니다. 왜 명성이 자자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고할까요...스텔라님 리뷰를 보니 다시금 장면 장면들이 떠오르네요~^^

stella.K 2023-03-28 14:21   좋아요 1 | URL
ㅎㅎ 그렇죠? 그래서 고전을 읽어야한다고 그러는가 봅니다. 막상 다른 고전을 읽으면 고전할텐데. ㅋ 언젠가 얼핏 들으니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 전쟁과 평화나 안나는 얼마나 잘 썼을까 그런 기대를 막 가져보게 되더군요.ㅋ

레삭매냐 2023-03-29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고저 -

전, 한 번도 읽지 못한 책이랍니다 ㅠ
톨스토이 읽어야지요 암요.

stella.K 2023-03-29 16:41   좋아요 1 | URL
헉, 의왼데요? 전당연히 읽으셨는줄ᆢㅎㅎ
꼭 읽으십시오.^^

페크pek0501 2023-03-29 1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활, 저는 읽었지요. 예전에 읽은 거라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요...
책장에 꽂힌 책을 보며 저건 읽었어, 그럽니다.ㅋ

stella.K 2023-04-07 18:15   좋아요 0 | URL
언니, 제가 미쳤나 봐요.
언니의 이 댓글 분명 봤는데. 답글 달았다고 생각했는데
안 달았네요. 미안해요.
근데 저 이달의 당선작 됐어요. 이럴수가...
이거 확인하는데 심장이 쪼그라 붙네요.
제가 왤케 소심해졌을까요? ㅠㅋㅋ

희선 2023-04-08 0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tella.K 님 축하합니다 주말 편안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stella.K 2023-04-08 09:35   좋아요 1 | URL
아, 희선님도 축하드려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니르바나 2023-04-12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 혜안이로군. ㅎㅎㅎ
월간 스텔라님, 이제 안뽑아준다고 불평 없기.^^

stella.K 2023-04-12 17:54   좋아요 1 | URL
당선 방법을 조금 알 것 같더라구요. ㅋㅋ
 
오늘을 잡아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9
솔 벨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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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발견하고 완독할 때까지 솔 벨로가 언제 이런 소설을 썼지? 좀 놀랐다. 더구나 작가 연보를 보니 결혼을 다섯 번이나 했다. 아니 결혼은 언제 또 이렇게 많이했을까? 더 놀랐다. (최근 안 건데 일론 머스크도 그 비슷한 결혼 이력이 있더라.) 그럼 뭐야? 무슨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산 것은 이미 그전에 세상 재미 볼 거 다 보고 들어갔던 거임? 


그러다 한참 있다 비로소 현타가 왔다. 아니나 다를까. 난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완전 착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소로를 솔 벨로와 완전 겹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착각을 해도 그렇지 남의 이름과 성을 교묘하게 섞어서 착각을 하다니 나이 들면 책도 못 읽겠구나 싶다. OTL 


이 이야기를 한마디로 뭐라고 해야 할까? 하는 일마다 안 되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옛 속담에도 재수 없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데, 주인공 윌헬름이 그런 사람이다. 이 남자가 얼마나 재수가 없냐면, 부모와 형제들이 다 학벌이 좋은데 자신만 변변치 않다.  


그나마 20대 때 배우가 돼볼까 했는데 그도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두어 곳 직장을 다녔지만 상사와 대판 싸우고 홧김에 사표를 던지고 나와버렸다. 그뿐인가? 결혼도 했는데  행복하지 못하다. 별거하고 있는데 그런 중 애인이 생겨 정식으로 이혼하고 새 출발을 하려고 하지만 아내가 이를 알고 이혼을 해 주지 않는다. 


법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아내도 똑같이 법으로 대응하면서 그 비용을 윌헬름에게 청구한다. 게다가 아내가 아이들을 데려갔기 때문에 만나지도 못한다. 아버지에게 빌붙어 보지만 역시 도움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살기는 그리 나쁘지 않은지 아버지와 함께 같은 호텔에서 산다. 물론 방 호수는 다르게 하여.  


사실 난 오래전부터 궁금했는데 호텔을 제집 삼아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살면 그렇게 살 수 있는지. 물론 호텔마다 급수가 있겠지만 어쨌든 하루 숙박료도 싸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무슨 짓을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게 남의 나라 얘기는 아니더라. 우리나라에 무슨 랩 가수가 돈을 얼마나 많이 벌던지 우리나라 5성급 호텔 그것도 펜트하우스에서 사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호텔족이 있었다. 물론 훗날 이사을 하던데 또 모르지 다시 호텔로 복귀했는지. 


