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큰작가 조정래의 인물 이야기 4
조정래 지음, 김재홍 그림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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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위인 전기 꽤 읽고 자랐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어린이 위인 전기는 그 구성이나 디자인이 나 때와는 확실히 다르단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림도 다채롭고 흥미 돋게 만드는지.   

 

올해가 3.1 운동 100주년이니 이런 책은 좀 의도적으로라도 읽어줘야 할 것도 같은데 역시 게으른 나는 어떤 필요에 의해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결국 일이 무산되는 바람에 의도적으로 읽어 준 셈이 됐으니 부끄러움은 면했다고나 할까? 그것도 이 책 완독 20 페이지 정도를 남겨놓고 무산이 된 것을 알았으니 그렇다고 책을 덮을 수는 없었다.

 

어린이 위인 전기로 읽어도 이렇게 뭉클한데 성인용으로 읽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더구나 이달부터 S 본부에서 아침 방송 때 김구의 증손과 모 탤런트가 그 옛날 증조할아버지 의 상해 임시정부 루트를 따라가는 방송을 했다. 그것과 겹쳐 이 책이 주는 감동이 배가가 됐다. 

 

최근 <스카이 캐슬>이란 드라마를 통해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을 까발리기도 했지만 선생이 살았던 시절에도 못지 않았나 보다. 천한 신분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천출도 공부만 잘하면 입신양명할 수 있다는 기대에 과거 시험을 보지만 그는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했다. 그것도 그가 실력이 없어서 그런 거라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온갖 입시 비리의 온상이 되어버린 과거에 선생 같이 천한 출신은 아무리 똑똑해도 꿈도 꿀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결국 마음을 추스리고 관상 같은 돈도 벌 수 있는 실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공부를 하기로 했는데, 그는 그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관상이 얼마나 안 좋은 상인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비록 관상은 안 좋지만 마음만큼은 넉넉하고 큰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 먹는다. 역시 사람의 마음은 운명을 뛰어 넘는 뭔가의 강력한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는 무엇보다 교육 사업에 힘을 썼다. 나라가 일본의 손에 넘어갔는데도 대다수의 백성들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그것은 인간의 게으름과 무지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인간의 무지함을 깨우쳐 국민의 주권을 되찾는 일에 평생을 바친다. 또한 그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 사상에 심취했고 후엔 기독교 신앙을 갖고 독립을 위해 헌신하게 된다.

 

그의 인생을 보면 역시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하늘(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 같다. 그는 몇 번의 투옥과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름도 몇 번을 바꿔 우리가 기억하는 김구로 남는다. 하지만 가장 뭉클한 장면은 상해로 넘어가 당대 쟁쟁한 독립 운동가들 이를테면 안창호와 안중근, 이봉창과 윤봉길 등과의 교우와 활약상은 정말 영화를 보는 것처럼 뭉클한데가 있다. 특히 이봉창이 일본 천황 암살에 실패 하지만 이 사건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훗날 윤봉길 의거를 돕는 과정은 어떻게 이런 영화같은 장면이 있을 수 있을까 읽으면서도 가슴이 찡했다.

 

의거가 있기 전 둘은 식사를 함께 한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윤봉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임에도 그는 너무나 태연하게 밥을 먹었고, 김구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를 지켜봐야 했다. 이 두 사람의 마음은 어떠한 것일지 감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한 사람은 이미 속세를 벗어났고, 한 사람은 나라를 구해야 하는 대의명분하에 동지의 죽음을 그저 지켜봐야만 한다. 이들의 마음의 거리는 물리적인 공간과 시간안에서도 우주만큼이나 떨어져 있는 것이다.

 

또한 둘의 시계를 바꿔 갖는 장면. 즉 윤봉길은 그 무렵 마침 새 시계를 갖고 있었고, 김구는 낡은 시계를 가지고 있었다. 윤봉길은 자신은 이제 몇 시간 후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니 새 시계가 필요 없다며 기꺼이 김구의 낡은 시계와 바꿔 갖는다. 그리고 죽어서 다시 만나자는 말도 남긴다. 하지만 실제로 김구가 윤봉길을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서 만나기까지는 얼마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문득 이즈음을 읽고 있는데 김구를 비롯해 당대 독립운동가들은 그렇게 정말 조국의 독립에 몸을 바친 걸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을까? 갈등이 없었을까? 순간 순간 몰려오는 두려움과 피곤함을 어떻게 견뎠을까? 그런 인간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그들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인간은 그렇게 순간 순간 연약한 존재다. 그때마다 다 잡고 이루어냈을 독립이었을 테니 그들의 희생이 어찌 값지다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얘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나라면 얼마를 버텨낼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이런 독립운동가의 말할 수 없는 희생이 있어 지금까지 대한민국이란 또는 한국이란 국호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매일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비리와 파벌 싸움 등을 보면서 과연 우리나라는 독립 운동가의 후손답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나라는 그냥 지켜지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하면 그들의 희생에 값하며 후손으로 사는 것이 될지 매일 매 순간 생각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만 같다.

 

김구는 그토록이나 바라던 조국해방의 그날을 보긴 했지만 그 이후 하나된 조국을 보지 못해 포효하는 듯한 울음을 삼켜야 했다. 그것도 부족해 안두희의 총탄에 암살을 당해야 했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서글픈 불행이랴. 또 어쩌면 그가 그렇게 갔기 때문에 그의 행적과 뜻은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르겠다. 읽는 내내 그는 나에게 '마음 넓게, 우직하게' 살아간 분으로 기억됐다. 제발 그를 비롯해 독립 영웅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우리가 잘 살아내야 한다고 이 독립 운동 100주년이 되는 싯점에 그분들의 영혼에 머리숙여 다짐하고 또 다짐해 본다. 더불어 이 뜻이 어린 후손들에게도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작가나 독자들이나 노력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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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19-03-25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혹시 왜수만복(倭水滿腹)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칠판에 이 단어를 쓰시고 나서
임진왜란 상황을 설명하신 이야기인데 너무 끔찍해서 잊혀지지 않는 말입니다.

