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나이프 엠마뉘엘 베르네임 소설
엠마뉴엘 베른하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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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을 칼로 찌르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얼마나 부조리한가?

사람을 찔렀으면 살인이거나 살인미수가 되고, 경찰이 오고, 구급차가 와 한바탕 난리가 일어나야 하는데 운이 좋은 건지 몽롱한 꿈을 꾸고 있는 건지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친구 조차 어떻게 된 거냐고 묻지도 않고 그저 몸이 안 좋은 것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주인공은 모른 척 시치미 떼고 다시 일상을 살아도 될 텐데 자신이 칼로 찌른 상대가 누군지 추적해 보기로 하고 몇번의 조회 끝에 마침내 상대를 만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또 묘한 건 그렇게 만났음에도 서로에 대한 확인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내가 당신을 찔렀나요?'라든가 '댁이 나를 찌른 사람?'이냐고 되묻지도 않고 둘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즉 살인미수자와 살인당할 뻔한 사람과의 사랑과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 있을까? 가끔 인간은 자신을 위해한 범인을 사랑하게 되는 정신작용에 휩싸이기도 한다는데 이 두 사람도 비슷한 것 같다. 

격렬한 감정적 사랑 후에 오는 강렬한 질문, "이 사람은 왜 나를 사랑하는가?"이건 좀 어리석은 질문인 것 같긴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처럼 가장 본능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결국 주인공이 알아 낸 건 그렇게 이상적인 것이 아니다. 즉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건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건전하고 이상적인 남녀간의 사랑 같은 것으론 이해할 수 없지만, 인간의 욕망의 원리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인간의 욕망이란 게 그다지 건강하고 정상적인 것은 아니니까. 그것을 안 순간 주인공은 사랑하는 애인이 자신을 언젠가 떠날 것을 알고, 또 떠나 보내지 않기 위해 그 사람이 원하는 사람으로 연기할 것을 다짐하는 것에서 이야기는 끝이난다. 결국 사랑은 없거나 사랑의 다른 말은 욕망이란 말일 것이다.

     ​          

처음엔 참 독특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가 시작되고도 한동안 대사없이 주인공의 상황과 생각만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게다가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같게 한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작가가 오랫동안 시나리오를 썼단다. 어쨌거나 프랑스 소설이나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선 나쁘지 않은 독서경험이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알고 싶어 자꾸 의심하게 만들었다. 즉 내가 지금 잘 읽고 있는지, 뭐 하나 놓치고 지나간 건 없는지. 물론 이건 나의 평소의 독서습관이긴 하다. 그리고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건 어렵고 재미없는 책 보단 내가 좋아하고 흥미를 느낄만한 책에 더 집중된다.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특히 사랑에 빠진 여자의 심리를 잘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또 그것이 나중에 어떤 반전에 이용되는지를 되집어 보면 작가의 필력이 정말 대단하다 싶다. 나중에 꼭 한 번 다시 읽게될 작품 같고, 더불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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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12-2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겠는데요...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니. 게다가 사랑에 빠진 여자의 심리라니.
사랑에 대해 뭔가 한 수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관심 가네요.
아무래도 모르겠는 게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닐까 해요.
드라마를 보니깐,
여자를 임신까지 시켜 놓고 싫다고 도망가는 남자가 있질 않나,
미워하면서 이혼까지 한 마당에 아내에게 남자가 생기니까 질투를 하지 않나,
밉다고 서로 할퀴며 살다가도 남편이 아프기라도 하면 눈물을 빼지 않나...
도대체 사랑의 감정이란 건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다르게 표현하면,
알 수 없는 건 인간, 이 되겠습니다.

벌써 한 해 마무리해야 하는 시간이네요. 잘 보내시길...

stella.K 2014-12-21 11:38   좋아요 0 | URL
ㅎㅎ 전 이 책 의외로 반전이 있어서 좋았어요.
100페이지 조금 넘는 책인데 정말 깔끔하더군요.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는 것들 거의 대부분은
집착이고 미친상태인 것 같아요. 언니가 예로 들으신 것만 해도
보면 말이어요.ㅋ

네. 고맙습니다. 언니께서도 마무리 잘하셔요.^^
 
안중근, 아베를 쏘다
김정현 지음 / 열림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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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2004년 한일월드컵을 양국이 함께 치르게 되었다고 했을 때 만감이 교차했다. 왜 이렇게 되야되는 것일까? 그전에 올림픽도 치뤄보고, 아시안게임도 치러봤는데 하물며 월드컵 하나 자국의 힘으로 치루지 못할까? 도대체 세계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어떻게 보길래 이런 결정이 났을까 의아스러웠다. 

뭐 좋은 뜻으로 받아 들일려면 받아 들일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역사적으로도 그다지 좋은 관계는 아니었으니 이 기회에 우호적 관계가 돼라고 그런 건 아니겠는가?  

그런데 또 보면 꼭 그런 선한 의도만 있었을까? 그건 마치 담임 선생이 유독 싸우는 같은 반 악동 두 명에게 뭔가 둘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미션 하나를 주고(그래봐야 교실청소나 주번이 다겠지만) 그러면 친해질까 아닐까를 지켜보겠다는 의도와 같은 건 아니었을까? 의심이 많은 나로선 별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다.

솔직히 나 같으면 안 했으면 안했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월드컵이 보통 기횐가? 한 번 치르면 100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 국제 경기다. 함부로 고사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나마 우리가 일본 보다 앞선 기량으로 대회를 마쳤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독도 문제며, 위안부 문제 등 마치 찰거머리처럼 달라 붙어 온갖 문제란 문제는 다 일으켜 놓고 해 볼 테면 해 봐. 뭐 그런 식이다. 도대체 일본과 우리나라는 무슨 마가 끼었길래 이러는 것일까? 이제 좀 청산할 거 청산하고 쿨하게 각자의 길을 가면 안 되는 걸까? 오죽하면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다고 외치며 죽어 갔던 것처럼, 누구라도 혀를 깨물며 나는 일본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죽으면 이 문제가 해결이 될까? 하긴, 그래봐야 웃음거리 밖엔 되지 않겠지.

