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 - 2009 제1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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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리뷰는 나의 완소작가 박범신의 고산자가 되고 말았다.

말았다.니.  그도 그럴 것이, 이책은 작년 마지막 주에 읽었는데 그러니만큼 대미를 장식하는 책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뭐 때문인지 한해를 넘겨버리고 새해에 읽은 첫책이 되고 말았다. 

 

 글쎄, 박범신 작가가 나의 완소작가라고 해도 그의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긴 하다. 언젠가 전작을 독파하고 싶은 욕심나는 작가이긴한데(문제는 생각만 있지 의욕을 내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다), 읽어 본 중에 이책은 다소 밋밋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그래서도 작년 대미를 장식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박범신 작가라면 적어도 나에겐 '뜨거운 문장'의 작가라고 생각했다. 이 뜨겁다는 것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는데,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하자면, 삶을 문장으로 태울 줄 아는 작가고, 에로틱한 문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점에서 그런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고 본다. 

물론 그런 작가의 면면이 이책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밋밋하다고 느끼는 건 뭐 때문인지 모르겠다. 특별히 클라이막스라고 보여지는 부분도 없는 것 같고, 주인공의 투지가 강하게 드러나지도 않는 것 같다. 그저 잘못 만든 지도 때문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고산자 김정호의 관조하는 듯한 자세가 이 소설을 강하게 이끌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맨끝에 작가의 질문이 좋았다. 

고산자 김정호는 누굴까? 천주학쟁이로 핍박을 받거나, 문둥병자는 아닐까? 

도대체 왜 그는 대동여지도에 독도를 그려넣지 않아 일본인의 말거리를 만들었을까?중국과 아라사가 각각 제 것이라고 우기는 압록강 하구의 녹둔도나 두만강 하구의 신도는 대동여지도에 당당히 그려넣으면서, 왜 간도 일대는 모두 빠뜨렸을까? 대마도는 오키나와는? 대체 그는 어떻게 백수십 년 전에 그처럼 오차가 거의 없는 과학적인 축척지도를 그렸을까, 대동여지도 목판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을까. (작가의 말 중에서) 이런 모든 질문이 작가로 하여금 김정호를 형상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서.

 

지구는 편편하였을 것이라는 사람의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어 놓았던 것은 갈릴레오였다. 그런 것처럼 우리나라 지도는 토끼 모양을 하고 있다거나 호랑이가 꿈틀거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도 하는데, 어쨌거나 그런 모양을 발견하기 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백두산을 수차례 올랐다고 하는데 거기 올라서면 정말 우리나라가 그런 모양인 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솔직히 내 나라나 남의 나라나 지도를 그리는 사람은 신기하다. 어떻게 그렸을까?

 

작가는 김정호를 고독한 자로 그렸다. 좀 더 탐험가적 인물로 지도를 그리기까지의 과정 보다 존재의 본질을 찾고 천하를 주유하는 인물로 그린 것이 어떻게도 주인공을 살려내지 못하는 범작이 되고 만 것은 아닌지.   

하긴, 아무리 기고, 뛰고, 날으는 작가라도 거기엔 반드시 범작은 있게 마련이다. 아쉽게도 이 작품이 그런 작품이 되고만 것은 아닌가 한다. 또 모를 일이다. 세월 흘러 다시 읽는다면 또 다른 읽는 맛을 느끼게 될런지. 

나는 이런 식으로 나의 완소 작가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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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06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 오늘 저도 새해 첫 리뷰를 한 번 써볼까, 하고 생각했는데 이모님께서 먼저 써주시니... 저는 박범신의 작품은 한번도 안 읽어봤어요.. 한국문학에는 영 미흡하기에.. 제목만 몇개 알지요. 마...말굽?

stella.K 2012-01-07 20:42   좋아요 0 | URL
이진이가 박범신을 읽기엔 좀 이를거란 생각이 들어.
사실 나도 박범신을 읽은지 얼마 안되거든.
그렇지. 의인이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문학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아.
그래도 쉽게 저버릴 수 없는 것이 또한 우리문학이란다.
특히 나이들면 들수록!ㅋㅋ

프레이야 2012-01-06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의 은교 리뷰가 떠올라요. 님의 완소작가 박범신은 청년이더군요.^^
우리도 올해 나이 한 살 더 먹어도 청춘합시나. 건강하게요.
근데 '고산자'는 별셋, 범작이군요. 그럼요, 대가에게도 범작이 있게 마련이지요.

stella.K 2012-01-07 20:44   좋아요 0 | URL
어맛! 프레이야님 오셨네요.
새해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어요.
그래요. 나이 먹어도 청춘으로 살아요. 건강하게.
프레이야님 올해도 좋은 일 가득가득 넘쳐나길 빌어요.
새해 복 많이 받구요.^^