이순신장군, 김구선생, 안중근의사 같이 민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 없었다면
악마의 얼굴을 한 일본 놈들의 치하에서 아직도 종노릇하고 있을겁니다.
얼빠진 뉴라이트들은 일본이 조선 근대화에 도움을 주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지만
그 놈들은 구한말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었거나
이후 그 밑에서 마름질하던 놈들의 후손들이 틀림없습니다.

지금도 잘 나가는 정신나간 현역국회의원이 일본자위대 기념행사에 참석했던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던 일이 있습니다.
이런 인간들이 나라의 지도자가 된다면 국민들이 탄 배가 침몰되고 있는데
또 다시 머리를 만지고 마사지나 받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보수, 진보를 떠나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놓여 있을 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초개같이 던지며
독립운동, 아니 독립전쟁을 치른 김구선생님의 높은 뜻을
후손된 우리는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아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stella.K 2019-03-25 18:12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그 옛날 독립 선조들은 자신을 이렇게 헌신했는데
과연 나라가 어려움에 빠지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제발 조상의 뜻에 누가되면 안될 텐데 한숨만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는 스스로 나라를 팔아 먹은 적전 또한 있는지라
앞으로 그런 정신나간 일을 하지 말라는 법 없죠.
부지런히 이런 책이라도 열심히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구 선생 이야기는 가슴 저미면서도 너무 멋있는데
왜 영화를 안 만드는지 모르겠어요.ㅠ
긴 글 고맙습니다.^^

syo 2019-03-26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한국사 공부하면서, 요런 책들을 더 잘 읽을 수 있는 소양이 쌓이고 있는 중이에요. 흥미도 막 생기구요. 그야말로 주입식 암기 교육의 혜택(?)입니다.....

stella.K 2019-03-26 10:26   좋아요 0 | URL
ㅎㅎ역사는 시큰둥 하다더니 잘 됐군요.
저도 이 책 읽으면서 요 시대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어지더라구요.
어린이 위인 전긴데도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
어른도 혹할만큼...^^

2019-03-29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0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 보다 : 봄-여름 2018 소설 보다
김봉곤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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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안 읽는 시대라고 한다. 이 말은 적어도 30년 전부터 있어 온 말이다.

정말 책을 안 읽는 시대라고 한다. 이 책을 보니 왠지 그 말이 더 실감이 난다. 예전에 이런 사이즈의 책은 시집 외엔 나오지 않았다. 그것도 바로 이 문지를 콕 찝어 얘기하는 거다. 그런데 소설이 이렇게 나온다는 게 왠지 책 안 읽는 시대에 뭔가의 자구책인 것 같아 마음이 짠하고 안쓰러운 느낌이 든다. 그것도 작가 한 사람이 아니라 무려 네 사람의 작품을 담았다. 게다가 인터뷰까지 들어가 있다. 마치, 이렇게까지 만들었는데 늬들(독자들)이 진짜 안 읽을 거니 하는 것도 같다. 또 가격을 얼마나 착한가? 오지게 착하다.

 

더구나 잡지 형식이다. 격월이나 계간처럼 정기적으로 나온다. 또 문고본으로도 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한 30년 전 삼중당 문고와 범우사의 문고본이 생각이 난다. 거의 쌍두마차 아니었나? 그러다 책의 고급화 전략에 따라 거의 사라지다 얼마 전부터 다시 나오는 줄로 알고 있다. 반갑긴 하다. 휴대하기도 좋고. 무엇보다 나 같은 경우 마음은 있으나 소설을 생각 보다 많이 읽지 못해 요즘 작가들이 어떻게 소설을 쓰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에게 이 책은 부담없이 읽을 수 있으니 좋다. 다른 책을 사는 김에 끼워서 샀다. 7, 8천원만 해도 안 샀을 거다. 

 

좋기는 한데 한편으론 염려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들이 장편을 잘 안 쓴다고 하는데 더 안 쓰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도대체 신인 작가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지 알 수 없지만 좀 스폰서 제도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책이 좀 안 팔리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글을 마음껏 쓸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다. 문학상이나 타야 겨우 작가를 알아 보는 구조니 이 문학상 한 번 타 보겠다고 난리 브루스를 칠 작가지망생들만 늘려 놔서야 되겠는가? 그런 시상 제도에 의존하지 말고 잘 쓰던 못 쓰던 꾸준히 쓰고 가능성 있는 사람을 발굴 계속 후원한다는 쪽으로 흘러주면 좋겠다. 지난 몇년 간 우리 문학계는 많은 자성과 비판, 질타들이 오고 갔을 텐데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가 없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이런 얇은 책을 통해 요즘 작가들의 작품 성향을 알 수 있게 된 건 반가운 일이다. 어떤 독자는 특정 작가에 대해 작품이 나오면 막 환호하고 그러던데 난 뭘 몰라서 그런지 환호할 정도인가? 의아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환호해 줘야할 것이다. 그래야 그 작가가 클 수가 있다. 요즘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품이 외국어로 번약되는 경우가 빈번해졌나 본데 반가운 일이긴 하다. 이것도 다 한류의 영향은 아니겠는가? 케이팝은 물론이고 음식, 영화, 뷰티쪽에서 강센데 문학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있겠는가. 제발 문학에서도 한류 열풍이 불기를 기대해 본다.

 

작년에 김봉곤 작가를 처음 발견했다. 물론 그의 작품을 읽어 본 것은 아니고 무서운 신예 작가라고 치켜 세우던데 그때 그의 책 표지가 제법 심쿵했다.  