지난 여름을 지내오면서 한 국무총리 후보가 민족 비하 발언을 했다고 결국 총리 후보를 사퇴 했다. 하지만 우리 엄마 세대만 하더라도 솔직히 맞는 말이라고 한다. 적어도 부인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전후 맥락은 동영상을 보지 않아 뭐라 말하기가 어렵지만 그도 마냥 우리나라를 비하 하자고 했던 말은 아닐 것이라고 본다.
언제적 동영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요즘 그런 말을 하면 오해의 소지는 있어 보이긴 한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앞서가는 민족인데. 더구나 남의 집 애는 흉 봐도 되지만 우리 집 애 흉 보면 기분 나쁜 것도 사실 아닌가?  

김연아를 비롯한 스포츠 스타들 한류 스타들 그들이 한국을 알린 건 사실이지만 정말로 애국한 건가? 그건 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냥 돈 번 거고 겸해서 나라도 알린 것 아닌가? 일부에서는 어떤 아이돌이 부른 노래가 하도 좋아 그걸 애국가로 지정해 달란다. 재밌자고 한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좀 해도 너무 하지 않나 싶다. 나도 애국의 길에 대해 학교에서 따로 배운 기억은 없지만 이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다. 나라를 되찾겠다고 피를 토하며 쓰러져갔던 우리의 조상님이 알면 경천동지 할 일은 아닐까 싶다.

나라를 지키는 방법. 어떻게 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인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저 무조건 일본의 만행에 비난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인가? 그건 누군가가 나는 일본이 싫어요 했다가 오히려 웃음을 사는 것 보다 더 웃긴 일이 될 수도 있다. 요즘엔 이승복처럼 공산당이 싫어요 해서 먹힐 시대가 아니란 말이다. 

적어도 난 이 책의 출현이 반가웠다. 
우린 흔히 우리나라와 일본의 역사를 독일과 홀로코스트의 역사에 비유하곤 하는데, 즉 독일은 자신의 역사를 반성하고 용서를 구했는데 일본은 그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출판이 영화 또는 기타 공연에서 자기네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들을 한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얼마만한 노력을 기울였을까?   

물론 찾아 보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물이 그다지 많아 보이진 않아 보인다. 그나마 뮤지컬에서 <명성황후>나 같은 안중근을 다룬 <영웅> 정도와 최근엔 이순신 장군이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는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나름 문학계에서 지명도 있는 작가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이 반가웠던 것이다. 그러므로써 안중근이란 역사적 인물이 다시 조명을 받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의 말이 좀 비장하게 들린다. 작가는 그러지 않아도 그의 100주년 기념으로 어느 극단에서 대본으로 써 달라는 걸 고사했다고 한다. 나름 성인이라 할 수 있는 분의 일대기를 쓴다는 것이 굉장한 부담이었나 보다. 그러나 그는 소설로 완성해 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안중근도 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니 책을 끝낼 수 있었다고. 

그러나 독자인 내가 읽어 본 바에 의하면 안중근은 그냥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다. 무학이었고, 무직이었지만 상당한 학식을 가지고 있었고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특별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또 어쩌면 작가의 입김일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안중근의 평전과 자서전을 바탕으로 썼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코 입김만으로는 그렇게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등을 죽일 수 있었고, 재판정에서 일본이 우리나라에 지은 죄에 대해 15가지로 말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 책은 약간의 판타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즉 첫 장면이 안중근이 아베를 만나는 장면과 마지막엔 그가 아베를 총으로 쏴 중태에 빠트리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선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으로 처음에 나는 작가가 너무 무리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다. 그냥 안중근의 전기 소설로 써도 무방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엔딩에서 저자가 왜 그런 시도를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를테면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한 지금의 일본 아베 수상에 대한 분노와 우리가 완성해야 할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역설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알겠지만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그가 옥중에 있을 때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완성을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결국 국가 원수를 죽인 혐의가 인정돼 31세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가 죽었다고 해서 그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의 저항정신, 그의 삶은 오늘 날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동양평화론도 잊혀지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안중근이 만일 살아있다면 정말 또 살인을 저질렀을까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결코 이등박문에게 총을 겨누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을 의연히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안중근이 아베에게 총을 쐈다고 했을 때 작가가 안중근을 두 번 살인자로 만드는구나 했다. 이 설정을 과연 그가 살아 있다면 받아 들였을까?

그런데 과연 그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는 이등을 죽이겠다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었다. 이등을 죽임으로 인해서 자신이 체포되고 재판정에 설 때 그렇게 일본의 15가지 죄과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 일을 감행했다. 마찬가지로 아직도 깨닫지 못하거나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일본을 위해 그는 기꺼이 암살범이 되길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안중근이 우리나라에서나 영웅으로 칭송하지 아직도 일본이 자신들의 죄과를 인정하지 않으니 사건으로만 보자면 여전히 미제의 사건일 뿐이다. 해결되지 못한 미제의 사건으로 남는다는 건 일본에게 사과 받아야 할 부채가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안중근은 기꺼이 또 다시 저격을 감행할 것이란 말이다. 그뿐 아니라 그가 이등을 저격하고 보여준 그의 태도나 행동들은 비장하면서도 가히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는 또 그러한 태도와 행동들을 보여 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에 해결되지 않는 의구심이 남아 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 왔기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게 단순히 오랑캐 기질이니 침략적 기질이니 하는 것으로 설명이 되는 것일까?

