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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감독의 <황산벌>을 나는 하도 시시하게 봐서 과연 저 영화가 재밌을까? 반신반의 했었는데 알고 봤더니 이 영화는 희곡<이>가 사나리오 원본이 되었다고 하니 구미가 당겼다. 모름지기 영화란 시나리오가 탄탄해야 성공하는 법. 입소문이 퍼지면서 꼭 봐야할 것 같았고, 어제야 뜻을 이루었다.

동성애를 다뤘다고 했는데 그 시대에 동성애가 없을리 없고, 직접적으로 다뤘다기 보단 동성애 넘어 더 깊은 인간의 이면을 터치해줬다고 보여진다. 또한 놀이패들의 신명나면서도 가감없는 성애를 희회시키는 놀이를 보면서 어쩌면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덧칠하지 않은 원초적 놀음이 저런 것은 아니었을까란 생각도 해 보았다.

등장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참 잘 그려냈다는 생각이 든다. 감히 놀이패들이 천민 출신으로 궁을 어찌 들어와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찌 어찌해서 궁에 들어와 왕의 눈에 띄였다는 이유만으로 호사스러움을 누리게 될 땐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겠지. 그러나  그들의 궁의 입성이 그리 좋은 것마는 아니었음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오늘 신문을 보니 감우성이 분한 장생은 원래 역사엔 없는 가공의 인물이란다. 그럼에도 감우성의 연기는 발군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줬던 것 같고, 신예 공길의 이준기는 정말 중성의 묘한 느낌을 발산한다. 사람이 동성에게 매력을 느끼면 이성은 그다지 매력을 못 느낀다고 하는데, 이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그말이 이해가 간다. 그리고 조연들의 맛깔스런 대사들도 일품이다. 일설에 따르면 연극<이>에서 주연급으로 나왔던 배우들이 이 영화에서 대거 조연으로 나왔다는데 그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저 사진을 올려놓긴 했지만(개인적으로 대나무를 좋아하는 까닭도 있긴 하지만) 몇몇 인상 깊었던 컷이 있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가장 멋진 씬은 맨 마지막에 공길과 장생이 외줄을 타면서 나눴던 대사들과 그 이후 반정이 일어났음에도 둘은 여전히 광대놀음을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공중에 몸을 던지는 엔딩컷이 기억에 남는다.

그것은 확실히 동성애 이상을 뛰어넘는 인간의 우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많은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공길과 장생의 변치않는 우정을 우직하게 이끌어가는 영화가 참 보기가 좋다.

같이 간 후배는 이준기의 이미지에 관해 그다지 좋게는 얘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좋아했던 남성의 이미지는 어떤가? 우리가 그토록 잊지못해하는 캔디의 테리우스나 사파이어 왕자는 다 여성적 이미지의 남성들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의 매력은 나도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가 보아도 유난히 가지런한 의치같은 이가 눈에 거스리기도 했지만 어찌보면 저 입모양이 저 남자의 매력을 더 배가시켜줬던 건 아닌가 의심하면서...

후배는 이준기 같이 태가 고운 남자도 요즘엔 많지 않느냐고 하면서 그 배우의 아우라를 한사코 깍으려 한다. 영화를 보고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트럭에서 오뎅을 파는 젊은 총각을 보면서,"저봐. 저 총각도 태가 곱잖아." 그래도 이준기만 같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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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01-28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날 즐겁게, 행복하게 잘 보내세요.^^

피에쓰: 그래도 마준기만 같겠는가?

프레이야 2006-01-28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의 남자, 저도 참 좋더군요. 장생과 공길의 대사가 인상적이었구요^^ 즐거운 설날 보내세요. 전 두부 굽다가 잠시 들렀어요^^

stella.K 2006-01-28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그래도 마준기가 이준기만 같겠습니까? 님도 행복한 설날 되시길...^^
혜경님/반가워요. 와락! 부비 부비~잘 지내시죠? 님도 즐거운 설날 보내세요.^.~
 
 전출처 : 인간아 > 1월 24일 - 커피와 담배 (Coffee And Cigarettes, 2003)

 

주연
로베르토 베니니 Roberto Benigni
케이트 블랑쉐 Cate Blanchett
신쿼 리 Cinque Lee
조이 리 Joie Lee
테일러 미드 Taylor Mead
알프리드 몰리나 Alfred Molina
빌 머레이 Bill Murray
이지 팝 Iggy Pop
윌리암 라이스 William Rice
RZA RZA
톰 웨이츠 Tom Waits
잭 화이트 Jack White
멕 화이트 Meg White
스티븐 라이트 Steven Wright
스티브 부세미 Steve Buscemi
스티브 쿠건 Steve Coogan
이삭 드 번콜 Isaach De Bankole
연출 부문
짐 자무시 Jim Jarmusch 감독
각본 부문
짐 자무시 Jim Jarmusch 각본
촬영 부문
톰 디칠로 Tom DiCillo 촬영
프레더릭 엘머스 Frederick Elmes 촬영
엘렌 쿠라스 Ellen Kuras 촬영
로비 물러 Robby Muller 촬영
제작 부문
그레첸 맥고원 Gretchen McGowan 제작부
스테이시 E. 스미스 Stacey E. Smith 제작부
제이슨 클라오트 Jason Kliot 제작
조안나 비센트 Joana Vicente 제작
프로덕션 디자인 부문
마크 프리드버그 Mark Friedberg 미술
편집 부문
제이 라비노위츠 Jay Rabinowitz 편집

 

커피와 담배가 만나듯, 사람은 무한히 만난다

짐 자무쉬의 능글거리며 고요한 유머를 또 한 번 경험합니다. 뭐랄까, 침묵을 사랑하는 악동 같기도 하고 여전히 뼛속부터 원래 언더였다는 듯한 이미지의 사내 같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입니다. 동양의 참선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탕자가 돌아오는 길에서 느끼는 회개와 참회와 반성이 담긴 화면을 언뜻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커피와 담배에 대한 짐 자무쉬의 오마쥬입니다. 그가 커피와 담배를 통해 들려주는 깊이 있는 유머를 경험해보세요. 저는, 커피를 즐기는 사람도 아니고 흡연자도 아니기 때문에, 이 영화가 그다지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좀 아쉽기는 합니다. 담배를 배워볼까 하는 망상도 생기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통해, 커피와 담배의 마력과 매력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으니, 이 영화는 분명, 커피 매니아와 흡연자들에게는 잠언처럼 달콤하고 알싸하고 깊이있게 느껴질 것입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엊나가는 대화와 말들의 파편들에 대해서, 커피와 담배를 마주하고 나누는 두 사람의 균형이 미묘하게 기울어지고 어떻게 다시 역전이 되는가에 대해서, 시시껄렁한 잡담으로 주고받는 말들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떨어져버리고 마는 유성의 아름다운 빛처럼 그의 유머는, 드러납니다. 웃기기는 하는데, 저는 여기에서 미국의 위선과 가식, 여러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짐 자무쉬의 풍자도 보았습니다. 저만의 생각일런지 모르겠으나, 여하간 이 영화를 보고나면 카페인과 니코틴에 잘 절여진 영혼이 되어 몽롱하고 황홀해집니다.