아무튼 그런 사람이 행복을 모르고 끊임없이 자신의 불행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그게 참 낯설지가 않다. 이 책이 지난 세기에 씌여졌는데 요즘에도 도처에 이런 사람은 깔려있고,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을 아직 못 만났다면 자신이 혹시 그런 사람은 아닌가 의심해도 좋을 만큼 흔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나라일수록 많다. 


부모 자식의 관계도 그다지 좋지 않다. 자식은 부모에게 왜 나를 도와주지 않나 늘 섭섭해한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을 투자의 대상으로 보고 투자한 만큼 성과가 없으면 그도 눈밖에 나는 건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렇게 아버지 아들러 박사는 윌헬름을 거의 내놓은 자식처럼 취급한다. 하긴 새도 새끼가 시원치 않으면 둥지 밖으로 밀어내지 않던가.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렇게 약한 새끼까지 힘들게 키울 여력이 없다. 인간의 세계나 자연의 세계나 적자생존이고 비정하다.          


윌헬름 주위엔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 없는데 탬킨이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그 주위를 맴돈다. 그는 일명 박사로도 통한다. 무슨 박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식 분야에서는 해박한가 보다. 솔직히 아이러니한 건, 믿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말은 그럴듯하게 한다는 것이다. 탬킨이 이런 말을 한다.


...... 우리에게 과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미래는 근심 걱정만 가득하고, 진짜는 현재뿐이야. '지금 여기뿐이라고. 오늘을 잡아야지." 


79쪽


바로 여기서 책 제목을 정했겠다. 하지만 오늘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솔 벨로는 지금 여기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날카롭게 포착하려한다. 윌헬름처럼 대부분 부족함이 없이 살아온 사람들, 그것도 자신의 노력이 아닌 부모가 만들어 준 온실속의 화초처럼 성장해 온 사람일수록 무엇이 지금, 여기의 삶인지를 잘 모를 경우가 많다. 그나마 부모의 세대는 가족과 함께 잘 살아야겠다는 꿈이라도 있지, 그렇게 호의호식하며 잘 살게 된 자식들은 꿈도 투지도, 쏟아부을 열정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 왜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역으로 윌헬름의 저 넋두리가 현실에서 다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과연 그는 만족하고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인간은 만족을 모르는 동물이니까. 또 어디선가 새로운 불만족을 찾아내고, 불평하며 누가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고 주문처럼 푸념하겠지. 


그런데 탬킨이 한 저 말 자체는 뼈를 때릴만하지만 받아들이기 때라선 그냥 현재를 (말초적으로) 즐기라고만 하는 것도 같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엄밀히 말해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므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더구나 윌헴름이 평소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다면 그냥 듣고 넘기지 않을 텐데 시종 시큰둥하다. 게다가 말미에 가서는 탬킨이 어떻게 된 일이지 모르겠지만, 죽는다. 허무하게. 그러다 보니 이야기도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사실 '지금 여기'의 삶은 실존주의 철학이나 상담학에서 많이 다루는 사상이다. 외부적인 여건이나 어떠한 존재가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끊임없이 알기를 힘써야 한다. 삶의 의미를, 왜 살아야 하는지를,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끝이 비록 죽음으로 끝날지라도 말이다. 


윌헬름의 나이가 40대 초반으로 나오던데 그 나이면 불혹이 아니던가. 무엇을 새롭게 하기에 적절한 나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젊음을 자랑할 나이가 아니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나이다. 살아온 날들 보다 살아갈 날이 아직 조금 더 남아있지만 그것을 더 이상 자랑할 수도 없는 나이다. 삶과 죽음이 비등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죽음이 삶을 추월하는 때를 맞이하게 되겠지. 


비록 소설은 탬킨의 죽음을 보고 윌헬름이 이후에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는 보여주지 않고 있지만 좀 이제와는 다른 삶을 살길 바랄 뿐이다.  


소설은 꼭 4, 50년대 저예산으로 만든 미국 영화를 보는 것도 같다. 뭐 그렇지 않아도 이 작품은 1956년도에 발표된 작품이다. 소설가를 규정하는 여러 말들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너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자꾸 수시로 새처럼 짹짹거려 주고 의식을 쪼아주는 것에 있다고도 했던 말을 기억한다. 솔 벨로는 그 일을 세련되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미국적으로.


사실 삶을 생각한다는 건 아주 피곤한 일이긴 하다. 나는 삶을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은 걱정이 너무 많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삶의 힘을 빼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욕망하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훗날 후회가 남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오늘을 잡는 것이 아니라 밀도 있게 살아야하지 않을까.

