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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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읽고나니, 그물망에 갖힌 작은 새 한 마리가 연상이 된다. 그 새는 할 수만 있으면 높이 날아야 했다. 하지만 어떤 운명이 날지 못 하도록 그물망을 덧씌우고, 결국 그 그물에 갇혀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마커스는, 한 마리 새다. 그래서 읽고나면 웬지 우울하다. 

이야기 구도는 의외로 간단하다. 매사에 참견이 심하고,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이 많은 아버지를 떠나 집에서 떨어진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지만,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은 그다지  자신의 마음과 잘 맞지 않으며, 사귀게된 여자친구도 알고 봤더니 정신병력이 있는 불행한 아이다. 공부하는 건 좋지만, 종교적 규율을 거부하며 신앙 좋은 학과장 역시 마커스에겐 그다지 좋은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어머니도 아버지와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못해 아들을 붙잡고 징징거리기나 한다. 그런 마커스에게도 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등으로 졸업해 졸업식 때 연단에서 졸업 연사를 읽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상황들은 마커스에게 혼란을 야기할 뿐이고, 결국 원치 않는 한국전쟁 파병 행렬에 동참하게 되고,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하게 된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하지만 필립 로스는 확실히 재담꾼이다. 이야기를 직조해내는 능력만큼이 정말 탁월하다. 이를테면 1장에 해당하는 '모르핀을 맞고'는 2장의 '벗어나'에서 마커스가 생명 유지를 위해 모르핀을 맞으며 병원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서술되어지는 마커스 자신의 1인칭 시점이고, 그런 마커스가 2장에서는 3인칭이 되어 전지적 시점에서 그의 생이 마무리 된다. 또한 어찌보면 반복되는 듯한 저 이야기의 구도가 점층적이면서도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고 있어, 읽으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공에게 감정이 이입이되며 연민을 갖도록 만든다. 그러면서 읽는 내내 인생에서 한번뿐인, 이 죽일 놈의 '청춘'을 뭐라고 정의했으면 좋을런지 몰라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인데, 인생을 하루 24시간에 비유한다면 20대는 아침 7시대에 해당하는 시간을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20대를 살면서  인생이 너무 빨리 간다고 너무 조바심 내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이다. 듣고 보니 위로가 될 법도 하다. 하지만 그래서 여유와 관조적 태도로 20대를 살든, 인생에 있어 분산시켜야할 에너지의 총량 중 3분의 1을 20대에 집중시켜 살든, 청춘은 만져지지 않고 음미되지도 않으며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다.    

누구는 청춘은 아름답다고 했는데, 과연 정말로 청춘이 아름다웠을까? 누구는 청춘을 푸르름에 비유하고, 꽃에도 비유하고, 달콤 쌉싸름한 맛에도 비유하지만, 과연 그렇기만 했을까? 물어보고 싶어진다. 솔직히, 청춘을 지나오면 꼭 그렇게만도 비유될 수 없는 것이 청춘임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누구에게는 맹물 같은 것일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쓴 독약에 비유될 수도 있으며, 누구에게는 시큼 털터름함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있어 청춘은 무엇에 비유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묻게 되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을 읽다보면, 꼭 주인공 같지는 않아도, 주인공에 동조하고, 감정이입을하고 싶어지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부모 곁을 떠나고 싶어하는 자식의 마음이다.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더 이상 나를 돌봐주셨던 부모님의 그늘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진다.  마커스는 그래서 대학을 간다는 명목으로 집을 떠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각자의 청춘에게는 그것이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는 결혼으로 지금까지의 둥지를 박차고 나가기도 하고, 누구는 유학이나 이민으로, 누구는 일부러 직장을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잡기도 한다. 아무튼 이렇게 부모의 감시와 통제를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열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다고 자유가 보장되는 것일까? 적어도 그것이 자유가 아니라면 다른 의미로 '속박 당하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한데, 그것을 향한 마커스의 부침이 제법 만만치가 않다. 그는 자유를 위해 홀로 있을 것을 선택하고,  구속 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종교적 규율조차 거부했다. 그리고 낭만적 사랑과 명예로워지는 것만이 자신의 자유를 증명해 주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가 택한 사랑은 너무나 건강하지 못하며, 명예를 지켜나가지도 못했다. 더구나 자신을 지지해 줄 것만 같았던 어머니조차 그에겐 힘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가 그리도 지키고 싶어했던 자유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뭔지는 몰라도 그 모양은  불안하고 불온하기 짝이 없으며, 이것인가 싶으면 저것도 아닌 혼란의 연속일 뿐이었다.  특히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사랑이 알고 보면 뭐 밟은 것 같은 참담함이 되었을 때 되돌릴 수 없고, 그러나 되돌려야만 하는 것이 측은하고 불쌍하기까지 하다.  우리도 비슷하지 않은가? 자유롭고 싶어선택한 결혼, 그래서 선택한 직장, 유학이나 이민이 더 나를 얽어매고 나를 속박한다. 하다못해 아무 것에도 매이고 싶지 않아 선택한 독신도 고독이 속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자유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찌보면 우리에겐 애초부터 자유란 허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의 태어남 조차도 내 자유의지가 아닌데 어디서 자유를 찾겠다는 말인가? 단지 우리에게 허락된 건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서 자족을 배우고, 인격의 성숙을 지향하고, 인류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우리의 씨를 계속해서 퍼뜨리고 그것을 지켜 나가는 것 밖엔 없는지도 모른다.  즉, 자유란 없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오히려 자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확실히 역설이다.   

책에서 이 말이 좋다. 한평생 아버지과 함께 코셔 정육점에서 일해왔던 어머니. 그 어머니에 대해 주인공 마커스가 이렇게 말한다. 정육점을 하려면 근육이 필요하다. 어머니에게는 근육이 있었다. 어머니가 우는 나를 품어 안아주었을 때 나는 그 근육을 느꼈다.(166p) 어찌보면 자유를 위한 날개에도 근육이 필요한 줄도 모르겠다.  하지만 젊은 날에 젊음을 모른다고, 이것을 다 깨닫기엔 마커스의 젊음은 미처 다 피지도 못했다. 그런 젊음이 있는 것이다. 멋진 첫 비행을 위해 힘껏 날개짓을 쳐야하지만 날개짓을 제대로 쳐 보기도 전에 추락하는 새처럼. 이 이야기는 바로 그렇게 미쳐 다 피워보지 못한 젊음에 바치는 장송곡 같기도 하다. 그래서 다 읽고나면 우울하다.  너무 우울해 작가에게 따져 묻고도 싶어진다. "당신은 어쩌면 그리도 청춘에 대해 이런 우울한 이야기를 쓸 생각을 했소?"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작가가 가감없이 인생의 한 단면을 이야기 했다는 것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에 쏟아지는 찬사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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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2-20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저도 이 책 읽었어요.
필립로스에 혹해서가 아니라,역자 정영목 님에 혹해서긴 하지만요~