 자네 여기 웬일인가/ 쌍둥이/ 캘리포니아 어디엔가/ 담배는 해로워/ 사촌/ 별일 없어/잭이 메기에게 테스라 코일을 선보이다/ 사촌 맞아?/ 사랑의 블랙홀/ 흥분/ 샴페인 의 열한 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영화를 통해 짐 자무쉬의 뛰어난 각본 연출력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들려주는 하나하나의 대사들의 깊이는 대단합니다. 커피도 모르면서, 담배도 모르면서, <커피와 담배>는 재미나게 보았습니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이 <담배와 커피> (Cigarettes & Coffee, 1993)라는 작품으로 패러디하기도 했군요. 보고 싶네요. 유쾌하고 가볍게 즐기기에 적당합니다. 물론 단편마다 쪼개어봐도 무방합니다. 저는 커피 한 잔 하러 갑니다. 커피를 마시고 잠들면, 꿈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휙휙 지나간다고 하는군요.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당신의 점심이, 커피와 담배였던 적은 없습니까?

 

<짐 자무시의 모든 것> - 씨네21에서 옮깁니다.

짐 자무시는 우리에게 이름에 비해 영화의 실체가 덜 알려져 있는 감독이다. 그것은 아마 <브로큰 플라워> 이전까지 만든 8편의 장편영화 중 한국에서 개봉한 그의 영화가 <천국보다 낯선> <데드맨> <고스트 독> 세편뿐이라는 단순하고도 안타까운 사실 때문일 거다. 그러니 그동안 간과되어왔던 그의 나머지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고 나서야, 간명하면서도 유쾌하고, 유쾌하면서도 탄식어린 자무시의 세계가 좀더 친절히 열릴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무시에게서 <브로큰 플라워>라는 영화편지 한통을 받았다. 자무시의 전작(과거)을 되돌아보기를 독촉받는 이상한 영화의 아홉 번째 편지를. 그걸 계기로 ‘짐 자무시의 모든 것’을 살펴본다.


니콜라스 레이에게는 그를 따르는 많은 후대 감독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두명의 후배가 있었다. 그의 마지막 생전의 모습을 담은 영화 <물 위의 번개>(1980)를 만들었던 빔 벤더스가 그 한명이고, 니콜라스 레이가 뉴욕대에서 강의할 무렵 그의 조교였으며, 그 인연으로 <물 위의 번개>의 스탭으로까지 참여한 짐 자무시가 나머지 한명이다. 자무시와 벤더스가 서로 알게 된 것도 이때쯤이다. 사실, 자무시의 첫 번째 장편영화 <영원한 휴가>(1980)도 니콜라스 레이 덕택에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어떤 이들은 <천국보다 낯선>을 자무시의 첫 번째 장편영화로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엄밀히 말해 <천국보다 낯선>은 자무시의 ‘첫 번째 35mm 장편영화’다. 대학 시절 학기 제출용으로 작심하고 만든 77분짜리 16mm 작품 <영원한 휴가>가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다). 자무시가 파리 시네마테크에 묻혀 일년 내내 영화를 본 뒤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그는 학비가 없었다. 하지만 능력있는 그에게 학교는 니콜라스 레이의 조교로 일하라고 추천했고, 그 대가로 졸업 단편을 만들 수 있도록 학비 장학금을 지불했다. 그런데 그 돈으로 자무시는 냉큼 장편영화를 만들었고, 학교는 그가 학비를 내기로 약속하고 받은 장학금을 장편영화를 만드는 데에 유용(?)한 죄로, 게다가 “그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죄”로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다. 그의 졸업장은 몇년 뒤에야 우송됐다.

벤더스가 졸업 작품으로 단편 대신 127분짜리 장편 <도시의 여름>을 만든 것처럼, 자무시도 10년 뒤 그런 사고를 똑같이 친 것이다. 여하간 그 이후 자무시는 수없이 많은 인터뷰에서 벤더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질문받았고, 그때마다 그는 “그와 나는 친구이고, 그의 초창기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에게서 받은 영향은 크게 없다”고 잘라 말하기를 반복해야 했다. 벤더스가 영화적 정점을 구가하고 있던 시절, <사물의 상태>를 만들고 나서 남은 40분 정도의 필름을 짐 자무시에게 주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천국보다 낯선>(1984)의 첫 번째 에피소드 ‘신세계’가 만들어졌다는 유명한 일화가 무엇보다도 그들의 계보를 규정하는 증거로 작용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어쨌거나, 그뒤 짐 자무시는 보란 듯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중요한 건 결코 ‘로드무비’라는 틀만큼은 벗어나질 않았다는 거다.

2005년 자무시와 벤더스는 <브로큰 플라워>와 <돈 컴 노킹>이라는 로드무비를 들고 똑같이 칸영화제를 찾았다. 그러나 여기서 자무시는 벤더스와 거의 반대의 결론에 도달해 있다. <돈 컴 노킹>에서 벤더스의 길은 자아를 찾는 길이고, 복구의 길이고, 의미의 길이다. 거기에 비해 자무시의 길은 방기의 길이고, 대상만이 있는 길이고, 해답이 없는 길이다. 의미가 끼어들 수도 없고, 그런다고 해봤자 뭔가 바뀔 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미정의 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그의 영화적 길 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지판들을 물끄러미 보며 그 무의미성과 미결(未決)을 넉넉하게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처음부터 순서대로 가보자.