참고로 난 요즘 이 '밀도'라는 단어에 꽂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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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2-07 2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밀도 있게 사는 것, 충실성 있는 하루하루를 살면 되려나요... 저에겐 쉽지 않을 듯...
힘을 좀 빼고 살고 싶어요. 편하고 자유롭게요. 이것도 쉽지 않더군요.
님의 리뷰를 읽으니 제가 되고 싶은 사람이 생각났네요. 운 억세게 좋은 사람이요.
운 억세게 좋은 페크, 가 되고 싶군요.ㅋㅋ
리뷰를 재밌게 잘 쓰셔서 글이 길어도 술술~~ 읽으며 내려왔네요.^^

stella.K 2023-02-07 20:11   좋아요 1 | URL
ㅎㅎ 언니는 반드시, 꼭,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 될 거예요. 정말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희선 2023-02-08 0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라마다 문화가 조금 다르다 해도 부모와 자식 사이는 비슷한 것도 있지요 자신이 잘 안 되는 건 남 탓하면 끝이 없기는 한데... 부모가 잘 안 해줘서 그렇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이 그렇군요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할 텐데, 그것도 쉽지 않네요


희선

stella.K 2023-02-08 13:15   좋아요 1 | URL
ㅎㅎ 그거 어렵지 않아요. 소확행 하는 게 하루하루를 잘 사는 거죠.
희선님은 서재에 시 쓰시잖아요. 그거 소확행 아니었나요?^^

yamoo 2023-02-13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있는데, 이게 좀 재미없을 거 같다는 인상이 지배적이라 아직 대기 상태입니다. 유진 오닐의 책을 읽고 별로라 생각되어 이것도 읽을지 말지 망설이고 있는데, 스텔라님 리뷰를 보니, 좀 재미없을 거 같다는 느낌이 확 옵니다. 벨로 책이 2권 있는데, 걍 다 처분해야할 듯합니다..ㅎㅎ

stella.K 2023-02-11 16:46   좋아요 0 | URL
ㅎㅎ 좀 그렇긴 합니다. 고전이 당대엔 좋을지 몰라도 우리가 읽기엔 좀 아쉬운 작품도 있잖아요. ㅋ

모나리자 2023-02-11 2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용을 읽어보니 책 제목이 강렬하고 압축적으로 잘 지은 것 같네요. 오래된 작품이지만 오늘의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네요. 잘되면 행복한 것이 우리 삶이라고 할 때 어쩌면 사는 내내 짊어져야 할 숙명같은 이야기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을 갖고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지요. 이 작가의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가에 궁금해지네요.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stella.K님.^^

2023-02-16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13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13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03-09 0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tella.K 님 축하합니다 이번 삼월은 많이 따듯하네요 지난 이월도 따듯했군요 그러니 삼월도... 봄이 짧을 것 같습니다

stella.K 님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stella.K 2023-03-09 09:51   좋아요 1 | URL
아이고, 고맙습니다. 희선님도 축하합니다.

희선님도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소울 메이트 - 영혼의 치유자, 반려견과 함께한 나날들
하세 세이슈 지음, 채숙향 옮김 / 창심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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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이 개를 언제부터 키우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모르긴 해도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키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워낙에 개를 좋아하셨고, 당시는 마당이 있는 집이라면 개 한 마리 정도는 키우지 않았을까. 지금이야 족보 있는 개를 키운다지만 나어렸을 땐 그런 것도 없었다. 그냥 점잖게 불러 잡종견이지 개를 키운다면 무조건 똥개였다.



개도 자신을 좋아하는 주인을 알아 본 단지 않는가. 그래서일까? 우리 집에서 키웠던 개들은 숭덩숭덩 새끼도 잘 낳았다. 그러자 집안의 어르신들은 우리 집은 개가 잘 되는 집안이라고 대견해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 그렇게 대견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개야 특별히 스트레스가 없으면 새끼를 잘 낳지 않는가. 그런데 그 말에 약간의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건, 그렇게 개는 새끼도 잘 낳고 우리를 잘 따르는 것 같은데 고양이는 그렇지가 못했다. 사람을 잘 따르지도 않거니와 좀 키워볼까 싶으면 어느 틈엔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개와 고양이는 앙숙지간이라는데 고양이도 그걸 아는 걸까? 개가 잘 되는 집에 자신이 머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 우리 집이 개가 잘 되는 집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도 알고 보면 나의 자의적인 해석일 뿐 근거 있는 소리는 아니다. 최근 어느 고양이 전문 수의사의 말을 들으니 만일 집에서 고양이를 키울 마음이 있다면 중성화 수술을 꼭 해 주라고 한다. 발정이 나면 집을 나간단다.