차트랑 2012-01-07 0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의 리뷰 완전 감동적입니다!!
도서를 선택하는데 더없는 정보를 주신 리뷰입니다.
저는 책을 얼마나 더 읽어야 이런 리뷰를 쓸수가 있는 것인지 ㅠ.ㅠ

강력하고 날카로운 리뷰어를 만나, 감동먹고 갑니다~ 스텔라님~
이런 리뷰를 써주시는 한, 스텔라님은 저의 완소리뷰어^^

stella.K 2012-01-07 20:49   좋아요 0 | URL
에고, 부끄럽습니다. 사실 크게 감동 먹은 게 없어서
리뷰 쓰기에도 약간은 애매하더군요.
그래도 잘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앞으로 차트랑공님의 독서에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하네요.^^

페크pek0501 2012-01-08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틱한 문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점에서" - 맞아요. 저도 예전에 박범신 작가의 에로틱한 문장들을 읽은 기억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요즘엔 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네요.

밋밋하다고 느껴지는 것 - 저도 요즘 웬만한 책에선 큰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걸 느끼는데, 나이탓도 있겠지만 우리 입맛이 고급스러워져서가 아닐까 생각해 봤어요. 음식도 그렇잖아요. 김치만으로도 맛있게 먹던 어린시절과 다르잖아요. 자꾸 더 맛있는 걸 찾게 되고...

그래서 책을 고를 때 예전에 비해 훨씬 신중해져요. 아주 좋은 책만을 엄선해서 골라 있게 돼요. ㅋㅋ

stella.K 2012-01-09 13:44   좋아요 0 | URL
내 말이요.ㅎㅎ
 
나의 이스마엘
다니엘 퀸 지음, 박희원 옮김 / 평사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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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드라마 대세는 아무래도 <뿌리 깊은 나무>에 있지 않나 싶다.
탄탄한 스토리 구성, 좋은 배우들, 화려한 액션.  그런 것들이 어우려져서 볼거리가 풍부하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성공 요인은 그런 부수적인 것에 있지 않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의 정신과 그것이 탄생하기까지의 쉽지 않은 과정이 고스란히 들어나서 감동을 더하는 것 같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세종대왕의 정신 때문이다. 오천 자나 되는 한문은 사대부와 있는 자들의 전위물이었다. 평범한 백성들은 동틀  때 일어나 하루종일 허리 한번 펴보지 못하고 계속 일만하다가 하루를 보낸다. 그들은 일만 하느라 글을 깨칠 시간이 없었고, 그렇지 않아도 양반들은 평민들이 언문을 깨치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깨우치게 되면 자기들의 세계가 위협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세종대왕은 평민도 글을 깨우치고 자기네들이 사는 세상을 함께 인식해 주길 바랐고, 그들을 위한 세상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세종대왕님의 한글은, 사회적 신분의 격차는 많이 줄이는 개기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내재해 있는 근본적인 의식의 벽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채 지금은 자본주의란 이름으로 그 힘을 더 크게 키워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부익부 빈익빈의 빈부격차를 지금도 계속 낫고 있다.
지금도 지구상의 반은 굶주림에 허덕이든가, 영양실조의 위기를 겪고 있다. 그것이 그들 나라의 경제적 구조의 문제와 기후 조건의 문제라고 떠넘기고 있지만, 거기엔 막강한 글로벌한 자본주의가 있는 것을 안다면, 다시 말해 그들의 탐욕 때문인 것을 안다면 이것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은 우리가 결코 용납하거나 두고만 보아서는 안된다. 그래서 또 그것을 일깨워주는 저작물들이 속속들이 등장을 하고 있다.
그것은 확실히 반가운 일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책들이 성인들에게만 국한되어 버린다면 자라나는 아이들은 어디가서 그런 책을 접해 볼 수가 있겠는가.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을 주도해야할 사람들은 누구보다 어린 아이와 청소년들이다. 그들이 그만한 때에 그만한 깨우침을 받지 못하면 변화를 주도하기는커녕 변화에 순응하는 인간 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책이 나와 아이들에게 읽힌다면 그것은 뜻있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고릴라 이스마엘>이란 책의 후속작으로, 나는 아쉽게도 <고릴라 이스마엘>을 읽지 못하였지만(그렇지 않아도 그 책은 품절됐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고릴라 이스마엘의 시각에서 풀어 쓴 책이다. 고릴라라는 동물을 등장시킨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무엇보다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른 시각, 다른 기준으로 이 세상을 해석하고 바라보길 원하는 저자의 의도가 다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물을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생태학적 측면에서 바라보길 원했던 것 같다.  