자무시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여행자이거나, 유랑자이거나, 아웃사이더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이민자이거나, 실제 외국인이다. 짐을 꾸려 여행하는 사람들이고, 정서의 처소를 찾지 못해서 이질적으로 떠도는 사람들이고, 중심 문화로 들어서기를 거부하며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고, 내 땅이 아닌 남의 땅에서 남의 언어로 사는 사람들이고, 그래서인지 이제 막 어딘가에 도착했거나 지금 막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들이다. 특히, 초창기 두편의 작품 <영원한 휴가>와 <천국보다 낯선>에서 그들의 모습은 황량함으로 그려져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방랑자예요.” 자무시는 <영원한 휴가>의 주인공 앨리를 그렇게 소개한다. 영화의 내용은 별 게 없다. 찰리 파커를 좋아하는 뉴욕 청년 앨리 파커가 빈민촌을 돌아다니며 별별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 대화하며 다니는 게 전부다. 고다르식 구성을 염두에 두거나, 오즈를 경외하거나, 브레송 영화의 한 장면을 대놓고 인용하거나 하면서, 아직 시네필의 혈기를 매끈하게 내성화하지 못한 티가 역력하지만, 결국에는 떠돌던 앨리가 마지막 장면에서 무작정 배를 타고 뉴욕을 떠나 파리로 향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세편의 에피소드로 나눠져 있는 <천국보다 낯선>에서 그들의 모습은 더 황량하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이제 막 뉴욕에 도착한 에바와 이미 그전에 도착하여 반(半)미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촌 윌리의 며칠간의 동거가 이 첫 번째 에피소드 ‘신세계’의 내용 전부다. 원래 단편은 에바가 클리블랜드로 떠나면서 끝난다. 그런데 자무시는 두편의 에피소드 ‘일년 후’와 ‘천국’을 덧붙여 장편으로 만든 것이다. 내용은 윌리와 그의 친구 에디가 에바를 찾아 클리블랜드로 향하고, 거기서 다시 셋이 플로리다로 충동적인 휴가를 떠나는 것이다. 영화는 그들의 무위도식하는 삶의 내용을 무미건조한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적으로 본다면 다소 과대평가받은 면이 있고, 벤더스의 영향을 의심할 만한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이미 자무시의 표지판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영화의 첫 장면에 뉴욕에 도착한 에바는 황량한 비행장에 홀로 서 있다. <지상의 밤>에서도 영화는 비행장에서 시작하고, <미스테리 트레인> <데드 맨>에서는 기차가 들어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브로큰 플라워>에 이르러서 에피소드 사이를 잇는 교량 역할로 이륙하는 하늘의 비행기를 연신 보여주는 것은 이런 일관성의 연장이다. 자무시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런 끊임없이 오고가는 임시성의 장면들을 거쳐야만 한다.

“내 집은 미국에 있는 것도 아니고, 미국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에요”, “나는 외국인이고, 또한 미국인이에요”, “내 자리는 언제나 주변이에요. 만약 내가 어쩌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든다면, 내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닌지 걱정하게 될지도 몰라요”라고 자무시는 말한다(실제로 그는 올해 칸영화제에서 <브로큰 플라워>에 쏟아진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에 적잖이 불편해했다고 한다). 그러니 그 주인공들의 입지는 자무시의 개인적 성향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의 생각에 집은 하나일 수가 없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정착이 고착이 되기 전에 그 자리를 떠나 사이-공간을 맴돈다.

<영원한 휴가>의 주인공 앨리는 파리행 배를 타기 직전 항구에서 누군가를 만난다. 지금 막 파리에서 뉴욕으로 온 젊은이다. 꼭 파리에서 뉴욕의 앨리처럼 살았을 것 같은 인물이다. 그러니까 한명이 그 자리를 떠나는 ‘그 시각’, 다른 한명이 그 자리로 들어온다. <천국보다 낯선>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에바가 부다페스트행 비행기를 탔다고 착각한 윌리가 표를 끊고 출국장 너머로 그녀를 찾으러 들어간다. ‘그 시각’, 에바는 부다페스트는 고사하고 그냥 플로리다 해변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모텔로 돌아온다. 영화는 거기서 끝나기 때문에 그뒤로 그들이 서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여기서도 중심은 ‘그 시각’이다. 그들이 같은 시각에 그 행위를 우연히도 교차했다는 사실뿐이다. 자무시의 영화에 도시의 지명이 곧잘 지정되는 것은 그 자체로 로드무비의 요소인 탓도 있지만, 이런 우연의 행동이 시간적 필연성 안에서 어떻게 동시에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 시각, 여러 곳에서 그들은 뭔가 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제각각이다.’ 그게 바로 동시적인 삶에 대한 자무시의 관심이 표명되는 방식이다. 특히나 그 관심사를 풀어냄에 있어 자무시가 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에피소드의 선택이다. <다운 바이 로>(1986), <미스테리 트레인>(1989), <지상의 밤>(1991)에서 바로 그 방식이 두드러져 드러난다.

자무시 스스로 “네오-비트-누아르-코미디”, 또는 “동화 같은 상상의 이야기”라고 말한 <다운 바이 로>에서는 이름이 비슷한 두 주인공 잭(Jack)과 잭(Zack)의 각각 따로 흘러가던 동시간대 에피소드가 그들이 함정에 빠져 죄를 뒤집어쓰고 루이지애나 감옥 같은 방으로 들어오면서 하나로 합쳐지고, 여기에 로베르토가 등장하면서 다시 다른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것이 유연하게 에피소드를 합친 예라면, <미스테리 트레인>과 <지상의 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에피소드 형식이다. <미스테리 트레인>은 멤피스의 어느 허름한 모텔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혼 아래 접혀진 동시간대 세개의 이야기다. 엘비스를 찾아서 일본에서 건너온 남녀 한쌍, 비행기 사고로 어쩔 수 없이 하룻밤 묵어가야 하는 이탈리아 여자, 술김에 사고를 치고 모텔로 숨어든 세명의 남자가 그들이다. 영화는 같은 모텔을 빌려 이 세 이야기를 차례로 보여준다. 게다가 자무시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재치있는 몇 가지 요소, 특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블루 문>으로 이것이 같은 시각에 겹쳐 일어난 사건임을 알려준다.

다음 영화 <지상의 밤>에서 그 시각, 그 장소의 그 행위는 다섯개로 나뉜다. LA, 뉴욕, 파리, 로마, 헬싱키에서 같은 시각 각각 승객들이 택시를 타고 택시 기사와 벌이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LA에서는 나이든 연예인 매니저와 나이 어린 소녀 기사가 만나고, 뉴욕에서는 운전에 미숙한 이민자 기사를 대신해 흑인 손님이 대신 운전하고, 파리에서는 맹인 여자와 흑인 기사의 짧은 교감이 오가고, 로마에서는 신부가 떠버리 기사의 차 안에서 숨지고, 헬싱키에서는 직장에서 쫓겨난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며 함께 술을 퍼마신 승객들에게 그보다 훨씬 더 슬픈 일은 얼마든지 있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자신의 절절한 이야기를 기사가 들려준다.

<미스테리 트레인>과 <지상의 밤>을 만들고 난 뒤의 인터뷰에서 자무시는 한때 문학도였던 그 기질을 발휘해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종려나무>와 제프리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 등에서 이런 형식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건 질문을 위한 대답이다. 사이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있는 자로서, 동시간 각기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관심은 당연해 보이고, 그들이 서로 영향받지 않고 독립적이기 위해서라도 각각의 에피소드는 적절해 보인다. 이쯤에서 자무시는 극중 인물이 한명이라면, 어떻게 그 에피소드 방식을 인물의 삶의 방향에 어울리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여 <데드 맨>과 <고스트 독>을 내놓는다.