다 피워보지도 못한 젊음에 바치는 장송곡이란 표현 넘 적절한걸요~^^

stella.K 2011-02-21 11:13   좋아요 0 | URL
뭐 정영목이야 워낙 유명한 번역가시잖아요.
원저자가 좋아선지 아니면 번역이 좋아선지
아무튼 글이 참 유려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필립 로스는 확실히 우울해요.ㅋ

blanca 2011-02-20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안 그래도 이 책 장바구니에 있었는데 주인공이 죽는 거라는 스포일러를^^;; 알려주셨군요. 스텔라님이 쓰신 청춘에 대한 느낌 동감합니다. 어떻게 살아도 결국 못 잡고 알지 못하고 휙 보내버리고 마는 것 같아요. 자유에 대한 대목도 그렇구요. 필립 로스는 어떻게근 삶이란 참 서글픈 거라고 얘기하는 것 같군요. 다음 책에 대한 기대를 한껏 더 부풀게 해 주셨어요^^

stella.K 2011-02-21 11:19   좋아요 0 | URL
솔직히 뒷부분 읽을 때까지 1인칭 소설인 줄 알았어요.
근데 뒷부분에서 벙쪘죠.ㅎㅎ
청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그때는 몰라요. 그죠?
더 나이들어 보면 알죠. 그땐 이미 청춘은 가고...흐흑!

필립 로스는 우울하긴 한데 더 읽고 싶게는 만들어요.
인생의 단면을 치장하지 않으면서 가차없이 쓰는 태도가
맘에 들었다고나 할까?

블랑카님의 댓글을 받고 보니 내가 확실히 리뷰를 못 쓰진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고마워요.^^

cyrus 2011-02-21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으면서 주인공의 죽음이 안타깝더라구요. 내용은 짧았지만
주인공이 겪어야했던 고민과 불안 그리고 죽음으로 마무리짓게 된 결말이
인상 깊었어요.

stella.K 2011-02-21 11:21   좋아요 0 | URL
그렇죠? 내용은 안타까운데, 글은 참 멋지다는 생각을 해요.^^
 
염소의 축제 2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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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선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역사상 독재로 악명을 떨쳤던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쉽게는 히틀러를 비롯해, 필리핀의 마르코스,  비참한 처형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줬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그는 죽을 때 눈도 재대로 감지 못했었다), 가까이는 박정희와 전두환, 김일성이나 김정일까지. 물론 지구상에 독재자가 이들 뿐이겠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느 곳에서 독재자들이 판을 치고 살고 있는지 우린 다 알 수가 없다. 공교롭게도 김정일은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로 현재 위키백과에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방금 전에 알았다.  

여기 우리가 기억할만한 또 다른 이름이 있으니 도미니카 공화국의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다.  그리고 그 인물은 2010년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 의해 재탄생했다.  그는 왜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를 자신의 소설에 되살리려 했을까? 

왜 '염소들의 축제La Fiesta del Chivo'인가? 

스페인어 염소에 해당하는 단어 Chivo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한 것은 음모자들 사이에선 트루히요를 '염소'라 지칭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염소는 그냥 동물을 지칭하는 명사였을텐데 트루히요에게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는 트루히요의 과도한 성욕과 뛰어난 남성적 능력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Fiesta  축제란 말로써 트루히요가 죽는 날 도미니카에 독재는 종식되고 커라란 축제가 벌어질 거라는 암시를 내포하며, 그것은 동시에 유혈 축제를 내포하기도 한다.  즉 말하자면 트루히요 음모자들끼라만 통하는 일종의 작전명이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비슷한 역사적 사건이 있는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두고 그 작전명을 '여우 사냥'으로 지었다지 않는가? 이렇게 사람들은 상징성을 같는 이름내지는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소설은 다분히 독재자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음모자의 관점에서의 이야기로 보여지기도 한다. 

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트루히요의 인간적 면모를 지켜볼 수 있는 시선 하나. 그리고 이를 지켜봐야하는 친트루히요파와 음모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또 하나는 여성의 시각을 대표하는  우라니아 카브랄의 이야기. 무엇보다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 트루히요를 많이 연구했다고 하는데, 우라니아는 실제로 있는 인물이 아닌 가장의 인물이라고 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어느 나라나 독재 치하에서는 여성들의 성적 압제로인한 상처를 간과할 수 없기에 그것을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개인적으로 우라니아의 부분을 가장 관심있게 읽기도 했는데,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그다지 크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어서 아쉬움이 컸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작가적인 한계는 아닐까 하는 의혹까지 가졌더랬다. 하지만 역시 작가가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트루히요의 시대 역시 페미니즘의 시대는 아니었고, 더구나 당시의 도미니카 같은 저개발 국가에서 여성이 주체적인 성의식을 갖는다는 건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가 딸의 처녀성을 독재자에게 바치는 시대였다면 그건 정말 비극의 시대다. 아버지조차 이성을 잃어버린 시대를 산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시대는 도미니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그런 상황에서 14살 어린 소녀가 무엇을 해 볼 수 있을까? 그나마 트루히요의 그늘에서 미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35년만에 고국에 돌아와 불구가 된 아버지께 자신을 증오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반전이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는 독재 체제에서 탄압받는 여성과 치욕스런 국민의 삶을 대변하기 위해 우라니아를 설정했다고 했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의 관점에서 우라니아를 해석하고 평가하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옳은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우리도 바로 한 세기 전 우라니아로 살아야했던 치욕스런 시대가 있었고, 지금도 우라니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이 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우리가 우라니아에 대해 아쉬움을 갖는다면, 그건 신화적이며 영웅적인 뭔가의 아우라를 우라니아에게서 끝끝내 발견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은 아닐까 싶다. 역시 우리는 허리우드식 스토리텔링에 너무 많이 익숙해져 버렸다.  

그들의 축제는 어디로 갔나?         

