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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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책을 읽으니 머리에서 안 쓰던 근육들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우린 자아나 욕망을 주제로 한 문체주의 소설에 너무 많이 길들여져 온 것은 아닌지?  그 깊이에 있어서는 가히 거장이라 칭하는 황석영이나 김훈이 따라 올 수 없는 묵직함이 있지 않나 싶다. 그것은 또  이 소설을 굳이 분류하자면 관념주의 소설에 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보면 말마따나 관념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도스토옙스키와 가히 맘먹지 않나 싶기도 하다.   

사실 난 이 작품을 20년 전쯤에 읽어었다(잘 기억은 안 나지만 김은국씨가 직접 번역한 책이었던 것 같다) . 뭐 20년 전에 읽었으니 내용이 그다지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그 느낌마는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으니 김은국 그는 참 흔치 않는 작가란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무엇보다 여느 작가는 잘 다루지 않을 법한 신의 존재에 대해 정면으로 묻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책이 서술적인 측면에서도 완벽함을 추구했다고는 볼 수 없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특징은 인물과 인물의 차이를 보여주는 캐릭터 구사면에선 다소 떨어진다.  무엇보다 화자를 비롯해 등장인물들이 하나 같이 비슷한 언어 수준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으로봐 교양 꽤나 갖춘 하이클래스다. 그래서 인물의 구분이 용이하지 않다. 또한 이 작품은 처음부터 그 속내를 드러내주지 않을뿐만 아니라 (추리 기법을 차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끝까지  결말을 보여주지 않고 있어서, 다시 읽어도 처음 읽는 것처럼 여전히 어렵다.  

무엇보다 6.25 그 신산했던 시절 공산당에 의해 12명의 기독교인이 죽었다. 하지만 그 중 신 목사와 한 목사는 살았다.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보는 사람마다 해석을 달리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그 두 사람은 왜 12명과 죽지 않고 살았는가? 하나님을 배반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오독의 여지를 두고서라도) 읽어보면 알겠지만 딱히 살기 위해 배반했던 것도 아니다. 또한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12명이 정말 순교했을까에도 의문의 여지는 남는다.  오히려 보기에 따라선 살아남은 두 사람이 죽은 자보다 더 진실해 보일 수도 있다.  

더구나 그들은 살아 남았기 때문에 왜 12명의 순교자와 함께 죽지 않았냐고 비판을 받을 수도 있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남은 자로서의 자기 사명이 있는 것처럼 일을 수행할뿐이다. 이를테면 살아남았다고 해서 신 목사나 한 목사나 그다지 행복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들은 살아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고, 12명의 순교자들이 어떻게 죽었는가를 간증하며 교세 확장을 위해 쓰임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이 또 전도와 신앙 전파를 위한 확신에 찬 행보도 아닌듯 싶다. 이책 중반을 조금 넘어서면 신 목사의 자조 어린 대사가 나온다. "...... 교인들에게 필요한 건 그들에게 위안과 학신을 줄 작고 멋진 얘기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의미있게 하고 고난을 값진 것으로 해줄 그 어떤 것이 아니겠나? ...... "(228p) 가히 신앙적 회의가 뚝뚝 묻어나는 대사다. 6.25의 참상을 몸소 겪으면서 두 패로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그런 상황을 침묵만 할 수 있는가? 진한 회의 내지는 원망을 하거나, 이 고난의 시기를 신앙으로 이겨 보겠다는 절대 신앙파. 하지만 그 후자쪽엔 바로 신 목사의 저런 회의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두고 읽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 어떤 사람은 신앙을 부정하는 책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신앙에 대해 더 진지한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즈음 묻고 싶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보다도 작가가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결말을 얘기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작가는,  신앙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작가 나름으로 얼마든지 결말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찌보면 문학의 도를 넘어서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들면, 인간이 고난 당할 때 신은 어디에 계시고,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그것에 답을 다는 쪽은 작가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성경학자나 변증학자가 할 일이다. 작가는 그저 인간의 다양한 삶을 규명하거나 풀어 헤치는 것에 있지 않을까? 작가는 인간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지 신을(또는 신앙을) 대변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문학 안에서 신의 유무를 가린다는 건 의미가 없어 보인다. 

단지 그런 생각은 든다.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작가가 손을 대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건 12명의 순교자일 것이다. 그들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말이 없다. 그러므로 작가는 무엇으로도 그들을 대변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들은 겉으로는 순교자라고 말하겠지만 문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영구미제로 남았다고 할 수 밖엔 없을 것 같다. 그점에 있어서 작가가 제목을 '순교자'로 했다는 건 어찌보면 아이러니 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지난 2004년도에 이라크에서 죽어간 김선일씨를 통해 순교자의 내면을 유추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당시 기독교계에선 그를 순교자로 추대를 했다. 그그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고 싶다고 부르짖다 죽어갔다. 그건 뭘 의미했을까? 신에 대한 원망이 없었을까? 아니면 신앙과 상관없는 단말마의 부르짖음이었을까? 또는 이 나라와 대통령에 대한 원망이었을까? 당시 사회에선 한 사람이 죽어가는데 기독교계에서는 순교자라고 한낱 감상주의에 젖어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또 한쪽에선 그렇게 부르짖는 것으로 보면 신에 대한 원망이 있는데 그것을 온전한 순교라고 볼 수 있냐고 잔인한 잣대를 들이대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순교자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산자의 최고의 예의는 아닐까? 산 목숨을 끊어내는 일인데 그가 죽는 순간 그렇게 부르짖는 거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의 죽음을 기독교에선 교세를 확장하고 신앙을 견고히 하는데 쓴다고 비난할 법도 하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자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믿는 자에겐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나와있다. 그러니 믿지 않는 자의 그런 비판도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순교자에 대해선 이 정도로만 하자. 