 

그런 소설이 있기는 한다. 책에 나온대로 온전히 자신을 재료삼아 쓰는 이야기. 화자가 곧 작가 자신이어서 어디를 갔으며 무엇을 했는지를 시시콜콜하게 밝히는. 나도 한때 습작이긴 하지만 그렇게 써 본 적이 있기는 하다. 쓰는 작가로서는 이것만큼 사실적이고 잘 아는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만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뭔가 작두를 타는 느낌이다. 과연 이래도 되는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작가는 게이로서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귄 이성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작품을 읽으니 오래 전 어느 연예인이 우스갯 소리로 한 말이 생각났다. 그럼 남자가 여자 좋아하지 남자 좋아하겠냐고 했던 말. 그건 자신이 바람둥이로 오해 받는 게 싫어 애둘러 말한 건데 그때는 그런 농담이 통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요즘 똑같은 말로 사람을 웃기려고 한다면 뜨아할 것이다. 요즘은 성적 취향이 고려되는 시대니까. 

 

내용에 보면 화자의 이성 친구 혜인이 갑자기 자신에게 가슴을 밀착시켜 빤히 쳐다보더라는 설명이 나오던데 문득 그녀는 왜 그랬을까 싶다. 적어도 독자인 나는 화자가 신기하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정말 이성에 관심이 없는 거니? 뭐 그런 의아함. 다시 한 번 보라는 의미에서 그러지 않았을까? 성적 취향이야 감히 뭐라고 얘기는 못하겠다만 난 좀 보수적이라서 그런지 자꾸 이성간의 관계가 줄어드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이러다 다음 세기 땐 역전이가 돼 오히려 이성간의 관계가 특이해 보이는 것으로 변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창조주가 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는지 재조명 되는 때가 오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제일 재밌고 의미있게 읽은 건 조남주의 <가출>이다. 나도 읽으면서 얼핏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생각이 났다. 부재로 인해 그 사람을 다시 한 번 재인식하는  건 인간의 자연스런 심리인 것 같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아버지의 부재가 가족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게 또 그닥 불행하거나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오히려 하나로 모이는 계기가 된다. 어머니는 평생 살림하느라 이골이 났건만 그래도 가족회의를 위해 가족이 모인다고 먹일 반찬을 해 대는 걸 보면 그것 밖에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그건 거의 본능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평생 뼈빠져라 가정에 헌신했으니 마지막으로 내 멋대로 살아보겠다고 해서 가출한 건데 이게 참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가장의 무거움, 굴레. 자유에 대한 갈망. 그렇더라도 가장이 된 건 오래 전부터 당신 자신의 선택이니 끝까지 지키면 안 되는 걸까? 뭔가 이제까지 그럭저럭 지켜왔던 삶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것 같아 짠했다. 하지만 일시적이더라도 그런 기간은 필요한 것 같긴하다.

 

이내 더 잘 된 건 가족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가출로 인해 그동안 억압된 것들이 뭔지 모르게 자유로워지면 새로운 질서가 생기려고 하고 있다. 우린 그 누군가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아도 그 누군가가 없이도 잘 사는 존재들이다. 무엇보다 우린 누군가 가출하면 클 나는 줄 알고 일탈이라며 죄인, 부적응 뭐 이런 이미지를 덧씌우기 좋아하는네 여기선 오히려 긍정적인 면들이 보인다. 그건 또 아버지가 어딘가 살아 있다는 수신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전혀 찾을 수 없다면 그런 긍정적인 변화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또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새들은 죽을 때가 되면 무리를 떠나 홀로 있다 죽는다고 하던데,  자신이 죽을 때 남아 있는 가족들이 사별의 슬픔을 덜 느끼게 해 주려면 가출도 괜찮은 방법이겠다 싶은 것이다. 나의 죽음으로 인한 부재를 가족들에게 미리 학습시켜 주는 것이다.  우린 애정의 집착을 떠나 그 사람이 그곳에 잘 있겠거니 하는 믿음을 가질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김혜진의 <다른 기억> 역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사람에 대해 믿는 것이 정말 올바른 믿음인 건지, 소문과 추측만 가지고 그 사람을 그렇게 보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그 사람은 이렇게 반듯하고 흐트러짐 없고, 힘든 상황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려고 하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변절자, 악덕업자, 천하의 죽어 마땅한 사람으로 되어 있으니 말이다. 어떤 게 그의 진실된 모습인지 시간만이 그 진실을 밝혀 주겠지? 그렇지만 그렇게 몰아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람이 등장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 그 질서에 순응 못하면 짤리거나 그만두는 건 확실히 폭력적 상황이란 생각이 든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다는 걸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흘러 간다는 것을 또 한 번 각인시켜준 소설이다. 또한 세상의 가짜 뉴스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나약한 인간을 잘 묘사한 것 같아 좋았다. 내가 좋다고 말하는 건 생각할 꺼리를 줘서 좋다는 거다.

 

정지돈은 나에게 언제나 그렇듯 잘 이해가 안 되는 작가다. 그러다 어느 무가지에 짧은 소설을 연재하는 것을 보고  꽤 색다른 느낌이었다. 작가가 이렇게도 쓰는구나 하는 새로운 자각 뭐 그런. 그러다 이 책에 실린 그의 작품을 읽고 예전에 읽었던 <내가 싸우듯이>이가 생각이 났다. 보통 작가들은 현실에서 문제 의식과 부조리함 뭐 그런 걸 끄집어 내지 않나? 그런데 이 작가는 무슨 문화계 르포르타주 형식이라고나 할까? 일반인들이 문화계 전반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니 이렇게라도 접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면 있는 거지만 난 왠지 작가의 특이함이 긍정도 부정도 못하겠다. 하나 확실한 건 난 이 작가와 친해지기는 힘들겠구나 하는 것. 