이 소설은 그다지 쉽게 읽혀지는 건 아닌 것 같다. 이야기가 길기도 하지만, 시간의 병렬을 해체시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 저 이야기를 하고 다소 혼란스럽게 이야기가 진행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점잖게 플래시백이니, 회상과 다양한 화자의 등장이니 목소리의 중첩이니, 한마디로 다양한 방법을 구사했다고 말하겠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 읽기는 쉽지 않더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익숙한 방법으로 읽히진 않는다는 소리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갖는 독특한 점은, 이야기가 사실적이지 않으며 우화적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그것은 특이하게도 각 등장인물의 특징과 심리상태와 대화에 주로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사실 독재자의 최후를 다룬 소설은 많다. 그런데 이걸 여느 작가가 썼다면 어땠을까? 감히 상상을 해 보건데, 아마도 이야기의 사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독재자를 죽이기 위해 사용된 무기는 무엇이며, 어떤 동선을 짜며, 살상자의 심리상태는 어떤 것이며, 암살이 성공했을 때와 실패했을 때의 시나리오. 그리고 독재자가 어떻게 쓰러졌는지 등을  굉장히 꼼꼼하고 장엄하게 썼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런 예상되어지는 연출된 상황을 배체한 채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야기를 채워 나간다. 어쩌면 그것이 작가가 갖는 필력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독재자의 암살과 그 이후에 대해 상당히 충실하게 그렸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독재자를 죽이는 것이다. 사실 누구 보다 죽일만한 정당한 이유를 가진 존재다. 하지만 암살자는 무슨 테러 집단도 아니고, 자실 특공대는 더더욱 아니다. 꼭 죽이고야 말리라는 그 강한 의지 뒤엔 그에 못지 않은 강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독재자의 암살엔 반드시 종교가 함께 간다. 종교인의 양심으로 살상만은 안된다고 해야 옳을 가톨릭 신부들 조차 독재자의 암살에 가담한다. 이것은 비단 이 이야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정의의 이름 또는 신의 이름으로 독재자는 처단되어 왔다. 그렇다면 정의는 어떻게 실현되는 것이며, 신의 왕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뭔가의 생각이 깊어졌다. 하지만 나의 생각을 더 깊게 만들었던 건 투루히요를 처단한 로만 장군을 비롯한 가담자의 이후의 행동이다. 그들은 일단 독재자를 죽이는데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는 성공하지 못했다. 어찌보면 나라에 더 혼란만을 가중시켰고 , 영웅이 되기는 커녕 더 많은 적들을 만들었다. 역시 한 사람의 피를 손에 묻힌다는 건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못되는 것 같다. 투루히요의 죽음에서 기쁨을 누리는 군중이 있는가 하면,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이 이야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의 독재 체제가 무너졌을 때에도 똑같이 겪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축제는 어디로 간 것일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작품에 대한 인터뷰에서 암살자들은 암살에 성공하고도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보고 두려워 했다고 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나라의 상황을 생각해 보다 

사실 이 책이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끝까지 읽었던 건, 어찌보면 이 책이 우리나라의 역사적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의 기시감 때문이었다. 어릴 적, 나 역시 우리나라엔 대통령이 원래 단 한 분만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신앙 같은 것이 되어서 앞으로도 이 분은 죽지도 않고 나라를 계속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 분이 어이없이 죽고 나서야 나는 꿈에서 깨어났고 그것이 독재 때문이며 더 많은 혼란과 이전의 독재자 못지 않은 독재자가 나타나 민주화의 꿈은 좌절되는 줄만 알았다. 누구는 또 그랬다. 우리 나라는 민주주의가 가능하지 않으니 이전의 독재자의 재림이 필요하다고. 또 누구는 그 독재자의 암살자가 사실은 처형되지 않았으며 지구 반대편 어느 섬에서 살고 있다고도 했다. 과연 괴담 아닌 괴담이고, 그만큼 사람은 자율적이지도 못하고 민주적이지도 못하며 뭔가에 기생해서 살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그것은 이 소설에 그대로 녹아져 있다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궁금한 것 하나가 떠올랐다. 우리나라 독재자를 암살했을 때 작전명은 뭐였을까? 독재자가 있는 나라의 역사는 확실히 슬프다. 그래서도 난 이 책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현재의 북한의 상황 때문에도 이 책을 포기하지 못했다. 한 나라에 독재자가 있다는 건 불행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자기 세대를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뭐란 말인가? 3대 세습 체제가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분단 국가이며 유일한 3대 독재 세습란 오명을 안게 되었다. 지금 북한은 그 어느 때보다 이 체제에 시달림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과연 북한은 자생 능력을 상실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하게 만들었다. 이 악습을 보고도 암살을 꿈꾸는 사람이 없더란 말인가? 새삼 가슴을 쓸어 내렸다. 물론 독재가 있으면 반드시 암살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암살을 심판하기 전에 그것을 나쁘게만 볼 수 없는 것은 그만큼 혁명에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며라고 생각한다. 그것의 끝이 어떤 결과를 낳던지간에 말이다. 그런데 북한은 자기네 나라의 독재를 청산할 의지도 없이 삼대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이 죽었을 때 집단 패닉 상태에 들어가기도 했다는 말을 적이 있다. 그런 걸 보면 사람의 의식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언젠가는 그 독재도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것도 아주 어이없는 그 하나 때문에.  

이야기를 무시하면 안 된다. 이야기가 갖는 신화적 상상력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은  진실을 은폐한 거짓말 하나가 어떻게 나치즘을 붕괴시켰는가를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수작이다. 그런 것처럼 이 소설이 갖는 신화적 상상력이 어느 나라의 독재를 어떻게 무너 뜨리게 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도 작가는 사실주의를 배제하고 우화적이며 상징적인 분위기로 이야기를 이끌어 갔을지 모른다. 이 소설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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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1-27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트루히요와 그의 아들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북한의 김정일, 김정은 부자가
떠올랐어요. 소설을 읽으면서 유신정권 시절의 우리나라랑 오늘날의 북한 정권이
동시에 연상되는,, 어쨌든 참 대단한 소설인거 같아요 ^^

stella.K 2011-01-28 13:18   좋아요 0 | URL
어쨌든 독재의 모습은 똑같은 것 같아요.
그런데 북한이 여타의 그것과 다른 건 그들 자체적으로 독재를 청산하지 못한채
독재자를 우상화하고 있다는 거죠. 어쩌면 좋을까 한숨만 깊어졌어요.ㅠ

근데 시루스님 밖에 없어요.뭐냐구요?
그냥 시루스님 조타구요!히히
 
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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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에게 있어 화두는 늘 '남자'였다. 