이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배경만 한국이라는 것뿐, 흐르는 정서는 미국의 그것과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이 미국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킬수도 있었고,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만일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정서가 한국의 그것을 표현했다면 이만큼 주목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오리엔탈리즘적인 작풍을 가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순수 한국 작품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작품으로 한국의 문학작품이 미국에 알려지는 개기가 되기도 했으니 이 작품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또 그만큼 당시는 노벨문학상이 아무리 세계적 권위를 갖기 위해 동양권 작품에도 관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뛰어넘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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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7-27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년에 이 책을 읽었을 때 그레이엄 그린의 <권력과 영광>이랑
같이 읽어보려고 했었어요. 작년 기억이라 좀 가물가물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이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타락한 종교인.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순교자>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가끔씩 읽었는데 잊혀져간 책이 있으면
다시 읽어보면 이전과 다른 새로운 감정을 얻을 수 있어서 좋은거 같아요 ^^

stella.K 2011-07-28 11:32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그레이엄 그린이라...!
타락한 종교인은 안 보이는데요. 갈등하는 종교인은 있어도.
혹시 오독한 건 아닌지...?ㅋ
토론 때 한 회원이 전쟁 상황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리얼하게 보여줬다. 뭐 이런 식으로 얘기해서 막 웃었어요.
뭐 전쟁이 나오지만 그 번짓수는 아니잖아요.ㅎㅎ
확실히 이 책은 오독할만해요. 그만큼 어렵다능.ㅠ
 
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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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부리, 땜통, 두더지... 모두 재밌고, 한번쯤 불러 보고 싶은 별명이기도 하다.  소설가들은 소설을 쓸 때 등장인물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 고민이라고 하는데, 한번쯤 사람 이름대신 이런 별명으로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대소설가 황석영은 이 소설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처음부터 이런 별명들이 등장하니 어느 한편 이름으로 기억되지 못하는 그들의 세상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소설 전반적인 느낌은 친근감 있어 좋았다.  

이 작품은 내가 그의 <바리데기>와 <강남몽>에 이어 세번째로 읽은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 세 작품에서 내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었다. 작가 김훈은 이미 자신의 소설은 마초가 아니라고 못 밖았지만(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그가 하는 말이 맞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마초는 '남성적'인 이미지를 표현할 때 쓰는 것을 볼 때 황석영의 작품이야말로 마초는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볼 때 이 작품은 유독 그 이미지가 강하다.  특히 아수라 반장이 딱부리의 엄마를 차지할 때를 보라. 딱히 이렇다 할 과정 설명을 생략한 채 모든 것을 제압시킨다. 하다못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딱부리 조차도 조금의 거부감은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명확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꽃섬' 이름만 들어서는 정말 섬 전체가 꽃밭일 것만 같은 그곳은 이성과 문화적인 것이 지배하는 하는 곳이 아니다. 그저 인간의 근저에 깔린 본성이 더 강하게 존재하는 곳이다.  그래서 땜통은 예언처럼 딱부리에게 말하지 않는가? "너네 엄마랑, 우리 아버지랑 붙어 먹을 거라"고.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 말은 적중했다. 거기엔 어떤 설명이 필요없이 그냥 암컷과 수컷의 자연스러운 교미의 현장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그곳 아이들도 실제로  자신의 엄마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흔하게 있어왔던 것이기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러니 딱부리 역시 더 이상 뭐라고 할 것이 못되는 것이다. 그렇게 꽃섬은 원초적인 곳이라 할 수 있고, 그곳은 딱부리가 이제까지 있어왔던 곳과는 또 다른 곳이다.  그곳엔 그곳만의 법칙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작가는 어떠한 비평도 허락하지 않는다. 

작가 김훈이 자신의 문학이 마초가 아닌 것을 가부장의 예를 들어 설명한 적이 있다. 가부장이 오늘 날에 와서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보여지고 있는데, 가부장은 가정을 책임진다는 남자에게 부여된 전통적인 관념이고 문화적인 것이라고 볼 때, 이 작품에서는 가부장적 이미지는 없다. 아수라 반장을 보라. 그는 마초적 힘만 있을 뿐 아무리 내연으로 맺어졌다고는하나 한 가정 책임지려는 의식은 결여된 채 자기 좋을대로만 하지 않는가?  

황석영의 작품의 특징은, 그의 작품의 어떤 것을 펼쳐 읽어도 한편의 장대한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 작품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참 묘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반에 인간적인 끈적끈적한 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본 <바리데기>나 <강남몽>보다 인간적이고 따뜻하다. 그래서 그럴까? 훨씬 읽기도 편했다. 

꽃섬은 어찌보면 개발되기 이전의 난지도 같은 곳이다. 하루에도 몇톤씩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를 분류 작업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섬을 이룬 곳이다. 어찌보면 작가는 버림 받은 그곳에도 인간성은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원래 물질주의가 팽배한 곳에선 인간의 소외를 말하고, 쓰레기 같이 버림 받은 곳에선 인간적인 것을 역설적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딱부리 어떻게 그런 곳에 가서 살 수 있냐고 했을 때, 그의 엄마는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말했는가 보다.  하지만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란 엄밀히 말하면 그곳 역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아귀다툼이 있는 말도 되고, 인간적 낭만이 있는 곳이란 말도 될 것이다. 그런 것처럼 딱부리의 시선으로도 보면 꽃섬은 그리 나쁜 곳마는 아니었다. '바리데기'는 처절하고, '강남몽'은 졸부에 대한 가차없는 시선이 존재하지만, 낯설지 않은 세상 꽃섬은 나름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약간은 동화같은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작가는 바로 이런 곳에서 인간의 삶의 풍경의 원형을 찾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쓰레기장이라는 장소의 특수성은 있지만, 이 작품은 또 어찌보면 시골의 어느 마을 보여주는 것도 같고, 멀지 않은 과거의 풍경을 보듯 낮설지가 않다. 우리의 7,80년대 풍경은 이러하지 않았는가?  딱부리를 비롯한 등장인물도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어 보인다. 어디서 본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황석영 작가는 '낯익은 세상'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황석영은 왜 이 새롭지 않은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으면서 때론 능청스럽게 들려주려 했던 걸까?  