 

2005-12-07 | 정한석 mapping@cine21.com | 씨네21

‘그 시각’이라는 횡적인 분산을 ‘그 시대’라는 시간의 종적 연속성 안에 끼워넣고 ‘문명 속의 고독’을 생각하는 것이 <데드 맨>(1995)과 <고스트 독>(1999)이다. “완전히 문화가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후회없이 자신이 꿈꾸는 생활을 고집스레 끌어나가는 돈키호테를 떠올렸다 돈키호테처럼 고스트 독은 자신의 행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자신의 신념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간다”고 자무시는 말한다. 그건 <데드 맨>의 주인공 윌리엄 블레이크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시대의 돈키호테다.

<데드 맨>과 <고스트 독>은 형제처럼 닮은 영화다. 일단 이 둘은 웨스턴 무비와 갱스터 무비라는 장르를 기점으로 우회한다. 하지만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볼 때 이 두 영화의 닮은꼴은 더 잘 보인다. 영화는 한명의 주인공을 따라 흘러간다. 그들이 만나는 인물들, 사건들은 에피소드처럼 다시금 새로운 국면의 이야기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거기에서 주인공 블레이크와 고스트 독은 이질적인 존재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처음에는 문명인이지만 뒤에는 원주민에 동화되어간다. 야만스러운 것은 원주민이 아니라 이곳을 차지한 문명인이라는 것을 블레이크는 느낀다. 야만적 문명의 개척시대에서 시인의 영혼으로 명명되어 환생한 블레이크(그의 친구 인디언 노바디는 그렇게 믿는다)는 본의 아니게 킬러가 되어 서부를 맴돈다. 그런가 하면 고스트 독은 유령 같은 존재다. 왜냐하면 그는 현대의 규율보다 고대의 규율을 존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영혼의 지침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일본의 무사도 정신을 담은 책 <사무라이의 길>이다. 어떤 계기로 그가 사무라이가 되었는지에 대한 증언은 (일부러 영화 속에서) 엇갈리지만, 어쨌든 지금 그는 문명 속의 고대인이다. 그리고 서구인의 육체를 가진 정신적 일본인이다. 흑인 래퍼 차림의 그는 일본식 무사도의 방식으로 삶을 꾸린다. “스즈키 세이준과 장 피에르 멜빌을 참고했지만, 오마주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자무시의 말은 진짜 참고 정도만 했다는 말로 들으면 된다. <데드 맨>과 <고스트 독>에서 주인공들은 문화와 역사를 지시하는 이질적 탐구자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어쩔 수 없는 건 그들이 모두 고독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친구는 있다. 그것도 말이 통하지 않거나 완전히 반대의 자리에 있을 때에만 진짜 친구가 된다. 그래서 블레이크의 친구는 오직 인디언 노바디이고, 고스트 독의 친구는 말이 통하지 않는 프랑스 이민자 아이스크림 주인청년이다. 하지만 죽음을 옆에 매달고 사는 이들에게 인생은 결국 혼자가 아닌가. 절대의 고독,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이 고독의 실체는 역사와 문화를 휘도는 형이상학적 영화로만 물을 수 있는 몫인가? 자무시는 형이상학의 신화적 세계에서 일상의 미니멀리즘적 세계로 돌아간다.

<커피와 담배>(2003)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쇼>의 청탁으로 1986년에 단편을 만든 게 계기가 됐다. 자무시는 세편까지 뜸하게 만들더니 내처 작정한 듯 연달아 나머지를 만들어 장편으로 늘렸다. 말이 장편이지, 각기 다른 장소의 카페에서 둘셋씩 모여 커피 마시고 담배 피우며 한담하다가 끝나는 10분 내외 11개의 단편을 모은 것이다. 사랑스러운 소품이었지만 좀 의심스러웠다. 이거 일상으로 돌아가도 너무 돌아간 것 아닌가 싶었다. 그런 의심이 들 때쯤 들고 나타난 것이 <브로큰 플라워>(2005)다.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빌 머레이는 <커피와 담배>의 에피소드 중 ‘Delirium’에서 우탕클랜의 RZA, GZA와 한담을 나누는 주방장으로 등장해 자무시 세계의 입문식을 거친 바 있다. 하지만 자무시와 빌 머레이가 <브로큰 플라워>에 합의한 건 그보다 더 오래전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전에 빌 머레이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다른 가상의 영화 <하늘에 뜬 세개의 달>(Three Moons in the Sky)의 각본이 먼저 있었다. 한 남자가 각각 세명의 부인과 가정을 따로 갖고 산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각본으로 제작비가 거의 모였을 때쯤 자무시는 생각을 바꿔 2주 반 만에 다른 내용으로 고쳤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지금의 영화 <브로큰 플라워>의 내용이다.

자무시와 머레이는 4년 전 토크쇼에 게스트로 초대되어 서로를 처음 알게 됐는데, 그때의 느낌을 빌 머레이는 재치있게 표현한다. 얼마나 죽이 잘 맞았는지 “영화에 대한 생각을 나눴는데 꼭 그동안 있는 줄도 모르고 지냈던 사촌형제를 만난 것처럼 잘 통했다”고 말할 정도다. 그건 자무시도 마찬가지였다. 자무시는 실제 배우를 상정하고 나서야 각본을 쓰는 스타일이다. “내 영화에서 배우들은 항상 출발점을 제시한다. 빈칸이나 채우는 존재들이 아니다.” 어느 영화, 어떤 인터뷰를 봐도 그렇게 말한다. <영원한 휴가>는 크리스 파커를, <천국보다 낯선>은 존 루리를, <다운 바이 로>는 톰 웨이츠를, <데드 맨>은 조니 뎁을, <고스트 독>은 포레스트 휘태커를 염두에 두고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번에는 “배우로서 고정되어 있는 빌 머레이의 이면을 보여주기를 원했다”고 한다.

영미권의 평단들이 <브로큰 플라워>를 계기로 ‘미국 독립영화의 기수 짐 자무시가 첫 번째 메인스트림 영화를 만들었다’는 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는 이유도 배우들 때문이다. 빌 머레이를 위시하여, 제프리 라이트, 샤론 스톤, 제시카 랭, 프랜시스 콘로이, 틸다 스윈튼, 줄리 델피 등의 화려한 간판급 배역진이 그 증거로 손꼽힌다. 아니 그럼, 조니 뎁, 가브리엘 번, 빌리 밥 손튼, 존 허트, 로버트 미첨, 이기 팝이 나온 <데드 맨>은 간판이 덜 화려했던가. “도대체 왜 메인스트림 운운하는지 모르겠다”는 자무시의 반응은 그래서 이해가 간다. 비교를 하자면 자무시는 커트 코베인이 음악을 생각하듯 영화를 생각하는 인물이다. 자신에 대한 대중의 몰표를 절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두 번째 이유를 찾자면 영화가 쉽고 재미있으며 곳곳에 유머가 넘치는 로맨틱코미디스럽다는 사실 때문이다. 특히 형이상학적 내러티브를 견지한 <데드 맨>과 <고스트 독>, 이 쌍둥이 같은 영화 이후에 나온 것이고, <커피와 담배>보다는 훨씬 더 대중적인 내러티브를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자무시식 로맨틱코미디 정도로 치부되는 건 모함이다. “<데드 맨>에서는 웨스턴 장르를 일종의 틀로 썼다. <고스트 독>에서도 영화의 다른 장르들을 비유하는 인용이었을 뿐이다. 그 점에서 <브로큰 플라워>는 로맨틱코미디도 아니고, 침울하고 비극적인 영화도 아니다. 범주 그 사이의 무언가다.”