가끔 그런 책을 만난다. 작가가 남잔데 작품 속 주인공이나 화자를 여자로 쓰는 경우. 또 그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여잔데 남자로 쓰는 경우. 그럴 경우 난 그 책을 의심부터 하고 본다. 여자를 잘 알고 쓰는 걸까? 또는 남자를 잘 알고 쓰는 걸까? 그냥 주인공을(또는 화자를) 그렇게 산정할 뿐 그것이 꼭 서로 다른 성을 잘 알아서 쓰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성(性)을 바꿔서 쓰는 것일까?  그럴 때 작품의 완성도는 얼마나 더 할 수 있는 것일까?

늘 남자에 관해서만 쓰는 것으로 알려진 작가가 나를 놀래켰던 작품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언니의 폐경'과 '화장'이란 작품이었다. 그 두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 김훈이 여자에 관해서 쓴다는 것이 놀라웠고,  여자를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쓰는 것에 다시 한번 놀라웠다. 그런 작가가 이 작품에서 또 한번 여자를 등장시켰다.  그런데 그것이 장편이어서 그럴까? 앞의 두 작품은 군더더기 없는 단편인데 반해, 이 작품은 뭔가 모르게 버거워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말하자면,  세밀하지만 다분히 우회적이고, 여성성을 대표하는 감성적인 면이 생각보다 그리 많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전작들은('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의 경우)  초라한 남자의 공허하고도 처연한 울림이 있었지만, 이 작품은 뭐랄까 결코 뜨겁게 덥혀지지 않은 아니 다 식어버린 밥상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작가를 떠올리면 늘, 가부장과 마초를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그는 가부장이란 말은 인정하지만, 마초는 아니라고 못 박았다.  사실 '가부장'이란 여성에겐 다소 권위적이고 위협적일수도 있지만 그런 요소를 제거한다면, 자신의 가정을 지키고 다스린다는 신사적 의민데 어찌 그것을 '마초'와 견줄수있냐며 정색을 했다. 마초는 남자적 허세가 아니겠냐며. 듣는 순간 그도 과연 맞는 말이다 싶다. 하지만 이 작품을 비롯해 그의 일련의 작품들은,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또는 가정을 지키지 못하는, 나약하고 회의하는 남자다. 그리고 그것이 김훈 문학의 화두란 생각이 든다.  

관조적인 문체 

이 작품 역시 남자를 비껴가지 않는데, 이 전의 작품들은 남자가 화자가 된데 반해 이 작품에선 여자 조연주가 화자가 됐다는 것은 김훈 문학에 변화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사실 앞서 두 편의 단편은 여자가 여자를 말하고(언니의 폐경), 남자가 여자 대해 말하는(화장) 형식을 취하지만, 이 작품에선 여성의 시선으로 남자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그렇듯 관조적이다.  김훈의 문학은 늘 그랬다.  여타의 작가들은 인간의 욕망을 한 자락 펼쳐 보이고 그것을 끝간데 없이 밀어붙이다 산화해 버리거나 또는 어느 지점에선가 돌이키고 선회하고마는(그것은 분명 작가 자신과의 타협일터)   지점에서 끝나 버리는데, 김훈의 문학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인간의 욕망을 산화해버린 그 지점에서 시작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실패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인간은 얼마나 나약하며,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거냐고 거듭거듭 말하고 있다.  하다못해 그의 소설에선 그 흔한 성애 장면 조차 나오지 않던가, 나오더라도 아주 건조하게 나올뿐이다 (칼의 노래). 이 작품에선 분명 누군가와의 성교로 아기를 임신했을텐데도, 여자는 끝내 임신한 채로 자살한 것으로 나오는 한 인물이 있다.   그처럼 그의 일련의 소설들엔 여자의 자리는 여간해서 없다. 사실 생각해 보면 여자에 대해 썼다는 '언니의 폐경'이나 '화장'도 정말 여자에 대해서 썼을까? 이쯤되면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언니의 폐경'은 여자의 싯점에서 여자에 대해 쓴 것처럼 보이지만 폐경에 대해 썼다는 점에서 여성의 끝자락에 관해 쓴 것이고, '화장'은 남편의 싯점에서 자기 아내를 통해 자신의 지난 삶을 반추하는 식이다. 그러니 그 외피만 달라졌을 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 작품 역시 그렇다. 여기선 단 두 여자만이 나올뿐이다. 화자인 조연주와 그녀의 어머니. 그나마 조연주는 직업상 전방부대에 예속했다. 거기서 남자들 특히, 안실장과 그의 아들 신우를 관찰하고, 죄수의 신분인 아버지를 생각한다.   어머니는 귀찮으리만큼 연주에게 전화를 해 아버지에 대한 끊임없는 보고로 일관한다. 그리고 그 안엔 아버지를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내치지도 못하는 어머니의 우유부단한 심정이 작품 전반에 건조하게 나타나 있다. 즉 작가는 이 두 여자를 통해 끊임없이 남자를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처음에 제기했던 '세밀하지만 다분히 우회적'이라는 건 어찌보면 그럴수밖에 없는 장치처럼도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이 작품엔 여성이란 애초부터 자리하고 있지 않으니까 여성성도 없는 것이다. 또한 작가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여자를 모르기 때문에 감성적이지도 않다.  그러므로 김훈의 문학은 '남자의 문학'인 동시에 '관조의 문학'이다.    

결핍에서 완성으로       

애초에 작가가 작품 속에서 여자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했더라면 그의 문학은 생명을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여성에게는 자궁이 있다는 점에서 생명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남자와 여자가 합일을 이루었을 때 생명은 탄생한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작가는  여성에겐 그다지 큰 의미도 역할도 주지 않았다. 생명 보단 죽음을 말하는 게 더 익숙하고, 충만 보단 결핍을 말하는 게 더 익숙해 보인다.  

그 부자에게 아내이며 어머니인 여성의 존재가 없기 때문이었을까. 아마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 닮은꼴 부자의 결핍은 생명으로 태어난 것들의 근원적인 결핍이어서, 본래부터 결핍 속에서 태어나서 거기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 결핍에 젖어서 살 수는 있지만 그것을 감지할 수는 없었고, 그들 부자의 결핍은 그 결핍을 인식하는 능력조차 결여된 결핍이었다. 그리고 한 개인의 생명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유전적으로 파생되어나온 또다른 생명이 그 결핍의 운명을 답습함으로써, 그 결핍은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이 그 아버지와 아들의 닮음이었다.(241p) 

 하긴, 꼭 김훈 작가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대부분의 작가는 희망 보단 절망을 얘기하고,  기쁨 보다는 고통을, 드러난 것 보단 드러나지 않는 것을 말하기 좋아한다. 그것은 거의 모든 작가의 생래적 특성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왜 글을 그렇게 쓰냐고 묻지 않는다. 싫으면 안 읽으면 그만인 것이지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의 문학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훈 작가 역시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문학적 세계를 완성에 가는데, 그야말로 그는 결핍에서 충만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결핍 그 자체를 완성해 가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찌보면 어줍잖은 충만, 명확하지 않은 확신, 불안한 행복, 그런 얼치기적 언어로 된 글은 쓰고 싶지 않은 그의 자존심 같은 것은 아닐지? 그런 것 보단 작가가 알고 깨달은 결핍, 공허, 허무 등을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가도 독자도.