 

그러지 않아도 그의 인터뷰에서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것을 뒷받침 해 주었는데, 인터뷰어인 김신식(이 사람은 또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문학평론가인가? 아님 출판사 편집 일을 하나? 이런 거 정도는 밝혀주면 좋을텐데)이, '...지돈 씨가 염두엔(이거 오타 같다. '염두해' 아닌가?) 둔 향후 계획을 공유 해'달라니까 그가 그런 말을 한다. "미래를 생각하진 않습니다. 너무 무섭기 때문입니다." 한다. 그래도 이 작가가 어디까지 가나 궁금하긴 하다.

 

얼마 전, 2019년 봄-여름호가 나왔나 본데 기회있는대로 사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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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3-18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책 읽기를 하고 계시는군요.

김봉곤 작가의 출현이 어쩌면 문학계에 새 바람을 불게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게이들의 사랑이야기 자체도 새롭지만 작가 자신이 게이임을 드러냄 또한 흔한 일이 아니라서요.
낙서처럼 막 쓰는 듯한 글 스타일이 노래로 말하면 꼭 랩을 듣는 듯하더군요. 저는 적응이 잘 되지 않더군요.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를 읽고 나서 든 생각입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stella.K 2019-03-18 14:47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도 김봉곤은 좀 적응이 안 되더군요.
무슨 사소설이라고나 할까?
물론 가끔 사소설이나 자전 소설이 뭐가 다를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소설을 쓰는 작가의 입장에선 혹 할만하다 싶기도 해요.
이런 소설도 먹히는 세상이 되었구나 싶어서.
솔직히 저도 이렇게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하거든요.
역시 사람은 간사한 것 같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2019-03-18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1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18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왜 니나 그리고르브나의 무덤을 찾아갔나
송영 지음 / 문학세계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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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 오래 전부터 들어 본 이름이긴 했다. 하지만 난 언제나 그렇듯 우리나라 대표 작가들, 그것도 80년대 활동한 작가들 외엔 그다지 아는 바가 없다. 물론 그도 이때를 전후로 활동했을 것이다. 내가 이제야 그를 알아봤다는 건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하긴 내가 이름만 알고 책 한 권 읽어보지 못한 작가가 어디 송영뿐이랴? 그렇게 생각하면 그는 차라리 늦게나마 운이 좋은 작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작가는 지난 2016년도에 유명을 달리했고, 이 책은 그의 유고집이다. 그가 아직도 살았다면 게으른 독자인 나는 여전히 그를 외면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알고 봤더니 나름 꽤 유명한 작가겸 예술가다. <땅콩 껍질의 속의 연가>란 제목은 나도 들어 본 것 같다. 이게 난 영화 제목만으로 알고 있는데, 베스트셀러 소설이고 후에 뮤지컬과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밖에도 몇 편의 소설이 있긴 하지만 알려진 명성에 비하면 과작이고, 클래식과 바둑에도 조예가 깊다고 한다. 또한 책 제목에서 얼핏 알 수 있듯이 작가는 러시아 문학에 심취하기도 했다. 책에도 나오지만 <의사 지바고>를 무려 3번이나 읽었고, 표제작인 <나는 왜 니나 그리고브나의 무덤을 찾아갔나>에선 러시아 현지의 어느 문학 회의에서 대학교 때 읽은 톨스토이의 <참회록>아니면 <인생독본>을 읽고 전율하다시피 했다며 작가의 러시아 문학 사랑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이 단편집의 특징이라면 맨 마지막에 나오는 <투계> 정도를 제외하고 모두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친했던 자신의 둘째 형이 눈앞에서 죽고 그로인한 충격으로 아버지가 정신분열을 앓게 된 사연. 탈영해 7년 동안 숨어 살다가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 이야기와 표제작을 비롯해 <라면 열 봉지와 50달러>, <금강산 가는 길> 같은 경우도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시시콜콜하게 이야기 한다.

 

이를 두고 장석주는 해설에서 왜 송영의 소설 세계는 원체험을 되풀이하고 변주한다고 썼는지 모르겠다. 그는 또 사적 체험이 작품의 모티프를 이룬다고도 했는데, 솔직히 이건 여타 소설가들이 많이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볼 때 송영은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옮겼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본명을 밝힐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니셜을 사용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등장인물은 실명을 그대로 사용했다. 예를 들면 최인호 같은 작가는 이름 그대로 나온다. 물론 그래봐야 아주 짧게 나오지만 뭔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도 같고 약간의 흥미와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또 어찌 보면 작가가 그렇게 한 것은 그리도 경외해마지 않았던 <의사 지바고>처럼 리얼리즘을 추구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여기서 우린 무엇을 소설이라 하며, 소설은 어때야 하는 것인가를 좀 더 진지하게 물어봐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일단 소설에 붙는 용어가 다양해졌다. 순수소설, 장르소설은 기본이고, 비소설, 논픽션 소설, 르포 소설, 일명 교양 소설이라 부르는 자전 소설에 에세이 소설 등 이 모든 것을 어떻게 구분해야할지 대략 난감해졌다.