가끔 어린 손자가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졸라 옛날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면 매번 비슷비슷한 내용인데도 재밌게 듣는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듣는 능력이 남다르기 때문일수도 있다. 똑같은 이야기더라도 지난번엔 이게 좀 더 흥미롭게 들려왔다면, 오늘은 저게 새롭게 들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우리가 찾으려 했던 건 이야기의 원형은 아니었을까? 그것을 확대하고, 발전시키고, 새롭게 변형시켜왔던 것이 화자의(소설가의) 임무일 것이다. 또한 그 속에서 말하려 했던 건 인간성이었을 것이다. 황석영 작가는 인간의 이념과(바리데기) 향락주의와 물질주의(강남몽)의 도전 속에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었을까를 찾는 모험을 주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또 이 작품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세 작품을 놓고 보니 우리나라의 지형도를 묘하게 아우르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오늘 날의 대부분의 작가가 인간 자아의 문제, 욕망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 때 황석영은 이념의 문제, 사회 계층간의 문제를 다룬다. 이것을 말하는 작가가 이제 몇이나 되겠는가 ?  

우리는 이제 좋으나 싫으나 2018년 동계올림픽을 치르게 되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 명암이 있듯 모든 사람이 평창 동계올림픽을 반기지마는 않는다. 물론 이익이 되는 측면도 있겠지만, 걱정과 우려를 표명하는 단체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그것은 세계화의 한 이면이라고 볼 때 이것은 있는 사람, 가진 자의 잔치일뿐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배려하지는 않는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그랬을 때 동계올림픽이란 이름이 갖는 후광 때문에 그들은 더 그늘지고 소외될 것이다. 한번의 행사를 치르고 버려지고 잔해들은 또 얼마인가?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이런 세계화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건 나름의 이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업주의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우리가 기억해야할  '낯익은 세상'은  여기 있다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2018년에도 기억되는 소설이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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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7-15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제가 읽었던 책에 대한 다른 분의 감상을 본다는 것은 참 좋은거 같아요.^^
스텔라님은 소설 속에 흐르고 있는 인간적인 면을 보셨군요.
저도 동계올림픽 확정 소식을 듣게 되면서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항상 큰 국제적
행사가 있는 지역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주민들이 더 손해를 보게 될까봐
걱정되기도 해요,

stella.K 2011-07-16 10:10   좋아요 0 | URL
저는 늘 무플이 될지도 모르는 저의 페이퍼에 댓글을 달아주시는
시루스님께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요.ㅎ~
저는 기쁜 줄은 모르겠더라구요.
그냥 바라던게되서 다행이다 정도랄까?
아무래도 동계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그나저나 우린 그런 국제적인 행사에 명만을 생각하지
암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한번의 행사가 약발이 언제까지 갈는지 그것도 그렇고.
내실을 다지는 대한민국이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만 집중되있는 것 같아 걱정되요.ㅜ

stella.K 2011-07-16 10:12   좋아요 0 | URL
참, 이거 리뷰대회 한다고 해서
읽은 건데 전 그냥 마음을 비우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황석영은 너무 매끄러워서...
그래도 전에 강남몽으로 겨우 턱걸이는 했었는데 말이죠.ㅋ

cyrus 2011-07-18 20:54   좋아요 0 | URL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래요 ^^

stella.K 2011-07-19 10:34   좋아요 0 | URL
ㅎㅎ 읎어요.
기대도 안해요. 아무래도 리뷰 방향을 잘 못 잡은 것 같다능.ㅜ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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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병이 있다 

작가 김애란이 80년 생이란다. 나 보다 한참 어리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그녀는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다. 그맘도 30세를 훌쩍 넘긴 나이니. 글쎄, 이 30대란 나잇대를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앞에서 세자면 적지 않은 나인데, 뒤에서 세보면 그 나이도 어리다. 사춘기를 어린이도 아닌 것이 어른도 아닌 것이 어찌보면 괴물 같기도 하다고 했다. 30대가 또 좀 그렇지 않나 싶기도 하다.  내 나이 스물 다섯도 많다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되면 어떻게 하나 막막한 느낌이었는데, 내 나이 30이 되었을 때 뭔가의 강 하나를 건너 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난 그저 강 하나를 건넜을 뿐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확실히 그때도 젊었고, 어른이 되기엔 아직도 어린 나이란 생각을 한다.  

나에겐 병이 있다. 젊은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병. 특히 다른 분야는 몰라도 문학에서 어떤 젊은 작가가 나름 문단계에서 주목을 받고, 그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해도 난 여간해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젊은 패기 하나는 인정해 줄지 몰라도(가능성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실험적인 문장, 뭔지도 모를 현학적인 미사여구에, 안 그래도 느림보 독서인 나는 그런 것들을 붙들고 있을 시간적 여력이 없다.  그리고 어떤 책이든 독서를 꾸준히 해 온 타입이라면, 이책은 내가 읽을 수 있는 책. 이건 좀 나랑 안 맞을 것 같은 책을  구분하게 된다. 물론 개중엔 파악이 어려운 책도 있다. 그런 책들은 읽어보기 전엔 뭐라고 평가하기 어려운 책이다. 그런 내가 김애란만큼은 정말 넘어가기 힘든 난맥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작가의 명성을 몇 년 전부터 익히 들어왔고, 작가의 첫 장편에 워낙에 반응이 뜨거웠던터라, 그냥 넘기기엔 뭔가 아쉬움이 남을 것만 같았다.  

