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 개정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그 시대를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역사에 대해 그리 관심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때부턴가 우리나라의 근세사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것은 매스컴의 영향도 무시못하겠고, 아무래도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기와 가장 근접한 시기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때를 두고 새삼 부르는 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일제시대란 표현도 하지만, 구한말 또는 개화기란 말을 쓰기도 한다. 어찌보면 다 그게 그거지 싶어도 이 시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일제시대는 일본의 시각이 많아 보이고, 구한말하면 수탈과 치욕의 우리의 시각이 많은 단어 같고, 개화기하면 이 무렵에 서양 문물이 들어오기도 시작했으니 서양적 시각이 많아 보인다.  

그만큼 여러 가지 시각이 충돌했던 혼란스러운 시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이 시기를 규정하라고 하면 저 세 단어 중 가장 맞는 단어는 역시 개화기가 많지 않을까 싶다. 우린 어쨌든 그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쳐 21세기에 문화를 세계 꽃피웠으니까.  

작가란 무엇인가?  

모든 작가가 다 그렇겠지만, 김영하 작가에 대해서도 호불호는 나뉠거라고 본다. 하지만 작가의 호불호를 떠나 적어도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평가는 기존의 작품과는 다르다는 것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읽어 본 중엔 최고라고 생각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시종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건, 작가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김영하 작가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멕시코로 이민 간 우리 선조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우리나라의 미국이나 하와이 이민사는 알고 있었지만, 멕시코 이민사는 또 좀 생소하지 않은가?  

흔하게 잘 아는 이야기를 작가가 그 자신의 입김을 입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재창조해내는 것도 능력이겠지만, 이렇게 감추어져 있는 이야기를 발굴해 내는 것도 작가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김영하 작가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멕시코 이민사를 알 수 있었겠는가? 물론 모르지는 않겠지. 하지만 역사 교과서에 한 페이지도 차지하지 않았을 것이고, 후딱 넘기면 금방 잊혀질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나도 좀 그런 것이 이것에 대한 자료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이자경의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란 책이 있었다니!). 구한말. 치욕스러운 역사를 사는 것도 괴로운 일인데, 살기 위하여 멕시코로 가야만 했던 또 다른 한쪽의 역사의 사람들. 우리는 그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것을 알려야겠다는 김영하 작가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이 소설은 서울행 비행기에 올라탄 어느 이민사 연구자의 잡담에서 시작되었다.  ......먼 곳으로 떠나 종적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에 나는 언제나 매료되었다. ...... 1905년에 제물포를 떠나 지구 반대편의 마야 유적지, 밀림에서 증발해 버린 일군의 사람들. 그들은 시종일관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그들이 떠난 1905년과 그들이 살아낸 1910년대는 작가로서는 정말 매력적인 연대였다. 한 소설을 끝낼 때마다 작가는 자신이 만든 세계의 명예 시민이 되는 영광을 (홀로) 누린다. 지금 이 순간 나는 1905년생이다. (353~354p) 작가의 말 중에서    

과연 이것이 작가인 것 같다. 작가라면 말하지 않고서는 못견디는 족속들. 그리고 쓰는 동안 그 세계의 명예 시민이 되고, 그 시대의 사람이 되는 것. 김영하 작가는 이로써 자신의 작가로서의 임무를 충실하지 않았나 싶다. 

더불어 작품에 보면 박광수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원래는 신부였으나 신내림을 거부할 수 없어 후에 무당이 된 사람이다. 작가란 바로 이런 박광수 같은 존재는 아닐까?말하자면 무당의 영매를 통해 죽은 자가 말하고, 살아있었을 때 한 많은 생을 죽어어서야 비로소 위로를 받듯, 작가를 통해 잊혀진 존재를 오늘 날에 복원하고 그들의 넋을 기리는 것. 이것이 작가의 일은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면 작가는 미지의 영혼을 위로하는 사람일 것이다. 

국가란 개인에게 무엇인가?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초등학교 때 보았던 알렉스 헤일리 원작 <뿌리>를 떠올렸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뿌리'는 노예의 역사를 다뤘지만, 이 작품은 이민사를 다루었다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책에서 보면, 조선인의 부당한 노동에 대해 항의하자 에네켄 농장주가 채찍을 휘두르자 그들은 당당히 우리는 노예가 아니니 채찍은 휘두르지 말아달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노동력 착취를 당해왔다는 점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던 것도 사실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새삼 깨닫는 건, 우리나라는 대대로 힘있는 군주에 대한 갈망이 있어 왔구나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알듯 역사적으로 힘있는 군주는 그리 많이 없었다. 나라가 나를 지켜주지 못하니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잡초 같은 근성이 우리에게 있어 왔으리라. 작품에서 이민선이 낮선 나라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불안했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진지한 논의가 있었을 때, 박정훈이란 인물을 통해 당시 망국의 백성이 가진 나리에 대한 한이 절절히 베어 나온다.  