<브로큰 플라워>는 9편 장편을 통틀어 백인 중산층이 주인공인 첫 번째 자무시 영화다. 미국사회의 가장자리에서 그 중심부에 사는 인물로 넘어온 것이다. 메인스트림이라는 말은 그런 점에서만 의미가 있다. 굳이 <브로큰 플라워>의 명함을 만들어야 한다면, 실마리는 그 이전까지 반복되던 영화들의 요소가 어떻게 흡수, 변주되었는가이다. 자무시는 여전히 인생은 난감하고, 고독은 운명이라는 믿음을 저버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스포일러를 피하고자 한다면 이 대목은 영화를 본 뒤 읽으시길)

주인공은 돈(빌 머레이)이다. 그는 그 이름의 의미를 텔레비전 속에서 흘러나오는 흑백영화 <돈 주앙의 모험>을 망연자실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도 한때는 돈 주앙처럼 못 말리는 바람둥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동거녀 쉐리(줄리 델피)조차 가정의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는 그를 탓하며 기어이 짐을 싸서 나가는 중이다. 그녀는 문 앞에서 분홍색(분홍색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편지 한통을 주워 돈에게 건네주고는 떠나버린다. 20년 전 헤어진 누구인지도 알 길 없는 애인이 보낸 그 편지에는 돈 몰래 낳아서 기른 19살짜리 아들이 지금 그를 찾아 여행을 떠난 것 같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옆집에 사는 절친한 흑인 친구 윈스턴(제프리 라이트)은 편지를 보낸 사람을 찾아보라고 권한다. 강권에 못 이겨 돈은 그녀들을 찾아 나선다. 로리타라는 딸과 홀로 사는 로라(샤론 스톤), 잡초 같은 히피 처녀에서 부동산 중개업자의 화초 같은 아내가 된 도라(프랜시스 콘로이), 잘 나가는 변호사에서 동물의사 소통사로 변해 있는 카르멘(제시카 랭), 험상궂은 남정네들과 같이 사는 페니(틸다 스윈튼), 그리고 죽어 땅에 묻힌 미셸 페페의 무덤까지 돌아다닌 뒤 돈은 성과없이 집에 온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아들 같은 녀석이 그의 동네를 초조한 눈빛으로 어슬렁거린다. 돈은 그 소년에게 말을 건다. 분명 그 분홍색 편지에는 “그 애가 아버지를 찾아 떠난 게 확실하단 느낌이 들어”라고 적혀 있었다.

먼저 영화의 분위기만을 놓고 설명하자면, <브로큰 플라워>는 완만하고 편안하지만, 궁금증이 동력이 되어 굴러가는 미스터리다. 이 미스터리극을 자무시는 두개의 미니멀리즘 동선으로 그린다. 그 하나는 얼굴 자체가 미니멀리즘인 빌 머레이의 무표정이고, 그 빌 머레이의 무표정을 영화의 무표정한 미니멀리즘 형식이 감싸안고 있다. 여기에 자무시의 키워드들이 변형된 형태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돈은 말 그대로 여행자다. 그리고 그 시각, 그 시대에 대한 자무시의 관심은 현재라는 시제로 바뀌어 이 영화의 화두로 자리잡는다. (다른 영화에서도 종종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돈은 한번 만난 사람을 두 번째 만나는 일이 없다. 이미 이 여행길 자체가 다시 만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 여행길에서 만난 옛 애인들은 말 그대로 이미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과거의 현현이다. 그래서 돈은 또다시 고독한 현재로 돌아온다. 아들같이 생긴 녀석이 눈앞에 나타나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아들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아들 같은 녀석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자무시는 마지막에 다시 질문을 던진다. 정말 미소년이 돈의 아들일까요? 그렇다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돈과 눈이 맞은 못생기고 뚱뚱하고 멍청하게 생긴 저 아이는 돈의 아들이 아니고 누구인가요, 라고. 또다시 판단은 유보되고, 그 순간 카메라는 현기증을 일으키듯 하늘을 한 바퀴 돈다.

<브로큰 플라워>가 독특한 건 모든 정황이 다 펼쳐지는데 그중에서 진실을 밝히는 정황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자무시는 <브로큰 플라워>를 ‘기표의 드라마’라는 구조로 만든다. 그 기표란 분홍색이고, 타자기이고, 복장이고, 개중에는 윈스턴이고, 농구대이다. 로라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녀와 그녀의 딸은 번갈아가며 분홍색 나이트 가운을 입고 있다. 도라를 찾았을 때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는 분홍색 명함을 건넨다. 동물의사 소통사 카르멘의 집 앞에는 농구대(열아홉살의 미국 소년이 즐기는 스포츠가 무엇이겠는가?)가 있고, 그녀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사랑하는 개 윈스턴(이 여행을 강권한 돈의 흑인 친구 이름)이었고, 그녀는 분홍색 바지를 입고 있다. 네 번째 여자 페니의 집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정황들이 있다. 농구대가 있고, 분홍색 커버가 있는 오토바이(열아홉살의 소년이 가장 갖고 싶은 게 무엇이겠는가?)가 있고, 심지어 분홍색 타자기가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페니와 돈 사이의 아들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돈은 분홍색 꽃을 한 다발 사들고 죽은 미셸 페페의 무덤을 방문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도 기표의 드라마는 끝날 줄을 모른다. 윈스턴은 아마 첫 장면에 등장했던 쉐리가 편지를 조작한 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떠날 때 분홍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돈에게 영화 말미에 분홍색 편지를 보낸다. 점점 더 알 길이 없다. 이젠 더 심해진다. 아들처럼 생긴 미소년의 가방에는 분홍색 꼬리표가 달려 있다. 엄마가 부적처럼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그럼 이 녀석이 내 아들 아닌가? 게다가 돈과 그 소년은 생각도 비슷하고, 복장까지 똑같다. 하지만 그 순간 돈과 그 아들로 보이는 소년과 똑같은 복장을 입은 또 다른 소년이 눈앞을 지나간다.

