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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ㅣ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슈테판 츠바이크의 저서들은 결코 만만이 읽히지는 않는다. 그는 전기작가로 더 많이 잘 알려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난 오래 전 그의 <체스>란 단편을 읽고 매료되었다. 그후 그의 책이 번역되어 나올 때마다 관심있게 들쳐보게 된다. 하지만 그의 사유의 깊이가 워낙 대단해 좋아는 하지만 선뜻 읽기에는 또 웬지 조심스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체스>를 읽었을 때의 감동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던터라 이번에 새롭게 그의 소설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이 반가웠다.
내가 <체스>를 기억하는 것은 그의 탁월한 심리 묘사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펼쳐 들었을 때 과연 <체스>에서 느끼는 그런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기대를 했는데, 역시나 그 기대를 져버리지 않아 나름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약간은 지루하고, 열린 결말을 보여주고 있어 약간의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쓴 작품이라 작가의 염세적 사고가 그대로 녹아 있어 실제 주인공이 어땠을지 짐작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번역자가 옮긴이의 글에서도 썼지만 '신데렐라'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는 어두운 이면이 없다. 부잣집 딸이었지만 계모에 의해 신분이 강등이 되었으면서도 밝음을 잃지 않고, 늘 꿋꿋하고 왕자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품은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늘 밤 12시만 되면 가난한 재투성이로 변한 신데렐라의 속내는 드러나지 않는다. 솔직히 (적어도)오늘 날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의 세상에서 매일 가난와 부를 왔다갔다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자기 정체성이 많이 흔들려야 오히려 정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감춘 채 고난을 인내하면 백마탄 왕자를 만난다는(원뜻은 그런 뜻은 아닐 것이다. 고난을 인내하면 좋은 날을 맞이 한다는 것의 은유가 되겠지) 허무맹랑하기까지한 이 이야기는 오늘 이 시대에는 참 먹히기가 힘든 이야기가 되어버린 건 아닌지. 더구나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한 이 시대엔 오히려 일부러 적극적으로 결혼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그러니 백마탄 왕자가 나타나 준다는 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안다. 더구나 왕의 피가 흐르는 귀하신 몸께서 한낱 재를 뒤짚어 쓴 여자를 사랑한다고? 아무리 신데렐라의 원래 신분이 귀족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현재를 대변해 줄 수 없다.
그런데도 신데렐라 이야기는 인간의 욕망을 대변하는 이야기이도 해 신분상승의 욕망을 부채질 하기도 한다. 바로 내가 본 이 작품은 이 점을 파고 들어가 인간의 내밀한 단면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을 보면서 나라나 시대 배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상상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정말 상상해 보라. 우리나라도 그렇고,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그렇고, 진짜 부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중산층이거나 그 이하의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많다. 그러나 그들 중엔 또 가깝든 멀든 부자 친인척은 꼭 한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 그들이 2주간 부자들이 사는 세계를 보여 주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2주간 동안 크루즈 여행을 하며 온갖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면 그 기회를 마다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크리스티네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물론 처음부터 나에게도 행운이...?! 처음엔 얼떨떨할 것이다. 그리고 무작정 좋아하지는 않겠지. 우리네 현실이라는 게 구차하기 이를 때가 없어 잠깐 어디를 다녀오는 것도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갈등하고, 준비를 많이해야 하는 것인가. 더구나 여행을 자주 안 해 본 사람일수록 그리고 생전 경험해 보지도 못한 것을 경험하게 된다면 더 많이 복잡하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의 골이 깊으면 깊을수록 유혹도 깊은 법이다. 내 평생 이런 기회가 아니면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기회를 그냥 흘려 보내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비록 한 순간의 꿈이어도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와 다른 삶을 잠깐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아니 오히려 바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화 같은 삶이 아닌가.