사실 다른 종(種)은 몰라도 인간이란 종만큼 자연과 부조화하고, 자연을 이겨 먹으려 하는 종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엔 세상을 통제하려고 하는 이기심과 오만함이 항상 서려 있다. 이것을 그대로 방치해 뒀다가는 인류와 지구 전체의 종말을 지켜 보는 건 시간문제다.
모르긴 해도 인류라는 종도 어느 정도까지는 자연과 어울려 살았을거라고 본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계기로 인간은 지구를 파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가 급속도로 병들기 시작한 건 최근 100년간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지구에 인류가 산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 100년 동안 지구를 이렇게까지 병들 수 있게 만들었을까? 정말 생각만 하면 아찔하다. 과연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이 지구를 병들기 이전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런지 의문이다. 그래도 그 노력을 계속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볼 때 '희망'(아니 그건 차라리 소망이라고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희망이 없다면 우리가 살아갈 아무런 근거는 없지 않는가.  

몇년 전부터 블루 오션이란 단어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다른 가치. 다른 판단. 다른 기준. 지금 이대로의 체계와 가치로서는 이 세상을 살릴 방도가 없기에. 그래서 인류는 진화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진화하되 제대로 진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를 깨우칠 필요가 있다.
세종대왕이 참 위대하고 좋은 일을 했다. 우리 글이 있었기에 이 책의 우리말 번역판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읽지 않는다면 그건 우리 손해다. 읽어라. 그리고 깨우쳐라. 우리가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단지 이런 건 있다. 청소년을 위한 책이라면서 쉽게 읽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장 하나 하나에서 느껴지는 건, 저자가 이것을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사려 깊은 사색이 느껴진다. 하긴, 청소년 책이라고 쉽게만 읽혀지는 책을 보라는 법있나? 그냥 오도독 생쌀 씹겠다는 각오로 읽으면 못 읽을 것도 없다. 그만큼 성인에게도 좋다는 말이다. 생쌀도 씹으면 그 나름의 맛있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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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1-27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년책이라고 해놓고 어려운책 무진장 많습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도 선생님께서 청소년이 읽어야한다,
하고 말씀하셨는데. 하아, 첫 장읽고 바로 책 덮었지 말입니다 ㅋㅋㅋ
또 고전문학같은건 ㅠㅠ

stella.K 2011-11-27 20:2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정말 그 책 쉽게 볼 책은 아닌데...
그렇다면 진짜 청소년이 볼만한 책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번역이 더 쉬워져야 하는 걸까?
이 책도 청소년에게 쉽게 권할만한 책은 아닌듯 한데
그래도 미국내에선 무슨무슨 청소년문학상을 탓단 말이죠.ㅠ
 
소설 손양원 : 사랑과 용서
유현종 지음 / 홍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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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에 대해선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가 주기철 목사와 함께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있다는 것과, 순교하기 전, 두 아들을 잃었는데 바로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자를 양아들로 삼은 일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기독교의 유명한 일화다.

솔직히 순교자야 워낙에 기독교 복음 선교가 척박한 우리나라의 시대적 상황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쳐도, 어떻게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자를 양아들로 삼을 수 있을까?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한편 인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고, 사랑과 용서의 원리에 입각해서 더 이상 미워하지 않을 수는 있을 것도 같다. 그를 다시 보지 않는다면 말이다. 또한 그것만으로도 큰일을 해내는 것이라고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타인으로 부터 위로 받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수를 가슴으로 끌어안고 보듬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그건 바보 아니면 성자. 둘 중의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닫는 건, 물론 그런 식으로의 용서도 대단한 일이겠지만, 우린 또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을 얼마나 많이 제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선을 거 왔던가를 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어느 때고 나 자신을 원하시되 100%를 원하지 않은 때가 없으셨다. 왜? 아들을 내어 주시돼 온전히 내어 주셨으니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셨다. 그러므로 나의 죄를 완전히 사해주셨다. 하지만 돌아보면 나는 하나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린 적이 없다. 내가 뭔데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드릴 수 없단 말인가? 사랑하는 관계는 100%가 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게 진정한 사랑의 관계다. 누구는 온전히 100% 아니 그 이상을 내어 줬는데, 누구는 80%만 내어 준다면 그건 온전히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며 상대를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법이라고. 먼저 선의를 베풀면 뒤통수를 맞는 법이니 절대 사람을 믿지 말라며, 그것을 정당화하며 신념처럼 여기기도 한다. 물론 그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손양원 목사의 딸 동희 양이 두 오빠를 죽인 재선을 아들로 삼으려는 아버지 앞에서 울부짖었던 것에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손양원 목사는 그 부분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드렸던 것 같다.

나는, 손양원 목사가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는 장면이 비교적 단순하게 묘사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름 그도 쉽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성경에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렸던 사건과 오버랩이 되기도 한다. 우린 그저 단순하게 아무 생각 없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을 공부하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아브라함도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을 때 나름의 고뇌가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본다. 더구나 하나도 아닌 둘이고, 그것도 확인 사살로 두 번 죽인 자이다. 어찌 보면 아비로서 비참했을 것이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넘어 모멸감까지 느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것을 그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덥석 아들로 삼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괴로움이 생략이 되어 아쉬움은 남지만, 대신 그의 딸이 울부짖는 것으로 작가는 그 부분을 대신 했다고 보여 진다.