<브로큰 플라워>의 기표들은 기의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다. 뭔가 있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만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맥거핀들이다. 자무시는 기표를 모아 뭔가 해보려 하지 않고, 그냥 기표 자체의 너저분한 널림으로 놓아둬버림으로써 만 가지 가능성을 갖게 한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다. 돈의 여행은 끝없이 이 몇 가지 기표들을 따라 옮겨다니는 의식의 여행이다. 애타게 기표를 쫓아다닐 뿐이다.

짐 자무시의 로드무비가 해답이 없는 길이라는 것은 기표의 드라마로만 구축되어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휴가>의 파리가 그것이고, <천국보다 낯선>의 플로리다가 그것이고, <다운 바이 로>의 두 갈래 길이 그것이고, <미스테리 트레인>의 엘비스 프레슬리가 그것이고, <지상의 밤>의 시계가 그것이고, <데드 맨>의 담배가 그것이고, <고스트 독>의 <사무라이의 길>이라는 책이 그것이고, <커피와 담배>의 커피와 담배가 그것이다. “플롯을 먼저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나를 두렵게 합니다. 그보다는 과정 안에 뭔가 있다는 것이 나를 더 흥분시키죠. 내가 원하는 것은 이야기를 찾기보다 디테일을 첨가하고 모아서 퍼즐이나 그 이야기를 구성하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기표의 드라마는 이런 창작의 습성과도 관계가 있는 셈이다.

짐 자무시의 영화에 사실은 있지만 진실은 없다. 때문에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계는 아예 정해져 있지 않은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소개하자면 그건 명상이다. 자무시는 ‘명상의 영화’를 만든다. 명상의 영화를 만들지, 성찰이나 통찰의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가령 성찰의 영화를 만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보고 나서는 무언가에 대해 열심히 반성해야 하는 책임

아닌 책임이 주어진다. 그러나 자무시의 영화는 잘 모르겠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깊이 그냥 거기에 생각을 적시면 된다. 옳고 그르고, 공감하고 아니고는 그 다음이다. 보고나서 아주아주 맑은 명상에 깊이 잠기면 되는 것이다. 그게 <브로큰 플라워>의 여행길이 인도하는 무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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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인간아 > 1월 8일 - 콘스탄트 가드너 (The Constant Gardener, 2005)

주연
랄프 파인즈 Ralph Fiennes :  저스틴 퀴일 역
다니엘 하포드 Daniele Harford :  미리암 역
대니 허스튼 Danny Huston :  샌디 역
조연
존 케오그 John Keogh
휴버트 콘드 Hubert Kounde
리차드 맥케이브 Richard McCabe
제라드 맥솔리 Gerard McSorley
빌 나이 Bill Nighy
지데데 오뉼로 Sidede Onyulo
아치 판자비 Archie Panjabi
에바 플랙너 Eva Plackner
피트 포스틀스웨이트 Pete Postlethwaite
아넥 킴 사나우 Anneke Kim Sarnau
도날드 섬터 Donald Sumpter
레이첼 웨이즈 Rachel Weisz
연출 부문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Fernando Meirelles 감독
각본 부문
Jeffrey Caine 각본
존 르 카르 John Le Carre 원작
기획 부문
게일 에건 Gail Egan 기획
로버트 존스 Robert Jones 기획
Donald Ranvaud 기획
촬영 부문
Cesar Charlone 촬영
제작 부문
헤닝 몰펜터 Henning Molfenter 제작부
트레이시 시워드 Tracey Seaward 제작부
Simon Channing-Williams 제작
음악 부문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 Alberto Iglesias 음악
프로덕션 디자인 부문
마크 타이데슬리 Mark Tildesley 미술
의상 부문
Odile Dicks-Mireaux 의상
편집 부문
클레어 심슨 Claire Simpson 편집
기타 부문
레오 데이비스 Leo Davis 배역

한 알의 알약도 먹기 두려운 이유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수한 생명의 희생과 살해가 필요합니다. 생계에 의해 선택의 자유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자발적 의사에 따른, 절대적으로 자발적일 수 없는, 목숨과 밥을 담보로 한 무수한 임상실험과 통계도 명확하지 않고 자료로도 남지 않는 개죽음을 통해 완성된 한 알의 알약을 먹고, 당신은 당신의 병을 낫게 하고, 통증을 완화시키고, 구원을 얻고, 또는 플리사보 효과에 지나지 않을 위안을 얻습니다. 당신의 안위와 평안은 거대한 메이저 제약회사의 엄청난 광고효과에 생판 놀아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완전하게 자발적인 앎이 아닌 이상, 누군가의 이익과 자본을 위해 강요된, 음모로 꾸며진, 주입되고 세뇌된 앎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차라리 아프고 말지 굳이 조금 덜 아프기 위해 함부로 약을 먹고 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다못해, 실험실의 모르모트와 새앙쥐들을 생각하면, 내 생명을 이룬 본질이 기괴해지고, 더 고통스러워지기도 하니까요.

영화 <시티 오브 갓>을 보신 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그 황홀하고 끔찍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신예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네, 맞습니다. 이 영화는, 그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원래 이 영화를 감독할 예정이었던 마이크 뉴웰이 <해리포터와 불의 잔>을 연출하게 된 건 다행이고 다행입니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가 이 영화를 연출하게 된 건, 그의 전작에 담겨 있는 강렬하고 현란하고 비참한 주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는 아프리카에서 불법적으로 벌어지는 메이저 제약회사의 거대하고도 비인간적인 음모를 파해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제약회사의 불법적인 실상을 폭로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가 비참하게 살해당한 아내를 대신해 아내의 사랑과 휴머니즘, 그리고 모든 진실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애쓰는 남편의 이야기가 웅장하고도 설득력있게 펼쳐집니다. 스토리도 좋았고,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는 구성방식도 매끄러웠습니다. 주제의식과 로맨스의 균형을 잘 잡아낸 점도 매력적입니다. 물론 <시티 오브 갓>에 비하면야 맹숭맹숭한 숭늉 같지만, 두 번째 작품치고는, 그의 재주와 능력이 알맞게 발휘되었다고 축복하기에 충분합니다.