뭐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 집은 고양이 특유의 음침함과 도도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개의 담백한 성격을 좋아하는지라 개가 잘 되는 집안이란 말은 일견 일리가 아주 없어 보이진 않는 것 같다. 개도 자신이 주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지 안 받는지 정도는 알 테니. 그러다 아버지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가 보신탕을 드시기도 한다는 엄마의 첩보를 들은 것이다. 그게 좀 실망스러웠다. 그때는 지금만큼이나 보신탕 문화가 문제가 됐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닭, 돼지도 잡아먹는데 개라고 못 잡아먹을까.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은 못 잡아먹는다. 닭과 돼지를 사랑했다면 못 먹을 것이다. 그런데 개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어떻게 잡아먹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럼 개를 마당에서 키웠던 건 언젠가 잡아먹을 생각을 하고 사육을 했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살아생전 보신탕을 잡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뭐 어디서 보신탕을 잡숫고 들어왔다는 말조차 들어 본 적이 없으니 한참 오래된 과거지사였던 것 같기는 하다. 그러다 아버지가 암에 걸리고 잘 먹어야 낫는다는 말에 집안 어른 누가 보신탕을 해 온 적이 있었다. 개고기만큼 단백질이 풍부한 고기도 없으니 망가진 아버지의 몸을 보호해 줄 거라며 권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그걸 다 드시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개가 잘 되는 집이라면 아버지는 그 개고기를 먹고 나았어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가 건강하셨을 때, 하루의 시작은 녀석들의 배설물을 치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꼭 녀석들에게 밥을 주고 출근을 하셨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다른 가족들은 아버지만큼 개를 돌보지 못했다. 그나마 엄마가 아버지의 일을 대신했지만 가끔 배설물을 제때 치우지 못하면 추운 겨울 그것이 그대로 얼 때도 있었다. 개가 잘 되는 집이라는 건 아마도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제시간에 모습을 드러내 녀석들의 주변을 살뜰히 챙겨주는 것. 그런 주인이 있는 한 그 개는 건강할 것이다.



우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계속 개를 키웠다. 물론 중간에 한 3년 정말 개를 안 키울 생각으로 버틴 적도 있긴 하다. 하지만 다롱이(요크셔테리어 수컷)을 다시 키우게 되면서 우리 집은 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집안인가 보다 했다. 그렇게 거부하는데도 다시 맡아 키우게 되는 걸 보면 말이다. 그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기뻤다. 그리고 애지중지 키웠다.



그런 다롱이가 작년 여름 정확히 광복절 날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18년 전 겨울 다롱이가 우리 집으로 쑥 들어왔다면, 이 책 역시 보는 순간 나의 마음에 쑥 들어와 버렸다. 성격상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어떤 물건이나 흔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으면 어떤 마음이 될지 알면서도 나는 기꺼이 이 책을 읽었다. 읽으면서 다롱이에 대한 그리움보단 오히려 살아있다면 녀석의 따뜻한 체온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개가 등장하는 아니 더 정확히는 개와 사람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개는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7편의 단편 소설이 실렸다. 멋부리지 않고 담백한 문장이 흡사 개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제목도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견종을 제목으로 삼았다. 견종이 어디 7마리만 있겠냐마는 모르긴 해도 일본에서 가장 핫한 견종들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또한 각 견종에 대한 특징을 작품 중간중간에 서술해 놓은 것으로 보아 저자가 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이 작품 전에 <소년과 개>란 작품을 썼고, 그 작품으로 지난 2020년 나오키상을 받았다고 한다. 문득 문학 작품에 개가 등장하는 작품이 꽤 되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건 사람이 늑대를 길들이기 시작한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하나의 장르로 봐도 되지 않을까.



게다가 영화는 또 얼마나 될까. 재작년 <퀼>이란 영화를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 영화 역시 일본 작품인데 보면서 곧 죽게 될 다롱이를 생각하며 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많이 울어두면 혹시 다롱이 죽는 날이 와도 덜 울게 되지 싶었는데 역시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다롱이와 헤어지는 슬픔은 그 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7편의 작품이 모두 좋긴 한데, 역시 난 마지막 수록 작품이 가장 인상 깊지 않나 싶다. 그것은 '실린 버니즈 마운틴 도그'라는 견종의 카타라는 이름을 가진 개의 이야기다. 이 개의 원래 이름은 카타리나인데 그렇게 줄여 부르는 거다. 그러고 보면 모든 작품에 나온 개의 이름은 하나같이 외국 이름이다. 서양 사람들이야 개에게 서양식 이름을 붙여주는 건 당연해 보이지만, 일본도 우리나라와 사정이 비슷하구나 했다. 우리나라도 개에게 서양식 이름을 많이 붙여주지 않던가. (물론 요즘은 한국식 이름도 심심찮게 쓰기도 하지만.) 하긴 견종 자체가 외국산이니 자연 그렇게 되는가 보다.



