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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 메이트 - 영혼의 치유자, 반려견과 함께한 나날들
하세 세이슈 지음, 채숙향 옮김 / 창심소 / 2022년 5월
평점 :
우리 집이 개를 언제부터 키우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모르긴 해도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키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워낙에 개를 좋아하셨고, 당시는 마당이 있는 집이라면 개 한 마리 정도는 키우지 않았을까. 지금이야 족보 있는 개를 키운다지만 나어렸을 땐 그런 것도 없었다. 그냥 점잖게 불러 잡종견이지 개를 키운다면 무조건 똥개였다.
개도 자신을 좋아하는 주인을 알아 본 단지 않는가. 그래서일까? 우리 집에서 키웠던 개들은 숭덩숭덩 새끼도 잘 낳았다. 그러자 집안의 어르신들은 우리 집은 개가 잘 되는 집안이라고 대견해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 그렇게 대견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개야 특별히 스트레스가 없으면 새끼를 잘 낳지 않는가. 그런데 그 말에 약간의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건, 그렇게 개는 새끼도 잘 낳고 우리를 잘 따르는 것 같은데 고양이는 그렇지가 못했다. 사람을 잘 따르지도 않거니와 좀 키워볼까 싶으면 어느 틈엔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개와 고양이는 앙숙지간이라는데 고양이도 그걸 아는 걸까? 개가 잘 되는 집에 자신이 머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 우리 집이 개가 잘 되는 집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도 알고 보면 나의 자의적인 해석일 뿐 근거 있는 소리는 아니다. 최근 어느 고양이 전문 수의사의 말을 들으니 만일 집에서 고양이를 키울 마음이 있다면 중성화 수술을 꼭 해 주라고 한다. 발정이 나면 집을 나간단다.
뭐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 집은 고양이 특유의 음침함과 도도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개의 담백한 성격을 좋아하는지라 개가 잘 되는 집안이란 말은 일견 일리가 아주 없어 보이진 않는 것 같다. 개도 자신이 주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지 안 받는지 정도는 알 테니. 그러다 아버지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가 보신탕을 드시기도 한다는 엄마의 첩보를 들은 것이다. 그게 좀 실망스러웠다. 그때는 지금만큼이나 보신탕 문화가 문제가 됐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닭, 돼지도 잡아먹는데 개라고 못 잡아먹을까.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은 못 잡아먹는다. 닭과 돼지를 사랑했다면 못 먹을 것이다. 그런데 개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어떻게 잡아먹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럼 개를 마당에서 키웠던 건 언젠가 잡아먹을 생각을 하고 사육을 했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살아생전 보신탕을 잡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뭐 어디서 보신탕을 잡숫고 들어왔다는 말조차 들어 본 적이 없으니 한참 오래된 과거지사였던 것 같기는 하다. 그러다 아버지가 암에 걸리고 잘 먹어야 낫는다는 말에 집안 어른 누가 보신탕을 해 온 적이 있었다. 개고기만큼 단백질이 풍부한 고기도 없으니 망가진 아버지의 몸을 보호해 줄 거라며 권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그걸 다 드시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개가 잘 되는 집이라면 아버지는 그 개고기를 먹고 나았어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가 건강하셨을 때, 하루의 시작은 녀석들의 배설물을 치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꼭 녀석들에게 밥을 주고 출근을 하셨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다른 가족들은 아버지만큼 개를 돌보지 못했다. 그나마 엄마가 아버지의 일을 대신했지만 가끔 배설물을 제때 치우지 못하면 추운 겨울 그것이 그대로 얼 때도 있었다. 개가 잘 되는 집이라는 건 아마도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제시간에 모습을 드러내 녀석들의 주변을 살뜰히 챙겨주는 것. 그런 주인이 있는 한 그 개는 건강할 것이다.
우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계속 개를 키웠다. 물론 중간에 한 3년 정말 개를 안 키울 생각으로 버틴 적도 있긴 하다. 하지만 다롱이(요크셔테리어 수컷)을 다시 키우게 되면서 우리 집은 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집안인가 보다 했다. 그렇게 거부하는데도 다시 맡아 키우게 되는 걸 보면 말이다. 그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기뻤다. 그리고 애지중지 키웠다.
그런 다롱이가 작년 여름 정확히 광복절 날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18년 전 겨울 다롱이가 우리 집으로 쑥 들어왔다면, 이 책 역시 보는 순간 나의 마음에 쑥 들어와 버렸다. 성격상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어떤 물건이나 흔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으면 어떤 마음이 될지 알면서도 나는 기꺼이 이 책을 읽었다. 읽으면서 다롱이에 대한 그리움보단 오히려 살아있다면 녀석의 따뜻한 체온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개가 등장하는 아니 더 정확히는 개와 사람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개는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7편의 단편 소설이 실렸다. 멋부리지 않고 담백한 문장이 흡사 개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제목도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견종을 제목으로 삼았다. 견종이 어디 7마리만 있겠냐마는 모르긴 해도 일본에서 가장 핫한 견종들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또한 각 견종에 대한 특징을 작품 중간중간에 서술해 놓은 것으로 보아 저자가 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이 작품 전에 <소년과 개>란 작품을 썼고, 그 작품으로 지난 2020년 나오키상을 받았다고 한다. 문득 문학 작품에 개가 등장하는 작품이 꽤 되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건 사람이 늑대를 길들이기 시작한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하나의 장르로 봐도 되지 않을까.