안중근이 죽기 전 그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

아들 중근에게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내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317P)
  
세상에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어미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어미는 물 한 모금인들 편안히 마셨겠는가? 또한 어미뿐이겠는가? 그의 아내와 가족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죽어간 사람이 수천, 수만인데 이게 단순히 오랑캐 같은 일본의 침략과 만행 때문이라고만 해도 되느냐는 말이다.
역사이래로 우리의 국왕과 지도자들은 나라를 온전히 지킬 마음이 있었을까? 그런 의문 또한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강대국의 틈바구니 어쩌구 하면서 나라의 지형의 문제로만 돌려도 되는 것인가? 과연 우리는 나라를 지킬 의지가 있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누구는, 일본은 우리가 우리나라를 아는 것 보다 우리나라를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무서운 말이다. 그러니까 일본이 그런 헛소리를 해도 된다고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어디가서 김연아가 애국을 하니, 어느 아이돌 노래 가지고 애국가로 삼자. 한류가 우리나라를 지켜줄 것이다 이런 철없는 소리 함부로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학교를 떠나 온지가 너무 오래되긴 됐다보다 이제까지 한국사가 필수가 아니었단다. 우리가 역사가 아니면 어디서 애국의 길을 배우겠는가? 과연 우리나라 교육은 재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책이 조금 더 재밌고 흥미로웠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한다. 이왕 판타지를 구사하겠다면 말이다. 좀 허구의 인물도 넣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또 그러기엔 작가는 진실을 추구하고 싶었고, 더불어 자신의 생각도 논리적으로 세우길 바랐던 것 같다.
그래도 이만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노고가 느껴진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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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8-3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정현 저자가 '아버지'란 장편소설을 쓴 작가가 맞네요. 저자 사진을 보니..,
그 책이 베스트셀러였던 옛날, 제가 그 책을 읽고 실망했다는 거죠. 밑줄을 그을 데가 하나도 없었어요...
이 사람, 소설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구나, 했어요.
논픽션을 읽는 느낌이랄까요. 문학의 맛이 하나도 안 났어요.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이젠 문장이 많이 좋아졌겠죠?

어느 책에서 그러는데 문장력은 얼마든지 노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하네요.
글 잘 쓰기 위한 사고력이야 독서로 그리고 체험으로 커버해야겠지만...
저도 '노력'이란 놈을 가져볼까 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stella.K 2014-08-31 18:15   좋아요 0 | URL
헉,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인기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예나 지금이나 지나치게 주목받고 잘 팔리는 소설은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버릇이 있긴 하죠.
아무튼 아버지가 대박을 칠 때 저는 안 봤고
마침 안중근에 관심있고, 작가도 알겸 기회가 있어 보게된 거예요.
어떤 리뷰어가 언니 비슷한 지적을 하긴 했어요.
이게 소설 맞냐고. 특히 판타지.
그런데 저는 이맘도 읽기에 나쁘지는 않다고 봤어요.
물론 이 보다 더 잘 쓴 전기 소설을 읽는다면 또 다를지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작가가 대본을 쓰지 않는 건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설 쓰기와 대본 쓰기는 좀 다른데 작가가 자기 자신을 잘 알았던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4-09-04 17:35   좋아요 0 | URL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베스트셀러는 내용만 좋으면 되지 문장력은 상관 없지요.
중년 남성인 아버지를 그렇게 구체적으로 그린 작품이 없었거든요. '아버지'라는 소설로 대중은 아버지의 고독한 위치를 알게 된 거죠.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서 관심 갖게 된 거죠. 그전까진 주로 어머니, 모성... 뭐 이런 데에 주목한 소설이 많았죠.

예를 들면 명퇴, 라는 말이 처음 나올 때 누군가가 회사에서 명퇴 당한 중년 남자를 사실적으로 잘 그려 냈다면(문장력이 탁월하지 않아도) 그것도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겠지요. 독자들의 공감만 얻을 수 있다면요. 대중은 탁월한 문장력을 보고 책을 사기보단 내용을 보고 사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 같이 글을 쓰는 사람들은 문장력을 따지겠지만요...
결과적으로 김정현 작가가 그 시대와 딱 맞는 소재를 잘 선택한 결과 같아요.(그때 명퇴, 라는 말이 있었나 헷갈림.) 이것을 소재주의라고도 하지요. 잘 선택한 소재로 덕을 보는 거요. '88만원 세대' 같은 책이 그래요. 이 책처럼 시대와 어울리는 내용으로 얼마든지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지요. 문장력은 베스트셀러에서 중요한 변수가 아니고, 문학상 수상작으로 뽑을 땐 중요한 변수겠지만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stella.K 2014-09-04 19:01   좋아요 0 | URL
오, 맞아요. 이렇게 명쾌할수가?
꼭 언니한테 과외수업 받는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TV 피플 북스토리 재팬 클래식 플러스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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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단편집을 읽기는 얼마만인가? 난 하루키 팬은 아니지만 이렇게 저렇게 읽어 온 바에 의하면, 하루키는 장편 보단 단편을 잘 쓰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아주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이란 단편집이나, 아예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단편집 등을 읽어보면 정말 아기자기 하면서 그만의 독특함이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치즈 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을 읽고 있노라면 정말 하늘에서 깨가 부슬부슬 쏟아질 것만 같고, 꽤 사랑스런 소설이란 생각을 했다.

 

나는 그 기대와 설렘을 안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읽어 가면서 느꼈던 건, 몽환적이면서도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독특함은 여전했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기대했던 감동은 그다지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최근작도 아니고, 오히려 작가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걸 다시 한 번 재편집한 책인데, 하루키는 이 단편 소설들을 쓰고 있을 즈음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이란 소설도 썼을 것이다. 그런데 난 어쩌면 그리도 치즈케이크만을 편애했던 것일까?  

 

특히 이 책에서 한 작품인가를 제외하고 섹스 얘기가 안 나오는 작품이 없다. 그만큼 그건 그의 주특라고 생각하는데, 난 거기서 내가 하루키를 너무 많이 알아 버렸구나 하며 식상해 버리고 말았다. 이는 내가 '치즈케이크...'를 좋게 기억하는 건 아마도 섹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언젠가 그는 한 인터뷰에서, 본인은 섹스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는다고 했던 걸 기억한다. 솔직히 그렇게도 생겼다. 그의 외모도 외모지만 그의 생활은 거의 수도승에 가깝지 않은가? 어느 하나 흐트러짐이 없다. 작가가 되려면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삶을 경주하는 작가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드라마나 영화 같은데서 담배나 뻑뻑 피워대고, 인스턴트 음식으로 대충 떼우는 고시생과 혼동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 물론 작가지망생의 이미지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자신의 작품에 섹스는 거의 빠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게 또 아주 묘사가 뛰어나고, 감동(?)스러우냐면 그렇지도 않다. 지극히 단순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솔직히 없어도 되는 건 아닐까? 어떤 땐 좀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뭘까? 한번쯤 뇌까리게 된다.