나 역시도 그것은 만만치 않은 유혹일 것이고, 당연히 그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한번도 상류사회의 삶을 살아 본적이 없으니 그것을 욕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욕망하지 않는다'가 과연 정직한 말일까? 어렸을 적, 우리 집은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너무도 평범한 집안이라 정말 사돈의 팔촌이라도 좀 유명한 사람이 있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나중에 안 일이긴 하지만, 아버지의 왕고모(이건 또 어떻게 계산이 되는 촌수인지 현깃증이 날 지경이다)쯤 되시는 분이 자유당 시절 유명한 작가라는 것도 알았고, 알만한 명망있는 집안의 딸이라는 것도 알았다. 처음엔 이걸 알고 나름 좋긴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평생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과 나의 삶이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가깝게 지내던 형제도 물건너 살면 이름만 형제고 남이나 나름없는데 촌수도 잘 가늠이 되지 않는 분이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냔 말이다.
그래도 이 욕망은 수시로 나를 자극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얘기하기도 쑥스럽고 싫지만, 난 사춘기 시절 한 때 미국에 계신 나의 막내 작은 아버지가 나를 데려가 공부시켜 주길 집착적으로 바란 적도 있다. 미국에서 그렇게 잘 사신다는데 어려서 나를 그리도 예뻐하셨던 조카의 팔자 좀 고쳐주시면 안 될까? 바란 적도 있었다. 그뿐인가? 우린 흔히 결혼을 신분상승의 도구로 잘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건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다. 본 소설은 바로 그런 주인공의 욕망을 잘도 건드려주고 있는 것이다.
분명 돈이 많으면 잘 살 기회도 많아지고, 사랑에 성공할 확률도 많아지며, 좋은 배우자를 만나 안락한 삶을 영위할 확률도 많아진다. 사람이 거지로 살다 부자로 신분이 바뀌어 사는 것은 그 적응이 빠르다. 그러나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 되어 적응하며 살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가난한 자가 추락을 경험하는 것 보다 몇십 배 또는 몇백 배의 강도로 사람을 절망하게 만든다. 더구나 2주 후엔 누더기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심리 상태를 경험하게 될까? 물론 잠시 공항상태를 경험하겠지. 하지만 그 잠시가 제 3자가 말하는 '잠시'일뿐 경험하기에 따라선 당사자에겐 억겁의 시간일수도 있을 것이다. 크리스티네는 안타깝게도 다시 누더기로 돌아왔을 때 자신이 겪어야 하는 심리적 충격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저 생각지 않은 행운을 즐겨보고 싶었을 뿐이다. 또 누가 아는가? 자신이 바로 신데렐라가 될지. 거기엔 그녀의 어머니도 한몫했다. 그러면 더 이상 거절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가난한 삶을 연명하다 부자의 세계에 편입된 우리의 크리스티네는 부자들이 베풀어주는 세례에 정신줄을 놓고 있는 것마는 아니었다. 나름 부자들이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하는지를 인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그녀는 부의 안락함을 만끽해 그것을 종종 잊어먹거나 합리화 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바로 주인공 크리스티네와 주변 인물을 통해 계급사회를 교묘하게 때로는 신랄하게 꼬집어 대기도 한다. 어느 사회건 계급을 무시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다. 공산주의건, 민주주의건 계급은 잊기마련이다. 이것이 없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유토피아겠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이상향일뿐이다. 형제지간에도 개인차가 있어 판이한 운명을 살기도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이 계급을 결정 짓는 것은 또한 학교일 것이다. 학교는 사람을 평준화시켰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학교만큼 사람을 서열화시키고 차별을 시키는 곳도 없다. 인간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사회를 경험하는 곳에서 이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어디를 간들 이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을까. 공동체 정신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이상 경쟁사회에서는 이것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크리스티네가 자신의 사고와 상류사회를 비교하는 그것에서 또는 그녀의 신분이 들어나는 과정에서 나는 묘하게도 쓰라린 학교 경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나와 종류가 다른 인간에 대해 사귀는 것을 얼마나 부담스럽고, 경계해 왔는지, 또 유유상종이라고 비슷한 사람끼리 똘똘뭉쳐 틈을 내주지 않는 것에서 크리스티네도 그러했을 것이란 감정이입이 어렵지 않았다. 사실 부의 세계가 베풀어주는 세례가 크면 클수록 그녀가 감내해야 하는 굴욕도 그만큼 컸다.
