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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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불릴 정도로 확고한 문학적 위치에 있는 일본의 국민작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본 작가다. 이 작품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B세트 제 87권에 속한다. 그의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마음>, <도련님>등을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은 네 번째로 읽은 작품이고...  100년이 넘은 작품인데도 고루하지 않고 사회비판과 함께 지식인의 삶의 태도의 모순을 잘 묘사하여 감동을 주고 있다.



 주인공인 다이스케는 사업에 성공한 아버지의 도움으로 직업이 없는 채로 그야말로 한량처럼 유유자적하며, 미술에 탐닉하거나 음악회도 가고 나름의 교양을 쌓는 등 문화생활에도 참여하며 살아간다.

서른이 다 되도록 직업을 가질 생각도 하지 않는다. ‘빵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을 가장 저열한 경험으로 생각하며, 무위도식하며 아버지의 돈을 꼬박꼬박 받아가며 산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나이가 차면 결혼을 시키려는 부모의 마음은 전통인가 보다. 사가와 집안의 딸을 소개하며 결혼을 종용하지만, 대학시절 친한 친구 히라오카의 아내 미치요가 아직도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느낀 다이스케는 끝내 결혼을 거부한다. 이로 인하여 분노한 아버지는 앞으로 아들로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며, 모든 물질적, 금전적 지원을 그만 두겠노라고 선포한다.



 그렇게도 당당했던 다이스케도 ‘돈’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친구를 배신하고, 나아가서는 사회적 인습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서까지 미치요를 선택했으나, 마지막에 커다란 궁지에 몰리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 <그 후>에는 ‘그 후’가 없다. ‘그 후’의 전야, 폭풍의 전야만 있을 뿐이다. 밋밋한 책의 제목을 짓기로 유명한 나쓰메 소세키는 이 소설에도 역시 평범한 제목을 붙였지만 그의 문학 세계의 전환을 예고하는 지극히 ‘문제적 작품’에 속한다고 한다.



 어느 소설속이든 현실에서든 모두 사랑하는 남녀가 행복하게 잘 살려면 ‘돈’은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더구나 직업이 없이 놀면서 지낼 수 있는 혜택을 누리려면 더욱 더 절대적인 것이다. 돈이 없어도 사랑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오래 지속 되지는 않는다. 기본적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는 것만 해결하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삶의 아름다움을 누려야 하고 갖고 싶은 것을 가져야 하며, 또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맨 마지막에 다이스케가, 생전에 빵을 위해 직업을 가져보지 않았던 그가, 일자리를 알아보러 뜨거운 햇볕 속으로 급히 걸어가며 “타들어 간다. 타들어 가” 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햇볕도 뜨겁지만 곤궁한 마음속은 더욱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을 게다. 사랑도 행복도 어느 정도는 물질적인 기반이 있어야 오래 가는 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회사에 매여 일을 하는 것을 ‘부품’ 운운하며 자유를 갈망하지만, 쉽사리 결단하지는 못한다. 시간에 묶여 있더라도 조금씩 주어지는 휴식 같은 여유에서 삶의 소소한 기쁨을 누리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삶에 열정이 없으면서 사랑만을 갈망하는 삶은 위험하다. 어디엔가 마음 바칠 곳 없이 무위도식하는 삶에는 회한이 자기도 모르게 기습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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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잠언 시집
류시화 엮음 / 열림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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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 꽤 친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긴 호흡의 책들을 읽느라 자주 읽지는 못하고 있다. 이벤트를 핑계로 이 책을 손에 잡았던 건 아주 오래전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책 성자가 된 청소부등 몇 권을 읽었던 기억, 2년 전 바쇼 하이쿠 선집을 읽었던 여운이 있어서다. 이 시는 잠언 시집으로 작자 미상의 시부터 이름난 시인, 문인에 이르기까지 주옥같은 시들의 향연이 들어 있었다. 시를 소리 내어 읽고 필사를 하면서 더욱 더 감동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 마음과 눈을 사로잡았던 몇 편의 시를 필사한 사진과 함께 소개해 보려 한다.