랄프 파인즈라는 배우를, 저는 1996년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통해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버려두고, 그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 서둘러 그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놓인 남자, 끝내 자신을 기다리다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안아들고 사막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통곡하던 남자의 이미지로, 저는 랄프 파인즈를 기억합니다. 이 영화에서도, 랄프 파인즈의 이미지는 거의 비슷합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거의 10년이 지났는데도 랄프 파인즈의 얼굴과 이미지는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랄프 파인즈의 연기는 정말로 애절하고 구슬픕니다. 사람에 대한 휴머니즘과 아내에 대한 사랑이 중첩되는 모습을 섬세한 표정으로 연기해내는 모습은 정말 멋집니다. 그의 필모그라피를 보니, 왜 이다지도 모진 방황을 했는가 싶게 작품의 꼴이 엉망입니다. 그나마 이 작품을 통해 그가 사막의 방황을 끝내고 돌아온 탕자처럼 진정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게 된 건 정말로 다행입니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카메라웤과 주제 의식, 메이저 주식회사에 불법적으로 임상실험을 당하고 부작용으로 죽음을 당해 아무런 기록도 없이 유기되는 상황, 유통기한이 한참 넘은 약을 감지덕지 받아먹고 해맑은 표정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손을 흔드는 어린 아이들의 표정, 음모가 드러나는 걸 막기 위해 청부살인업자들을 고용해 마구 죽여버리는 자본주의의 충실한 개들, 무기력하게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저지하지 못하는 힘없는 진실의 비참, 사랑과 소명 사이에서 방황하고 의심하며 부대끼다 서로 틀어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영화에 담겨 있습니다. <시티 오브 갓>을 통해 화려하게 데뷔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가 이토록 자신의 기량을 성실하고도 올곧게 펼쳐나가는 모습을 본다는 건 무척이나 흡족한 일입니다.

제약회사는 무기판매회사와 똑같다는 영화 속의 말은, 정말로 들어맞는 말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만큼의 사람을 죽여대는 제약회사의 이면을 알게 된 후, 우리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약을 먹을 수 있게 될까요? '앓느니 죽지.'하는 낮은 신음이, 아직도 제 영혼 속에서 비어져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판매하는 것보다, 천진난만한 천사의 얼굴을 하고 구원자의 손길을 내밀어 죽음과 고통을 팔아 배를 채우는 제약회사의 실체는 아직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더욱 역겹고 무서운 일입니다. 정작 사탄과 악마는 선지자와 구원자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하였으니, 차라리 아프고 말 일입니다.

이 영화는 아마도 영국의 자본과 후원으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등장하는 배우들이 거의 영국국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역으로 등장하는 대니 허스튼과 <러브 액츄얼리>의 한물 간 비실비실한 뮤지션 빌 나이를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이 영화의 호평이 계속 이어져, 아카데미까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랄프 파인즈가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영광을 다시금 이뤄낼 수 있기를, 이 영화의 메세지가 아프리카의 현실을 조금은 개선시킬 수 있기를,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필모그라피가 조금씩 알차고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유통기한이 지난, 부작용으로 선진국에서는 판매금지가 된, 임상실험 단계에 지나지 않는, 약을 통해 삶의 마지막 희망을 이어나가는 아프리카의 고통받는 존재들이 조금이나마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진정한 'Constant Gardener'를 도대체 언제쯤이나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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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인간아 > 1월 6일 - 쉬핑 뉴스 (The Shipping News, 2001)

주연
케빈 스페이시 Kevin Spacey
줄리안 무어 Julianne Moore
조연
주디 덴치 Judi Dench
케이트 블랑쉐 Cate Blanchett
피트 포스틀스웨이트 Pete Postlethwaite
리스 이판 Rhys Ifans
고든 핀셋 Gordon Pinsent
단역
스콧 글렌 Scott Glenn
제이슨 베어 Jason Behr
지네타 아네트 Jeanetta Arnette
로리 파인 Larry Pine
로버트 조이 Robert Joy
로만 포드호라 Roman Podhora
다니엘 캐쉬 Daniel Kash
마크 로렌스 Marc Lawrence
Nancy Beatty
R.D. 레이드 R.D. Reid
John MacEachern
연출 부문
라세 할스트롬 Lasse Hallstrom 감독
각본 부문
로버트 넬슨 야곱 Robert Nelson Jacobs 각본
E. 애니 프룰스 E. Annie Proulx 원작
기획 부문
메릴 포스터 Meryl Poster 기획
봅 웨인스타인 Bob Weinstein 기획
하비 웨인스타인 Harvey Weinstein 기획
촬영 부문
올리버 스태플톤 Oliver Stapleton 촬영
제작 부문
스티븐 P. 던 Stephen P. Dunn 제작팀장
미쉘 플랫 Michele Platt 제작팀장
다이아나 포코니 Diana Pokorny 제작부
롭 코원 Rob Cowan 제작
린다 골드스타인 노울톤 Linda Goldstein Knowlton 제작
레슬리 홀러런 Leslie Holleran 제작
어윈 윙클러 Irwin Winkler 제작
음악 부문
크리스토퍼 영 Christopher Young 음악
프로덕션 디자인 부문
데이비드 그롭먼 David Gropman 미술
의상 부문
레니 에리치 칼푸스 Renee Ehrlich Kalfus 의상
편집 부문
앤드류 몬드쉐인 Andrew Mondshein 편집
기타 부문
케리 바든 Kerry Barden 배역
빌리 홉킨스 Billy Hopkins 배역
수잔느 스미스 Suzanne Smith 배역

꽃 같은 인생

'욕'이 욕보는 세상입니다. 욕을 들어쳐먹을 놈들은, 욕먹지 않고, 애꿏은, 좆같은 애오라지 인생들만, 주구장창, 된 뻘창처럼 왕창 욕먹고 다니는 세상입니다. 무엇이든, 올곧게 가지 못하는, 방향이 토라진 꼴이 도처에 널린 세상은 올바른 세상이 아닙니다. 죄 지은 잡것들은 떵떵거리면서, 희희낙락 한평생 한갓지게 잘 살아갑니다. 평생을 순결하고 맑게 살아온 사람들은, 계속해서 농투성이 무지렁이처럼 뿌리만 깊숙하게 내리뻗으면서, 정작 열매는 잘 맺지 못하면서, 슬픔과 고독의 꽃만 무화과처럼 피워대며 살아갑니다.

살면서, 점점 욕에 대한 언어유희만 늘어갑니다. '꽃 같은 인생'은 '좆 같은 인생'입니다. 정작 저는 '좆'이 뭔 의미인지도 잘 모르지만요. '된장'은 '젠장'의 다른 말입니다. 아름답고 정겹고 구수한 된장을 모독하는 말이지만요. '아저씨 발냄새나.'나 ' 저런 십장생.'이나 '씹팔센치.'나 '이런 게시판을 보았나.'나 '수박 씨발라먹어라.'는 더욱더 심한 언어유희를 가장한 욕지거리입니다.

쉬핑뉴스라는 영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저는 우선 욕지거리에 대한 농담 섞인 농지거리를 먼저 말합니다. 붓의 펄럭임과 스침을 말하기 이전에, 이미 묵의 농담에 대해서 깊이 신경써야 함은 더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붓질을 배우기 이전에, 먹을 가는 법을 먼저 배우는 건 그래서, 온당한 일일 겁니다. 이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건, 우선은, 케빈 스페이시와 쥴리안 무어와 쥬디 덴치와 케이트 블랑쉐라는 이름의 아우라 때문입니다. 사랑하지는 않지만 영혼의 꼬리가 솔깃해지는 힘을 가진 이름들의 조합에 저는 우선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감독은, 라세 할스트롬이 아닌가요! (사실은, 이상하게, 자꾸만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헷갈립니다. <킹덤>과 <초콜렛>의 이미지는 아득하기만 한데 말이지요.)