작가가 극작을 전공해서일까? 대사의 감칠맛이 있고, 모든 소설가는 처음엔 다 시인이었다는 속설이있듯, 작가 역시도 시 꽤나 읽은 양, 싯적 문장도 나름 돋보인다.  게다가 주인공 아름이 서하와 이메일로 주고 받은 편지는 오래 전에 읽었던 <소피의 세계>를 연상케도 했다. 그런 것으로 봐 작가가 얼마나 가능성이 많은 사람인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육체의 물음         

이책을 읽으려니 최근 난 본의 아니게 인간의 육체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하게 만드는 책을 읽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스콧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와 박범신 작가의 <은교>였다. 읽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은 인간의 육체를 거꾸로 되돌리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과연 무엇인가를 압축된 문장속에 진지하게 묻고 있다. 또한 박범신의 작품은 육체의 소멸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오욕칠정을 과감하면서도 강렬한 문체로 보여준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조로증을 앓고 있는 한 소년을 통해, 너무 일찍 노쇄 해버린 인간의 육체가 정신의 발달을 뛰어넘는 한계 상황을 담담하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면 주인공 한아름이 아직 겪지 않아도 되는 노화 과정에서 걸릴 수 있는 병을 몸소 겪으면서, '육체는 철저하게 독자적이다'라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건강할 땐 몰랐던 육체의 고통이 도대체 내 몸 어디에 숨어서 나를 이토록 처절하게 아프게 만드는가? 그런데 비해 우린 건강할 땐 너무나 그것을 잊고 몸을 함부로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작품에 없는 것.  

얼마 전, 조경란 작가를 만났던 자리에서 그녀는, 요즘 젊은 작가들의 글쓰기 태도에 대해 부럽다는 말을 남긴 것을 기억한다. 자신은 너무나 힘들고, 때론 고통스럽게 쓸 때가 많은데 요즘 젊은 작가들은 정말 즐기면서 작업을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만일 실제로 그런 작가가 있다면 그건 정말 문학을 너무 쉽게 보고 하는 것이고, 그들도 글이란 쓰면 쓸수록, 문학은 알면 알수록 어려운 대상임을 시마다, 때마다 알게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또 조경란 작가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박범신 작가는 그의 한 산문집에서, 요즘 젊은 작가는 모든지 다 잘한다고 했다. 그들의 주특기인 글쓰기는 물론이고, 연애도 잘 하고, 공부도 잘하고, 취미 활동도 잘하고 한마디로 만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매력은 없다고 했다. 그들은 (아직) 진정한 결핍이란 게 뭔지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 말에 동감한다. 이 작품을 보라.  어디에 결핍이 나타나는가? 어디에 생에 대한 갈망과 처절함이 베어 있나? 놀라웠던 건, 문체의 미학은 어느만치 구축한 것 같지만, 작품 전반은 너무 착함이 흐른다. 17세. 한창 혈기가 방자할 때 죽음을 맞이하게 된 한아름이 과연 소년다운 데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몸이 조로라고 해서 영혼도 애늙은이 일수는 없다. 마치 자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살다가 죽을 사람처럼 모든 것에 초탈하다. 그것도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은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안하던 짓도 하고, 인생의 모험을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자신을 태워버리기도 한다는데, 그래도 꼭 한번은 자기 생의 모험을 감행하는 뭔가가 있어줘야 하지 않는가? 육체가 그렇다고 해서 정신까지 그렇게 그려버리는 작가가 나는 아쉬웠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주인공에 대한 천착이 부족한 듯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뭘 하고 싶냐는 물음에 계속 모호한 대답으로 일갈하지 않는가?

 그나마 서하와 뭔가의 섬씽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또 알고 봤더니 사이버 가상 인물로 밝혀져, 아름은 고사하고 읽는 나도 뭔가 사기당한 느낌이었다. 후에 장씨 할아버지와 뭔가의 모험이 있을 줄 알았는데, 고작 한다는 것이 미라를 설득해 아름과 함께 외출을 해 소주팩에 빨대를 꽂아 빨아 먹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왜 그리도 진지한 걸까? 아름이 생애 마지막 외출인데 휘날레 치곤 너무 노회한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같이 늙었지만 장씨 할아버지는 아름에게 나름 젊은이라면 할 수 있는 뭔가의 미션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야 한다. 그래야 아름이 죽었을 때 섭섭치 않게 이승을 떠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가능성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꼭 있어야만 했던 것  

그건 뭐 남의 작품이나 말할 자격이 없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명백히 없는 것이 있다. 그건, 인간의 '오욕칠정'이 없다. 이것을 얼마나 잘 구사하느냐에 따라 작가의 역량이 인정을 받기도 하고, 못 받기도 한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같은 육체를 그려도 <은교>나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보라. 이것을 얼마나 능숙하게 구사를 하고 있는가? 특히 '은교' 같은 경우는 이것을 끝까지 밀고나가 독자들까지도 벼랑 끝에 서게 만든다.  물론 여기서, 그들은 연륜이 쌓인 대작가가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물론 작가의 연륜 무시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무마하기엔 김애란 작가는 충분히 재능있는 작가다. 젊다면 젊은 패기가 보여져야 하는데, 그녀의 세계는 결핍, 간절함을 알기엔 너무 충만한 세계속에서 유유자적 해 보인다.  