하지만 또 어쩌면 손양원 목사는 처음부터 원수를 원망할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것은 사람 자체가 악해서라기 보단, 시대 자체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알지도 못한 채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미쳐 날뛰는 자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그저 탓한다면 시대를 탓하는 수밖에. 후에 판도는 완전히 바뀌어서 공산당에 부역한 자들을 색출해서 처단해야 할 때, 여느 사람 같으면 나라가 대신 원수를 갚게 해 주는구나 약간의 위로는 됐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그런 결단을 하지 않았더라면 한 생명이 그 자리에서 죽음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는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알고 죽게 되길 바랐을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암울하고, 짐승 같은 세대일수록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란 걸 하나님은 친히 손양원 목사로 하여금 증명케 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보다 책을 읽으면서 손양원 목사의 신앙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단순함’ 또는 ‘순전함’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단순하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말해도 믿지 않을 만큼, 인간은 단순하지가 못하다. 솔직히 단순해지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솔직히 나 자신 신앙생활을 하면서 순간순간 얼마나 의심이 많은지, 얼마나 회의가 많은지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신앙은 단순해지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순전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토 달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이유 갖다 붙이지 않고, 그저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을 손양원 목사는 끝까지 지키며 보여줬고, 어떤 결기마저 느끼게 해 줬다. 하지만 한편 드는 생각은 과연 이런 사람이 오늘 날에도 존재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오늘 날은 우리는 너무나 풍요롭고 편안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너도 나도 기득권을 얻기 위해 발 버둥대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목사들조차 할 수만 있으면 좋은 교회, 될 수 있으면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과연 손양원 목사 같은 올곧은 분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가려져 쉬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등불을 켜서 창문 아래 두지 않고 창가 위에 둔다고 하셨다. 그런 것처럼 착한 일, 옳은 일은 드러나게 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의 본이 될 수 있도록 하신다.

지금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 보다 위기라고 말한다. 이런 때에 손양원 목사의 전기 소설을 읽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닫는 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들어 신사참배를 거부한 손양원 목사는 물론 그의 부친 손종일 장로 같은 분이 계셨기에 우리나라는 일제통치에서 해방을 맞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나라의 국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일본의 신사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지만, 다른 우상에 무릎 꿇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신앙의 선배들의 결기를 생각하면서, 나의 신앙은 지금 어떤지 다시 한 번 점검하고 되돌아 봐야할 때라고 본다.  

글이 참 막힘없이 유려하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이미 역사 소설가로 잘 알려진 분의 글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기독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볼 수 있어 좋은 독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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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 2011-10-31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양원 목사님...학교 다닐때 읽었는데...제 믿음의 얕음을 절실히 느꼈죠.
새로나온 책인가보네요.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stella.K 2011-10-31 17:46   좋아요 0 | URL
아, 메르헨님도 크리스찬이시군요.
작가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현종 작가라서
마음이 가더군요.
이번 기회에 손양원 목사님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개기가
되서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근대사와 그 역사 속에서 기독교인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페크pek0501 2011-11-04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법이라고. 먼저 선의를 베풀면 뒤통수를 맞는 법이니 절대 사람을 믿지 말라며, 그것을 정당화하며 신념처럼 여기기도 한다" - 이렇게 생각한다면 세상살이가 너무 살벌해요. 선의를 베풀고 그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 대가가 없으면 실망하죠. 그냥 베푸는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 모두... 베푸는 그 자체도 즐거움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뒤통수를 맞는다?, 우리 뒤통수 치는 사람, 되지 맙시다. ^^ 남 가슴 아프게 하면 즐거운가요? 원래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고, 때린 사람은 괴로워 못 자는 법이죠. ^^

stella.K 2011-11-05 11:15   좋아요 0 | URL
와우, 어제 저의 서재에 오셔서 아주 훑으셨군요.
고맙습니다. 저는 오래된 서재라 그런지 옛날에
알았던 서재인들과도 서로 왕래가 뜸해졌어요.
지금 한창 활동중인 분들은 또 비슷한 시기에 서재 활동을 하신 분들
끼리만 친한 것 같고.
새롭게 누굴 사귀자니 그렇고, 옛 사람과 통하자니 그렇고.
제가 성격이 그래서 그런가, 오래된 서재인의 고충이 이런 거더라구요.
그래도 이렇게 님의 예방을 받으니 정말 반갑고 좋네요.
고맙습니다.^^
 
검은 꽃 - 개정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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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 시대를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역사에 대해 그리 관심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때부턴가 우리나라의 근세사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것은 매스컴의 영향도 무시못하겠고, 아무래도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기와 가장 근접한 시기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때를 두고 새삼 부르는 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일제시대란 표현도 하지만, 구한말 또는 개화기란 말을 쓰기도 한다. 어찌보면 다 그게 그거지 싶어도 이 시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일제시대는 일본의 시각이 많아 보이고, 구한말하면 수탈과 치욕의 우리의 시각이 많은 단어 같고, 개화기하면 이 무렵에 서양 문물이 들어오기도 시작했으니 서양적 시각이 많아 보인다.  