케빈 스페이시가 우리나라에 알려진 건 아마도 <유주얼 서스펙트>를 통해서였을 겁니다. 저도 예전에는 개뿔 전혀 모르다가 이 영화를 통해 케빈 스페이시라는 배우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니까요. 어리버리하고 친근한 케빈 스페이시의 이미지는 이후 계속해서 재탕삼탕 두고두고 맛간 사골처럼 우려지게 되지만, 그래도 <쉬핑뉴스>의 배역은 그나마 알맞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릴 때 아버지에게 주구장창 학대를 당하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물에 대한 공포를 가지게 된 아해가 갖가지 잡다구리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야기에 헐리우드의 어떤 배우가 알맞겠습니까. 더구나 음탕하고 방탕한 여자를 우연히 만나 딸까지 싸질러놓고, 여자는 왠 놈팽이와 바람맞아 도망가다가 물에 빠져 죽어버리고, 딸은, 어미된 년이 돈을 받고 팔아먹으려다가 간신히 구하게 된 상황입니다. 이러한 꼴에, 그는 '코일'이라는 성을 가지고, 예전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그 고향에서 벌어지는, 끔찍하고 섬득한 과거의 재현이, 이 영화에서는 펼쳐집니다.

각자 태어나는 순간, 영혼에는, 미늘 하나씩이 꿰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은 다음에야, 영혼이 대롱대롱 매달려 손맛을 적절히 내주다가, 마침내 들어올려져 미늘이 빠져나가고 우리의 영혼은, 털썩, 탁한 저수지 물에 잠긴 그물망 속으로 내던져지는 게 아닐까요. 죽기 전에는, 여하간 이 미늘의 끈덕지고도 독한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향에서 서서히 드러나게 되는, 개개인의 과거사는 끔찍합니다. 그러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점잖고 고요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살아가는 척 할 수 있다는 건, 인간이 얼마나 독하고도 고독하다는 증거인지요.

정말로 '꽃 같은 세상'입니다. 모든 존재는, '좆'으로 잉태되었고, '좆'을 통해 세상을 나와, 존재가 되었음에도, 저는 아직까지도 '좆'에 대해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꽃 진 자리에서 열매가 슬며시 맺듯, 우리도, 좆 진 자리에서 생명으로 드러나는 것이겠지요. '꽃 같은 세상'이든 '좆 같은 세상'이든 결국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이 지나갈 때 우리는 무슨 붓글씨를 쓰듯, 좆을 놀리게 되는 건가요.

생뚱맞게, 원효가 생각납니다. 내 좆은 꽃인데, 원효의 꽃은 도끼였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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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슈퍼스타 감사용'을 하길래 녹화해서 따로 보았다.

글쎄, 난 이 영화가 그다지 와닿지는 않았다. 처음엔 오밀조밀한(?) 화면 구성에 나름대로 보게끔 만드는 요소는 있었지만, 예전에 우리나라에선 스포츠 영화가 대박내기 힘들다는 얘기를 주워 들어서일까? 아니면 내가 야구에 대해선 문외한 이어서 일까? 어쨌든 전체적인 느낌은 평이했다. 게다가 우리 연극팀 후배 한 아이가 이 영화가 좋다고 극찬한 것이 오히려 나에겐 마이너스로 작용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딱 한가지 나의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장면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거진 말미에 감사용이 사력을 다 했음에도 결국은 져서 허탈하게 앉아있는 모습부터 였다. 그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서일까? 그동안 감사용을 시기하고, 무시했던 같은 삼미팀 동료들도 하나 같이 그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지나간다. 그리고 마지막 박철순이 그에게 목례하고 지나간다. 그전까지 그 누구에게도 인사 같은 건 할 줄 모르던 박철순이 감사용에게 그런 목례를 하는 건 그로선 감사용에 대한 최고의 오마주가 아니었을까? 어쨌든 박철순이 감사용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그제야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난 이기고 싶었어."를 연발하며 무너진다.

내가 그것을 잊지 못해 하는 것은 울 연극팀이 했던 연극과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버스 기사인 아버지가 고의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치어 죽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럴수 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의 아이를 치지 않으면 버스 승객을 죽음으로 몰아 더 큰 참사를 막아야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자신이 운전하던 차로 치었을 때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를 표현하는 장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순간 기가 막혀 아무 소리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까? 아님 포효하듯 울음을 토해 냈을까? 어느쪽을 선택하더라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후자쪽에 더 힘을 실었다. 그런데 내내 이런 컨셉으로 가려고 했는데 여태까지 모습도 들어내지 않다가 하루전날 짠 나타난 히든 카드(?) 녀석이 울지 말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그 녀석 올해 연극과 졸업한 것은 알겠는데, 그렇게 연출에 관여할거면 처음부터 잡을 일이지 왜 늦게 나타나 밤 놔라 대추 놔라인가?

어쨌든  그 녀석왈, 배우가 관객을 울려야지 관객이 울 준비도 안 되있는데 배우가 먼저 울어버리면 그건 짜고치는 고스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 같았다. 결국 우린 녀석의 말을 듣고 울지 않기로 하고 대신 주인공을 맡은 아이에게 울지 말고 패닉상태로 가자고 했다. 아마도 호흡이 더 갈었더라면 울어도 될것도 같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연극은 거기서 암전이다.

사실 패닉에서 암전이어도 연극이 망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한 연출에 의문은 가져 봄직하다. 정말 배우가 먼저 울면 안되는 것일까?

나는 그 영화의 이범수가 그 장면에서 우는 건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어 보였다. 비록 나는 울지 않았어도. 나 역시도 눈물나는 영화나 영상물을 본적이 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 주인공들이 그만한 상황에서 울었기 때문에 나 역시 동화가 되어 울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녀석이 말했던 관객이 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데 배우가 먼저 우는 건 쇼라고 말하는 것은 좀 맞지 않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 배우가 아주 연기를 잘 하던가, 우린 감히 올려다 볼 수 없는 연기의 최고의 경지를 넘보려고 했다는 소리 같기도 하다.

물론 난 감사용이 울었을 때 같이 울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어떤지는 십분 이해가 간다. 결국 우리 연극도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연극을 하면 실제에서는 문제도 되지 않을 법한 벼라별 것이 다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쪼잔해지고 성격더러워 지는 거 아닌가?

난 누가 연극하겠다면 뜯어 말리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의 경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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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12-29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가 얼마나 공감을 유발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슬픈연가같은 드라마는 주인공들만 열라 울지, 시청자들은 아무도 안울거든요... 이 영화에서 전 어머니가 모아놓은 야구장 입장권 때 가슴이 뭉클해졌어요.

2005-12-29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