카타에게 걸린 병은 '조직구성육종'이란 병으로 일종의 혈액암이라고 한다. 암이라는 게 그렇듯 고칠 방법은 없고, 단지 양질의 치료로 생명을 연장시키거나 고통을 감해주는 정도 밖엔 없다. 좀 놀라운 건 일본은 자연요법이 발달되어 있는가 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는 것 같다.) 주인공 부부는 병원 치료가 카타에겐 좋지 못할 거라고 판단하고 자연요법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카타의 치료를 의뢰한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카타의 치료와 죽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안타까운 건 이 견종은 12년 안팎으로 밖에 살지 못한다고 한다. 원래 대형견의 수명이 길지 않은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은 그런 대형견의 수명 연장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원래 중형견이 대형견 보다 좀 더 오래 사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보통은 15년 전후로 사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요즘엔 그보다 더 오래 사는 것 같다. 수의학의 발달과 영영 상태가 좋아진 결과고, 20년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고 하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에게 암이 흔해진 건 수명 연장의 결과라고 한다. 예전에 암은 그렇게 흔한 병이 아니었다. 그건 사람이 암이 걸릴 때까지 살지 않기 때문이다. 개도 비슷하지 않을까. 다롱이 전에 우린 제니라는 몰티즈 암컷을 키웠었다. 그 개야말로 15년 가까이 살다 죽었는데 개에게 실제로 흔한 병은 백내장이다. 하지만 제니는 백내장은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따져 보자면 제니는 백내장에 걸리도록 살지 않았다는 말도 되지 않을까. 다롱이도 다행히 암은 걸리지 않았지만 14, 5살 무렵이 되자 백내장이 시작이 됐다. 18년을 살았으니 그 운명을 피해가 진 못 했던 셈이다.



사람이 무병장수하면 그것 이상 바랄 것이 없는데 개도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사람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병들었다고 그 생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건강했을 땐 무심했던 것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때가 많다. 주인공 역시 카타가 건강했을 때 카타의 사랑이 형식적이었다. 하지만 병들자 그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카타의 생명을 연장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카타가 죽어가고 있음을 막지는 못한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랑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죽음을 이기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명을 잠시 연장시킬 수는 있어도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반려견을 키우고 싶어 하다가도 바로 이 죽음이 두려워 키울 수 없다고 말한다. 그건 맞는 말 같다. 오랜 세월 키워왔던 개의 죽음을 보는 건 괴롭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롱이를 보내고 남은 건 슬픔과 고독뿐이었다. 18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녀석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니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살아있을 때 죽음을 자주 상기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숨 쉬고, 이렇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자고 먹고 싸고 있는데 죽을 거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이 녀석의 몸에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또 누구는 말한다. 반려견이 죽는 건 확실히 슬픈 일이지만 키우는 기쁨과 즐거움이 더 커서 감수하고 키운다고. 그도 맞는 얘기다. 반려견을 키우지 않으면 슬플 필요는 없겠지만 기쁨 또한 없다. 결국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우린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안다. 기쁨도 영원하지 않지만 슬픔 또한 영원하지 않다. 그냥 살아 있을 때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우리가 다롱이를 무지개다리로 보낼 때 슬플지언정 섭섭하지 않은 건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사랑해 줬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죽음과 슬픔까지도 감내할 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녀석은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개가 잘 되는 집이란 여기까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저 단순히 새끼를 숭덩숭덩 잘 났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개가 무지개다리를 무사히 건널 수 있게 해 주는 것까지 함께해 주는 것. 그리고 잊지 않는 것.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우리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개도 많았다. 개가 사람과 친한 건 맞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니 나는 저자의 필력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우리 집을 거쳐간 개들에 대한 회상록은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책에도 학대받은 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아직도 버려지고 학대받는 개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어떻게 나보다 작고 힘없는 개를 학대할 수 있을까다. 인간의 마음 어디에 그런 악한 마음이 작동할 수 있는 건지 할 수만 있으면 꺼내서 해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책이 널리 널리 읽히면 버림받고, 학대받는 개가 좀 줄어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 책은 인간과 개가 얼마나 가까이 연결되어 있는가를 넘어, 개가 인간과 인간을 어떻게 이어줄 수 있는가에 대한 아름다운 보고서이기도 하다. 글을 쓰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 저자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이런 책은 개를 키우던 안 키우던 널리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끝으로 저자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언제부턴가 SNS에서 떠돌던 '개를 위한 십계명'을 앞에 실어 놓았다. 그런 것을 보면 개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 같다. 이 책을 읽던지 안 읽던지 이건 꼭 한번 찾아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참고로, 우리 집은 현재 개를 키우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키울 계획은 없다. 그러나 다롱이처럼 키울 수밖에 없는 운명 같은 개를 만난다면 키워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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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6-30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제 팔년이 된 고양이가 자주 눈에 밟힙니다. 세월의 길이가 다르기에 대부분의 경우 반려견/반려묘를 먼저 보내야 하는 건 숙명이죠. 현재에 충실해 살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듯 합니다.