 

글쎄, 나도 모를 일이지. 작가 자신이 정확히 얘기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 식대로 추측을 해 본다. 그건 하루키가 섹스를 (수컷의 그것처럼)지극히 일상적으로 생각하거나, 소설에서 섹스 이야기가 빠지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거나 그렇지 않을까?

 

뭐 같은 예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 오래 전, 습작품으로 유년 시절의 성심리를 소재로 한 작품을 쓴 적이 있었다. 워크숍 작품으로 기한 내 내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어떤 작품을 쓸까 고심 끝에 그것을 소재로 했던 것이다.

운이 좋았던지 나는 대체로 좋은 평점을 받았다.

 

그때 깨달았다.  짧은 시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써라.

더구나 나는 성인의 그것이 아니라 유년에 있는 아이의 그것으로 잡았던 게 유효했던 것 같다. 좋은 점수를 받아서 좋긴 했지만, 내가 뭐 섹스중독자도 아니고 이것에 맛들여 글을 쓸 때 계속 이런 걸 쓰면 어쩌나 겁이 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 후 나는 그 작품을 다시 꺼내보지 않았고, 결국 흐지부지 어디론가 사라져 지금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좀 아쉽긴 하다. 그거라도 붙들고 있다가 훗날 등단을 노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건, 그 이야기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쓴 소설이니 어렴풋하게라도 기억이 남아 있어야 할 텐데 작품을 쓴 기억만 나지 내용은 전혀 기억에 없다. 

 

남자는 섹스를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자는 마음이 동해야 몸도 따라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하루키가 알았더라면 그래서 여성 독자를 조금이라도 배려한다면 섹스를 과연 그런 식으로 표현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더 의미롭게 표현했거나 아예 없는 것으로 하지 않았을까? 

 

남자가 섹스를 말하는 것도 참 여러 가지라는 걸 나는 비교적 최근에야 알았다. 보통 신앙을 가진 남자들은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하지만 그들도 어딘가에서는 할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 어느 중년의 집사가 무슨 모임에서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나름 진지하게 하는 걸 들었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순간 섹스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비해 어떤 타입은 일부러 들어보라는 식으로 마구 지껄이기도 한다. 그땐 여자라곤 나 하나였고 시커먼 남자들이 서너 명 있었다. 그리고 가볍게 한 잔 하는 자리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나를 그다지 안 좋아한다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는 남자였다. 우리가 뭐 10대 20대도 아니고, 새삼 내외할 것도 없지 않냐해서 까발리는데, 그건 공교롭게도 자기 와이프와 새로운 체위에 돌입하려다 냅다 차였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못 들어 줄 건 없지만, 우리나라 말은 팩트가 아니라 뉘앙스라는 거. 나는 속으로, 이 인간이 이 타임에서 왜 이런 주둥이를 놀리는 걸까?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웃고 넘겼는데 속으론, '재밌냐? 니 와이프가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아냐?' 했다.

 

그런데 비해 하루키처럼 일상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그냥 식욕을 채우고, 스포츠 하듯 하는 것. 뭐 그런 것 말이다.

 

그러고 보면 하루키는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긴, 그의 사진에 찍힌 얼굴을 보고 매력적이라고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그냥 작가일 뿐이다.

 

최근 새롭게 시작한 노희경의 드라마가 있다. 거기서 보면 조인성이 작가로 나온다. 그것도 추리작가. 작가란 누가 보기엔 개떡 같은 상황도 교묘하게 이용하고 울거먹는 족속들이다. 그게 다른 사람 이야기라면 화낼 필요도 없는데, 이것이 내 상황을 이용해 먹는 거라면 정말 화가 많이 날 것이다. 그때 우리의 공효진이 그런 말을 한다. 이 상황이 재밌냐고, 재미있어서 니 작품에 써 먹을 생각하냐고. 그러자 조인성이 멋있게 한방 날린다. 그래. 그렇다. 나의 상처도 작품에 이용해 먹는데, 남의 상처 좀 이용해 먹는 게 뭐 어떠냐고.

 

그게 좀 치사하긴 하지만 맞는 얘기다. 세상에 비밀이 어딨겠는가? 4사람 내지 6 사람만 건너면 우린 다 아는 사람들이라는데. 하지만 중요한 건, 나의 아픔이 그 누군가에겐 약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처 받은 위로자라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독자들은 소설을 읽는 것인지도 모르고. 

 

지금까지 하루키에 대해선 많이 알려진 부분이 있고, 여기 실린 작품들은 비교적 그의 초기에 해당하는 작품이고 보면,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처럼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작품이 몇 눈에 띈다. 이를테면, '우리들 시대의 포크로어- 고도 자본주의'라든지, '잠' 같은 작품은 확연히 그런 게 느껴진다.

 

특히 '잠'에서의 주인공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느낀 부분들을 묘사하는 이라든지, 불면증 때문에 잠에 대한 책들을 뒤적인 것을 읽으면 이건 정말 하루키가 언젠가 한 번은 불면증에 시달렸고 그것을 달래려고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잠을 연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만든다.

 

또한 '우리들 시대의 포크로어-' 같은 작품은 작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 보는 것 같고(이때도 섹스 얘기를 하는데 정말 재미없게 쓴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즉 말하자면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서 고백록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행여나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독자나 인터뷰어에게 부탁하건데 이거 당신 이야기냐, 아니냐 그런 걸로 작가를 짜증나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작가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요리하는 사람들이다. 내 이야기, 남의 이야기 구분하지 않는다. 다른 물어 볼 것도 많은데 그런 촌스러운 질문으로 귀한 기회를 허비하는가.   