 

무엇보다 송영의 작품들은 장석주의 말마따나 심심할 정도로 사건이 없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 따라 지루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을 따지고, 플롯과 장르 따지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 소설이냐며 읽다가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나 역시 좀 지루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흥미롭게 읽었다. 한 작가의 삶의 기록으로서의 소설로 읽힌다면 말이다. 어차피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 소설이라면 굳이 그것을 모티프로 하고 변주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냥 나의 있는 그대로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소설은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오래 전 나도 소설가을 쓰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다(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때 누가 그렇다면 무슨 소설을 쓰겠냐는 말에 대답을 못한 적이 있다. 그건 정말 말문이 막혀서가 아니라 나도 송영 같은 사실주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그땐 그런 것도 소설로 볼 수 있는지 확실하게 장담할 수가 없어 말할 수가 없었다. 자전 소설이라면 모르겠는데. 그리고 설혹 있다고 해도 뭉뚱그려서 자전 소설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만큼 소설을 보는 시야가 그리 넓지 못했다는 얘기다. 하긴 카프카의 소설은 미완성 소설이 대부분이다. 그러면서도 그 자체로도 소설이라고 본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나라 같은 문학 풍토에서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이런 되다만 소설을 감히 들이 대냐고 화를 내야 맞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느 문학상 후보에도 들지 못하고 몇 줄 읽다 자동 폐기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완성 소설은 이 소설집에도 나온다. 이를테면 첫 번째 수록작 <화롄의 여인>이나 <나는 왜 니나 그리고르브나의 무덤을 찾아 갔나>가 그것인데 그에 대한 작가의 변이 작가노트에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습작 같은 느낌도 드는데 우린 또 습작을 얼마나 우습게 보는가? 습작이야 말로 미완성 작품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어쩌면 우린 그 작가의 완성작 보단 이런 습작 또는 미완성작에 더 주목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완성작은 어찌 보면 독자와 평론가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듬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책으로 나오기 전 편집자 같은 타인들이 초고라고 받는 작가의 작품은 사실 작가에겐 최소한 재고를 거친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니까 습작 또는 미완성작은 어떤 의미에서 작가에겐 최초의 초고(?).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쓴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원고. 그것을 보는 건 좀 더 의미가 있을 것도 같다. 이를테면 정사 보단 야사가 더 흥미롭고 진실에 더 가까울 수 있는 이치와 같지 않을까.

 

사실 작가는 처음부터 어떤 소설을 쓰겠다고 해서 쓰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큰 그림을 그리고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는 자신이 뭘 추구하는지도 모르고 단지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욕망을 가지고 블록을 쌓듯이 한 작품, 한 작품 쓸 뿐이다. 그러다 보면 작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비로소 자신도 알아듣고 그때야 비로소 자신의 작품 세계를 말하지 않을까?

 

사람들 저마다 자신이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그게 그 사람을 말해주기도 한다. 작가와 작가가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건 바로 그런 것일 게다. 작가가 아닌 사람은 말만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말을 글로 쓴다. 말은 휘발성이 있지만 글은 문자로 남는다. 작가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글은 나를 세우는 글이어야 하고, 자기 성찰적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물며 그것을 소설로 풀어내는 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또 그런 의미에서 장석주의 해설은 너무 기존의 소설의 틀에서 작가의 글을 풀이한 것 같아 조금은 아쉬웠다. 다른 장르는 몰라도 소설은 언제나 열린 사고를 가지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작가가 성공한 작가일까? 난 솔직히 작가가 작품에서 어떤 문인 협회에 가담하고 그 덕에 중국도 가고(화롄의 여인), 러시아도 가고(나는 왜 니나 그리고르브나의 무덤을 찾아갔나), 금강산도 가고(금강산 가는 길), 몇몇의 우리가 잘 알만한 작가들과 교류했다는 게 부럽긴 했다. 하지만 그게 반드시 성공한 작가일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궁극적인 건 아닌 것 같다. 독자로서 어떤 작가의 작품을 한 번 읽어주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작가가 구축하는 문학을 이해하고 지켜봐 주는 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독자를 한 명이라도 가진 작가가 있다면 그 작가야 말로 행복하고 성공한 작가는 아닐까? 송영. 그가 지금도 살아 여전히 작품 활동을 했더라면 오래 지켜보고 싶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사람이 잊힌다는 게 제일 서럽다는데 작가는 내게 너무 늦게 온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동시에 유고집이란 이름으로 만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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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4-18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로필사진 바꾸셨군요. 어느 집 앞 자전거네요.
stella.K님, 즐거운 수요일 보내세요.^^

stella.K 2018-04-18 16:15   좋아요 0 | URL
ㅎㅎ 네. 좀 지루한 것 같아서요.^^

2018-04-18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4-18 17:58   좋아요 0 | URL
ㅎㅎㅎ 할렐루야! 알겠습니다.
꼭 첫번째 독자로 모시도록하겠습니다.ㅋㅋㅋ

페크pek0501 2018-04-19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이상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점을 정확하게 포착해 그것에 대해 깊게 이해하게 되어 소설을 쓰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안 비밀을 독자들에게 터뜨려 주겠어.‘ 하는 생각으로. ㅋ

stella.K 2018-04-20 14:27   좋아요 0 | URL
ㅎㅎ 그렇죠. 그런 이유로 소설을 쓰기도 하죠.
그러고 보면 언니도 뭔가 생각해둔 소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터뜨려 주세요!^^
 
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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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다보면 유난히 마음 쓰이고,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사람이 한두 명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와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감히 영초 언니에 비할 수 없지만)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다. 단지 저자와 내가 공통점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어렵고 힘든 시절은 있을진대 그 시절을 기꺼이 함께 가 준 사람이 꼭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되돌아 볼 때 마냥 힘들고 불행하지만은 않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도 그런 시절과 사람이 있었다. 매번 고딩 조무래기들과 연극을 하다 몇년 후 제법 갖춰진 곳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수를 만났다. 한때 연극이 좋아 배우로도 활동했었지만 뭐 때문인지 연극판을 완전히 떠났으며 팀 내에서도 그리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했다. 나 보다 세 살이 어렸지만 언니, 언니 하면서 잘 따랐던 후배다. 나는 다소의 낯가림이 있어 평소 그리 살갑게 대해주지도 못했다.

 

갖춰진 곳이니 나에겐 더 잘된 일이긴 한데 그것도 잠시, 왜 난 그곳이 그리도 부담스럽고 외로워했는지 모르겠다. 지나놓고 보면 다 미숙하고 지혜롭지 못해 그런 것이긴 하지만 당시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것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왜 이 일을 한다고 했을까? 마음 고생도 많이 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럴 때마다 수는 내 아픔이 자신의 아픔인 양 같이 울어주고 아파해 줬다.