또 이렇게 말하면, 문학이 이렇게까지 엄숙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냥 가볍게 읽고 넘기는 소설도 소설은 소설이 아니냐고. 물론 취향의 문제일텐데, 물론 난 거기에 반론을 재기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유사이래로 문학은 이 인간의 오욕칠정의 문제를 가지고 다양한 변주를 하며 두터운 층위를 구축해 왔다.  취향 가지고 말하는 건 너무 문학을 쉽게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느 순간이 되면, 문학은 무엇이냐, 문학은 어때야 하는가 하는 진지한 물음에 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참고로, 고 장영희 교수는 자신의 산문집에서 자신을 문학의 길로 이끈 한 은사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정의했다. 문학은 삶의 '교통순경'. 교통순경이 차들이 남의 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기 차선을 따라 반칙없이 잘 가고 있는가를 지키듯이, 문학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진정 사람답게, 제대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지킨다......"('문학의 숲을 거닐다' 39p)  또한, 박범신 작가는 자본주의 물결속에서 인간 본질이 무엇이고, 그것으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문학의 길이라고 말한 바있다. 그러므로 문학은 절대로 적당히 취급되거나 만만히 보아야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체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자본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여기서 내가 아직도 젊은 작가들을 신뢰하지 않는 건, 그들은 문체만 좋으면 다 좋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체는 그 작가의 고유의 색깔을 결정짓는 나름 중요한 분야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기능적인 측면이지 전체로 확대해석 해서 보는 건 좋지 않다. 나는 본 작품에서, 아름과 서하가 나는 이메일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이 좀 지루했는데, 이것은 자칫 신파로 나갈 우려가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 작품이 이토록이나 들끊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읽어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문체가 좋다고 하는가 본데, 문체에 가려 결국 문학의 본질은 체 건드리지도 못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인다.  조로는 아름이가 아니다. 자본주의를 경계하지 못한 인간의 성과주의가 조로다. 마케팅에 힘 입은 작품이 독자의 입소문을 타고 번져갔다. 덕분에 나도 낚시에 걸렸지만, 그래서 작가에게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도록 만든 꼴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요즘, 4,50대 빠르면 30대에 자서전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출판사도 먹고는 살아야겠지. 하지만 귀한 자식일수록 엄하게 다루랬다고, 가능성 있는 작가가 너무 일찍 조로를 경험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그것과 관련해서 조금 다른 얘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위대한 탄생' 그렇게도 지탄해 마지 않는 건, 이런 이유와 같은 맥락이다. 이제 스물 갓 넘은 친구들이 노래 하나 잘 부른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성공한 양 해 버리면 그들이 겪을 정체성의 혼란과 자본주의 물결을 거슬러 진정한 가수로 설 수 있을지, 겉포장의 화려함이 번데기의 과정을 겪지 않은 나비로 착각하지는 않는지 한심해 보였다.  요는 그만큼 자본주의는 생각보다 치명적일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성숙의 문제 

그래. 조경란 작가의 말대로 요즘 젊은 작가가 글을 즐기며 쓴다면, 그들은 절대로 혼자 외롭게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충분히 즐길거 다 즐겨가면서 작업할 것이다. 과연 그래서 좋은 작품이 나오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내가 볼 때 주목 받은 작가의 첫 장편이란 호들갑은 맞지 않아 보인다. 이건 중편 이상 나올 것이 없으며, 필요하면 단편으로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작품이었다. 에필로그 이후 더 나올 이야기는 없어 보이는데 뭔지 모를 에필로그가 또 붙는다. 어쩌란 말인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적어도 난 30대 말이 되고, 40이 넘어보니 비로소 사람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친구와 만나 1시간만 그 얘기를 들으면 그걸 글로 옮겨보고 싶어진다. 아, 이 친구의 얘기를 글로 옮길 수만 있다면...! 그는 그냥 수다를 떤 것이겠지만, 그 안에 인생의 역경과 희노애락과 얼마나 자기 본위적인가가 들려 그것을 글로 써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 것처럼, 그 이전엔 사람말이 잘 안 들렸다. 내 아집이 강하고, 생각이 많아서. 지금이라면 쓸수 있을 것도 같다. 그만큼 글을 쓴다는 건 마라톤인 것 같다. 

작가들에겐 30대의 문학이 다르고, 40대 문학이 다르고, 50, 60대 문학이 다르다고 한다. 난, 김애란 작가가 세상 평가에 휘둘리지 말로 오롯이 자신의 길을 갔으면 좋겠다. 나로선 처음 대하는 그녀의 작품이지만, 난 이 정도의 느낌 밖에는 가질 수 없었다. 나에겐 좀 더 지켜봤으면 하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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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7-05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런 시각으로 보여질 수도 있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꼭 같은 의견일 필요 없잖아요 ^^

stella.K 2011-07-05 17:04   좋아요 0 | URL
저에겐 완전 낚시였어요.ㅠ

2011-07-05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6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6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1-07-05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스텔라님의 생각 중 젊은 작가들의 글에 대한 부분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제가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 때마다 더 어렸을 때 전부라고 생각했던 세계가 얼마나 빈약했는지를 알아가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구요.

stella.K 2011-07-06 11:50   좋아요 0 | URL
사실 이글 쓰면서 참 만감이 많이 교차하더군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 역시 칭찬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래서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우리나라 문학이
도대체 뭘 할 수 있지? 묻지 않을 수 없더군요.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이음새가 투박하군요.
그래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브랑카님.^^

cyrus 2011-07-06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책에 대한 블로거들의 관심이 많더군요. 사실 작가 이름도
처음 들어봤어요,, ^^;;

stella.K 2011-07-06 11:52   좋아요 0 | URL
ㅎㅎ 나름 문단계에선 유명한 아이돌인데.
하긴 아이돌이란 말이 좀 어색하지만
문학계 아이돌과 가요계 아이돌을 같이 보면 클나죠.^^