저기, 나는 안 돌아가려네. ...... 그까짓 나라, 해준 것이 무엇이 있다고 돟아가겠는가. 어려서는 굶기고 철드니 때리고, 살만하니 내치지 않았나. 위로는 되놈에, 로스케 등쌀에, 아래로는 왜놈들 군홧발에 이리 맞고 저리 굽신, 제 나라 백성들한텐  동지섣달 찬서리마냥 모질고,  남의 나라 군대엔 오뉴월 개처럼 비실비실, 밸도 없고 줏대도 없는 그놈의 나라엔, 나는 켤코 안 돌아가려네.(84p) 

박정훈의 이런 나라에 대한 원망은 낮설지지가 않다. 불과 10여 년 전, 화마에 자식을 잃고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는 이 나라에 잠시도 살고 싶지 않다며 이민을 결심한 어느 전 국가대표 운동선수의 이야기가 오버랩이 된다. 결국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인 것 같다. 나라 안에서 이리 맞고, 저리 채이며 경쟁하며 살던가, 나라를 벗어나 박정훈의 결의처럼 끝까지 살아 남던가?   

이 이야기는 한마디로 주권을 잃은 일국의 백성들이 낮선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사실적이다. 

제2의 검은꽃은 가능한가?   

역사 소설의 면모는 그 시대의 이야기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가지고 읽힐만한가에 있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을 다룬만큼 너무 동떨어져 있거나 개연성이 떨어지면 공감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요즘엔 다른 나라에 번역 수출될 것을 고려해 외국에서도 인정을 받을 것이냐도 중요해졌다. 여담이지만 누구의 말을 들으니, 군대 이야기는 워낙에 특수해 번역해봤자 다른 나라에선 이해받기 어렵다고 한다. 남자들 둘, 셋만 모이면 군대 얘기 빠지지 않는다고 하던데 이게 세계에 나가선 아무런 소용이 없다니 좀 의외였다. 김영하의 이 소설은 번역이 됐는지 모르겠다. 번역이되면 세계인에게도 과연 무난히 읽힐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보편성과 더불어 과연 이 작품이 현대를 되돌아 볼만한가하는 점 또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북한의 탈북자를 생각했다.1905년의 조선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멕시코로 가는 이민선을 탔다. 오늘 날의 탈북자들은 먹고 살기위해 사선을 넘는다. 그들이 북한 탈출에 성공했다고 해서 당장 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동남아를 비롯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우리가 공감하는 것은 아무리 욕을 해도 나라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탈북자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가난한 나라라도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가난한 나라라고 다 불행한 것마는 아니다. 비근한 예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는 방글라데시라고 하는데, 행복지수는 그 어느 나라 보다 높은 것을 보면. 탈북자들은 북한을 탈출하는 순간 나라없는 난민이 되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들이 국적을 회복할 때까지 제2의 검은 꽃은 씌여지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하표 역사소설 

앞으로 김영하 작가가 또 역사 소설을 쓸지 모르겠다. 문학 평론가 남진우 씨의 말대로 그의 역사 소설은 기존의 역사소설이 추구하는 과거 시대의 충실한 재현이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낭만적 영웅화(325p)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역사 소설이 역사적 사실을 근거해서 쓰여진다는 것을 감안할 때 등장인물은 또 어느 실존인물의 재현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런 인물은 충분히 있을 법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의 삶을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게 그렸다고 생각한다(에필로그의 부언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정말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결정하는 건 작가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지어진 이야기라도) 그것은 철저하게 그 시대를 살았던 자들이 평가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은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처럼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동정 받고, 이해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위해 작가는 이 작품을 쓰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번쯤 읽어봐도 좋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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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09-0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는 소외된 계층이나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눈을 돌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그들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엔 탈북자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도 많습니다. 그들을 배려하기보다 오히려 얕보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도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 씁쓸해져요. 그들을 우리로부터 분리시키기보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로서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 건 이제 우리 몫입니다.

멕시코 이민사 같은, 감추어져 있는 이야기를 발굴해 내는 것도 작가의 능력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읽어볼 만한 책 같군요. 그런데 한 가지, 이렇게 길게 또 많이(거의 매일) 쓰시는 님의 그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 홍삼을 드십니까?

^^^잘 읽고 갑니다.

stella.K 2011-09-05 15:11   좋아요 0 | URL
ㅎㅎㅎ 홍삼은...그러면 뭐합니까?
추천도 많이 못 받는 걸.ㅜㅜ
길게 안 쓸려고 하는데 길게 써 지내요. 이상해요.
제가 리뷰 쓴지 10년쯤 돼 오는데 초기에 쓴 건 정말 짧게 썼거든요.
쓴다하는 리뷰어들 흉내내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역시 내 스타일대로 써야 하는 건데...>,<;;
암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이리시스 2011-09-05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민사가 충격적이고 감명 깊었어요. 이후로 김영하 작가의 작품들이 썩 좋진 않았는데 그래도 <검은꽃>이 아직까지도 제일 좋거든요. 벗어날 수도 없는 어떤 특수한 시대나 상황을 힘껏 살아내는 그런 이야기를 제가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초등학교 때 본 <뿌리>를 기억한단 말이에요?^^

stella.K 2011-09-06 13:32   좋아요 0 | URL
그럼요. 굉장히 감동하면서 봤는데.
이런 작품을 워낙 깊이 각인이 돼서 쉽게 안 잊어져요.
무엇보다 원작이 백인의 시각이 아닌 흑인의 시각에서
썼잖아요. 다시 보면 어떨지 모르겠어요.
아이리시스님은 보셨을라나요? 그때가 1977,8년도 작으로 알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