 

 

 

 

 

 

 예전에 내가 속해 있던 독서회의 선정 도서로 읽었던 조화로운 삶의 공동 저자였던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의 시를 만나서 반가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직업인으로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연으로 돌아가 몸을 쓰면서 자급자족을 위해 몸소 실천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경이로움을 느꼈었다. 불편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최소한의 물건을 갖고 열심히 땅을 일군 다음 나머지 시간을 글을 쓰며 살았던 삶, 멋져 보이면서도 범인들은 감히 실천하지 못하는 삶이었다. 도시의 숲에서라도 할 수 있는 한 간소한 삶을 살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따라해 보고 싶다. 너무 많이 갖지 않고 있는 것으로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마음의 평정을 잃지 말고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는 말이 와 닿는다. 근심 걱정을 떨치고 그날그날을 살라는 말, 지금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인 것 같다.

 

 

 

 

 

 

 

<사진> 성장한 아들에게

 

 이 시를 읽다가 작년에 취업을 해서 집을 떠나 있는 큰 아이가 생각났다. 작자 미상의 시인데 화자인 엄마는 다 자란 아들이 곁에 없는 것, 어렸을 때 많이 놀아주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운 모양이다. 그림책을 읽어 달라고 했을 때 조금 있다 읽어 주마, 하고 미루기도 했다. 그렇게 바빴던 두 손이 지금은 너무 한가해서 하루하루도 너무 길고 그때로 돌아가 놀아주고 싶단다. 모든 것은 지나고 나서야 후회가 되는 것인가. 돌아보면 세월은 얼마나 빠른 것인지. 두 녀석이 방안 가득 레고를 쏟아놓고 종일 놀던 시절이 있었는데 레고도 어디 가고 세월도 흘러갔다. 코로나 때문에 계속 재택근무라는데 좋은 점도 있겠지만 참 답답하기도 할 것 같다. 나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서 하루하루가 너무 길다는 이 시의 화자에 비하면 행복한 건가. 하루하루가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모른다. 어렸을 때 레고를 갖고 조물 거리던 그 손으로 엊그제는 나베를 끓여 먹는다고 사진을 보내왔다. 어서 코로나 물러가고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렴, 아들아.

 

 

 

칼릴 지브란의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20대 시절 엄청 사랑했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를 끼고 살았었다. 이사를 몇 번 하면서 잃어버리고 얼마나 서운했던지. 여기서 만나서 오래 전 추억과 함께 만난 듯 반가웠다. 적당한 거리감은 연인만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통용되는 말이 아닌가. 현악기의 줄들이 사원의 기둥들이 서로 떨어져 있듯이 우리는 서로의 조화로운 거리를 헤아리는 눈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사람도 시간도. 기쁨도 슬픔도.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불행도 없을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라, 는 말은 현재에 충실하며 살라는 의미이겠다. 과거에 너무 연연하다 보면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담보 잡힌다면 그것도 어리석은 일이 되겠지. 적당한 선에서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꿈꾼다면 우리는 좀 더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지 않을까.

 

 