그만큼 여러 가지 시각이 충돌했던 혼란스러운 시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이 시기를 규정하라고 하면 저 세 단어 중 가장 맞는 단어는 역시 개화기가 많지 않을까 싶다. 우린 어쨌든 그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쳐 21세기에 문화를 세계 꽃피웠으니까.  

작가란 무엇인가?  

모든 작가가 다 그렇겠지만, 김영하 작가에 대해서도 호불호는 나뉠거라고 본다. 하지만 작가의 호불호를 떠나 적어도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평가는 기존의 작품과는 다르다는 것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읽어 본 중엔 최고라고 생각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시종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건, 작가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김영하 작가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멕시코로 이민 간 우리 선조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우리나라의 미국이나 하와이 이민사는 알고 있었지만, 멕시코 이민사는 또 좀 생소하지 않은가?  

흔하게 잘 아는 이야기를 작가가 그 자신의 입김을 입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재창조해내는 것도 능력이겠지만, 이렇게 감추어져 있는 이야기를 발굴해 내는 것도 작가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김영하 작가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멕시코 이민사를 알 수 있었겠는가? 물론 모르지는 않겠지. 하지만 역사 교과서에 한 페이지도 차지하지 않았을 것이고, 후딱 넘기면 금방 잊혀질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나도 좀 그런 것이 이것에 대한 자료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이자경의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란 책이 있었다니!). 구한말. 치욕스러운 역사를 사는 것도 괴로운 일인데, 살기 위하여 멕시코로 가야만 했던 또 다른 한쪽의 역사의 사람들. 우리는 그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것을 알려야겠다는 김영하 작가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이 소설은 서울행 비행기에 올라탄 어느 이민사 연구자의 잡담에서 시작되었다.  ......먼 곳으로 떠나 종적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에 나는 언제나 매료되었다. ...... 1905년에 제물포를 떠나 지구 반대편의 마야 유적지, 밀림에서 증발해 버린 일군의 사람들. 그들은 시종일관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그들이 떠난 1905년과 그들이 살아낸 1910년대는 작가로서는 정말 매력적인 연대였다. 한 소설을 끝낼 때마다 작가는 자신이 만든 세계의 명예 시민이 되는 영광을 (홀로) 누린다. 지금 이 순간 나는 1905년생이다. (353~354p) 작가의 말 중에서    

과연 이것이 작가인 것 같다. 작가라면 말하지 않고서는 못견디는 족속들. 그리고 쓰는 동안 그 세계의 명예 시민이 되고, 그 시대의 사람이 되는 것. 김영하 작가는 이로써 자신의 작가로서의 임무를 충실하지 않았나 싶다. 

더불어 작품에 보면 박광수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원래는 신부였으나 신내림을 거부할 수 없어 후에 무당이 된 사람이다. 작가란 바로 이런 박광수 같은 존재는 아닐까?말하자면 무당의 영매를 통해 죽은 자가 말하고, 살아있었을 때 한 많은 생을 죽어어서야 비로소 위로를 받듯, 작가를 통해 잊혀진 존재를 오늘 날에 복원하고 그들의 넋을 기리는 것. 이것이 작가의 일은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면 작가는 미지의 영혼을 위로하는 사람일 것이다. 

국가란 개인에게 무엇인가?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초등학교 때 보았던 알렉스 헤일리 원작 <뿌리>를 떠올렸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뿌리'는 노예의 역사를 다뤘지만, 이 작품은 이민사를 다루었다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책에서 보면, 조선인의 부당한 노동에 대해 항의하자 에네켄 농장주가 채찍을 휘두르자 그들은 당당히 우리는 노예가 아니니 채찍은 휘두르지 말아달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노동력 착취를 당해왔다는 점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던 것도 사실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새삼 깨닫는 건, 우리나라는 대대로 힘있는 군주에 대한 갈망이 있어 왔구나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알듯 역사적으로 힘있는 군주는 그리 많이 없었다. 나라가 나를 지켜주지 못하니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잡초 같은 근성이 우리에게 있어 왔으리라. 작품에서 이민선이 낮선 나라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불안했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진지한 논의가 있었을 때, 박정훈이란 인물을 통해 당시 망국의 백성이 가진 나리에 대한 한이 절절히 베어 나온다.  

