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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하이쿠.센류 그림 시집 - 한 줄짜리 日本詩 ㅣ 에피파니 에쎄 플라네르
이수정 편역 / 에피파니 / 2019년 5월
평점 :
번역 수업에서 일본 유력신문의 칼럼을 번역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와카가 나왔다. 고전 문법이 쓰인 만큼 당연히 번역하기 어려웠다. 번역에 도움이 될만한 책을 소개받았는데 하이쿠와 와카를 자주 읽어보라는 거였다. 이 책은 와카, 하이쿠, 센류가 들어있는 그림 시집이다. 편역자 이수정은 문학박사이며 시인으로 일본어와 독일어에 능하신 분 같다. 저서로는, Vom Razel des Begriffs (공저), Berlin, Duncker&Humblott 『言語と現·』(공저), 東京, 有斐閣, 『하이데거―그의 생애와 사상』(공저), 서울대출판부 『하이데거―그의 물음들을 묻는다』, 생각의 나무(한국연구재단 우수저서) 『하이데거―‘존재’와 ‘시간’』, 철학과현실사 『본연의 현상학』등이 있고, 역서로는 『현상학의 흐름』, 『해석학의 흐름』, 『근대성의 구조』, 『현상학의 흐름』등 다수 있고, 시집으로는『향기의 인연』, 생각의 나무『푸른 시간들』, 철학과현실사 등이 있다.
먼저 생소한 독자를 위해 와카(和歌), 하이쿠(俳句), 센류(川柳)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 보려 한다. 옛날부터 일본인들은 한 줄짜리 시를 즐겼는데 5-7-5-7-7로 글자수를 맞춘 것이 와카이다. 하이쿠는 글자수를 더 줄인 5-7-5에 반드시 계절을 나타내는 ‘키고(季語)’가 들어간다. 이를 무시하고 재치와 풍자의 해학을 담은 것이 센류이다. 이 시집에서는 일본어와 한글 발음을 병기해서 일본어를 모르는 독자라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무엇보다도 시집에 잘 어울리는 화려한 ‘우키요에’(浮(き)世絵, 에도시대에 성행한 풍속화)를 감상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이제 시를 감상해 보자.
와카(和歌)
먼저 만요슈(万葉集) 한 편을 소개한다.
柳こそ伐れば生えすれ世の人の
야나기코소 키레바하 에스레 요노히토노
恋に死なむを如何にせよとぞ
코이니시나무오 이카니세요토조
読人しらず(東歌)
버들가지야 꺾여도 또 나지만 세상 사람은
그리워 죽겠는데 어쩌란 말이신지
(p19, 작자불명)
*만요슈(万葉集)-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시가(詩歌)집((20권; 奈良 시대 말엽에 이루어짐)).
여러 장르 중 언어의 경제성을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한 것이 시라고 한다. 이 시집에 소개된 와카, 하이쿠, 센류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차이를 느껴보자. 작자불명의 이 시에서 화자는 그리운 이를 떠나보낸 듯하다. 자연은 무수한 영겁의 세월을 거듭하면서도 새로운 생을 살 수 있지만, 인간은 한번 가면 그걸로 마지막이다. 그러니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생겨난 걸까. 우리에게 영원할 것 같은 시간도 마찬가지다. 하루하루 보내다 보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시간을 붙들 수는 없으니 우리가 그 시간과 함께 동지가 될 때 의미있는 일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타가와 히로시게 그림.
코킨와카슈(古今和歌集)
봄노래
벚꽃 잎이여, 어지러이 흩날려 눈 가려주렴
늙음이 찾아오는 저 길이 헷갈리게
(p23, 아리와라노 나리히라)
벚꽃은 화사하다. 지는 벚꽃은 환상적이다. 하지만 어지러이 흩날리는 꽃잎을 보며 젊음이 사라지는 것을 떠올리는 이도 있으리라. 늙음이 찾아오는 길을 헷갈리게 하여 막아달라는 화자의 말에 애잔함도 묻어나고 왠지 재치도 느껴진다. 나이가 들어도 동안으로 살고 싶은 마음에 얼마나 많이 노력을 기울이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시다.