오랜만에 시집을 읽으며 필사를 하면서 의미 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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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나를 안아 준다 - 잠들기 전 시 한 편, 베갯머리 시
신현림 엮음 / 판미동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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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시가 나를 안아준다>는 ‘한때 죽음에 가닿았을 만큼 심각한 불면증을 앓았’다는 저자가 사랑한 시 모음이다. 시가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주었고, 탐구하고 시를 쓰면서 인생의 많은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했다. 이제 우리 독자가 행복해질 차례다. 누구나 나의 슬픔, 고통이 제일 무겁게 느껴지는 법이다. 매일 밤 시를 읽으며 ‘당신이 정말 행복하면 좋겠다. 외롭고 힘들 때 이 책이 당신을 꼭 끌어안아줄 수 있으리라’는 저자의 강렬한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내가 시와 가장 친했던 적이 언제인가 생각해 본다. 고교시절 이었을 거다. 국어선생님은 방학과제로 자신의 애송시를 모아서 자신만의 시집을 만들어 제출하라는 미션을 부여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좋아했던 시, 그것도 한국시인의 시를 제1부에 외국시를 제2부에 넣고 사이사이에 그림도 그려 넣고 그것을 몇 번이고 수정하고 살펴보면서 흡족했었다. 제본 테이프를 사다가 마무리해서 제출한 결과 제일 상위점수인 A를 받고 아주 뿌듯했던 기억... 그 추억의 결과물을 한동안 갖고 있었는데, 언제 없어진지 모르게 없어졌다. 그 후로는 띄엄띄엄 시를 접했다.

 

 

끝남에 대한 고통이 닥치기도 전에

미리 괴로워하면 삶이 망가져간다.

끝나기 전까지 가능할 수도 있는 삶이

 

 

기쁨과 슬픔은

모두 한 가지에 관한 것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에 관한 것

 

 

한쪽이라도 부정한다면

이는 삶을 부정하는 것

 

 

그렇기에

기쁨과 슬픔

그 둘에게 조용히 대답한다.

“네.”라고

-주디 브라운(p188)

 

삶이 있는 한 기쁨과 슬픔은 한 몸이다.

그렇기에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부정하지 말고 간결하게 “네.”라고

이 얼마나 심플한 말인가. 고민하고 이리저리 잴 것이 없다.

아침은 또 밝아온다. 하지만 그 아침은 무한하지 않다.

내가 살아 숨을 쉬고 느낄 수 있을 때까지이다.

 

 사람에게 묻는다

 

땅에게 물었다.

땅은 땅과 어떻게 사는가?

땅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서로 존경합니다.

 

 

물에게 물었다.

물은 물과 어떻게 사는가?

물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서로 채워줍니다.

 

 

사람에게 묻기를,

사람은 사람과 어떻게 사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스스로 한 번 대답해보라.

-휴틴(p216)-

 

 저마다 자연은 자연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존재의 이유가 있다.

땅, 물 등 자연은 그냥 거기 있다. 그들은 서로 빼앗고 다투지 않는다.

태초부터 받은 것을 온전히 인간에게 내어주기만 한다.

오직 인간만이 남의 것을 가지고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의 앞으로의 삶은,

사람은 사람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되새기면서 살아야 하리라.

 

 누구든지 여러 가지 이유로 잠 못 드는 밤이 있을 것이다.

시를 두 번 세 번 낭송하면서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짐을 느꼈다.

이 시 모음은 밤, 고독, 사랑, 감사, 희망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평소 접하기 어려운 예쁜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점은 기분 좋은 덤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마음을 털고 따뜻하게 마음을 보듬어주는 시 속에 빠져 보자.

나만 힘든 게 아니고,

다들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며 살고 있구나, 안도하며 새로운 힘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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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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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다. 당시 기억에 노벨문학상의 상금이 얼마인가, 에 대해 인터넷상에 뜨겁게 오르내렸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십억 원 정도라는. 그것도 놀랍지만, 여든 두 살의 노작가, 하얀 머리의 우아하게 나이든 그 모습에 끌려서 이 책을 구입했었다. 꽤나 묵혔다가 읽은 셈이다.