stella.K 2022-06-30 18:15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고양이도 잘 키우면 15년은 산다더군요.
팔년이면 중년은 넘었겠는데요?
사실 다롱이는 막판에 죽을 때 애를 좀 먹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개는 첨봤어요.
소위 개가 잘 되는 집에서 뭔 일이랍니까.ㅎ
여건만 허락되신다면 계속 키워보시죠.
잉크냄새님 아직도 젊지 않으십니까? 아닌가...ㅋㅋ
저희집은 개와 함께 나이들어서 돌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건 산책을 시켜줘야 하는데 성격상 집에 들어오면
잘 나가지 않는 성격이라.
뭐 요즘엔 펫시터도 있다는데 그도 좀 그렇고.
나이들수록 고양이를 많이 키운다더고 하긴 하는데...
역시 키우다 보내는 건 힘들긴 하더군요.

레삭매냐 2022-06-30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댕댕이 귀엽긴 하지만
키울 자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서식하는 아파트에서는
더더욱. 아무래도 댕댕인 단독
주택이 낫지 않을까요.

stella.K 2022-06-30 18:15   좋아요 1 | URL
맞아요. 다롱이가 성격이 예민해서
초기 땐 민원도 받고 좀 눈치가 보이더군요.
한때 계속 키울까 마당이 있는 언니네로 보낼까 고민을 했습니다.
개 키우는덴 마당이 있는 집이 좋죠.
맘놓고 키웠던 옛날이 그립긴 하네요.
누가 키우라고 그러면 못 키울 것 같아요.
그래도 치매예방, 건강을 위해선 키우는 게 좋다고 그러긴 하는데...ㅠ

희선 2022-07-01 0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는 아픈 개하고 살려고 시골로 이사했다고도 하더군요 《소년과 개》를 쓰고 쓴 건가 했는데, 이걸 먼저 썼네요 사람이 오래 살게 되고 암이나 치매가 나타나게 되다니, 오래 사는 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개는 사람하고 살아서 그런 병에 걸린다고도 하던데, 그것보다 개도 오래 살아서 병이 생기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사람이든 동물이든 아프지 않으면 좋을 텐데...

동물을 때리는 사람은 어떻게 그러나 싶기도 합니다 자신보다 약해서 그런 거겠지요 그런 사람보다 동물이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함께 사는 사람이 더 많기를 바랍니다


희선

stella.K 2022-07-01 09:48   좋아요 1 | URL
오, 그런 말이 있군요. 암튼 작가가 개를 정말 사랑하는구나란 게
느껴져요. 소년과개도 읽어보고 싶어요.

정말 동물학대는 좀 뿌리뽑혀야 하는데
그것도 알콜중독처럼 치료받아야 할 질병이라고 생각합니다.

페크pek0501 2022-07-06 17: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가 잘되는 집, 듣기 좋네요. 화초가 잘 자라는 집도 있죠.
티브이 속의 개를 보면 귀여워요. 저는 개와 가까이 지낼 기회가 없었어요. 어릴 때 친구집에 가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강아지를 보았던 게 인상적이었죠. 아직 새끼라 방에 두었더라고요. 겨울이었나 봐요. 꼬물거리는 게 얼마나 귀엽던지...
다롱이 생각나네요. 떠난 지 벌써 1년이 되어가는군요. 저는 정 드는 게 무서워용.
드러운 게 정, 이라고 하던데 저는 무서운 게 정, 이에요. ㅋㅋ