저기, 나는 안 돌아가려네. ...... 그까짓 나라, 해준 것이 무엇이 있다고 돟아가겠는가. 어려서는 굶기고 철드니 때리고, 살만하니 내치지 않았나. 위로는 되놈에, 로스케 등쌀에, 아래로는 왜놈들 군홧발에 이리 맞고 저리 굽신, 제 나라 백성들한텐  동지섣달 찬서리마냥 모질고,  남의 나라 군대엔 오뉴월 개처럼 비실비실, 밸도 없고 줏대도 없는 그놈의 나라엔, 나는 켤코 안 돌아가려네.(84p) 

박정훈의 이런 나라에 대한 원망은 낮설지지가 않다. 불과 10여 년 전, 화마에 자식을 잃고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는 이 나라에 잠시도 살고 싶지 않다며 이민을 결심한 어느 전 국가대표 운동선수의 이야기가 오버랩이 된다. 결국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인 것 같다. 나라 안에서 이리 맞고, 저리 채이며 경쟁하며 살던가, 나라를 벗어나 박정훈의 결의처럼 끝까지 살아 남던가?   

이 이야기는 한마디로 주권을 잃은 일국의 백성들이 낮선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사실적이다. 

제2의 검은꽃은 가능한가?   

역사 소설의 면모는 그 시대의 이야기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가지고 읽힐만한가에 있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을 다룬만큼 너무 동떨어져 있거나 개연성이 떨어지면 공감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요즘엔 다른 나라에 번역 수출될 것을 고려해 외국에서도 인정을 받을 것이냐도 중요해졌다. 여담이지만 누구의 말을 들으니, 군대 이야기는 워낙에 특수해 번역해봤자 다른 나라에선 이해받기 어렵다고 한다. 남자들 둘, 셋만 모이면 군대 얘기 빠지지 않는다고 하던데 이게 세계에 나가선 아무런 소용이 없다니 좀 의외였다. 김영하의 이 소설은 번역이 됐는지 모르겠다. 번역이되면 세계인에게도 과연 무난히 읽힐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보편성과 더불어 과연 이 작품이 현대를 되돌아 볼만한가하는 점 또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북한의 탈북자를 생각했다.1905년의 조선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멕시코로 가는 이민선을 탔다. 오늘 날의 탈북자들은 먹고 살기위해 사선을 넘는다. 그들이 북한 탈출에 성공했다고 해서 당장 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동남아를 비롯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우리가 공감하는 것은 아무리 욕을 해도 나라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탈북자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가난한 나라라도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가난한 나라라고 다 불행한 것마는 아니다. 비근한 예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는 방글라데시라고 하는데, 행복지수는 그 어느 나라 보다 높은 것을 보면. 탈북자들은 북한을 탈출하는 순간 나라없는 난민이 되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들이 국적을 회복할 때까지 제2의 검은 꽃은 씌여지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하표 역사소설 

앞으로 김영하 작가가 또 역사 소설을 쓸지 모르겠다. 문학 평론가 남진우 씨의 말대로 그의 역사 소설은 기존의 역사소설이 추구하는 과거 시대의 충실한 재현이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낭만적 영웅화(325p)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역사 소설이 역사적 사실을 근거해서 쓰여진다는 것을 감안할 때 등장인물은 또 어느 실존인물의 재현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런 인물은 충분히 있을 법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의 삶을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게 그렸다고 생각한다(에필로그의 부언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정말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결정하는 건 작가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지어진 이야기라도) 그것은 철저하게 그 시대를 살았던 자들이 평가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은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처럼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동정 받고, 이해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위해 작가는 이 작품을 쓰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번쯤 읽어봐도 좋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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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09-0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는 소외된 계층이나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눈을 돌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그들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엔 탈북자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도 많습니다. 그들을 배려하기보다 오히려 얕보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도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 씁쓸해져요. 그들을 우리로부터 분리시키기보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로서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 건 이제 우리 몫입니다.

멕시코 이민사 같은, 감추어져 있는 이야기를 발굴해 내는 것도 작가의 능력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읽어볼 만한 책 같군요. 그런데 한 가지, 이렇게 길게 또 많이(거의 매일) 쓰시는 님의 그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 홍삼을 드십니까?

^^^잘 읽고 갑니다.

stella.K 2011-09-05 15:11   좋아요 0 | URL
ㅎㅎㅎ 홍삼은...그러면 뭐합니까?
추천도 많이 못 받는 걸.ㅜㅜ
길게 안 쓸려고 하는데 길게 써 지내요. 이상해요.
제가 리뷰 쓴지 10년쯤 돼 오는데 초기에 쓴 건 정말 짧게 썼거든요.
쓴다하는 리뷰어들 흉내내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역시 내 스타일대로 써야 하는 건데...>,<;;
암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이리시스 2011-09-05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민사가 충격적이고 감명 깊었어요. 이후로 김영하 작가의 작품들이 썩 좋진 않았는데 그래도 <검은꽃>이 아직까지도 제일 좋거든요. 벗어날 수도 없는 어떤 특수한 시대나 상황을 힘껏 살아내는 그런 이야기를 제가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초등학교 때 본 <뿌리>를 기억한단 말이에요?^^

stella.K 2011-09-06 13:32   좋아요 0 | URL
그럼요. 굉장히 감동하면서 봤는데.
이런 작품을 워낙 깊이 각인이 돼서 쉽게 안 잊어져요.
무엇보다 원작이 백인의 시각이 아닌 흑인의 시각에서
썼잖아요. 다시 보면 어떨지 모르겠어요.
아이리시스님은 보셨을라나요? 그때가 1977,8년도 작으로 알고 있는데...^^
 