 오랜만에 단편 작품을 접해서인지 처음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감이 잘 안 왔다. 짧은 이야기 속에 숨겨진 기지나 위트는 읽으면서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좀 더 읽으면서 감탄하게 된다. 정제된 간결한 문장, 직설적이고 단호함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들뜨는 느낌도 없고, 차분하기까지 하다. 열 네 편의 단편이 들어 있는데, 특별히 훌륭하고 모범적인 인간을 다루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정감 있는 이웃 같은 부류의 사람들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상처를 안겨주는 나쁜 사람도 등장한다. 부잣집 딸이지만,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여인이 남자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 또 불륜으로 맺은 남편이 옛날 여인을 만나게 되자, 불같이 화를 내다가 자신의 삶을 돌아다보며 깨닫는 여자도 있다. 남성 또한 그렇게 강인한 사람도 아니다. 그들 역시 결함이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예를 들면, 남자가 연인을 버린 이유가 여성의 힘이 두려웠기 때문인 경우도 있다. 이렇게 사람은 완벽하지 않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 그 결과에 대해 울고불고 하는 감정의 동요도 별로 없다. 오히려 더 지독한 경우를 당하지 않게 되었음을 안도하는 것이라고 할까. 너무 담담해서 옆에 있다면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연민이 느껴질 정도다.


 <아문센>은 화자인 비비안 하이드가 일자리를 찾아 요양원에 갔다가 의사인 레디 폭스와 결혼하자는 청혼을 받고 드레스를 준비하는 등 설렘으로 가득 찼는데,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결혼할 마음이 없다며 기차 티켓을 끊어서 보낸다. 멍한 장면이다. 아무런 설명도 없고 일말의 미안함도 없는 그 태도에 기가 막힐 뿐이다. 아마도 이날이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의 날 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그의 당당함, 반문할 틈도 주지 않는 눈빛. 당당하고 오만함 뒤에 어떤 이유는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우연히 마주치지만, 그 때 그 감정을 떠올린다.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자갈>은 밋밋한 삶을 싫어하여 삶의 자극을 원했던 의 엄마가 다른 남자 닐의 아이를 갖고 이전의 삶과 연관된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행복해 하며, 아이들과 시골로 떠난다. 거기서 의 언니 카로가 물에 빠져 죽게 된다. 닐은 카론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고, 그 후 태어난 자신의 아들의 아버지 노릇도 할 생각이 없다면서 떠나버린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진정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기회를 얻은 것 같다고 했는데. 삶은 이렇게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 아닐까.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이 금세 지루해지는 걸 보면. 언니 카로가 의기양양하게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모습에 붙들려 있던 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새 아빠였던 닐을 만난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P142)


 달리 무슨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좀 더 빨리, 어떻게 했더라면... 등 죄의식에 사로 잡혀 있다고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하려 함인가. 시원한 대답은 없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연연하며 살아가는 인생은 아닌지. 어쩌면 아무 일 없는, 특별한 일 없는 소박하고 지루한 듯한 삶이 행복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은 그 순간을 참지 못해서 사단이 난다. 늘 일을 벌이고 수습을 못해 나자빠져 있다가 뒤늦게 깨닫곤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자존심>은 은행가였던 아버지가 부실 경영으로 망하고 업자에게 속아서 집을 헐값에 팔게 된 오나이다가 같이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언청이의 결함을 갖고 있는 는 그녀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한다. 수술을 통해 비교적 훌륭하게고쳤지만, 어려서부터 몸에 배었던 마음의 상처를 버리지 못한 것인가. 오랫동안 익숙한 환경을 버리고 새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여전히 두렵기만 하다. 자신은 아무런 계획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늘 해오던 일을 하며 조용히 그렇게 노년을 향해 가려고 한다. 내미는 손을 잡으면 좀 더 인생이 풀릴 수도 있으련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억지를 부려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오나이다의 마음도 참 멋쩍었겠지. 한 손으로 손뼉을 칠 수 없는 노릇이다. 울새보다는 크고 까마귀보다는 작은 스컹크들이 춤을 추듯 움직이는 장면을 보며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장면은 마음이 싸하다. 서로의 길을 방해하지는 않는 그 새들의 움직임을 따르려는 이들의 마음인가 해서.

