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일본 성은 혼마루本(중심 성곽), 니노마루(제2성곽), 산노마루(제3성곽)의 3중 구조인데, 히메지성은 여기에 니시노마루(서쪽 성곽)와 데마루(방어 성곽)까지 더한 5중 구조다. 더불어완벽한 방어를 목적으로 들어선 많은 건물이 완벽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어 히메지성이 보유한 국보만 8채에다 중요문화재(우리로 치면 보물)는 74채에 이른다(성 안의 건물 대부분이 국보 아니면 보물인 셈이다. - P119

•창건 당시의 아스카데라는 지금처럼 작은 절이 아니었다. 사방 2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사찰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아스카데라 건설•에 백제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찰 건립 계획을 세운 소가 씨가 도움을 요청하자, 백제는 승려는 물론이고 건축과 토목기술자, 기와 장인, 화공까지 보냈다. 거의 ‘국가대표급 공사 팀‘을 보낸 것이다. 일본 국왕의 사찰도 아니고, 아무리 실세라지만 일개 귀족가문의 요청으로 이런 드림 팀을 파견했다는 것이 놀랍다.
- P130

더불어 아스카 문화가 백제의 강력한 영향 아래 생겨났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불교를 전한 것도, 최초의 사찰을 지어준 것도 백제였으니 말이다. 당시 일본의 기술 수준은 보잘것없었다. 지금은 터만 남은 아스카의 궁전들도 나무 지붕 건물이었단다. 그때까지 일본은 기와를 만들어낼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아스카데라는 일본 최 - P131

초의 기와지붕 건물로도 알려져 있다.
이렇게 여러 개의 ‘일본 최초‘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아스카데라는나라 시대 이후 잊힌 절이 되었다가, 가마쿠라 막부 초기에 벼락을맞고 불타버렸다(그러고 보니 오사카성 천수각을 불태운 것도 벼락이었다. 이렇듯벼락은 일본 옛 건물의 주된 화재 원인 중 하나다). 지금 보이는 건물은 수백 년뒤 에도 시대에 재건된 것으로, 규모도 모양도 분위기도 그 옛날의것은 아니다. - P133

일본 고대사의 핵심 인물, 1984년까지 발행된 1만엔권 지폐 속인물, 지금도 일본인이 존경하는 역사인물로 손꼽힌다는 쇼토쿠 태자가드디어 등장한 것이다(심지어 많은 학자는 쇼토쿠 태자가 섭정이 되는 593년•을 아스카 시대의 실질적인 시작이라고 본다). 이 중요한 인물에 관해서는 그가 세웠다는 ‘아스카 문화의 꽃, 호류지로 가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로 하자.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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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오사카는 전성기를 맞았지만, 오사카성은 벼락을 맞아 천수각이 불타는 등 시련에 시달렸다. 소실된 천수각은 수백 년 동안방치되었다. 평화로운 에도 시대에는 난공불락의 성이 필요 없었던탓이다. 천수각은 에도 시대와 메이지 시대까지 지난 1931년이 되어서야 다시 지어졌다. 여기에는 당시 오사카가 도쿄를 제치고 명실공히 일본 제1의 도시로 올라섰다는 자부심도 한몫했다. - P92

쓰루하시 시장의 왁자지껄한 활력 뒤에는 80만 재일교포들의 고단했던 역사가 숨어 있다. 비극의 시작은 일제의 조선 강점이었다.
한반도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일본제국의 국민, 그것도 차별받는 2등 국민이 되었다. 일본 ‘본토‘의 1등 국민들이 몰려오자 식민지의 2등 국민들은 땅도 집도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 P109

이렇게 늘어난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자이니치조센징)의 수는 태평양전쟁 종전 당시 200만 명에 달했다. 해방 후 그중 140만 명가량이 조국으로 돌아갔지만, 나머지 60만 명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본에 남았다. 특히 군수공장이 몰려 있던 오사카에는 20만 명이나 되는 재일조선인이 남아 있었다. - P109

하루아침에 무국적자가 되어버린 자이니치를 향해 각종 차별이 시작되었다(사실은 차별하기 위해 무국적자로 만든 것이다). 의료보험이나 연금에 가입할 수도, 공무원이 될 수도, 취직할 수도, 심지어 집을 임대할수도 없었다. 자이니치의 역사는 ‘차별을 없애기 위한 투쟁사‘라 해도과언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으나 일본에서 자이니치로 사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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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일본과 백제의 관계를 알아보고 넘어가자. 기원전 - P79

300년 무렵 도래인이 일본에 문명을 전해준 이후 한반도와 일본은활발히 교류했는데 그 중심에는 백제가 있었다(일본에 처음 한자를 전해준 왕인 백제 사람이다). 당연히 일본 조정에 친백제계 세력이 생겨났고 사이메이 덴노 또한 친백제계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파견된 총 4만 명의 일본군은 백강(지금의 금강으로 추정)에서 나당 연합군과맞붙었지만 참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많은 백제 귀족이 일본에 망명했고, 이들 덕분에 일본 사회는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 P81