헬프 2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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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좀 당혹스럽다. 이게 다인가 싶어서.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뭔가를 보여줄 것 같은데 뭐가 수줍은 것인지, 아니면 뭔가의 진실을 은폐하고 있는 것인지 보여주다가 말고 자꾸 지엽적인 것에 이야기를 돌려 원점을 흐리고 만다. 이야기가 쭉 진행될 것 같으면서도 그 다음 장에선 또 다른 사람의 새로운 싯점을 보여주고 있어 서서히 짜증도 나고 한숨도 나왔다. 그렇다고 스키터와 아이빌린과 미니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냐면 그렇지도 않다. 각각의 장은 이들 세 사람의 싯점을 서로 교차하며 보여주기는 하는데, 이 셋의 특별한 차이를 모르겠다. 이를테면 한 사람안에 여러 자아가 있어 그냥 혼자 이 사람도  됐다, 저 사람도 됐다, 혼자 독백놀이라도 하는 것 같다. 마치 다중인격인 것처럼.  

게다가 문체 또한 어쩌면 그리도 작위적인 것인지? 도대체 이런 문체는 원작자가 원래 설정한 문체를 그대로 옮긴 것인지, 아니면 번역하는 과정에서 번역자가 의도한 문체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문체 또한 책 읽기에 방해가 되서 독서의 지루함을 가중시켰다. 예를들면 이런 것이다. 이 작품은 세 여인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보여주는데, 이야기는 일인칭 화자의 싯점에서 풀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시도야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다. 그전에도 다른 작가들도 필요에 따라 그렇게 한다. 그런데 이런 작품은 화자인 '나'가 주관적인 화법으로 풀어 나가는데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객관적 싯점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종의 현재진행형조로. 이를테면 TV 드라마에서 가끔 보는 소재이기도 한데, 등장인물이 대사를 할 때 "나는 ...를 무척 좋아해" 이렇해도 될 대사를, 일부러 어리고 유치해 보이려고 극중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그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보는 그것. 내가 대하는 그 사람이 전부인데 이것을 보는 또 다른 내가 그런 나를 또 주시하고 있는데 이런  지문들이 수두룩하다는 거다. 현재진행형적 문체다 보니 마치 모든 것이 의도된 양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전지적 싯점으로 쓸 일이지 뭐 때문에 이런 상투적이고 작위적인 문체를 쓰는 것일까?  

그런데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나는 요즘에 쏟아져 나오는 소설을 선듯 골라 읽기가 겁이 난다. 그것도 잘 썼다는 작품일수록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하다. 도무지 나에겐 이해도 안 되고,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은 작품들에 거의 열광하는 요즘 독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도대체 뭘 보고 그러는 걸까? 과연 이것이 슬프게도 구세대와 신세대를 나누는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요즘 작품에 불감증인 건지, 아니면 그 작품을 읽은 다른 독자들이 조그만 감동에도 쾌감을 느끼는 감정체계가 발달이 되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뭐 남이 어떻게 느끼든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작가다. 현대 소설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영화적 글쓰기다. 어떤 소설들은 정말 영화의 시퀀스를 보는 것 같이 그 분할을 기술적으로 잘 나눠놨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무슨 믿음인지 아예 영화화 될 것을 의식하고 쓰는 작가도 많이 있다. 하지만 난 이런 작가들이 참 우습다. 한마디로 요즘 작가들은(남의 나라 작가들이나, 내 나라 작가들이나) 미안하지만 하나 같이 형식주의에 빠져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이 무엇이냐는 정의도 없이, 무조건 재미만 있으면 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형식만을 추구할뿐 어떠한 주제도, 교훈도 뚜렷하지가 않다. 그러다보니 독자들은 어느 때부턴가 감동과 재미를 혼동하는 것 같다. 이 작품은 누구에겐 재미를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나 같은 경우는 재미도 없었지만). 그러나 어떠한 주제도, 교훈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를테면 난 그런 책을 원한다. 우리가 고기를 먹을 때 살코기만 먹는 것은 그 고기 맛을 충분히 즐기는 것이 아니다. 단단한 뼈야 씹기가 어렵겠지만 가끔 "오도독, 오도독" 하고 뼈 씹히는 맛이 있어야 그 고기의 맛을 충분히 느끼는 거다. 소위 소설도 그런 맛이 있어야 한다. 이책을 보라. 거창하게도 두 권으로 나와 뭔가 굉장한 것을 줄 것  같지만 "오도독"하며 건질 뼈과 살코기가 있는지? 