무해한모리군 2011-07-06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느낀 밍숭한 느낌의 실체가 오욕칠정이었군요.
사실 매일매일 오그라드는 일만 남은 삶일지라도 그걸 놓는게 쿨해질리가 없는데 이 소설은 참 쿨하죠.. 어떤 일말의 불편함도 독자가 느낄 필요없는 매끈함. 제겐 잘읽고 다시 들쳐볼 일이 없는 무수한 책중 하나였어요 ㅎㅎㅎ

stella.K 2011-07-06 13:09   좋아요 0 | URL
처음 읽을 땐 문체가 좋아서 나중에 소리내서
재독해야지 하다가 그냥 안하기로 했어요.
저도 휘모리님과 같은 생각이라.^^

프레이야 2011-07-07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여기저기 평이 좋은 편이라 관심을 두고 있는데
스텔라님의 조금은 다른 방향의 리뷰 잘 읽었어요.
전 김애란의 작품음 하나도 안 읽어봤구요. '은교'는 정말 강했어요.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적지 않은 것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노인의 눈은 그래서 젊음의 눈과는 다른 깊이가 있을 거라는 믿음, 저도 있답니다.
우리 나이엔 더더욱 그러고 싶어지는 단계에 있지않나싶구요.
아, 그런 글 한 줄 쓰고 죽으려나요.

stella.K 2011-07-07 11:49   좋아요 0 | URL
이책 읽고 뭔지 모를 분노가 옹송거리고 있었어요.
뭔가를 속이고 있다는 느낌.
김애란은 그냥 내비둬도 알아서 잘 클 사람인데,
오히려 매스컴의 지나친 스폿라이트가 가만 놔두질 않는구나.
이 싸구려 상업주의의 천박함을 마주 하는 것 같아서
정말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제가 너무 지니친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프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또 한번 발동걸리면...아시잖습니까?ㅋ
맞아요. 이 마음 가라앉힐려면 최근 나온 박범신의 소설을
읽어줘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ㅠ

보물선 2011-07-12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무척 기대하며 읽었는데
읽고 나니 허전한 느낌이었어요. 뭔가 약하구나~
스텔라님이 그걸 조목조목 적어준것 같다니깐요^^*

근데 <물속골리앗>이라는 단편은 달랐어요.
이 작가, 잘 크겠구나.. 응원해줘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작품마다 편차가 있을 수는 있다. 대작가도 그렇다... 하는 생각두요~

이런 솔직한 리뷰, 꼭 필요한것 같아요.
같은 느낌을 가진 저같은 사람에게 위로가 된다고나 할까요?




stella.K 2011-07-12 15:44   좋아요 0 | URL
보물선님, 반가워요.
한사람님 서재에서 뵜는데...ㅎ
이 작품 하도 화가나서 글 한 편 또 썼어요.
이제 좀 풀어질 때도 됐는데 말이어요.
저의 부족한 글이 위로가 된다니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암튼 감사해요.^^

2022-12-17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체르노빌의 아이들 (양장) - 히로세 다카시 반핵평화소설, 개역개정판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3개월이 됐나? 일본의 지진 해일에 원전이 폭발했다는 소식을 들은지도. 그런데 처음 한 달 정도는 불안하더니 그맘도  잊혀지는 것인지, 아니면 체념을 한 건지, 지금은 다소 잠잠해진 느낌이다. 우린 그 보다 먼저 체르노빌 원전 사태를 접한 상태라, 분명 일본도 체르노빌 사태 만큼이나 심각할 텐데도 자제를 해서 그런지 아직 이렇다할 보도가 없다.  

솔직히 체르노빌도 사태가 일어났을 당시에만 조금 요란했지, 그 이후 어느 정도 복구가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정말 나의 무지의 소치다. 이번 일본 원전 사태가 아니었으면 영원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를 그곳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즉 우리나라 모 방송국 기자가 그곳을 취재한 것이 얼마전 보도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문득문득 궁금했다. 하지만 인간의 무지함과 게으름을 탓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끔찍한 재난 앞에 사람이 집단으로 죽어 나감에도 그것을 단발성으로 끝내버리고마는 보도행태를 탓해야 하는 것일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걸 보고 있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막연하게 체르노빌이 복구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게 아니었다. 거긴 이미 사람이 살지않는 유령도시가 되어버렸다. 그곳을 취재하는 기자의 사명감은 알아줄만은 한데, 왠지 그 기자가 조마조마 하면서도 측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오래 머물렀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짧은 순간 취재를 했는데도 방사능에 오염됐을 것만 같기도 하고, 사지로 가는 걸 막지 못한 그의 아내나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먹고 산다는 게 뭐길래, 등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나는 역시 제 3자 일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체르노빌. 지금 그곳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기 보다, 그곳을 취재하는 기자의 안위를 더 걱정하다니? 