 

그런데 얼마 전에 안 사실인데, 일본에선 하루키가 우리나라만큼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 나라에선 안티도 많다고 한다. 그런데 비해 우리나라는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느낌이다. 우리나라의 한 권위있는 출판사는 그의 작품을 세계 명작  목록에 넣었다고 해서 구설수(?)에 올랐다고 하는데, 나 개인으로도 하루키는 확실히 좀 애매한데가 있는 작가는 아닌가 싶다. 적어도 그의 작품은 기존의 잣대와 사고방식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그만큼 새로운 사고방식과 열린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작가는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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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8-13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책이군요. 이런 책이 나왔는지 몰랐어요.
그의 책은 몇 권 읽었는데 좋았던 것도 있고 그저 그런 것도 있었어요.
작가라고 해서 다 잘 쓸 수는 없는 거겠죠.

늦여름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에요. 만끽하시길...

아, 공감3 중에서 하나는 제가 누른 거랍니다. ㅋㅋ

stella.K 2014-08-13 12:24   좋아요 0 | URL
아, 오랜만이십니다.
저도 하루키는 별론데 워낙에 매스컴에서 띄워주는 게 있어서
그 부분은 좀 마땅치 않아요.
그냥 열심히 쓰는 작가로는 인정을 해 주겠는데 말이죠.
전 단편집이 좋았는데 오랜만에 읽었지만 그도 별로더군요.

이 리뷰 오랫동안 공감1이었는데 갑자기 3으로 올라가 있어서 놀랐어요.
그중 언니가 누르신 거군요. 고맙습니다. ^^

2014-08-13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초교회 잔혹사
옥성호 지음 / 박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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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래 전 한 영화의 제목에서 따 온 거라는 건 확실해 보이는데 그것을 교회와 접목시켰으니 저자를 생각할 때, 이 사람 뭔가 작정을 해도 단단히 작정했구나 싶었다. 

 

더구나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이 교회를 탄압하기 위해서 쓴 거라면 그럴 수 있겠거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크리스찬이다. 크리스찬이 이렇게 자극적인 제목을 써도 되는 것일까? 요즘 시쳇말로 삽질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저자의 지금까지의 책을 돌아보건데 이런 책을 저자가 아니면 누가 쓸까? 일부 수긍이 가기도 한다. 저자의 책들은 일부 몇 권의 책을 제외하면 교회와 기독교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서슬퍼런 책들이 많다. 그리고 난 그런 책들이 싫지 않았다. 이 책도 그런 맥락의 책은 아닐까? 기대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더구나 소설의 배경이 되는 교회가 요즘 언론과 반대 세력의 질타를 받으며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교회가 아니던가? 공방이 뜨거워 배경이 되는 S교회에서는 이 책에 명예훼손 여부를 검토한 후 고소를 할지 말지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모르긴 해도 판매중지가 불가피 하니 그러기 전에 읽어 두는 게 좋겠다 싶기도 했다(그런데 아직까지는 그런 불행한 사태엔 이르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난 나의 느낌부터 얘기하자면 글쎄, 제목과 내용이 그다지 매치가 되는 느낌은 아니다. 즉 이 만한 소설에 그런 제목이 필요할까? 다른 제목을 했어도 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저자가 전문 소설가는 아니니 그런 것을 감안한다면 이만큼 쓴 것도 나름 나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조나 등장인물도 (소설가가 아니어서인지는 몰라도) 깊이가 없고 왠지 급조했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교회가 기업화되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려고 했던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도 결국 목사의 자녀고, 현재 주의 종이 되기 위한 수련의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무래도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싯점이 S 교회의 현재를 배경으로 했다는 걸 부인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소설과 겹쳐 보인다.  

 

어쨌거나 그렇게 생각해 보면 교회의 기업화에 대한 우려는 못해도 20년 전부터 논의가 되어왔던 거지 김건축 목사(S 교회로 보면 지금의 담임 목사)가 부임한 최근의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20년 전이라고 한다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S교회에 선대 목사님이 살아 계셨을 때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빠진 것이 있다. 그것은 김건축 목사가 담임 목사로 부임하기 전 교회에 대해 선대 목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목회를 해 왔는지 그 행적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는 거다. 물론 미루어 짐작은 할 수 있지만, 독자더러 미루어 짐작하게 만드는 것과 작가가 확실하게 다루는 것과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나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왜 작가가 이것을 빠트렸느냐는 것이다. 둘 중 하나 아니었을까? 생각을 못했거나, 다루었다면 작가의 아버지를 직간접으로라도 표현 해야하니까 어떤 식으로라도 피해 가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완벽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보인다. 

 

또한 소설의 서초교회든 지금의 S 교회든 대중심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사람의 마음은  그렇다.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땐 알게 모르게 비판도 하고, 흉도 보지만 그러다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정이 남아 있어 이 사람이 살아생전에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부족했는지 거의 기억 못할 정도가 되어버린다. 

 

적어도 내가 보는 S교회는 아직도 선대 목사에 대한 추모의 정이 남아 있어서 그 분의 그림자가 교회에 깔려있다. 물론 나도 그분을 존경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건 그분이 돌아가시고나니 그 분의 빈자리가 너무 컸던 건지 마치 그분은 완벽한 인격에 완벽한 목회를 하셨던 것처럼 느껴져 조금 심하게 말하면 지금은 거의 우상처럼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분을 여간해서 놓아 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선대 목사는 그렇게 완벽한 분이 아니셨다. 물론 그분은 완벽을 향해 몸부림 쳤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추모의 정이 너무 강해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어 보인다. 그래서 이런 가설도 가능하다. 즉 지금 겪고 있는 S 교회의 문제가 대중심리로 볼 때 자꾸만 현재의 담임 목사와 비교가 되고, 담임 목사는 살아 있으니 그가 잘못한 것은 더 크게 보이고, 상대적으로 선대 목사는 돌아갔으니 그 분의 잘한 면은 점점 더 부각되는 것이라면? (현 담임 목사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담임 목사(소설에서 김건축 목사)가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선대 목사와 다른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재미있는 건, 소설에 보면 살생부가 나온다. 새로운 목사가 부임을 했으니 물갈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지만, 기존에 있는 사람이라면 살생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살생부가 목사의 세계에서만 존재할까?(그 부분을 읽는데 난 약간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지 않다. 실제로 난 그 문제가 된 S 교회 살생부에 내 이름이 올라간 경험이 있다. 15년 전 일이긴 하다. 그렇다고 내가 그때 무슨 직원이었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나는 그때 일개 주일학교 교사였을 뿐이다. 단지 그동안 주일학교를 담당한 전임 목사가 사임을 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목사가 오면서 나를 살생부에 기록해 둔 것이다. 몰론 그 목사는 전부터 나를 알고 있는 목사다. 

