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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그 형제들 4 - 이집트에서의 요셉 (하)
토마스 만 지음, 장지연 옮김 / 살림 / 2001년 11월
평점 :
이 책이 언제 나왔는가를 돌아보니 2001년 11월에 나온 걸로 되있다. 그 무렵 신문의 북섹션에 어느 기자의 리뷰를 굳이 읽지 않더라도 나는 이 책을 꼭 완독하리라 다짐 했었다.
이 책은 알겠지만, 창세기 40장부터 나오는 야곱의 아들 요셉에 관한 이야기다. 내용은 간단하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그로인한 이복형들의 시셈으로 인해 함정에 빠지고, 그후 이집트의 노예상인에게 팔려가 갖은 고생 끝에 이집트 총리대신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하지만 실상 성경 본문은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9장 정도로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고, 그나마 어린아이에게 구연동화를 읽어주듯 너무나 교훈적이고 정형화 된 듯하여 어른들에겐 그닥 와닿지 않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운이 좋았을까? 이것을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로부터 들었다. 그때 그 선생님이 얼마나 재밌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던지 말 그대로 빨려들어가듯 했고, 침을 흘려도 침이 흐르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한마디로 감전 됐다고나 할까? 나는 그만 이 이야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내가 사춘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고, 성경을 펼쳤을 때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마주하고 얼마나 그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던지, 지금은 그 나이의 몇 곱절을 살지만 나는 여전히 그 이야기에서 조금도 자유하지 못한 채 세월을 살면 살수록 이 이야기에 빚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가 성인이 되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생각해 보라. 자신을 사로잡는 이야기가 있는지? 나이가 들어서도 잊지 않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 있는지. 그러기에 나는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을 꼭 완독하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 이야기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나의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생각만큼 그렇게 쉽게 읽혀지는 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원래 귀한 것, 신비스러운 것은 쉽게 문을 여는 법이 없으니까. 그러니 토마스 만도 이 이야기에 20년을 바친 것이 아니겠는가? 그만큼 이야기의 구조는 간단한 것 같아도 그 신비로움은 가히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솔직히 난 1권부터 3권까지 어떻게 읽었는지 기억에 없다. 앞서 밝혔지만, 너무 지루해 이 책을 발견했던 처음의 다짐과는 달리 그 다음 권은 언제 읽을지 기약에도 없었다. 독후감도 써놓지 못했다. 그리고 최근 드디어 4권을 읽었을 때 내가 비로소 깨달은 건, 3권까지는 4권과 그 이후의 것(6권까지)을 말하기 위한 전초전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성경대로라면 3권까지는 야곱이 요셉을 어떻게 생각했고, 요셉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으며, 이복형들은 요셉을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끊이지 않고 펼쳐진다. 그리고 4권의 내용은 이렇다. 이집트 노예상인에 의해 팔려간 요셉이 포티파르(성경은 보디발이라고 했다)라고 하는 이집트의 최고 권력가의 시종이 된다. 그러나 요셉은 포티파르의 아내의 끊임없는 유혹을 받고 있었다. 결국 포티파르의 아내는 그를 유혹하는데 실패하자 오히려 요셉이 자신을 덮칠려고 했다고 누명을 씌워 주인으로 하여금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것 또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 만은 이 이야기를 상당히 매혹적인 이야기로 풀어간다. 이후에도 요셉의 이야기는 더 전개가 되겠지만 아마도 요셉과 무트의 이야기는 전체를 통털어 가장 매혹적이고 백미라고 꼽을만 하지 않을까? 그것은 확실히 토마스 만의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물론 4권에서도 예의 그 끊임없이 펼쳐지는 만연체의 문장은 여전하여 읽는이로 하여금 지루함을 금치 못하게 만들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만연체의 문장속에서 발견하는 보석 같은 문장 또한 매우 훌륭할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하나 하나가 무척 매력적이다. 특히 가슴에 사무치도록 요셉을 향한 그리움과 정욕에 사로잡힌 여인의 마음은 절절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성경에 잠시 언급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같이 잠자기를 종용했다는 이 짧은 문장이 그녀를 대변해 주기엔 한참 역부족이다. 또한 그 뜻을 결국 이루지 못하자 증오의 마음으로 변해 요셉을 스스로 배신하는 여인의 마음이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조금도 비껴가지 않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4권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요셉이 여인의 유혹에 조금도 동요함이 없었다는 것에서 단순히 교훈만을 찾으려 하면 안될 것이다. 요즘 같이 성적으로 자유로운 시대에 어쩌면 요셉은 비웃음을 살 인물일지도 모른다. 요셉이 살았던 그 시대에도 성은 언제나 자유로왔다. 성을 숭배하는 신이 있었고, 그 시대의 창녀는 신을 받드는 신녀로서 추앙을 받았까. 그러니 고자가 아닌 다음에야 이 유혹을 피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왜 그런 속에서 요셉이 그토록 육체적 순결을 지키고자 했는지 토마스 만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요셉을 대변해 준다. 또한 토마스 만은 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을 때마다 그의 육체와 정신이 어떠했을런지 그 파장과 떨림을 놓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요셉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 무트가 요셉을 어느 정도나 생각했는지 생생하게 가늠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는내내 서사시가 뭔지를 새삼 깨달았으며, 마치 대작 오페라를 보는 듯한 상상에 사로잡혔ㅅ다. 더불어 왜 이런 훌륭한 이야기가 오페라나 뮤지컬 또는 연극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토마스 만이 기독교인이었는지 아닌지는 나로선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위해 읽기도 하겠지만, 그 이야기 자체는 신화로서 읽기에도 손색이 없다. 작가라면 이야기의 전범이 될만한 신화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보고 싶어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토마스 만은 작가로서 충분히 충실했다고 본다. 내가 이 이야기에 두근거리는 떨림이 있고, 빚을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를 다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