작품, 다르게 보기 

사실 작가의 작품들은 뛰어난 문체에도 불구하고, 허무주의를 짙게 깔고 있어서 읽고나면 한동안 우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매번 그의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다시 읽기를 감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다(그것은 왜 그런지 알 수 없으며, 남자 보단 여자가 더 읽기를 스스로에게 강요하지 않을까?).  중독이다.  그렇게 읽으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작가는 왜 그리도 남자 이야기만을 하는 것일까? 물론 남자이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말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이쯤 작품을 대하고 보니 남자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이 열린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남자 이야기 또는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일정한 패턴 내지는 이데올로기가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확실히 이것의 또 다른 측면에서 남자를 이야기 하고, 아버지를 이야기 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왜 남자는 힘, 영웅 등 지구를 떠받히는 존재로 그리느냐는 것이다.  남자도 얼마나 연약한 존재고, 모든 위험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며, 자유롭고 싶어하는지를 작가는 매번 새롭지만 일관 되게 조명해 왔다. 그것은 남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 이기도 하다.  

나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낄 때마다 느꼈던 건 가정과 사업을 이끌어가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가 무시로 생각 났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은, 내가 어렸을 때 전날의 숙취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우연히 마주치게된 아버지의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아버지가 가끔은 만취 상태인 경우가 있고 그런 때가 되면 기도는 좀체로 하시지 않는데, 그날따라 무엇 때문인지 그러고 계셨던 것이다. 뭔가 큰 일이 아버지에게 닥친 것 같았다. 하지만 차마 물어보질 못했다. 그때 이후 아버지는 다시 평정을 되찾으신 것으로 봐서 위기는 넘기신 것 같기도 한데, 그런 때가 그 이후에도 몇 번은 더 있었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모든 것을 팽개치고 싶으셨던 때가 얼마나 많으셨을까? 남자에게는 저마다의 동굴이 있다는데 결혼과 동시에 그 동굴이 흔적없이 사라지고  가장의 책임만이 남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책임을 아는 남자는 그렇게 많지는 않아보인다.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배우지 않아도 자연히 안다고 생각한다. 자식을 낳아보면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몰라 처음부터 가장이 되지 못한 아버지들이 얼마나 많은가? 

남자와 여자가 합일의 경지에 이르면 생명을 잉태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불안한 것이고 결핍된 것인가?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완성을 향해 나가는 거라고 하지만, 무엇을 위한 완성이고, 어디로 가는 완성인지 모른다. 설혹 완성을 향해 간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어느 한쪽이 먼저 죽게 되어 있고,  같이 살비비고 살면 남성성과 여성성이 마모가 돼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경우, 어머니는 아버지를 이인칭으로 보지 않고 낮선 벌레 보듯하며 시도때도 없이 딸에게 전화해 그 관찰한 바를 보고하고 있지 않는가? 이토록이나 삶은 스산한 것이다. 그렇게 애정없는 결혼 생활에도 아버지가 돌아가니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운다. 깨달음은 죽음의 순간에 온다더니 아버지가 불쌍한 존재임을 어머니는 그때 깨닫는가 보다. 이렇게 작가의 결핍을 완성시키며 나가고 있고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는 현재진행형이다. 

작품 사이 사이 나오는 곤충과 꽃들에 관한 이야기가 재밌다. 또한 아버지의 장례 장면중 화장해 타고난 뼛가루를 고슬한 밥에 소금과 함께 묻혀 새의 먹이로 주는 사찰 의례가 독특하고 새로웠다. 작가의 이런 공부와 노력이 더해져 나름 작품을 읽는 맛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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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12-28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핍을 인정하고 그걸 무엇으로 채우려고 애쓰지 않는 것,
그게 김훈의 글에 늘 느껴져 스산한 풍경을 떠올려줍니다.
저도 별 넷으로 했지요.^^
연말 무던히 잘 보내고 계신지요.
갈수록 가고 오는 시간에 무덤덤해짐을 느껴요.ㅎㅎ

stella.K 2010-12-30 14:17   좋아요 0 | URL
이번 작품은 좀 그랬지요?
반복적인 문장도 많고.

그러게요. 제가 프레이야님께 좀 소원했죠?
죄송해요.ㅜ

양철나무꾼 2010-12-30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님도 이 책에서 그의 결핍을 읽으셨군요~^^

stella.K 2010-12-30 11:0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런데 이 작품을 보니까 비로써 그의 문학이
하나로 정리가 되더라구요. 결핍의 문학이었고, 관조의 문학이었다는 거.^^
 
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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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이 책의 가제본을 받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언제부턴가 그 누구의, 어떤 작품도 가제본을 읽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교롭게도 그렇게 해서 읽은 작품이 나에겐 그다지 높은 점수를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평가가 여타의 독자들이 그 책을 선택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객관적인 평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을 생각하면 적지않은 부담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그 책에 대한 리뷰를 언제 쓰게되던지간에 나는 그 책을 읽는 제1군에 속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도 작가의 작품이라면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작품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그의 작품 세계의 독특함을 알기에 나름 즐거울거란 기대를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읽으면서 즐거웠다. 몇몇 작품은.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 책을 읽으려고 펼쳐들었는데 마침 내 취향에 딱이다 싶은 책을 만나면 기분 좋은 거. 그땐 정말 빨려들어갈듯 하면서도, 밥을 안 먹어도 든든한 행복감 을 느낀다(물론 그렇다고 책 읽느라 끼니를 걸러본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다. 글쎄, 앞으로 내 인생에 과연 그럴 때가 있으려나?) .  말하자면 그런 느낌을 이 책에서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몇몇 작품에서는.  