놀라운 것은, 그렇게 방사능이 오염된 곳은 몇 십년 내에 복구되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 200년 이상이 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0년을 걸려서라도 회복이 되긴 된다는 건가? 아니면 회복불능이라는 말인가? 또한 사태가 일어났을 당시 그곳에 살았던 사람은 졸지에 피난을 갔지만 지금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역시나 책에서처럼 어린 아이의 피해는 치명적이어서 기형은 물론이고, 건강이 심하게 위협을 받고 있다. 아직까지 일본은 쉬쉬하지만 조만간 제2의 체르노빌 사태를 보는 건 시간 문제가 되었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책은  이번 일본의 원전 사태 때문에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된 것으로 아는데,  역시 저자가 전문 소설가가 아니고, 르포작가여서 그럴까?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체르노빌이 왜 그 같은 사태를 맞이하였는지 대한 입체적이고도 사실적인 묘사는 거의없고, 단지 그때의 피해 상황과 이반이란 소년과 그의 여동생의 처절하고도 안타까운 상황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어, 전체적으로 봤을 때 맥이 좀 빠지는 느낌든다. 그럴 경우 이야기는 다소 진부해지면서 감상적이 되기 쉬운데, 그래서일까? 읽다보면 당시의 급박했을 체르노빌의 상황을 읽는다기 보단, 나치를 배경으로 핍박 받고, 헤어질수밖에 없는 어느 유대인의 자전적 소설을 읽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놓쳐서는 안되는 것은, 국가가 재난을 당했을 때 국민은 얼마나 정부를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전 사태가 이슈가 되고 있을 때, 나는 마침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났기에, 원전이 왜 있어야 하는 거냐는 다소 생뚱맞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질문도 사실은 일본이 아니었으면 전혀 묻지 않았을 질문이다. 그랬을 때 한 지인이 아주 교과서적인 대답으로 나의 무지를 일깨워 줬다. 즉 석유만으로는 에너지의 필요를 다 해결할 수 없기에 필요하다고. 그것이 확실한가에 대해선 그도 말할 수 없었으리라. 그냥 그런 줄 알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뿐. 나 역시 그런 교과서적인 답을 얻자고 물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책 후기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지금 일본의 원자로를 모두 없애도 전력 사정에 전혀 장애가 없다. 러시아로부터 홋카이도를 경유해 파이프라인을 설치하여 천연가스를 이용하면 된다. 석유는 유한한 에너지지만, 천연가스는 지질의 심층부에서 무한히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172p)라고 말하고 있다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확실히 새겨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말하자면, 원전만이 전부는 아닐진대 너무나 위태롭게 그것을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또 일본에만 국한된 이야기일까? 이렇게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각 나라마다 원자력을 보유하려고 하는 것은 뭐 때문일까? 눈앞에 뻔히 재난을 보고도 말이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체르노빌이나, 일본이나 심지어 우리나라까지도 원자력은 절대 안전하다고 말했다. 지진도 몇 도에도 끄덕이 없다고 했다. 물론 일본같은 경우 지진이 워낙 강하게도 났지만, 어쨌든 그 자랑이 무색하게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나라도 그러지 말라는 보장이 어딨겠는가?  설혹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안전하다고 해도, 우리 머리 위로 언제 북한이 쏘아올린 핵의 세례를 받을런지 알 수가 없다. 그랬을 때 우린 정부를 어느 만큼 신뢰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얼마 전,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그런 국가적 비상사태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얼마나 침착하게 대응했는지.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쪽으로 선회했다.  

원전을 보유하고 싶은지 국가가 국민에게 물어 보기나 했나? 그것이 국익을 위해 좋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그 나라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그렇게 사고가 났을 때 가장 먼저 차출이 되는 것은 관련자들이요, 남자들이요, 가장들이다. 책에서처럼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가장 패해를 많이 보는 사람은 제목 그대로 아이들이고, 노인들이며, 여자들이다. 꿈을 채 피워보기도 전에 죽어갔던 그들. 피폭에 살아 남아도 불구자로 살아갈수밖에 없는 아이들.  우린 좀 더 안전하고도, 행복한 국가를 그들에게 물려줘야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내 당대에서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우린 마치 시한 폭탄 지구를 떠받들고 아틀라스의 후예들 같다.   

조금 아쉬운 작품이긴 하지만, 저자는 핵발전이 우리들 개개인의 인생을 어떤 비극으로 빠뜨려 가는가를 절실히 알리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나는 이 책 말고도 체르노빌을 심층적으로 다룬 책들이 좀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원자력 피해를 입은 일본도 가감없이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연 이 원자력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겠는지, 세계적으로 고민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구의 미래가 달린 문젠데 어떻게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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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3 15: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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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3 18: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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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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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3: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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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5: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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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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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한쪽 눈을 뜨다 문학동네 청소년 7
은이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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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어떤 일 때문에 한 중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렇게 중학교를 방문하기는 정말이지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느꼈던 당혹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것은 바로 책상 때문이었다.    

책상이 좀 낡기도 했지만 작은 듯도했다.  성인인 내가 보기에 작아 보이는 책상이 과연 아이들에겐 맞는 것인지? 아니면 아이들도 작다고 생각하는데 생긴 게 그 모양이니 별 수 없이 쓰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자라면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후자쪽이라면 다소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러면서 또 하나 드는 생각은, 내 중학시절 썼던 책상과 의자를 나는 어떻게 느꼈던 걸까? 하는 거였다. 그땐 나름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새삼   '겨우 요거였어?' 하며 오히려 실망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큼 같은 물건이라도 그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요는,  아이들에게 맞지 않을 것만 같은 책상은 교육의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것일 것이며, 나는 그 시절 학교를 그저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현대식 학교가 생긴이래, 교육은 한번도 사람에게 맞춘 적이 없다. 오히려 사람이 교육에 맞추어졌다. 그래서 벽돌공장에서 규격에 맞혀 벽돌이 찍혀 나오듯, 학교는 그렇게 규격에 맞는 인간만을 만들어 세상으로 내보냈다. 그 규격에 맞는 인간이란, 즉 세상을 자유자제로 유영할 수 있는 소위 말하는 우성인자이거나, 적어도 세상에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인간을 의미한다.  학교는 작은 사회다. 여기서 잘 살아남는 자가 사회에서도 잘 살아남을 것이고, 여기서 도태되는 자가 사회에서도 도태될 확률이 높다. 즉 잉여인간. 루저가 되는 것이다.   