 

하지만 스타일도 성향도 서로 달라 우린 결정적일 때 불화했고, 생채기도 많이 냈다. 세상에 처음부터 마음에 맞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서로 맞춰 가는 거지. 그게 이론적으론 가능한데 막상 부딪쳐 보면 생각만큼 되질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 한 번 크게 싸우고 다시 안 볼 생각도 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또 그런 것이 아니라 다시 화해하고 한동안은 잘 지냈다.

 

모든 것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고 그도 몇 년을 하고나니 팀의 존폐설이 제기 되었고, 결국 팀을 정리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때 나는 그것에 단 1의 아쉬움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다렸다고나 할까? 팀이 해체되면 다시는 돌아보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수 역시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싸늘하더니 팀이 완전히 정리가 되자 마치 대인기피증에라도 걸린 사람마냥 숨어버렸다.

 

나는 수가 그렇게 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우린 팀이 해체가 되더라도 서로 연락하고 가끔 밥도 같이 먹으며 옛 추억을 곱씹게 될 줄 알았다. 그러다 거의 1년 반만이던가? 어떤 일이 있어 다시 만났는데 옛날의 수가 아니었다. 뭔지 모르게 막이 쳐져있었고 불편해하는 모습이 영력했다. 나 역시 그렇게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그런 그녀에게 따뜻하게 대해 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우린 다시 만나지 못했다.

 

사람이 잊히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런 식으로 헤어지니 더 많이 기억에 남더라. 그리도 살갑고, 열정적이었는데 그녀가 마치 하루아침에 병든 사람처럼 바뀐 것을 도무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 그렇게 안으로 곪아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때 그녀는 팀을 더 이어갈 마음이 있었던 걸까? 그런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나에게 화살을 돌려댔던 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지만 그래도 그때를 되돌아보면 수만큼 나를 이해하려고 했던 사람은 없었고, 연극판의 그 치열한 여정을 함께 견뎠던 사람도 없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생각나는 사람이다.

이 책을 보며 난 그때의 수가 아스라이 떠오르는 것이다.

 

저자는 어떻게 그 오랜 세월 이 이야기를 가슴에만 묻어놓고 살았을까?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서전을 쓰고 싶어지는 법인데 저자는 참으로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꽁꽁 묻어놨겠구나 싶다. 더구나 저자는 언론인 출신이다. 온갖 사건과 사고, 남의 이야기는 발 빠르게 취재하고 썼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이렇게 말하지 않은 걸 보면 그 시절에 대한, 또 영초 언니에 대한 빚진 마음이 어느 정돈지 알 것도 같다.

 

덕분에 우린 민주와 항쟁, 그 뜨거웠던 시절을 다시 한 번 만나게 됐다. 어느 한쪽에서는 또 옛날 고리짝 이야기를 곱씹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시절 민주화 투사들과 독재 정권에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선량한 시민들의 가슴에 또 한 번 못을 박는 일이 될 것이다.

 

아직도 민주화 운동 진상이 규명되지 않았다. 아직도 친일 세력을 비롯한 일부 보수 세력이 이것을 자꾸 덮으려고만 한다. 그래도 정권이 바뀌긴 바뀌었나 보다. 지난 박근혜 정권과 보수 세력은 할 수만 있으면 죽은 박정희의 망령을 다시 살려 내려고 안달이었는데 정권이 바뀌고 보니 해결하지 못한 민주화 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나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진상은 반드시 규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 이 책이 그저 한낱 개인의 과거사에 대한 한풀이나 하자고 쓰인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여성인 만큼 그 시절 여성들이 어떻게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어떻게 고문과 학대를 받아왔는가를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어 그 시대를 규명하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 역시 박정희 키즈로 자라왔고, 그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계기로 민주화 운동은 일어났다고 생각했었다. 솔직히 그때까지 그를 대신할 사람이 있었을까?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을 보고 난 그때야 비로소 나의 믿음을 의심했고, 박정희를 의심했다. 그도 죽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 권력은 남용되어선 안 되겠지만 장기적으로 이어져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을 그제야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몰라서 그렇지 우리나라의 민주화 열망은 그 보다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저자도 말하지 않는가? 우린 그저 박정희가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오길 바랐지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고. 그 덕분에 교도소에서 나올 수 있었고, 제적당했던 학생의 신분을 다시 회복할 수도 있었으며, 소위 말하는 서울의 봄을 맞이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국가가 그들에게 입힌 폭력과 상처는 보상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물론 그들이 어떠한 보상을 바라고 투사의 길에 뛰어 들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또 그 덕분에 어느 정도 민주화는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피기도 전에 시들어져 가는 꽃이 됐던 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가 언제 독립투사를 제대로 대우한 적이 있던가? 친일파의 후손들은 여전히 저렇게 건재한데, 국가 유공자란 명예는 주면서 그들이 정작 어떻게 사는지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런 것처럼 민주화 투사들 역시 나 몰라라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우리나라처럼 사관이 좁은 나라도 흔치 않은 것 같다. 모 아니면 도다.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됐다는 건 또 한 번 역사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지 않는가?

 

무엇이 그토록 역사의 망령을 놔주지 못하는 걸까? 그걸 단순히 향수라고 말해도 좋은 걸까? 새 역사, 새 역사 하지만 우린 아직 새 역사의 주인이 될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굳이 가보지 않아도 되는 길을 돌아 가보고 그 끝에 닿아봐야 깨닫는 우리 민족은 그다지 지혜로워 보이지 않는다. 미래지향적이지 못하고 과거 지향적이며, 진취적이지 못하고, 현실 타협적이며 안정만을 지향하는 그것이 발목을 잡아 온 것은 아닌가?

