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 영화를 녹화를 하고 몇번에 나눠서 봤는지 모르겠다.
정말 바빠서 그랬는지, 아님 영화에 대한 관심이 예전만 같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다. 조금 조금씩 보느라 4일은 걸렸던 것 같다.
게다가 배경이 유대인 홀로코스트다. 난 언제부턴가 이것을 소재로한 영화나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그냥 잔인한 게 싫다. 그래도 많은 영화나 책들이 잔악성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나름의 삶에 대한 애착과 몸부림, 잔인한 시대에도 꿈과 욕망, 광기를 잘도 표현한다.
이 영화 역시도 잔인한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그렇지 꼭 잔인한 것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한가지 이이러니는 인간은 풍요의 세대에 정신적 곤핍과 핍절을 얘기하고, 현실적으로 어렵고 잔인할 때 인간이 가진 꿈과 희망을 얘기하고 싶어한다.
그 시대가 암울하기만 했을까? 그 시대가 풍요롭고 행복하기만 했을까? 이것을 논하는 것이 인간이라니...
이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홀로코스트 이전엔 비유대인과 유대인이 함께 공존하며 잘 살았다. 그런데 나치의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면서 비유대인은 유대인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렇다고 모든 비유대인이 유대인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아니다.
유대인 다비드의 가족과 함께 한때 이웃하며 잘 살았던 조셉과 마리 부부.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자 다비드를 자신들의 집 지하로 통하는 벽장에 숨겨준다. 무려 2년 동안.
그들은 겉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는 양 웃고 살지만 유대인 다비드 때문에 노심초사한다. 언제 유대인을 숨겨줬다는 죄명으로 잡혀갈지 모르는 상태. 설상가상으로 조셉의 친구가 마리에게 관심을 보이며 그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그 시절 말한마디 잘못해도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하는 판국에 마리는 어쩌자고 하지도 않은 임신을 했다고 떠들었던 것일까? 이것이 나중에라도 알리면 큰일이 난다. 하지만 조셉은 정자 생성을 하지 못하므로 아내 마리를 임신시킬 수 없는 사람이다.
결국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다비드를 통해 마리에게 임신을 시킨다. 물론 마리는 정숙한 여자이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펄쩍 뛰지만 결국 살아남기 위해 이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조셉의 선택에 동조한다. 이때 다비드는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는 인물인가?
마리가 임신을 해서 해산할 즈음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끝이나고 세상은 또 변해있었다. 예전엔 유대인을 숨겨주면 처형을 당했지만, 이번엔 반대로 유대인을 숨겨줬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비드가 필요했지만 그 결정적인 순간에 다비드는 지난 2년 동안 낮선 사람과의 접촉이 없었으므로 숨어버린다. 이대로 죽는가보다고 생각했는데 천만다행으로 숨어버린 다비드를 찾아내고 조셉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남의 씨이긴 하지만 어부지리로 얻게된 아들과 함께 평온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영화의 아우라는 강하다. 비극 같지만 희극같고 희극 같지만 비극적여 보인다. 어떻게 보든 인간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얼마 전에 본 '태극기 휘날리며'를 생각했다. 한국전쟁 발발당시 사람들은 살기위해 공산당에 서명을 하고 쌀 한바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하나 같이 부역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집단 학살을 당한다. 하지만 이 영화엔 어떠한 위트나 유머도 없다. 끝까지 심각하고 끝까지 연민을 갖게만든다.
비극적인 이야기 속에서도 희극을 도출해 낼 수 있고, 희극적인 이야기 속에서도 비극을 말할 수 있는 작가나 연출가가 있다면 그건 굉장한 능력이 아닐까?
아무튼 이 영화에 필 받고 어제부터 내가 붙들기 시작한 책이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이다. 결코 '나의 아름다운 비밀' 같지는 않겠으나 이 책은 독특하게도 독일 아이의 눈으로 그 시대를 조명했다고 하니 흥미롭다.
이렇게 한가지 사건을 두고 여러개의 시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놀랍고도 재미있는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