stella.K 2022-07-06 19:06   좋아요 2 | URL
맞아요. 드럽고 무서운 게 정이죠.ㅎㅎ
고독을 견딜 수만 있으면 뱐려동물은 키우지 않는 게
좋은 것 같긴해요. 다롱이가 없다는 건 외롭고 쓸쓸하지만
육체적으로 힘은 훨씬 덜 드는 것도 사실이예요.
물도 훨씬 덜 들고.ㅋ
그래도 어떤 땐 키울 수 밖에 없는 운명이
또 오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가져 본다는.ㅋㅋ

mini74 2022-07-08 17: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개가 잘 되는 집에 대한 스텔라님의 정의가 맞다고 상각해요 ~ 죽을때까지 함께 하기 ~ 당선 축하드립니다 *^^*

stella.K 2022-07-08 18:05   좋아요 3 | URL
옷, 제가 당선됐군요. 기쁜 소식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미니님도 축하드려요.^^

희선 2022-07-09 02: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tella.K 님 축하합니다 저는 이 글 보면서 당선작으로 뽑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게 맞았다니 신기합니다 stella.K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강나루 2022-07-09 14: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tella.k님 당선 축하드려요^^

thkang1001 2022-07-10 09: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tella. K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휴일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2-07-12 17: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달의 당선작에 뽑히셨네요. 진심 축하드립니다. ^^

 
빨간 피터의 고백 -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마히 그랑 지음, 서준환 옮김, 프란츠 카프카 원작 / 늘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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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보았을까? 사춘기 시절 있었던가. 연기를 잘했던 배우 추송웅이 원숭이 분장을 하고 찍었던 연극 포스터가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난 오랫동안 이 연극을 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리기도 했거니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이 독특한 배우를 좋아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는 세상을 떠났고 그에 따라 이 작품은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다 이렇게 그래픽 노블을 대하니 감회가 새롭다.

새롭게 안 사실은 아직도 <빨간 피터의 고백>이 계속 공연되고 있었다. 추송웅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공연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좋은 작품은 그 누구를 통해서라도 계속 이어진다.

난 원작을 카프카가 쓴 줄도 몰랐다. <성>이나 <변신> 같은 대표작이나 쓴 줄 알았지 이 작품을 카프카가 썼다니. 예전에 알았다면 한 번이라도 읽어 볼 생각을 했을까? 그래도 안 봤을 것 같긴 하다. 솔직히 프란츠 카프카는 내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작가라서 말이지. 누구는 <변신>을 재밌게 읽었다고도 하던데 카프카는 내게 늘 독서의 좌절을 안겨줬던 작가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래픽 노블이어서일까?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카프카가 이런 작품도 썼나, 읽으면서 새삼 놀라기도 했다. 섣부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 작품으로 카프카를 다시 가까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기도 한다.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 봤던 어느 애니메이션이 생각난다. 로봇 사용이 일상화된 미래에서 인간은 이제 그것을 노예처럼 부리며 편하게 살고 있다. 그러다 중앙 컴퓨터의 오작동으로 로봇이 인간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무력으로 인간을 착취하게 된다. 그 가운데 주인공의 모험과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이런 이야기에 로봇 대신 원숭이를 대입시키면 꼭 이 작품이다. 그 애니메이션의 원작자 보다 카프카가 시대를 먼저 살았으니 모르긴 해도 그가 카프카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인간은 참 특이한 존재다. 뭐든지 인간 좋을 때로 다듬고 길들이는데 선수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류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모든 분야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인데 말이다. 이 책도 바로 그런 것을 일깨운다. 원숭이가 인간과 비슷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원숭이의 동물성을 줄이고 인간성을 극대화 시켜 서커스에 이용한다. 그래서 인간이 된 원숭이 '빨간 피터'가 나중에 어떤 형상을 하게 되는지 지켜 보라.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에게만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이 다스리는 권세는 죄가 들어오고 나서 오염이 된다. 즉 하나님은 선함으로 다스리기를 바라셨지만 그것은 다분히 파괴적 된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닐 테지만. 어떤 건 생명을 살리기도 한다.)

이 진지하고도 흥미로운 작품을 보면서 문득 카프카는 어떤 생각으로 이 작품을 썼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좀 더 인간적이 되길 바라서 쓰지 않았을까.