도쿠가와의 에도 시대에 오사카는 ‘천하의 부엌‘으로 불리며 전성기를 맞았다. 전국에서 생산한 쌀과 특산물, 다양한 상품들이 오사카에 모였다가 에도로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물자의 이동이 주로 강과바닷길을 통했기에 ‘물의 도시‘라는 별칭도 붙었다. 오사카阪: 큰 언 - P83

라는 이름이 생긴 것도 이 시기였다.
‘천하의 부엌‘이라는 별명은 ‘맛있는 음식이 많다‘는 의미보다는
‘천하를 먹여 살릴 만큼 물산이 풍부하다‘는 뜻에 가깝다. 에도가 정치의 중심이라면 오사카는 일본 최고의 경제도시였다. "모우카리맛카?"(벌이는 좀 위) 하는 오사카 특유의 사투리) 인사말이생겨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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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탕으로 메이지 정부는 법률, 교육, 금융, 군대, 교통부터 옷과 음식 등 일상생활까지 서양식 근대화를 추진했다. 헌법을 만들고의회를 구성하는 등 덴노 중심의 근대국가 체제를 갖춘 일본이 가장먼저 한 일은 해외 침략이었다. 이들이 따라 배운 국가들이 모두 서양 제국주의 국가였으니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 P57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 경제의 황금기를 가져왔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전쟁을 하는 동안 일본은 전쟁 물자를 만들어 팔았으니까 - P57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끝이 보이지 않는 대공황을 탈출하기 위해 일본이 선택한 것은 전쟁이었다.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태평양전쟁(1941)을 연달아 일으키며 일본은 전쟁에 올인했고, 결과는 파국이었다. 전쟁 말기의 도쿄 대공습으로 10만 명,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수십만 명의 일본 민간인이 죽었다. 마지막까지 덴노를 지키기 위한 ‘옥쇄 작전‘(후퇴 없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작전이 펼쳐진오키나와에서는 전체 인구 중 4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은 일본인뿐 아니라 아시아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재앙이었다.  - P59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멈췄던 일본의 공장은 한국전쟁의 군수물자를 대기 위해 다시 가동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후에도 일본에서는 해마다 10퍼센트 이상 경제가 성장하는 ‘진무경기‘가 이어졌다(진무는 일본의 첫 덴노로, 우리로 치면 단군 같은 존재다. 즉 ‘진무경기‘란 ‘단군 이래 최대 호황‘과 같은 뜻이다). 일본의 고도성장은 도쿄 올림픽(1964년)과 오사카 엑스포(1970년)를 거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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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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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김정선은 20년 넘게 남의 문장을 다듬는 교정 교열 일을 하면서도 동사의 맛, 소설의 첫 문장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교정 교열 일을 20년도 넘게 했다니 그 분야의 전문가라 할 만하겠다. 책을 읽다가 전에 재미있게 보았던 일드 <수수하지만 굉장해!> 가 떠올랐다. 패션 잡지 편집장이 꿈이었던 코노 에츠코가 7년이나 도전하여 취업에 성공했는데 처음 맡은 일이 교정 교열이었다. 양질의 교정 교열을 위해 작가를 직접 만나거나 현지답사까지 하는 등 열정을 쏟는 교정자의 일상을 보면서 재미는 물론 뭉클한 감동까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책을 통해 알게 된 교정자의 일상은 조금 달랐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고 문장과 씨름 해야 하는 고뇌의 과정도 엿보였다. 다루고 있는 내용은 저자가 많은 문장을 다듬으면서 얻어낸 좋은 문장 표현과 한 저자와 나눈 메일 내용을 사이사이 소개하고 있다. 교정 교열에 대한 규칙만 알려주었다면 지루한 느낌도 있었을 텐데 그러한 에피소드도 곁들여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맨 처음 다루고 있는 내용은 적ㆍ의를 보이는 것ㆍ들’ 5가지와 굳이 있다고 쓰지 않아도 어차피 있는표현 3가지 등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도 모르게 중독(?)이 된 채 쓰고 있는 익숙한 문장 표현이 많다. 아마도 평소에 글쓰기를 자주 하는 사람이라면 책을 읽다가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서 놀랄 것이다. 이 중 몇 가지를 소개해 보겠다.

 


<예시>


사회 현상, 경제 문제, 정치세력, 국제 관계, 혁명 사상, 자유주의 경향


<교정의 예>

사회 현상, 경제 문제, 정치 세력, 국제 관계, 혁명 사상, 자유주의 경향(p19)

 



접미사 ‘-과 조사 ‘-그리고 의존 명사 과 접미사 ‘-도 무의식적으로 자주 쓴다는 사실을 번역 수업을 통해 깨달았다. 그저 무심코 쓰다 보니 습관으로 굳어지지 않았나 싶다.하지만 좀 더 나은 표현을 쓰려고 궁리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단어에서 ‘-을 빼니 훨씬 깔끔해졌다. 늦게라도 간결하고 좋은 문장 표현을 알게 되어 다행이다 싶다.