무엇보다 이 작품은 '블론드'하다. 즉 '백인 취향의 백치미'란 말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과연 이 작품에 열광할 필요가 있을까? 이야기의 발상부터가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1960년대 아직도 흑백인종차별이 팽배한 시절, 기자 아니면 작가가 되길 소망하는 스키터가 뭘 가지고 회사의 상사와 독자의 눈을 사로잡을 이야기를 써 볼까 고민하다, 두 유색인 여인(미니와 아이빌린)의 이야기를 써서 세상에 꼼수를 던진다는 말 아닌가? 그걸 두고 용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걸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진짜 용기가 돼고, 진짜 정의가 되려면 스키터는 그 보다 오래 전부터 유색인들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저 관계의 친밀함이나 호기심 정도만 가지고는 안된다. 그래서 백인들이 유색인을 멸시하고 차별할 때마다 그 마음에 저항의 마음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끌어 올릴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고작 화장실을 따로 쓰는 것에 대한 문제 의식 정도만으로 유색인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의지는 솔직히 철부지의 모험이지, 의식있는 사람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로는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스키터가 그 두 유색인 여자들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썼는지가 구체적으로 나와있지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어쨌든 책이 나오고 독자들의 반응을 예의주시하다 이야기는 어처구니 없게도 끝나 버린다.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그런 문체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뭔가가 나와줄 줄 것을 기대하고  끝까지 완독을 결행했지만, 결과는 완전 참패다. 결국 이야기는 처음부터 그렇게 모험(그것도 반쪽짜리)에 대한 어설픈 해프닝 정도만 보여줄 작정이었나 보다. 그리고 시대가 시대이니만치 마르틴 루터 킹과 존 케네디의 암살을 양념으로 넣어 구색 맞추기를 했다.  

한마디로 난 이런 식의 백인우월주의가 마뜩치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오래 전 보았던 <파워 오브 원>이란 영화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작품은 영화적으로 봤을 때 흠잡을 때 없는 작품이긴 하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새롭게 떠보면 그 영화는 백인우월주의의 또는 영웅주의의 또 다른 작품이다.  왜 백인만이 유색인종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960년이고, 그 보다 100여년 전에는 링컨의 노예해방을 위한 선언과 전쟁이 있었던 즈음이기도 하다. 링컨의 정신은 높이 살만하지만, 과연 노예해방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노예해방의 남북전쟁은 사실 알고보면 흑인 노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을 사이에 둔 힘과 힘의 전쟁이었단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100년이 흐른 상황에서도 유색인들은 신분은 자유로워졌을지 몰라도 사회적 제약은 전보다 더 심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정부가 고작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남편은 술주정뱅이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쓸 수 없다. 그것은 그들에겐 또 다른 구속이 있었다. 그것은 신분 또한 자유하지 못하다는 걸 반증하기도 한다. 

사실 진정한 노예해방이 일어나야 한다면 그들의 정신과 복지 또한 해방이 일어났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링컨은 무턱대고(?) 무력으로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가르치고,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군사 훈련도 시킨 후 그때야 비로소 전쟁을 하든 해방을하든 했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돌이킬 수 없는 먼 과거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결과 신분의 해방만 주었을뿐 유색인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약탈을 일삼거나 새로운 노예계약에 참여하는 꼴을 면치 못했던 것 아닌가?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건, 지금까지 유색인에 대한 백인의 인종차별을 그린 작품이 이전에도 있을진데 같은 백인이 쓴 작품과 흑인이 쓴 작품이 다를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들면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 같은 경우, 원작이나  영화나 그 리얼리티가 선명하게 살아있다. 그런데비해 백인이 아무리 이 문제를 다루더라도 그건 늘상 앞서 말했던대로 백인우월주의나, 영웅주의 형식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블론드 하고, 정말 묘한 조합이다. 

그런데 진짜 모르겠는 건, 이 50년전 이야기가 오늘 날 2011년과 무슨 연관이 있어 보인다는 건지 모르겠다. 인종차별은 그때나 지금이나 늘 있어 온 거고, 문체의 현대성을 들어 굳이 이 작품의 위대성을 강조하는가 본데, 이런 주례사도 알고 보면 다 백인들이 쓴 거 아닌가? 과연 작가가 등장시킨 유색인들도 이 주례사에 동의했을지 의문이다.   

자, 이만하면 난 이 작품에 대해 감동할 수 없는 이유를 다 밝혔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도 이 작품을 사서 읽고 감동할 독자가 있다면 그건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이긴 할 것이다. 난들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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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2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2 13: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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