 

같은 목사들끼리는 직급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바뀌면 그 내각도 바뀌는데 자기 좋은 사람으로 배치하는 거야 어느 회사 조직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봉사하는 성도에게 무슨 살생부일까 믿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이 분이 살생을 하는 것이다. 얌전히 가만히만 둬도 열심히 봉사할 사람들을 전임 목사의 내각 구성원이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중상모략을 일삼아 내치는 것이었다. 그 목사님 지금 뭐하냐구? 어느 수도권 지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목사로 맹활약 중이시다.

 

그렇다고 그 살생부의 목사님이 주일학교을 오래 역임했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2년인가 3년도 못 되어 교회를 나와 개척했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오래 있을 것도 아니면서 그런 소동극(?)을 벌이다니. 허탈한 웃음과 함께 대단하다는 말 밖엔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나를 비롯한 그 살생부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 목사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사람들도 아니었다. 일개 주일학교 교사가 하나님의 종에게 어찌감히 역심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난 살생부의 목사가 자신의 권위는 들어내고 싶어 안달 난 발정난 개처럼 보였다. 그게 S 교회 선대 목사가 아직 생존해 계셨을 때 내가 목도하고 직접 겪였던 일이다. 물론 선대 목사님은 결코 알 리 없는 일이겠지만, 그때도 S 교회는 결코 작은 교회가 아니었다. 물론 지금의 규모 보단 훨씬 작지만 그때도 그런 조짐이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것이 문제라면 사실은 선대 목사님이 계셨을 때 이걸 지적했어야 한다. 

 

저자에겐 좀 미안한 얘기지만 이런 식의 소설을 쓴다면 오히려 나 같은 사람이 써야되지 않을까? 나는 교회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니까. 어쨌거나 그렇게 생각하니 작가는 어느 특정인을 의식해서 쓴 것도 같고, 큰 교회의 문제를 일반화 해서 쓴 것도 같다. 그런 교회 목사가 한 둘이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저자가 TV 인터뷰에 나온 걸 봤는데, 그는 이 이야기가 전혀 없는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사실만을 전하는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논지를 슬쩍 피해가며 얘기한 것을 보았다. 왜 그런지를 이 책을 보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난 그 살생부의 목사가 교회를 떠나 가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오늘 날의 주의 종이라는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건 자신이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교회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이다. 교회는 목사의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누구의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때 확실히 알았다. 하나님과 성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왜냐하면, 나는 S 교회에 남았고, 그 목사는 S 교회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 목사는 그야말로 종처럼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 목사가 그걸 알고 떠났을까? 아니. 모르긴 해도 그때도 모르고 떠났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모를 것이다. 죽을 때쯤에 깨달으려나? 그래도 지금 S 교회가 당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조금의 경각심을 갖긴 하겠지. 하지만 그 근간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S 교회를 다니면서 제일 많이 고민했던 건 왜 교회가 이상적인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그냥 조직처럼 느껴지느냐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직분 맡은 것이 무슨 큰 벼슬을 한 것마냥 편을 가르고, 세력을 규합하고 등등. 물론 선대 목사님이 교회에 대한 고민을 많이했겠지. 하지만 그 고민이 나에게까지 전달되지는 못한 채 난 한동안 이런 고민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선대 목사가 세상을 떠나고, 교회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정리가 될 때쯤 교회의 일련의 사태들을 목도해야 했다. 그 세월이 또한 20년이다. 정리라기 보단 포기할 것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길 것 맡기고 한 것이지만.

 

책은 어떠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은 채 마무리를 짓고 있는데, 실제의 서초교회는 이 보다 훨씬 시끄럽다. 분열되고 쪼개졌다. 이것을 두고 기존의 S 교회는 반대파라고 말하고 있고, 교회를 나온 사람들은 개혁파라고 한다. 누구의 표현이 맞는 걸까? 그리고 정말 누가 옳은 걸까? 이것 때문에 교회 잘 다니던 집안의 가족들도 갈라져 누구는 기존 교회를 누구는 개혁파 또는 반대파 교회를 다니고 있단다. 가장 연합과 일치를 보여야 하는 교회가 이렇게 되어버렸다.  

 

선대 목사는 누구 보다 교회의 회복을 위해 일생을 바쳤고, 한때 목사의 2대 세습이 사회 문제가 되면서 그건 합당치 않다고 해서 지금의 담임 목사를 추대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결국 이 사단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것도 저자인 선대 목사의 아들에 의해서. 그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물론 현 담임 목사도 죄 없다 하진 못하겠지. 죄 없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그런데 개혁파라고 하는 교회가 과연 담임 목사가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길래 이토록 집요하고 끈질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사람이 죄는 탓해도 인격은 모독하지 말아야 할 텐데 이미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물론 그들도 처음엔 저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들의 주장이 먹히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수위와 강도가 점점 세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괴물을 없애려다 자신 괴물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개선시키는 것이 개혁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개혁파라고 하는 그들이 적어도 그런 의지를 보여줬더라면 나는 지금의 교회를 떠나 그들에게 합류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들은 교회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한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런지는 꽤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위는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렇다면 교회 앞에서 시위하는 게 과연 그들이 말하는 올바른 개혁일까? 