이를테면, 이 책의 첫번째에 나오는 <근처>나, 두번째에 나오는 <누런 강에 한 척> 같은 작품을 읽으면서 이 책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작가의 단편집이라해도 다 좋을 수는 없다. 그래도 이렇게 출발이 좋으면 이 책은 생각 보다 훨씬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난 초두의 그 두 작품에서 이외수의 문장 내지는 김훈의 문장을 떠올리기도 했으니까. 그러리만치 나는 이 책에 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편 느끼는 것은, 작가도 나이를 먹는 걸까?(68년생이니 우리나라 나이로 43세다) 이 정도의 경지라면 상당히 노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노쇠해졌다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  놀라울 정도로.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는 그의 비주류적 감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동시에 젊은 감성 또한 잃지 않고 있음을 과거 <핑퐁>에서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하긴, <핑퐁>이 언제적 작품이던가? 그후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수록작 <낮잠>을 어디선가 읽었던 적이 있다. 도저히 작가의 작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만큼, 연극적이면서도 노년의 살풍경함을 유감없이 들어내놓고 있어 놀랍기도 하고, 신선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의 작품의 생경함에 놀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작가는 젊다고 하기엔 나이들었지만, 노숙하기엔 또 아직 젊지 않은가? 모르긴해도, 어쩌면 그는 일련의 몇 작품을 통해 앞으로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렇게 몇 작품을 제외하면 나머지 작품들은 여전히 박민규식 독특함과 자유로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좋게 말하면 스펙이 넣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또 어찌보면 편차가 너무 심하다는 느낌도 든다. 한마디로 작가는 작품집 안에는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려고 했던 것 같다. SF, 판타지, 세기말, 서부극 등 종합선물세트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특히 앞서 말한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작품은 작가가 담아내고자하는 정서가 뭔지 파악하기는 어렵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엔 다소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앞서도 밝혔지만, 난 작가의 작품을 그리 많이 접해 보질 못했다. 더구나 열거한 SF니, 판타지니 하는 장르는 내가 그리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익숙한 장르도 아니다. 그런 여타의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종합선물세트를 좋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 가제본을 다 읽기도 전에 진짜 책이 왔다. 사실, 상하권(이 책에 따르면 side A,B)으로 되어있다는 것은 '예약판매' 때부터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장편소설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단편소설 모음을 상하권으로 냈다. 이례적이란 생각이 든다. 더구나 구성도 독특하지 않은가? 꼭 옛날 아날로그 시대의 레코드 LP판이 생각이 난다. 책 표지 그림은 딱 내 취향은 아니지만 독특하다. 꼭 송강호가 영화 <반칙왕>에서 쓴 타이거 마스크가 생각이 난다. 책을 이렇게 구성할 수도 있구나. 나름 놀랍고 신선한 시도란 생각이 들었다. 더 놀라운 건, 별책부록인 아트북이다. 일러스트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그림이 인상적이다. 예전에 조경란의 <혀>의 표지 장정을 보고 혀를 내둘렀던적이 있었는데, 이건 그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하드카바케이스 까지! 정말 선물용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책이 언제부터  선물용으로 손색이 있다 없다를 가늠했는지 모르겠다. 책은 그저 책일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난 옛날 사람 아니, 적어도 아날로그 때 책의 맛을 들였던 사람이 돼나서 그런지 책의 이런 변화가 내심 반갑진 않았다. 언제부턴지, 책도 글자가 깨알 같이 박힌 것 보다 듬성듬성 박히고 화려한 그림으로 채운 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책은 모름지기 글로 전하는 것인데 책이 직무를 유기한 듯하다. 책을 기획해서 내는 쪽이 그러하다면 독자 역시 그렇게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뚝배기 보다 장맛이라고, 될 수 있으면 작가의 글이 멋진 디자인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선 그 보단 얼마나 내용이 좋은가가 우선일 것이다. 소문난 잔치 먹을 것이 없다는 말은 듣지 말아야 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디자인이나 장정은 좋은데 내용이 이를 받혀주지 못하면, 아니 적어도 이 부수적인 것 때문에 작가의 글이 재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면 안 되지 않는가?(아, 내가 어쩌다 이런 말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요는, 독자가 책을 선택할 때 반드시 장정이 좋아서 그 책을 선택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는 것이다.  또한 작가의 글이 아쉽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말했지만, 작가의 문체는 자유로운데 어떠한 정서를 담아내려고 하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한마디로 무국적이고, 좋게 말하면 스펙이 넓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산만하다. 더구나 이걸 두권으로 낼 생각을 했으니, 차리라 깔끔하게 한 권으로 냈더라면 기획에서 무리수를 뒀다는 말은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책의 겉모양이나, 내용면에서 균형을 잡는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젠장, 독자가 왜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하는지 모르겠다. 독자야 작품이 어떤 그릇에 담겨졌던지 간에 그 내용으로 좋았다, 안 좋았다를 얘기하면 그만 아닌가? 그래서 책은 너무 화려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독자의 판단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과유불급이다. )  물론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수도 있다. 다양한 문학을 소화해내지 못하고 다소의 보수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좁은 시야가 모처럼 내놓은 작가의 책을 이렇게 말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기도 조심스럽다.  

아무튼, 마침 가제본으로 미쳐 다 읽기도 전에 읽기가 책이 도착이 됐다.  내심 가제본으로 읽기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받게 되어 반가웠다. 그런데 단행본으로 읽으면 잘 읽힐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듯했다. 아무래도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이 정도에서 일갈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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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0-11-13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책은 맛있거나, 유익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므로 스테님의 글 제목을
보고 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웃음)
아..그런데 도대체, 책장을 넘겨 본지가 언제인지(만화책 빼고 -_-;)....가물가물..
한 때는, 너무 먹어대서 질려서 스스로 책에 손이 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시간이 허락해주질 않는군요.헹..

stella.K 2010-11-14 15:14   좋아요 0 | URL
ㅎㅎ 엘신님은 이런 글 제목에 끌리시는군요.
알겠습니다. 기회되면 엘신님 상대로 낚시질이나 해 봐야겠습니다.
이번엔 제가 입질에 성공한 거죠?ㅋㅋ

L.SHIN 2010-11-15 21:11   좋아요 0 | URL
낚시질이라니요...쿨럭..;;
기왕이면 밑밥으로 금 한 냥 이런거 달아주..ㅋㅋㅋ

cyrus 2010-11-14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제본이면 어떤건가요?? 스텔라님~ 어떤 형식으로 되어 있는지 궁금하네요.
이번에 나온 박민규 작가의 신작이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신선한 구성으로 다가왔긴한데,, 스텔라님은 이번 작품에 실망이 컸는가보네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었다라는 말이 떠올리네요.