 

 이밖에도 <코리>는 돈은 많지만 다리를 저는 결함이 있는 코리가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불륜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다 그 상대 하워드에게 사기를 당했음을 나중에 깨닫는다. 고통스럽지만 무언가를 따지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보다 훨씬 더 좋지 않은 일이 생길수도 있지 않느냐는 생각에 미치고 내버려둔다. <호수가 보이는 풍경>은 꿈과 노년의 정신질환을 통해 시간과 기억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은 인간 존재에 대한 복잡한 심리를 탐색하는데, 그 주제는 주로 시간 혹은 기억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


 작품 후반에 따로 분리된 <시선>, <>, <목소리들>, <디어 라이프>는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며 소설은 아니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소설 같은 감동과 내밀한 슬픔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이야기, 괴롭힘을 당하던 학창시절 이야기, 교사였던 권위적인 어머니와의 애증관계, 아버지로부터 매 맞은 기억, 열한 살에 작가의 꿈을 꾸고 읽었던 책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져 있다. 단편을 쓴 계기가 장편을 쓰는 전단계로서 끊임없는 훈련이었지만, 쓰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했고, 다른 인터뷰에서는 나는 다른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이 일을 잘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이 일만큼 끌렸던 것은 없었고, 그러니 내 삶에는 다른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미국의 작가 신시아 오직은 우리의 체호프이며, 우리시대의 작가 대부분보다 오래 읽힐 작가라고 했으며,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master of the contemporary short story)" 이라는 이유가 노벨상 선정 이유라고 했다. 열 네 편의 이야기를 다 읽고 먼로의 연보를 읽는데 눈이 축축이 젖어든다. 그녀의 문학에의 끊임없는 열정과 삶이 전류처럼 전해졌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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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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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만나게 되어 설렜던 마음과 달리, 초반부터 참 어지간히도 잘 안 읽히는 책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그렇게 가볍게 술술 읽혀질 수 없겠지. 인간사에 얽히고설킨 문제를 드러내어 더 나은 삶을 구현하는 역할을 하는 문학의 힘을 생각해 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 읽기를 다 마치고 작품 해설을 보니 역시나, ‘악명 높은 1장’이라고 했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960년 ‘일미안보조약’을 체결하려는 정부에 맞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전국적인 반대 투쟁을 벌였던 해이며, 이듬해 정초까지의 기간으로 되어 있다.


나(화자)는 원래 추한 얼굴로 태어났는데, 길을 걷다가 두려움과 분노로 패닉 상태에 빠진 초등학생들이 던진 돌에 맞아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이 사고에 대해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없고, ‘기대’할 게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아내는 위스키를 달고 사는 알콜 중독자이다. 그리고 이 부부의 아이는 머리에 혹이 달린 채 태어난 백치다. 일란성 쌍둥이로 불리던 나의 친구는 엽기적인 모습을 하고 자살을 했다. 여기까지만 봐도 온통 고통으로 얼룩진 인간 군상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온통 ‘죽음의 냄새가 나는 것들에 완전히 둘러싸여’(P75)있었다.

 

 미국에서 방랑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동생 다카(다카시)는 형에게 시코쿠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그렇다면 형, 그것들을 떨쳐 버리고 삶의 자리로 올라와야 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음의 냄새가 형한테 옮겨갈 거야.”(p75)라고 한다. 이미 겁쟁이였던 예전의 동생이 아니다.


초반부터 작품의 분위기는 두려움과 수치심의 고통으로 사로잡혀 있다. “너는 꼭 쥐새끼 같다!”는 말을 마음속에서 떨칠 수가 없다. 꿈속에서조차 정화조 구덩이를 간절히 그리워 할 만큼 자기혐오와 수치심으로 똘똘 뭉쳐있다. 또 하나는 무기력이라고 할까. 맨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아내를 보고 제지하지도 않는다. 포기하고 그대로 지켜보는 것 밖에는.

