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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가 위로가 되는 이상한 시대입니다 - 뉴스룸 뒤편에서 전하는 JTBC 작가의 보도 일기
임경빈 지음 / 부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제목이 좀 묘하다 싶다. 뉴스가 위로가 되는 이상한 시대라니?
뉴스는 그러면 안 되는 건가? 그게 언제부터라곤 정확히 모르겠는데 암튼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뉴스는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나는 내 주위에 일부러 뉴스를 보지 않는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뉴스가 희망을 전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안 좋은 소식, 이를테면 정치인들의 싸움과 비리. 그것은 경제인들도 마찬가지고, 온갖 사건과 사고만 전달해도 한 시간이 빠듯할 정도다. 그 소리가 단순히 시끄러워서가 아니다. 매일 그런 소리만 듣는다고 해 봐라. 가위 눌린다. 그래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뉴스가 무슨 죄인가? 뉴스는 그저 있는 사실을 전달할 뿐인데. 문제는 그런 사실을 영산해 내는 사회 전반의 시스템이 문제 아닌가? 그런데 뉴스도 반성할 필요는 있다. 그것만이 보도 거리는 아니지 않는가. 좀 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것들도 찾아보면 많을 텐데 왜 그리도 우중충한 소식만 전하는 건지. 그게 또 어떻게 보면 뇌의 작용인지도 모르겠다. 나쁜 것, 부정적인 건 잘 잊히지 않는 것. 그래서 분명 좋은 뉴스도 전달했는데 그것을 잊는 것이다. 기자로선 각인될만한 걸 취재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악)순환을 하는 것은 아닌지.
그랬던 뉴스가 언제부턴가 조금씩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생활밀착형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뉴스 할 시간이면 TV 앞을 떠나 있거나 다른 채널로 돌렸던 것도 언제부턴가 오히려 그 시간이면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효과를 얻었다.
글쎄, 뉴스가 위로가 되는지 어쩌는지는 난 잘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난 저자가 팩트체크에서 일한다는 JTBC의 뉴스룸을 보지 않으니까. 그건 일부러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할 시간에 난 아직 TV를 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뉴스룸에 팩트체크가 만들어지고 나서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뉴스를 볼 맛이 난다고 칭찬을 듣곤 한단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세월 뉴스하면 지상파 3사가 독점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공영의 의무를 다해야할 지상파 방송사들이 정부의 하수인 노릇을 해서 국민의 알 권리를 차단해 왔다.
그것을 극적으로 잘 보여준 예가 세월호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었다. 이런 중요한 사안을 지상파 3사들은 늑장 보도를 하거나 아예 보도를 하지 않으려 했다. 그에 비해 뉴스룸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보도했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신뢰를 받았다. 바로 이 알 권리를 충족시켜 줬다는 점에서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생각을 못했다. 이런 뉴스 뒤에 작가들이 있다는 것을. 뉴스는 당연 기자들이 만든다고 생각했다. 자료 화면은 물론이고, 보도 멘트까지. 그런데 나 같은 경우 그 뒤에 숨은 작가가 있을 수 있다는 어렴풋이 알게 됐던 건 우연히 책 <탄핵, 헌법으로 체크하다>의 독자와의 만남에서다. 거기에 공저자들이 공교롭게도 그 유명한 뉴스룸 기자와 작가로 이루어진 제작진들이다. 그중 한 명이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하고.
무엇을 쓰는 작가든 작가는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자기가 드러나지 않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은. 왜냐하면 작가는 문자로 말하고, 작품으로 말하는 존재들이니까. 그런 점에서 뉴스 보도 작가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뉴스 보도 작가들이 뭘 할까? 기껏해야 기자들이 취재해 온 것을 입에 맞게 다듬어 주고, 자막 다듬고 뭐 그런 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 책을 보면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거의 기자 못지않게 현장을 누비고 뛰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뉴스 보도 작가는 거의 대부분 프리랜서로 일을 한다.
프리랜서. 멋진 말이긴 하다. 중세 시대 용병에서 나온 말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돈만 주면 대신 싸워주는 사람. 즉 다시 말해 일 해주는 사람.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놀고 싶으면 언제든지 노는 사람. 하지만 이것이 어느 나라, 어떤 집단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의미와 대우가 달라질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선 빛 좋은 개살구고, 전문직이긴 하나 비정규직이란 카테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프리랜서가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또 있다. 방송사들이 말이 좋아 외주 제작이지 말하자면 자기네들 손쉬운 방법으로 하청을 주는 것이다. 그게 훨씬 직접 제작하는 것 보다 비용이 싸게 먹히니까. 그리고 하청은 어떻게든 시스템이 원활히 돌아가기 위해 재하청을 준다. 거기에 끼어서 일하는 사람이 프리랜서이고 하청인의 다른 말인 셈이다. 계속 그러다 보면 비용 단가만을 생각할 뿐 그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뒷전인 것이다. 다 먹고 살자는 취지라는 걸 알지만 그렇게 하청만 돌리다 보면 우리나라는 하청 산업 구조를 면할 수가 없다. 물론 이것을 탈피해 보겠다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모색하고 있긴 하지만 과연 성공할 수 있을는지.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프리랜서란 지위가 보장되지 않는 계약직이고, 비정규직의 곁가지라고 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비정규직만큼 저평가된 나라도 없을 것이다. 여타의 나라에선 비정규직일수록 페이가 쎄다고 하는데 말이다. 저자는 방송 작가도 계약직인 만큼 4대 보험이 안 되고 여러 가지 수당을 생각할 때 못해도 월 300은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웬만한 베테랑이 아니고선 그러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놀라운 건, 자신이 20년 전 초보 작가 때 받았던 임금을 여전히 받고 있는 곳도 많다고 한다. 그동안 물가상승률이 얼만데. 그나마 최근에 작가 유니온이 생겨서 점점 좋아지고 있기는 한단다.
사실 이렇게만 말하면 이 직업에 별로 희망이 생기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저자는 시사 보도 분야에서 일한지가 20년이다. 자신의 프리랜서로 일한 경험을 살려 자신의 지위를 어떻게 높여 갈 것인가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그러한 선배들이 있기에 후배들이 닦아놓은 길과 터 위에서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은 방송 작가로서의 애환, 방송 작가가 하는 일, 방송 작가의 비전과 전망 등을 나름 알기 쉽게 설명해 놓았다. 하지만 왠지 흥미롭기 보단 뭔가 모르게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이 분야에 대한 책은 나로선 처음 접하는 것이긴 한데 아직도 정착이 안 된 분야다 보니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오늘도 한 책을 읽었는데, 어떤 것이 문제가 되면 그 분야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와 줘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갑질이 문제라면 그 사건을 보도하는 단편적인 뉴스에만 의존하지 말고, 갑질이 왜 문제인 건지, 갑질을 어떻게 고쳐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전문적이고도 총체적으로 다룬 책들이 많이 나와 사회적 인식을 새롭게 하는 개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한다. 그처럼 방송 작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물들어 올 때 노 저으랬다고, 이렇게 뉴스룸이 인기고 그에 따라 방송 작가가 뭐하는 사람인지 알려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들을 어찌 알겠는가? 하청 산업 구조가 문제고, 그에 따른 삶의 질적 저하가 문제라면 그것을 적극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잘 모른다. 자리는 누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드는 거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방송 작가를 사회적으로 알리지 않으면 그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려면 이런 책들이 더 많이 나와 줘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만 기억하자. 결국 이 책이 말하는 건 하나다. 일하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제발 그런 날이 나도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