2010-11-14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0-11-14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다른 책 구입하였더니 맛뵈기로 얇은 책자가 따라왔더라구요.
제가 박민규를 좀 애정하기는 하는데,또 소설집에는 별 매력을 못 느껴서요.
님의 리뷰를 보니,더 망설여지는 걸요~ㅠ.ㅠ

stella.K 2010-11-14 15:1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작가의 독특함이 좋은데
이 책이 딱 좋다고 권하기엔 조심스럽더라구요.
한마디로 전 내용이나 기획이나 과유불급이라고 생각했습니다.ㅠ

2010-11-14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4 2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11-14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제본이라는 대목에 관심이 갑니다. 가제본은 읽기 힘들게 되어 있나요? 박민규는 단편 하나 읽어 봤어요. <카스테라>가 좋다고 난리여서 여러 번 도서관에서 대출해 보려다 못 보고 <근처>인가를 읽어 봤는데 기대보다 좋지는 않더라구요. 안그래도 이번 신간 비주얼이 정말 박민규다워서 참 궁금했는데 정갈하고 좋은 리뷰 잘 읽고 가요, 스텔라님.

stella.K 2010-11-15 11:29   좋아요 0 | URL
아뇨. 가제본이 다 그렇죠 뭐.
맞아요. 비주얼이 박민규스럽긴 해요.
그런데 몇몇 작품을 빼고는 저는 좀 그랬어요.
읽어줘서 내가 더 고맙습니다. 블랑카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2 - 개정판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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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억울해, 억울해, 억울해! 

우여곡절 끝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내가 이 책을 읽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알 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나 자신 그럴수 있었는지 웃음이 나온다). 처음엔 이것을 책으로 읽을 생각은 그리 많지 않았다. TV 드라마로 나오는데 굳이 이 작품을 책으로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사실, 책을 쓴 작가에게나 출판에 관련된 분들은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다시피 이 작품은 드라마가 있기 전에 먼저 책으로 나왔고, 읽어본 독자들은 드라마화 될  것을 예상했거나, 리뷰를 통해 드라마로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곤 했으니까. 그래서 독자들의 예상(또는 희망사항)은 적중했고, 드라마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방영되고 있다(다음 주면 아쉬운 종영이지만).  덕분에 책은 더더욱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앞서 말했던 '억울하다'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 느낌이다. 그건 여전히 책이 드라마에 엎혀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책이 더 유명해져서 드라마화한 거지만 결과적으로 (언제나 그랬듯이) 그러한 관행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책(또는 작가)의 입장에선 억울하고 아쉽다고 할 밖에. 

책과 드라마가 다른점   

아무리 책이 좋아도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그것 때문에 책을 더 볼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드라마로 나오면 독서에 대한 욕구는 슬그머니 꺽이는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편이다. 그만큼 문자가 영상 이미지를 쫓아가지 못한다. 물론 이미지가 인간의 상상력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21세기는 영상테크놀로지 시대기 때문에 인간의 상상력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아 졌다. 분명 영상테크놀로지도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예를들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조선의 저잣거리, 반궁, 성균관 내부, 위폐가 모셔졌다는 사당, 복식 등은 전문가가 아니면 그것을 재현에 낼 수 없고, 따라서 우리 일반인으로선 상상의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영상만을 의지할 수는 없다. 반드시 영상이 추구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는 텔레비전의 황금시간에 배치된만큼 영상 등급을 피해가지 못한다. 그래서 책에서 나오는 질펀하고도 농도 짙은 성적 농담 같은 것은 드라마에선 방영불가다. 당장 "나 구용하다."라고 했던 그의 호 '여림'의 뜻이 책과 드라마에서 얼마나 다르게 나오는지 아는 사람은 알지 않는가?ㅎ 이걸 그대로 방송에 내보냈다가 무슨 경을 칠지 안 봐도 비디오다. 19금이라면 가능하지만.  그러니까 한마디로 드라마는 인물이 갖는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미스테리한 면을 부각시켰고, 동시에 없어서는 안될 무술을 뽐내는 쪽이었다면, 책은 인간의 심리와 역사적 배경에 촛점을 맞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보자면 드라마가 훨씬 인물의 생생함과 박진감을 높혔다는 건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정조와 정약용을 살렸다는 점은, 그들이 실제로 그랬을런지, 안 그랬을지는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아 보인다. 어차피 역사나 전기물이 아니라 역사를 차용한 드라마니까. 그냥 그 인물이 갖는 아우라를 살려 상상력을 극대화했다는 측면에선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장르문학? 그게 뭔데? 

하지만 난 이 '정은궐'이란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작가 프로필을 보면 과거에 그가 썼던 작품 몇 개와 그의 존재를 각인시켜준 본 작품(그리고 규장각 각신의 나날들)외엔 그 어떠한 정보도 알 수가 없다. 하다못해 그가 남잔지, 여잔지도 불분명하다. 하나 아는 것이 있다면, 처음 작가가 정은궐이란 이름이 아닌 본명으로 보이는 이름을 썼다가 필명을 그렇게 정한 것으로 안다.  이건 작가 나름의 연막작전은 아닌가 싶은데, 나 개인적으론 이런 취향은 그다지 좋은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작가가 너무 나대도 그렇긴 하지만, 너무 신비주의 작전을 쓰는 것도 좋은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또 한 가지 '억울'할 수도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B급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이 B급이면, 작가 역시도 B급 작가라는 소린데, 과연 그것에 대해서 정작 작가는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다. 허리우드 영화 감독들 중엔 스스로를 B급으로 칭하는 사람도 많다. 하긴, 어설픈 A 보단 확실한(또는 고품격) B가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B급이라면, A에서 보여지는 작품성이나 화려한 수사없지만, 통속적이고, 마이너적 감성을 뜻하지 않는가? 어설픈 작품성과 어설픈 수사로 치장하느니, 확실한 B가 A를 눌러버리는 그런 구도 또한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작품에 B를 부여하느냐는 말이지. 

이만한 작품을 구사하려면 시대를 관통하는 나름의 지식과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드라마야 어쩔 수 없어서 특정 인물을 부각시켰다지만(화려해야 하니까), 책에선 잘금 4인방 외 어떤 인물도 크게 부각되는 인물은 없었다. 하다못해 정조도 정약용도 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왜 , 이제까지 역사 소설은 그렇게 잘 난 사람이 나와야 하는 건데? 이렇게 역사적인 배경이나 맥락을 유지하면서 허구의 인물이 이끌어 가는 역사물이 나와주면 안 되는 건가?    