 

민주화를 외쳤던 사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피해를 입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했다. 사람들이 억압 받고, 피 흘리고 있는데 그것을 어찌 나 몰라라 할 수 있겠는가? 짐승도 그렇게 안한다. 돕는 사람을 핍박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정말로 잘못된 사회다. 이런 사회의 미래가 어떨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런 사회에 내 자식을 맡길 수 없어 그토록 분노했던 것이 아닌가?

 

그나마 정권이 바뀌니 진상 규명이라도 한다지. 앞으로 또 정권이 바뀌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발굴하고, 제시하고, 증명되었으면 좋겠다. 말했다시피 우리나라는 역사를 보는 스펙트럼이 넓지가 못하니 또 언제 잠자고 있는 역사의 망령이 나와 그것을 잡아먹고 흐려 놓을지 알 수가 없다.

 

영초 언니가 그리된 건 정말 다시 생각해도 마음 아픈 일이다.

그리도 민주화를 열망했던 그녀였지만 이 나라에서 내 아이를 온전히 키울 자신이 없어 이민까지 불사했건만 그것이 죄였을까? 그녀가 캐나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렇게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졌으니 이제 행복해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그녀에겐 조금치의 행복도 허락되지 않았던 걸까?

 

그런데 또 영초 언니를 생각하면 그게 어디 저자 개인만이 아는 언니였을까 싶기도 하다. 우리는 얼마나 민주화 운동을 하다 상처 받은 사람들을 보듬었을까? 사랑했을까? 언제나 그렇지만 생은 내 편인 적이 없다. 과연 영초 언니가 그리된 것이 그 언니 개인만의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의 생은 그녀의 편이 아니어도 우리는 그녀 편이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는 한 개인의 체험으로서 그 시절을 얘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마치 우리에게 이런 사람을 알고 있노라고 소개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린 영초 언니를 어떻게 해야 할까? 2, 3의 천영초가 또 있지 않을까?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을 하고 상처 받고 쓰러진 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다.

 

모르긴 해도 저자는 영초 언니에 대한 어떤 부채 의식 때문에 이 글을 썼을 것이다. 한때는 함께 민주화의 험한 강을 건넜던 사람. 그런데 또 필요에 의해 그를 멀리했다. 또한 그것이 언니를 그리 만들었을까 죄책감도 있었으리라. 무엇이 영초 언니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읽는 나도 마음이 착잡했다.

 

이 책은 영초 언니에 대한 저자의 참회록이자, 민주화 운동의 여성사이기도 하며, 한때 뜨거웠던 열망의 비망록이기도 하다. 꼭 한 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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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9-27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일의 잔재를 뿌리뽑지 못한 역사가
한스럽네요
그들이 살아남기위해 공산당 때려잡는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것이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2016년, 휘날리는 태극기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줬지 않나 싶습니다.

stella.K 2017-09-28 14:5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우리나라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과거사 진상 규명이지 우린 해결할 의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제 쿨까당 잠깐 보니까 전두환이 비자금만 1조라더군요.
최근까지 했던 국회의장이 전두환 끄나풀이었다는데
누굴 말하는 건지 가물가물하더군요.
아무튼 그만큼 아직까지도 정치계에 줄을 대고 있다는 거죠.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요.

2017-09-27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8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9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27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 책을 읽으면서 궁금한 점 하나 생겼어요. 천영초 님의 과거 모습이 있는 사진을 단 한 장이라도 실려 있지 않았을까요? 사진도 역사가 되는 기록인데 말이죠.

stella.K 2017-09-28 14:46   좋아요 0 | URL
그러게. 그게 좀 실렸으면 좋았을텐데...
근데 그러면 오히려 작가의 자서전 같은 분위기가 나서일까?
아니면 그 부분은 비밀로 하고 싶었나 보지.
아무튼 좀 그분은 정말 안타까웠어.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ㅠ

2017-09-27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8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8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난쟁이 백작 주주
에브 드 카스트로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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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몇 년 전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난쟁이 말고 '축소형 인간'으로서의 난쟁이가 TV에 나온 적이 있다. 미국인가 그랬고, 여자아이였다. 그때의 키가 약간 큰 인형 정도랄까?  세월이 흘렀으니 지금은 거의 숙녀가 다 돼있지 않을까? 아무튼 그런 보도를 접해 봤으니 이 전기 소설의 주인공 유제프 보루스와스키의 실존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더니 그의 초상으로 보이는 그림 한 점이 보인다.

정말 작다. 역자의 설명대로 유제프 보루스와스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연골 무형성증의 탈비례 난쟁이'가 아니라 신체의 비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체구만 작게 발달한 '축소 비례 난쟁이'인 것이다.   

그는 1739년에 태어나 백 살에서 2년이 모자른 98세를 살고 삶을 마감했다. 그를 본 의사는 20년도 채 살지 못할 거라고 했는데 그에 몇 배에 해당하는 삶을 살았으니 사는 것에 있어서는 여한이 없어 보인다. 더구나 옛날 시대에.

그러나 그 세월을 사는 그 조그만 어깨 위에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가 얼마만 한 것인지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하기가 어렵다. 비장애인도 세상을 살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건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장애인이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는 이보다 훨씬 더 무겁고 커 보인다.

그나마 타고난 배경이라도 남 보다 유리하다면 다행일 수도 있겠지만 유제프는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것 외엔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버지는 우물에 빠져 죽고, 그의 형제들은 병으로 죽거나 가난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졌으며, 어머니는 귀족 친구에게 유제프를 맡긴 후로 다신 만날 수가 없다. 그뿐인가, 훗날 그 자신도 자신의 첫째 딸을 양자로 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는다. 

아무튼 유제프는 그때부터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몸소 터득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됐다.