작가가 영섭의 시각으로 학교, 특히 교실을 야생의 사바나로 설정한 건 적절한 설정같다. 그리고 영섭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자신을 변신이 가능한 동물로 생각하는 건 씁쓸하지만 공감한다. 이는 어찌보면 그렇게 생각하므로 자신을 숨기려는 일종의 자폐적 성향 같기도 하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이 정글같은 교실에서 살아 남기란 쉽지 않을테니. 물론 그것은 일종의 자기방어적 사고일텐데, 일견 이해가 가면서도 역시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숨기는 영섭에게 씁쓸한 연민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랬던만큼 내가 어떤 식으로든 이 작품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기시감처럼 사춘기 시절, 그것도 중학시절과 맞닥트려질 수 밖에없었다. 그때 난 영섭이만큼도 영리하지도 못했다. 영섭은 그래도 학교를 사바나의 세계로라도 표현할 수 있었지, 하지만 난 도무지 이 학교라는 곳을 무엇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질적인 블랙홀 같은 곳이다가도, 그럭저럭 인간이 정붙이고 살만한 곳이란 생각을 하루에도 몇번씩 되풀이 해 가며 살았던 것 같다.   

분명 이 학교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다른 어떤 곳에서도 살아남지 못할텐데, 나는 아침에 눈만 뜨면 학교 갈 일이 끔찍했고, 무사히 학교를 다녀오면 그 사실에 안도했다. 학교가 주는 구속이 싫었고, 선생님의 폭압내지는 압제도 내겐 끔찍했다. 무엇보다 학교는 나 있는 그대로가 인정될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던 것 같다. 작품 속 태준을 보라. 그에게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닌데, 단지 공부 하나 잘 한다는 이유만으로 무난한 학교 생활을 하고있다. 어찌보면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세상을 별 어려움없이 잘 살아갈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느새 이들을 영웅시해 왔다. 하지만 그들이 공부에서만 앨리트지, 삶에 있어서도 앨리트는 아니지 않는가? 

난 지금도 학교에 대한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중학교 들어와서 첫 성적표를 받던 날이다. 다른 과목은 그냥 그럭저럭 점수를 맞았는데, 수학에서 기대 이하의 점수를 받아 전체 성적이 한참 아래로 곤두박질 쳐버린 것이다. 어떻게 수학 하나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사람이 낮은 등수를 받아야 하는 건가? 나의 학교생활도 순탄치는 않겠다는 생각을 순간하게 되었고, 역시나 난 학교 적응이 쉽지 않았다. 작품에서 누구도 영섭에게 사바나에선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나 역시도 누구에게도 학교를 견디는 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든 학교의 지도방침에 따라 올 사람은 따라오고, 못 따라오는 사람의 등에는 회초리 아니면 무관심만이 존재할 뿐이다. 거기서 내가 숨을 수 있는 곳은 책뿐이었다. 책은 나의 따분한 학교생활을 버티게 해 줬고, 학교가 주는 두려움을 어느 정도 완화해 주었다. 그것 외에 내가 학교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별로 없었다. 작품 말미에 영섭이 변하여 모르는 아이들의 물건 갈취하고 장난을 쳐 보는 건 제목과 잘 어울리는 행동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은 순하다가도 돌출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난 그렇게 첫 성적표를 받아든 날, 속으로 뭔가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한 과목에서 낙제를 받았다고 이렇게까지 열등해야 하는가? 억울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에서 인정을 받는 이런 세상이 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의 생각은 생각에서 머무를 뿐이었다. 그건 기준을 바꿔야 하는 문제인데 그러기엔 난 힘이 없었다.  그래서 못하는 사람은 계속 못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그 시절을 보냈다. 그때 누구든, 내가 수학을 못하는 것은 전체를 못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항상 못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나는 그 시절을 조금 편하게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하나를 못하는 것에 대한 동공이 너무 컸기 때문에 무엇으도 메울 수 없을 거란 두려움이 컸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고, 때문에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눈을 떠야할 때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작품에 나온 영섭이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을까? 그저 앞만 보고 달리라고만 하지, 왜 달려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잘 달릴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하고 성적비관 자살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죽기에는 그들의 젊음은 아직 저리도 아름다운데 말이다. 

나는 우리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세상이 이미 만들어 놓은 그물과 기준에 맞추어 살게 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들 자신이 기준이 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나의 청소년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고, 그 시절엔 권력이 지배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성과 장점을 인정받기 어려운 시대였다. 하지만 세상은 이제 달라졌고, 달라져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인정 받고 존중 받는다면 세상은 진정한 매니아의 세상이 될 것이다. 세상에 장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매니아는 있을 수 있어도 루저는 없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여기 등장하는 아이들이 앞으로 어떤 아이가 될 것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힘없는 루저가 될 확률이 높아 보인다. 그 공부 잘한다는 태준이까지도. 하지만, 새로운 기준으로 이들을 바라봐주고, 각자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다면 바람직하게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청소년의 내면을 시의적절하게 잘 표현해 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사건이 있다든지 그래서 반전이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냥 이들의 내면 세계는 현재진행형이며 가변적임을 암시해 준다.  

청소년을 괴물에 비유한다지. 어린이도 아닌 어른도 아닌 애매한 존재. 그들은 이제 한쪽 눈을 떴다. 한쪽 눈만 가지고는 세상을 다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시기는 또 지나간다. 그러면 나머지 한쪽 눈도 뜨게 되겠지. 그들이 양쪽눈을 다 떴을 때 희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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