 

저자는 말했다. 우리 사회를 잔혹하게 만드는 성역과 금기가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지금 교회에서 떨어져나간 소위 개혁파가 선대 목사를 잊지 못해 주일날 목사님의 지나간 VOD를 틀며 예배를 드린다면 그게 하나님의 위한 교회인 것인지, 선대 목사를 우상화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묻고 싶다. 그도 교회가 하나님과 성도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S 교회를 옹호하느냐면 그렇지는 않다. 나도 교회가 지나치게 커지는 것에 있어서 경계하는 쪽이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예전 같으면 뭐 이런 교회가 다 있냐고, 이 교회가 아니면 다닐 교회가 없느냐 하며 교회를 떠났을지 모르고, 아니면 교회에 희망이 없다고 아예 교회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 교회를 여전히 다니는 건 앞서도 말했지만 교회가 목사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과 성도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잘 믿어놓고 실망해서 교회를 안 나간다면 그건 내 손해고, 내 책임이다.

 

여기저기서 문제의 징후를 감지한다. 무엇보다 구관이 명관이었던 건지 같은 교회 성도들이라고 해도 옛날의 그 사람들 같지가 않다. 어쩌면 그리도 자신이 믿는 하나님 외엔 뵈는 것이 없는 사람이 그리도 많아진 건지. 이것을 견디기도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들이 변화될 것이라는 믿음 갖지 않는다면 교회를 다니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좀 이제 21세기를 사니 거기에 맞는 사고 방식을 가져야하지 않나? 대형 교회가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문제시 하는 것 또한 위험하다. 대형교회는 대형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런데 대형교회가 작은 교회를 잠식한다거나 성장을 방해한다는 식의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빨리 이것부터 치유하고 대형교회와 소형교회가 나가야할 바를 모색해야 한다.

 

오늘 날 교회가 왜 그처럼 많고 작은 교회가 대형교회에 맥을 못추는데 그게 다 주의 종들이라는 목사들이 벌여놓은 일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서로 떠넘기고 있다. 왜 그런 일에 허비하고 있는 걸까? 성도들이 무조건 대형교회만 선호한다고 누가 그러던가? 목사라는 사람들이 본질을 놓쳐버리면 애꿎게 피해를 보는 쪽은 성도라는 걸 목사들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루터와 칼빈이 일으켰다는 종교개혁은 오늘 날 21세기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회 앞에서 피켓 시위하고, 선대 목사 VOD 틀고, 법원에 고소하고 이 정도 가지고 개혁한다고 어디가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도 좋은 취지에서 교회에서 분리돼 나왔겠지만 불가피하게 조직을 만들다 보면 그들 안에서도 내분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도 그들이 피켓들고 시위하고, 비판과 고소를 여전히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이 정말로 교회의 개혁을 원한다면 개혁된 모습을 보여주라. 그래서 따라하고 싶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 바깥에서 그러는 건 하나도 소용이 없다.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토록이나 좋은 의도라면 말이다.

 

내가 아는 교회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이상사회의 모범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교회에 대해선 목사나 신학자들이 더 잘 알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교회는 유토피아는 아니었다. 누구든 다 오라면서 말이다.

 

교회는 어두운 것과 밝은 면이 함께 존재하는 곳이다. 또한 교회는 인내해야 하는 곳이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다 공존해 있기에 한 사람이 교회에서 개과천선했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또 이상하고, 미성숙한 사람들이 그렇게 되기까지 기다려줘야 한다. 그 이상하고 미성숙한 사람이 성도만 있는 것도 벅찬데 집사들에게도 있고, 장로들에게도 있으며, 심지어 목사들의 세계에도 있다. 

 

미성숙하다는 이유만으로, 선대 목사와 같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피켓들고 시위해서 변화될 것 같으면 나도 했을 것이다. 교회가 크면 큰만큼 시련도 있다. 선대 목사님을 생각한다면 현 담임 목사를 위해 기도부터 해야하는 게 원칙 아닌가? 선대 목사님도 다 성도들의 기도로 목회하신 분 아닌가? 

 

할 말은 많은데 이쯤 해 둬야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몰랐는데 지금 새로 지은 교회 앞에 노송이 있는데 그게 거의 600년이란다. 우린 이제 길어야 100년을 살 뿐인데 600년 동안 인간의 여러가지 것들을 다 봤겠지. 그리고도 저리 조용히 있는 건 그게  단순히사람이 아닌 나무라서 그런 걸까? 

 

책에도 소나무야, 소나무야 하며 바비킴의 노래를 살짝 넣던데 저자는 그걸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해 넣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은 성도여야 하는 것 아닌가?

 

말없이 교회를 다니는 것이 담임 목사가 좋아서만이 아니다. 개혁파 교인들이 불쌍해서만도 아니다. 못난 소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못 낫기에 그저 교회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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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6-04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회 역시 여러 사람들이 모여 드는 곳이라 문제가 없을 수 없군요.
목사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부족한 인간임을 목사 스스로도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어릴 때 목사 설교를 들어보면 그야말로 '능력자'인 것 같았는데...
이젠 그보다 더한 사람도 그렇게 보이지 않죠.
'인간'을 알고 나니 차라리 그 어리석음에 연민이 생깁니다.

며칠 미세먼지로 창문도 못 열고 고생했는데,
오늘 날씨는 매우 맑음, 입니다. 좋은 공기 마시며 많이 걸어야겠어요.
님도 좋은 공기를 만끽하시길...

stella.K 2014-06-04 13:45   좋아요 0 | URL
무플이 될지도 모르는 리뷰에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ㅋ
이 책 읽으니까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그런데 언니도 교회 다니시나 봐요. 전 안 다니시는 줄 알았거든요.
요즘 교회 보면 안타까운 일이 많죠.
옛날엔 나라도 구하는 신앙이었는데 말이죠.ㅠ
제가 교회 다니면서 겪은 이야기를 쓰라면 저 리뷰에 쓴 건 조족지혈이어요.