그래도 바라기는 크레스티네가 자신의 현실로 돌아왔을 때 얼른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나름의 또 새로운 삶을 살아가길 바랬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현실로 돌아왔을 때 허탈하다 못해 현실은 몇백 배 참혹한 것으로 느껴졌지만(더구나 어머니도 돌아간 상황이 아닌가) 그래도 사랑할만한 사람을 만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것은 오히려 동반자살을 모의하는 것이 되어버렸고, 그 전에 크게 한탕할 것을 모의하는 것에서 소설은 끝나버렸다. 이것은 확실히 말했지만 작가의 사고관을 그대로 반영한 결말이다. 소설의 배경은 전후 오스트리아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참혹함, 피폐함, 공허함등을 대변했을 것이다. 희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여기서 복구하고 좋은 사회가 되어도 계급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이나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작가의 염세적 세계관을 그래도 보여준다.
나라면 감정이입이 너무도 잘되는 이 소설의 결말을 어떻게 했을까? 작가는 인간 세계의 밑바닥을 보고 그런 결론을 내렸겠지만 난 아직 바닥을 보지 못했으니 다소 상투적일지 몰라도 가난한 사람은 또 그 나름의 가난한 사랑을 하게되는 것으로 끝을 맺었을지 모를 일이다. 왜 그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너무 가난해서 그 가난을 반으로 나누려고 결혼하는 커플이 있는가 하면, 바로 가난 때문에 헤어지는 커플도 있다. 물론 가난 때문에 헤어지는 경우가 더 많지만 그거야말로 상투적이 아닌가? 소설은 이야기인만큼 인간의 상상을 더 강화시켜 줄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가난한 연인들의 사랑을 존중해 줄 필요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또 이들을 볼 때 일부러 그것을 강제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결말은 아닌듯도 하다. 즉 다시 말하면, 작가는 이 세대에 다시 한 번 태어나야 하는 줄도 모른다. 그리고 너무 불행하지 않게 세상을 바라봤다면 조금 더 나은 결말을 이끌어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스테반 츠바이크가 이 세대에 다시 태어나도 이 세대를 달가와 하지 않을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러니 결말을 종용하지 말자. 차라리 다른 작가를 찾아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내가 만일 크리스티네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가득이나 불행한 처지에 지지리 운도 없는 남자를 만나 동반자살을 모의하고 그전에 한탕 크게 할 것을 동조하기 보다, 자신이 경험한 부자들의 세계를 까발리고 좀 더 부풀려 글을 써서 출판사를 찾아 갔을 것 같다. 그리고 누구도 전쟁을 원했던 사람은 없었다. 윗대가리들이 저질러 놓은 이 말도 안되는 놀음에 국민들만 죽어나가는 현실을 보라고 외쳤을지 모를 일이다. 사람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은 그냥 있는 말이 아니다. 크리스티네는 애인을 잘 만나야 했고, 국민은 지도자를 잘 만나야 했으며, 독자는 작가를 잘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테반 츠바이크는 분명 내가 경외해마지않는 작가임엔 틀림없지만 이 작품은 좀 암울한 작품이라 이런 작가를 좋아하는 나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행을 말하는 소설은 가급적 안 읽는 것이 좋긴한데 문학의 거의 대부분은 허무주의를 담고 있어 행복한 소설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작가의 명성을 생각할 때 이런 판형은 정말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표지는 그렇다쳐도 재생지에 페이퍼백이라니. 예의가 없다못해 홀대하는 것 같아 아쉽다 약간 화도 났다. 이왕 책을 만들려거든 좀 더 생각하고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