무엇보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귀족들 앞에서 춤과 재롱을 피워야 했다. 그리고 그건 유제프란 본래의 이름 보다 장난감이란 뜻의 주주로 더 많이 인식이 되었고, 당대 귀부인들 사이에선 행운의 마스코트쯤으로 여겨졌다. 물론 그 덕분에 일생 육체나 정신적으로 학대받은 적은 없다. 귀족을 상대한다는 건 그들 앞에서 재롱을 피워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더불어 그들은 유제프를 지켜주는 울타리도 되니까.

실제로도 그는 두 번의 양어머니가 바뀌는 동안 나쁘지 않은 사회적 대우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여기서 유제프가 당대 주류 사회에 섞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짐작이 가기도 하지만, 더불어 그 시대 귀족들이 무작정 난쟁이 같은 장애인들을 어떻게 대했을까를 짐작해 본다. 어느 정도는 너그럽지 않았을까? 그도 그럴 것이 없는 사람끼리 서로 보살피며 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있는 사람이 더 인색하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광에서 인심 난다고, 있는 사람이 베푸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책에는 그런 언급이 나오진 않지만 귀족 교육 중엔 노블레스 오블리지에 대한 교육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회적 약자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해줘야 하는지를 나름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유제프에 대한 귀족들의 환심은 딱 거기까지다. (실제로 그런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누구도 그를 동등한 인격체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사회적 약자니 돌봐줘야 하는 건 당연한 거지만 그러니만큼 사람들은 그를 장난감과 호기심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유희만을 얻으려 했다. 바로 이것에 유제프의 고독이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사랑을 만났다. 사랑하는 사람 이잘린을 만나기 전 잠시 직업이 배우인 여자를 만나고 나름 서로 진지한 사랑을 한 것 같기도 하지만 서로 진실하지 못했고 뭔가 어긋나 있어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잘린은 달랐다. 그녀만큼은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이잘린이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려면 지금까지 두 번째 양어머니 집에서 누렸던 호사를 뒤로하고 그 집을 나와야 한다.

그 선택에 유제프는 조금의 망설임이 없었다. 과감하게 집을 나왔고 신혼 때 잠깐의 행복을 제외한다면 그의 삶은 매번 산 넘어 산이었다. 매번 고비의 순간이었고, 망하고 파산할 것만 같은데도 망하지 않고 파산하지 않는다. 그게 또 어찌 보면 우리네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도 그러지 않는가?

그리고 난 책을 다 읽어나갈 즈음 그의 삶에 진정한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부자로 생을 마쳤든, 가난하게 마쳤든, 짧던 길던 우리의 삶이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마지막엔 다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생의 마지막 날까지 그만큼 살아오기가 쉬웠겠는가.

물론 유제프는 그렇게 힘들 게 살지 않아도 되는지도 모른다. 육체적으로 온전치 못하니 양어머니 그늘에서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아도 될 것이다. 사랑도 굳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해 뭐 하겠는가. 그 때문에 그는 평생 먹고사는 문제와 애증의 문제로 고통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가 양어머니의 집을 나오고,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을 사랑한 걸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까? 그것은 담대한 자기 선언이었고, 자기 선택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므로 인해 닥칠 여러 가지 고난과 역경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일생 사는 동안 후회하지 않았다.

사람은 언젠가 꼭 한 번은 자기 선언과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사람이지 어떻게 주워진 환경 속에서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짐승도 아니고 장난감은 더더욱 아니라면 말이다. 그 욕망은 유제프로선 더 강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정말 인간의 삶이란 책의 한 구절처럼, 모든 것을 가졌으나 모든 것을 가지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런 삶의 자조는 가지지 못한 사람 보다 가진 사람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또한 인생은 나그네 길 이랬다고 유제프는 양어머니 집을 나온 순간 나그네로서의 대로의 삶이 펼쳐졌다. 책을 읽어보면 그는 어느 한 군데 말뚝 박고 살았다는 말이 없다.

물론 그래서 그는 훗날 회고록을 세 번이나 고쳐 쓸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당시로선 교통도 그리 발달하지 못했으니 어딘가를 옮겨 다니며 살아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유제프의 몸으로서는 더더욱. 그러나 그런 감행이 있었기에 저자는 유제프의 회고록을 접했으며 우린 또 이렇게 그의 손끝에서 당대 유럽의 역사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유제프는 인생 어느 지점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만이 모든 수모를 감내하며 살아갔던 것이 아니라는걸. 자신이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른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살았다 뿐이지 사람들 저마다 삶의 짐을 가지고 다른 식의 수모를 감내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며 삶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미에 보면, 누구도 죽고, 누구도 죽고, 누구도 죽었다며 당대 최고 권력자들의 명단이다. 사람은 그 인생의 시작은 다 달라도 그 끝은 비슷하다. 이것을 깨달으며 사는 것이 또한 인생 아닌가? 집채만 한 삶의 무게가 자신을 짓누르는 것이 겁이 나 미리 죽음에게 자신의 생명을 양도해버리는 건 또 얼마나 슬프고 어리석은 일인가?

소설이 나름 꽤 훌륭하다. 어찌 보면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클래식 버전을 보는 것도 같고(이 작품은 조만간 영화로 나오지 않을까?), 저자의 유려한 문체와 풍부한 비유가 읽는 내내 즐거웠다. 꼭 읽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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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4-12 2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형의 역사》라는 책에 난장이 사례가 나옵니다. 이 책에 유제프가 나오는지 확인해봐야겠어요.

stella.K 2017-04-12 21:24   좋아요 1 | URL
오, 그런 책도 있었구나.
이 책 정말 괜찮아. 재밌어.
너도 기회되면 읽어 봐.^^

cyrus 2017-04-12 21:57   좋아요 1 | URL
방금 전에 《기형의 역사》를 살펴봤는데요, 정말로 유제프 보루스와스키에 대한 내용이 있어요. 이 소설, 꼭 읽어봐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