저자를 나쁘다고 할 생각은 없는데
전엔 서슬시퍼런 카리스마가 있어 좋았는데 지금은 뭔가 도가 넘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안타까워요.
카리스마도 자신의 자리를 지켰을 때나 멋있는 거지 지키지 못하고 있으면
방종내지는 허세란 느낌이 들어 씁쓸해요.
저도 내친김에 제 글을 쓸까봐요.
빛을 보고 안 보고를 떠나 기록이라는 건 중요한 거니까.ㅎ
 
新 황태자비 납치사건 - 개정판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4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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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난 김진명 작가에 대한 묘한 편견이 있었다. 글쎄, 그냥 똑똑하고 글 잘 쓰는 작가에 대한 독자의 열등감 같은 거라고 해 두자. 아니면,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가의 작품엔 문학성이 떨어질 거란 독자가 갖는 보수적인 편견 같은 게 있지 않나? 그런 것을 통해 독자라고 아무 작품이나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은근 과시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게 맞는 생각이든 아니든, 김진명 작가는 매니아층이 두텁다는 것엔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은 작가의 그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내가 처음 읽은 그의 첫 작품이다. 물론 이 책은 전에 한 번 나왔다가 이번에 개정판을 내면서 '신'이라는 글자를 달고 나왔다. 이 전의 책과 무엇이 다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읽으면서 '제법이다'하며 읽었다. 

 

무엇보다 문체가 쉬워 읽는데 부담이 없었다. 나이가 드니 머리 써 가면서, 앞뒤 문맥 따져가면서 읽는 책이 부담스러워 졌다. 더구나 추리 소설은 좀 그런 수고를 하게 만들지 않나?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양파껍질 벗기듯 알아 가는 재미도 있다지만 이쪽에 취약한 나는 꽤나 질기게도 추리 소설을 거부하며 책을 읽어 왔구나 싶다.

 

또한 쉬운 문체면서 논리가 정연하다. 물론 현실에 일어날 확률은 0.0001%도 안 되겠지만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상하에선 나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게다가 황태자비 납치 사건을 주도한 임선규는 또 얼마나 벗있는 사람인가!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땐 막연히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다룬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것과 함께 중국의 난징대학살과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까지 다분히 일본의 사과과 시정을 촉구하는 국가적 대명제에 작가는 이 작품으로 보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일본과 동시 출판을 하려했지만 일본 극우파에 의해 일본 출판이 저지됐다고 한다.

 

일본의 황태자비를 납치해서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고 잘못된 역사관을 바로 잡겠다. 확실히 꼼수긴 꼼수다. 엔딩도 나름 만족스럽긴 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다분히 계몽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좀 웃기다. 역사는 사실에 입각하면서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계몽적인 기능이 있으면 좋긴한데 왜 문학은 그러면 다소 김이 빠진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난 좀 그랬다. 하긴, 등장인물을 보면 하나 같이 모난 구석이 없다. 다 반듯하다.

 

하다못해 일본측 등장인물도 보면 그들이 역사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든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 우리나라가 쓴 만큼 어느 한구석 그래도 좀 나쁜 사람으로 그릴 법도한데 균형이라도 잡듯 반듯하다. 그리고 독자의 열망이 뭔지도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어 거기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계몽 문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읽으면서 한편 드는 생각은, 지금의 일본 역사의 왜곡과 은폐가 우리나라도 똑같은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본다. 솔직히 인정을 하고 사죄를 구했을까? 아니면 일본과 별반 다르지 않게 극우적 태도를 취했을까? 그건 아무래도 대대로 내려오는 민족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알겠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는 정복의 역사가 아니다. 지키고, 보존하는 성향이 강한 민족이다. 누구는 왜 우리나라 민족성은 좀 정복하는 능동성을 갖지 못했냐고 불평할지 모르겠지만 난 우리나라가 정복과 찬탈의 역사가 아닌 것에 오히려 다행스러움을 느낌다. 물론 대신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었던 질곡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엔 다소 아픔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자기 나라의 역사를 있는 인정할 수 없는 민족에 내일이란 있을 수 없다는 그 말에 나는 백 번 동감한다.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일본에 무엇을 크게 바라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인정할 것 인정하고, 사죄할 것 사죄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이 세 나라는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며 태평양 시대를 열어갈 중심축이지 않는가? 인정할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죄할 것을 사죄하지 못한다면 그 나라의 지도자는 얼마나 미성숙한 사람들인가? 나라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이 모양인데 그 나라 국민들이 지도자의 무엇을 보며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더구나 자라나는 다음 세대는 과연 자기네 나라가 전혀 남의 나라에 해코지한 적이 없는 깨끗하고 양심 바른 나라라고 정말 굳게 믿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한 가정의 부모도 자식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즉각 사과해야 하는 거라고 올바로 가르치지 않는가?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고 해도 다른 나리 민족의 아이가 그것을 건드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개미가 뚫어놓은 구멍 하나가 둑을 무너트린다고 그게 그냥 아이들 싸움으로 끝날 수 있을까?

 

세계가 남의 나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그렇다. 일본이 우리나라 보다 강대국이어서 일본에 유리한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그건 올바른 세계사는 아닐 것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일본과 우리나라가 적대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 때문에 흠집을 내려고 이러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어느 나라나 부끄러운 역사는 있다. 단지 우리 다음 세대엔 이런 부끄러운 역사들 물려주지 않기 위해 역사는 바로 씌어야 한다.

 

또한 일본 모두가 우파적인 것은 아니다. 소수긴 하지만 자신의 나라 조상이 지은 죄를 대신 참회하고 역사를 바로 하려고 하는 성숙한 사람들이 있다. 난 그들의 참회와 노력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수가 그럴 때 소신을 지켜내기란 또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앞서 일본의 지도자 얘기를 했지만, 소설의 일본 황태자비와 지금의 황태자비는 얼마나 다른 것인지 생각해 본다. 적어도 지금의 일본 황태자비도 알고는 있지 않을까? 자기네 나라 극우파들이 얼마나 역사를 왜곡시키려 하는지를. 하지만 나라를 대표하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 황실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견디느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진실은 언제나 정의 편이다. 정의가 살아 있는한 진실은 피를 흘릴지라도 승리할 것이다. 진실이 언제 행복하게 미소짓고 있는 거 봤나? 

 

이 작품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 계몽적이라고 해서 재미가 없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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