게다가 영화는 또 얼마나 될까. 재작년 <퀼>이란 영화를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 영화 역시 일본 작품인데 보면서 곧 죽게 될 다롱이를 생각하며 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많이 울어두면 혹시 다롱이 죽는 날이 와도 덜 울게 되지 싶었는데 역시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다롱이와 헤어지는 슬픔은 그 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7편의 작품이 모두 좋긴 한데, 역시 난 마지막 수록 작품이 가장 인상 깊지 않나 싶다. 그것은 '실린 버니즈 마운틴 도그'라는 견종의 카타라는 이름을 가진 개의 이야기다. 이 개의 원래 이름은 카타리나인데 그렇게 줄여 부르는 거다. 그러고 보면 모든 작품에 나온 개의 이름은 하나같이 외국 이름이다. 서양 사람들이야 개에게 서양식 이름을 붙여주는 건 당연해 보이지만, 일본도 우리나라와 사정이 비슷하구나 했다. 우리나라도 개에게 서양식 이름을 많이 붙여주지 않던가. (물론 요즘은 한국식 이름도 심심찮게 쓰기도 하지만.) 하긴 견종 자체가 외국산이니 자연 그렇게 되는가 보다.
카타에게 걸린 병은 '조직구성육종'이란 병으로 일종의 혈액암이라고 한다. 암이라는 게 그렇듯 고칠 방법은 없고, 단지 양질의 치료로 생명을 연장시키거나 고통을 감해주는 정도 밖엔 없다. 좀 놀라운 건 일본은 자연요법이 발달되어 있는가 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는 것 같다.) 주인공 부부는 병원 치료가 카타에겐 좋지 못할 거라고 판단하고 자연요법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카타의 치료를 의뢰한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카타의 치료와 죽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안타까운 건 이 견종은 12년 안팎으로 밖에 살지 못한다고 한다. 원래 대형견의 수명이 길지 않은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은 그런 대형견의 수명 연장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원래 중형견이 대형견 보다 좀 더 오래 사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보통은 15년 전후로 사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요즘엔 그보다 더 오래 사는 것 같다. 수의학의 발달과 영영 상태가 좋아진 결과고, 20년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고 하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에게 암이 흔해진 건 수명 연장의 결과라고 한다. 예전에 암은 그렇게 흔한 병이 아니었다. 그건 사람이 암이 걸릴 때까지 살지 않기 때문이다. 개도 비슷하지 않을까. 다롱이 전에 우린 제니라는 몰티즈 암컷을 키웠었다. 그 개야말로 15년 가까이 살다 죽었는데 개에게 실제로 흔한 병은 백내장이다. 하지만 제니는 백내장은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따져 보자면 제니는 백내장에 걸리도록 살지 않았다는 말도 되지 않을까. 다롱이도 다행히 암은 걸리지 않았지만 14, 5살 무렵이 되자 백내장이 시작이 됐다. 18년을 살았으니 그 운명을 피해가 진 못 했던 셈이다.
사람이 무병장수하면 그것 이상 바랄 것이 없는데 개도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사람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병들었다고 그 생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건강했을 땐 무심했던 것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때가 많다. 주인공 역시 카타가 건강했을 때 카타의 사랑이 형식적이었다. 하지만 병들자 그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카타의 생명을 연장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카타가 죽어가고 있음을 막지는 못한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랑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죽음을 이기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명을 잠시 연장시킬 수는 있어도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반려견을 키우고 싶어 하다가도 바로 이 죽음이 두려워 키울 수 없다고 말한다. 그건 맞는 말 같다. 오랜 세월 키워왔던 개의 죽음을 보는 건 괴롭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롱이를 보내고 남은 건 슬픔과 고독뿐이었다. 18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녀석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니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살아있을 때 죽음을 자주 상기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숨 쉬고, 이렇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자고 먹고 싸고 있는데 죽을 거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이 녀석의 몸에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또 누구는 말한다. 반려견이 죽는 건 확실히 슬픈 일이지만 키우는 기쁨과 즐거움이 더 커서 감수하고 키운다고. 그도 맞는 얘기다. 반려견을 키우지 않으면 슬플 필요는 없겠지만 기쁨 또한 없다. 결국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우린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안다. 기쁨도 영원하지 않지만 슬픔 또한 영원하지 않다. 그냥 살아 있을 때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우리가 다롱이를 무지개다리로 보낼 때 슬플지언정 섭섭하지 않은 건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사랑해 줬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죽음과 슬픔까지도 감내할 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녀석은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개가 잘 되는 집이란 여기까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저 단순히 새끼를 숭덩숭덩 잘 났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개가 무지개다리를 무사히 건널 수 있게 해 주는 것까지 함께해 주는 것. 그리고 잊지 않는 것.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우리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개도 많았다. 개가 사람과 친한 건 맞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니 나는 저자의 필력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우리 집을 거쳐간 개들에 대한 회상록은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책에도 학대받은 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아직도 버려지고 학대받는 개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어떻게 나보다 작고 힘없는 개를 학대할 수 있을까다. 인간의 마음 어디에 그런 악한 마음이 작동할 수 있는 건지 할 수만 있으면 꺼내서 해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책이 널리 널리 읽히면 버림받고, 학대받는 개가 좀 줄어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 책은 인간과 개가 얼마나 가까이 연결되어 있는가를 넘어, 개가 인간과 인간을 어떻게 이어줄 수 있는가에 대한 아름다운 보고서이기도 하다. 글을 쓰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 저자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이런 책은 개를 키우던 안 키우던 널리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끝으로 저자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언제부턴가 SNS에서 떠돌던 '개를 위한 십계명'을 앞에 실어 놓았다. 그런 것을 보면 개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 같다. 이 책을 읽던지 안 읽던지 이건 꼭 한번 찾아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참고로, 우리 집은 현재 개를 키우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키울 계획은 없다. 그러나 다롱이처럼 키울 수밖에 없는 운명 같은 개를 만난다면 키워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