그리고 설혹 나왔다 하더라도 '장르 문학'에 국한시켜 폄한다. 반드시 소설은 유명한 필력있는 작가가 써야하며, 문체가 좋아야 하고, 그것이 역사 소설일 경우엔 역사적으로 인정 받은 인물을 형상화해야 한다는 규칙은 어디서 나온 발상인가? 그것 역시 사대주의가 아닌가? 문학이면 문학이지 장르문학, 순수문학 가르는 이 행태는 언제까지 계속될 건지 모르겠다.  물론 그래봐야 내 입만 아플뿐 순수문학하는 어르신은 꿈쩍도 안할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읽어본 결과, 작가의 그것이 그냥 B급 작가라고 하긴엔 작품에 드린 공력이나 필력이 여느 프로 작가 못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르 문학 작가라고 하기엔 꽤 억울한 무엇이 있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불만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책 장정이 그게 뭔가? (솔직히 선물로 받아 선물하신 분께 누가 될까 말을 아끼고 싶긴 한데) 받아보고 약간은 식겁했다. 솔직히 책 장정이 그야말로 B급이다. 이러니 우리나라에서 장르문학(난 솔직히 이 표현이 탐탁지 않지만)이 대접 받지 못한 이유일 수도 있겠다. 책 장정이 그 책을 살 것이냐 말 것이냐의 반은 먹어주고 들어가는데, 내가 작가였다면 '억울'해서 책 못 내겠다고 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나마 개정판이 이 정도라면 초판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아무튼 이런 쪽에서의 작품은 더 나와줘도 좋지 않을까? 

이 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보다 이 작품을(책이나 드라마나)  두고 동성애 코드라고 한다. 물론 조선 시대 실제로 남장을 한 여자 성균관 유생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여자가 남장을하고 나왔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동성애 코드라고 보는 시각도 고려해 봐야할 것 같다.  실제 동성애자들이 봐도 이 작품은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작품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무조건 여자가 남장하고 나온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다 동성애 코드라고 보는 우리의 시각도 점검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문학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에는 작가 자신의 욕망을 투영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작가가 보는 사회적 욕망을 녹여낼 수도 있다. 난 아무리 봐도 이 작품은 조선 시대 당시 억압된 여성의 사회적 신분과 상승을 대리 만족시키는 작품으로 밖에는 보여지지 않는다. 정말 윤희 같은 인물이 이런 활약상을 보였다면 당시의 여인들이 얼마나 통쾌했을까? 그러나 이런 일은 있을 법하지 않고 허구였던만큼 대리 만족이다. 그렇다면 오늘 날의 독자들이 윤희를 보고 대리 만족을 해야할만큼 이 나라의 여권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는가?고 묻는다면 그건 좀 다른 얘기가 될 것이다. 이건 감상적 차원에서의 로맨스 소설이지, 페미니즘을 표방하기 위해 쓴 작품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니만큼 동성애옹호를 위한 것으로 보기에도 미흡해 보인다. 설혹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래야 세련되고 앞서가는 뭐라도 되는 양하는 것이 미덥지 않다.  

독자는, 책을 읽는 사람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 보내는 아낌없는 찬사에 동감한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론 조금은 늘어지고,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건 내가 이 작품을 보고 열광하리만큼 젊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이건 드라마를 볼 때도 그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가가 이 작품이 드렸을 공력은 높이 사고 싶다. 읽으면서, 미국에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가 있다면 이건 감히 한국판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런 지적이면서도 대중의 인기도 어느 정도 확보한 소설이 반가웠다.  앞서 A급이나 B급이니 하는 건 엄밀한 의미에서 독자가 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독자는 그저 책을 읽는 사람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이야기의 후편에 속한다는 <규장각 각신의 나날>도 계속 읽고 봐야겠지만, 그 질펀하고 농 짙은 성농담 때문에라도 <조선 후기 성 소화 선집>(문학동네)란 책도 읽고 싶어졌고, 성균관 생활기라는 <성균관의 공부벌레들>(수막새)도 읽고 싶어졌다. 약간 흉내낸 느낌이 나긴 하지만, 소설이 주는 구라 때문에 '정말 그럴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면 그건 일단 성공한 독서라고 생각한다.  독자가 작가에게 바라는 건 독서의 즐거움과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작가는 어렵지만, 또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 작가다.  작가 정은궐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쓰고 있을지 사알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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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0-29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ㅇㅇ, 좋은 리뷰예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을 정도로. ^^

언니, 장르 문학은여, 대여점과 일부 고정팬을 타겟으로 했다는 의미예요.
무협이나 판타지, 로맨스 소설이 그런 편인데,
한달에 엄청난 숫자가 쏟아져 나와요.
왜냐하면, 하루에 몇권씩 동일 장르만 읽는 골수 팬이 있어서 그래요.
<성균관->은 장르 소설 중 수작으로 성공한 경우구여,
어떤 장르 소설들은 으아,, 미치게따 할 정도인 경우도 종종 있대요.

그래도 소설, 꽤 잼나셨죠?
저는 규장각이 더 맘에 들어요, 윤희가 당당하거든요.

stella.K 2010-10-29 18:5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이제야 그대 땜에 확실히 알았네.
그러니까 장르문학 하는 사람들 열심히 분발해야 한다구요.
그대가 선물해 준 규장각 빨리 읽어야 할 텐데...
읽어줘서 고마워요.^^

다이조부 2010-10-29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으니까 드라마가 급 땡기네요~

스텔라님이 김태훈 이야기한거 보면서 가슴이 넓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

stella.K 2010-10-30 12:24   좋아요 0 | URL
ㅎㅎ 아니어요. 김태훈이 결혼도 안하고 잘난 척하는 거야
좀 거시기 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은 웃긴데가 있어요. 그래서 좋아해요.

드라마가 제가 기대한 것만큼 시원하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래도 기대 안하고 보면 볼만하죠. 무엇보다 출연진들이 잘 생겼잖아요.
괜히 잘금 4인방이겠습니까?ㅎㅎ

자하(紫霞) 2010-10-3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들을 밤을 새워서 읽었다는거 아닙니까?
덕분에 이틀동안 눈에 핏줄이 서서 많이 아픈 애로 알았을거예요.
드라마도 본방사수한다는...^^;

stella.K 2010-10-31 18:13   좋아요 0 | URL
ㅎㅎ 저는 그 정도는 아니던데...
그래도 이 작품은 참 영리하게 잘 쓴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2010-10-31 1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31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1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