 

 시코쿠 고향 골짜기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이 ‘슈퍼마켓 천황’에게 빚을 지지 않은 이가 없었다. ‘슈퍼마켓 천황’은 골짜기 사람들의 부정적 감정이 잠재되어 있는 호칭이었다. 20년 전에 강제로 끌려와 벌채 노동을 했던 조선인들이 이제는 거꾸로 경제적 우위에 서게 된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역설적인 표현이었던 것이다.

 

 동생은 만엔 원년(1860년)의 증조부 동생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S형의 죽음에 맞서 ‘슈퍼마켓 천황’을 축출하려 한다. 광기어린 영웅 심리로 자신을 동일시한다. 풋볼 팀을 구성하여 훈련을 시킨다. 폭동을 일으키기 위한 훈련이다. 군중을 선동하여 물건을 약탈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군중의 ‘고통의 열망’을 이용하여 폭력을 동원하는 또 하나의 폭력이 어디 성공한 적이 있었던가. 이용만 당하고 폭동은 실패로 끝나며 고스란히 고통을 떠맡게 되는 이는 현지 주민들이다. 다시 비굴하게 고개를 숙인다.

 

 증조부의 동생은 우리 집안에서 보면 자신의 집을 부수고 불을 지른 최악의 미치광이였고, 혼자만 처형을 모면했다. S형은 반대로 조선인 부락의 습격 참가자 중 혼자만 살해당하는 역할이었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무슨 일인지 알 수도 없고 성과도 없는 일을 해서 재산과 생명을 잃은 아버지는 그 미치광이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S형은 아버지를 통해 증조부의 동생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애는 내 자식이 아니라고 했다. 그 역할을 다시 다카시가 맡은 것이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못된 짓을 할 수도 없을 만큼 힘이 빠져버려서 결국 선량할 수밖에 없는 쇠약자’인 나는 다카의 풋볼 연습이 증조부님 동생이 청년들을 훈련시킨 것이 아니라 오로지 평화적인 목적으로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랐지만, 골짜기 마을은 폭력으로 얼룩진다.

 

 또 하나의 감도는 분위기는 무기력하고 미약한 존재감이다. 이미 자기혐오와 수치심으로 가득한 사람은 주변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 마치 강 건너 불구경 하는듯한 심정이다. 이 골짜기에 뿌리를 내리려 하나 뿌리가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 동생 다카시는 교활한 연기를 하면서 형의 명의로 된 집과 토지를 팔아치웠고, 풋볼팀을 위한 기부금 명목으로 절반 이상을 빼앗아 갔다. 그것을 알고도 따지지도 못하는 체념과 무기력.

 

 동생의 포악한 생각을 읽은 나는 왜 그것을 저지하지 못하는가.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며 ‘외부 인간’이라고 치부한다. 자기만 깨끗하면 된다? 옳지 못한 일을 하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말리지 않고 그저 방관하는 자세야말로 ‘말기적인’일이 아닌가. ‘새 생활’이라는 명분 속에서 동생 다카시는 형수(아내)와 불륜을 저지른다. 미스테리로 남아 있던 누이동생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실토한다. 이 엄청난 일들이 너무도 초연하게 묘사된다. 기본적인 인간성마저 의심된다.

 

 반사회적인, 육친 형을 배신한 비양심적인 행위를 아무런 미안한 마음 없이 털어놓는 장면은 전율을 느낀다. 인간의 심리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과연 인간에게 최소한의 선이 있는가싶다. 무질서의 극치. 동생의 포악과 폭력을 보고도 비겁하게 얕은 잠 속으로 도망치려 한다. 폭력을 당하고 또 폭력을 가하는 가해자가 된다. 누이동생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죽음으로 갚는다. 나는 비로소 다카시의 죽음으로 동생의 아이를 가진 아내와 다시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결코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읽어내기 무척 힘들었지만, 읽기를 마친 지금, 뿌듯한 마음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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