개인적 취향이고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난 지금도 동물을 의인화한 동화나 애니메이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작품은 주로 어린아이를 위해 만들어지고 상상력을 고취시키기도 하지만, 이면에 동물을 동물 자체로 보기 보다 인간이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만드는 건 아닐까 싶어 편한 마음으로 보게 되진 않는다. 또한 동물을 희화화시키기도 하지 않는가. 물론 동물에겐 인격이 없으니 그런들 누가 뭐랄 사람은 없겠지만 거기에 인간이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마음이 투영되기 마련이니 인간은 삼가 자기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작품을 보면서 나의 오랜 질문 중 하나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노크하고 도전을 주는 게 작가의 역할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카프카는 진정 대단한 작가고, 위대한 작가란 생각이 든다. 이 작품으로 오래된 옛 작가를 만나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준 출판사에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참고로, 이 책은 출판사에서 서평 도서로 받은 건데 독일어 원서가 함께 왔다. 평생 프랑스어로 책을 읽을 것 같지 않은데 그래도 받고 보니 뿌듯하고 출판사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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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2-05-15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프카가 썼다는 것은 저도 지금 알았어요. 카프카는 정말...천재야 천재.
저희 세대에게 빨간 피터의 고백 = 추송웅 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인상적인 연극 포스터가 각인되어 있지요.
아직도 공연중이라니. 이제라도 보고 싶네요. 딸, 아들, 사위 모두 연극인들이니 혹시 그들이 관련되어 있으려나요?

stella.K 2022-05-15 20:35   좋아요 0 | URL
아, 사위도 연극인인가요? 정말 연극인 집안이군요.
따님인 추상미 씨는 얼마 전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던가, 뭐 그랬던 것도 같던데...
독실한 크리스찬이더군요.
뭐 하나 했더니 CBS 기독교 방송 프로 진행을 맡고 있더군요.
이젠 아줌마가 다 됐어요. 나름 미인이었는데.ㅋ

프레이야 2022-05-15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독일어 원서가 따라왔군요. 좋으시겠어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왠지 멋짐요. 카프카 원작이었다는 건 저도 처음 알았네요. 나인 님처럼 저도 추송웅 배우가 생각나는데 말이죠.

stella.K 2022-05-15 20:35   좋아요 1 | URL
첨엔 좀 부담이 되더군요.
독일어 까막 눈인데 이걸 어디다 써 먹나 싶은 게.
가지고 있다 나중에 사 보고 싶은 책 있고 적립금 궁해지면
중고샵에 팔까 봐요.ㅋ
책이 참 좋더구요. 인상적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앉은 자리에서 뚝딱
읽을 수 있어 좋더군요. 제가 책을 워낙 굼뜨게 읽는데 넘 빨리 읽어 오히려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ㅋㅋ

2022-05-15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6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6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6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6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2-05-19 17: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 예전 어떤 영화가 떠오르네요. 오랑우탄이 나오는 영화인데 주인공 남자와 오랑우탄 사이에 우정이 가능한가, 하는 걸 지켜 보았었죠. 서로 의사 소통이 잘 되지 않아 오해를 낳고 그래서 오랑우탄이 폭력적으로 변해 버려서 안타깝게 보았었죠. 저는 우정을 쌓는 게 가능하다는 결말을 기대했었거든요.
인간은 정말 신비로운 존재예요. 길들이면 길들여지고 권력을 잡으면 독재적이 되고 또 겸손해지다가도 아쉬울 게 없어지면 교만해지고요. 가장 궁금한 게 인간에 대해 탐구한 결과물이에요.
실제로 외계인이 나타나서 함께 사는 세상이 된다면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인간의 또 다른 특성이 나타날 것 같아요.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마음의 변신이 가능한 게 인간이니까요.

스텔라 님의 서재에 몇 번 들어왔었는데 새 글이 없어서 오래 쉬나 보다 했다가
오늘 이 글을 보니 반가운 맘에 댓글 남깁니다. ^^

stella.K 2022-05-19 20:31   좋아요 1 | URL
아웅, 언니! 고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작년인가 무슨 우리나라 코미디 영화에 오랑우탄이 나오는 영화
하나 본 것 같네요. 근데 왜 제목이 생각이 안 날까요. 나름 재미있었는데.ㅠ
인간이 뭔가를 장악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하는 건 정말 오만한 거라고 생각해요.
함께 어울리고 공존하는 거지.

요즘 갱년기라 그런지 의욕부진에 몸도 찌뿌듯하니 안 좋으네요.
지난 주 초에 1박2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때 이후로 다리도 안 좋아졌어요.
오늘 서평 하나 새로 올렸는데 그것도 얼마만에 올린 건지 몰라요.
또 하나가 남았는데 서평은 읽었으면 바로바로 남기는 게 좋은데
오래 전에 읽은 책을 리뷰하려니 좀 거시기 하네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