 


조사 ‘-의 예도 들어보자.


1. 문제 해결

2. 음악 취향 형성 시기

3. 이제는 모든 걸 혼자 힘으로 해내야만 한다.

4. 부모와 화해가 우선이다.


나열한 문장은 ‘-를 빼고 아래와 같이 다듬을 수 있다.



1. 문제 해결

2. 음악 취향이 형성되는 시기

3. 이제는 모든 걸 혼자 힘으로 해내야만 한다.

4. 부모와 화해하는 일이 우선이다.(p22~23)

 

특히 2번과 4번은 ‘-를 빼고 문장 일부를 다듬어 좀 더 다양한 표현으로 교정할 수 있다.

  


이번에는 것ㆍ들을 무심코 쓰게 되는 문장의 예를 들어보겠다.


<예시>


1. 사과나무들에 사과들이 주렁주렁 열렸다.

2. 수많은 무리들이 열을 지어 행진해 갔다.

3. 내가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

4. 인생이라는 것을 딱 부러지게 정의하기 어렵다면



<교정의 예>


1. 사과나무에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다.

2. 수많은 무리가 열을 지어 행진해 갔다.

3.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

4. 인생을 딱 부러지게 정의하기 어렵다면(P28)

  



이 예시에서 우리가 ‘-이나 ‘-을 얼마나 남발하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 무리는 단어 자체에 이미 복수의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을 붙일 필요가 없다. ‘적ㆍ의를 보이는 것ㆍ들습관적으로 적ㆍ의ㆍ것ㆍ들을 무심코 붙이면 문장을 읽는 독자들이 적의를 보인다라는 재치있는 언어 유희로 기억하고 글쓰기에 실천해 보면 어떨까.

 



지적으로 게을러 보이게 만드는 표현에 대한 내용도 무척 공감한 부분이다. 글쓰기를 하다 보면 ‘-에 대한(대해)’, ‘-들 중 한 사람, ’-들 중(가운데) 하나, ‘-들 중 어떤’, ‘-같은 경우’, ‘-에 의한’, ‘-으로 인한등의 표현을 얼마나 자주 쓰는지. 이 중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같은 경우


같은 경우에는, 중국 같은 경우, 같은 경우

 


이 문장을 살펴보면 경우’, ‘중국경우’, ‘경우가 동격이 된단다. 무심코 쓴 표현이 비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나 또한 ‘-같다‘-같은등의 표현을 자주 쓴다는 걸 떠올렸다. 이 표현을 습관적으로 쓰다 보면 확신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는 대상에까지 쓰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제가 합격했다니 정말 꿈만 같아요라고 할 때는 형용사 같다가 어울리지만 어제 친구랑 밥 먹고 영화를 봤던 것 같아요라고 쓰면 어색한 표현이 된다.

 



마지막으로 얘기하는 내용은 문장 다듬기이다. 문장을 쓸 때 유의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주어와 술어가 호응하도록 배치해야 하고 관형사나 부사처럼 꾸미는 말은 각각 체언과 용언 앞에 제대로 놓아야 하며 수와 격을 일치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기본 원칙 외에도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있는데, 누구나 문장을 쓸 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써 나간다고 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누구나 문장을 읽을 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읽어 나간다는 얘기다. 실제로 문장을 읽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며 문장을 쓰는 방법도 그와 다를 수 없다고 했다. 과연 그렇구나. 너무 당연한 말이라 이런 원칙이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 더구나 한국어 문장은 영어와 달리 되감는 구조가 아니라 펼쳐 내는 구조라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계속 풀어내야 한단다.

 


<예시>


계속 걸어간 나는 마침내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나는 계속 걸어서 마침내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p196)

 



언뜻 보면 비슷한 의미 같은데 저자의 분석을 보니 차이가 느껴졌다. 위의 문장 계속 걸어간 나는이 만드는 거리와 그 뒤로 이어진 마침내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가 만드는 거리가 다르다는 것이다. 앞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밭은 느낌이고, 이렇게 거리가 일정하지 않으면 뭔가 펼쳐지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고 했다. 반면 두 번째 문장은 거리가 일정하게 펼쳐 낸 문장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문장의 주인이 문장을 쓰는 내가 아니라 문장 안의 주어와 술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문장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고 글을 쓰면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넘어가거나, 문장의 기준점을 문장 안에 두지 않고 내가 위치한 지점에 두게 되면 자연스러운 문장을 쓰기가 어렵다고 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으므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평소에 생각지 못한 거라서 신선하고 유익한 공부가 되었다.

 



글쓰기에 깊은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을 것이다. 오랜 시간 교정 교열의 현장에서 길러낸 유익한 팁이 가득 들어있다. 글의 행간에서 저자의 감성도 엿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 전문 교정자로서 단호함이 느껴져서 더욱 진정성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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