가을 노래
달 보노라니 오만가지 것들이 다 서글퍼라
나 혼자만 찾아온 가을은 아니지만
(p63, 오에노 치사토)
가을은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고 쓸쓸해지는 계절이다. 이름 모를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리는 밤, 저녁 달이 뜬 밤은 고요하다. ‘오만가지 것들이 다 서글’프다고 한 이 시의 화자는 홀로 오랜 세월을 살아왔을까. 그래서 지난날의 추억을 더 많이 떠올렸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되돌아볼 수 있는 가을이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그리운 사람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으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테니.
신 코킨와카슈(新古今和歌集)
여름 노래
창문 가까이 댓잎을 희롱하는 바람 소리에
너무나도 짧았던 선잠의 꿈이었네
(p87, 쇼쿠시 공주)
어찌 잊으리 접시꽃을 묶어서 풀베개 삼고
선잠 잤던 들판의 이슬 내린 동틀 녁
(p87, 쇼쿠시 공주)
한여름의 낮잠만큼 행복한 시간이 있을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시골집 마루에 누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던 기억이 난다. 흰 구름 뭉게뭉게 떠다니고 시원한 바람 한 줄기에 스르르 눈이 감긴다. 어느 날인가는 비몽사몽 깨어 ‘학교 가야지!’ 하고 놀랐던 기억도 있다.
하이쿠(俳句)
에도시대의 하이쿠(1603~1867)
춥다곤 해도 불은 쬐지 마시게 눈사람이여
(p121, 야마자키 소칸)
빙그레 미소가 지어지는 하이쿠다. 추운 겨울에나 살 수 있는 눈사람. 아무리 춥다해도 불을 쬐는 순간 녹아내린다. 시의 화자는 눈사람을 만들며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이 하이쿠를 떠올렸을까. 시인의 눈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다. 뭘 보더라도 시 하나를 건진다.
소리로 죄다 내질러버렸구나 이 매미 허물
(p137, 마쯔오 바쇼)
모기 한 놈이 나 귀머거린 줄 알고 또 찾아왔군
(P179, 코바야시 잇사)
여름 하면 떠오르는 상징물은 매미 소리다. 뜨거운 여름날 매미들의 합창을 듣고 있으면 시끄러운 소리에 귀가 따갑다. 그런데도 자장가처럼 들릴 때가 있다. 매미 울음은 규칙성이 있다. 하나가 울기 시작하면 일제히 따라 합창을 하고 함께 멈춘다. 얼마나 소리를 질러댔으면 허물이 벗겨졌을까. 땅속에서 움츠리고 있다가 7년 만에 나왔으니 마음껏 울도록 내버려 두어야겠다.
모기는 그야말로 여름날의 불청객이다. 귓가에서 윙윙대는 소리가 나면 한밤중에도 벌떡 일어난다. 감히 내 잠을 방해하다니! 라며 짜증이 나곤 했던 나에게 이 시가 눈에 확 들어왔다. 모기와 씨름하면서도 시상을 떠올리는 문인들의 재치를 한 수 배우고 싶다.
근대의 하이쿠
어깨에 와서 붙임성 있게 앉네 고추잠자리
(p223, 나쓰메 소세키)
달디단 홍시, 떫었던 젊은 날을 잊지 마시게
(p227, 나쓰메 소세키)
나의 최애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하이쿠를 많이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난번에 읽은 하이쿠에서도 그의 재치를 확인했는데 이 하이쿠도 역시나 그랬다. 어린 시절 내 옷에 어쩌다 앉은 잠자리를 보고 놀라며 신기해했다. 그게 ‘붙임성’이 있어서 그랬구나.
아래의 하이쿠는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하지 못한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가 있어야 현재도 있다. ‘떫었던’ 시절을 잘 견뎌내야만 ‘달디단 홍시’가 된다. 지금 더없이 좋은 때라면 더더욱 과거의 힘든 시절을 되새기며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 자연에서 삶의 지혜를 건져 올릴 수 있는 혜안에 탄복하게 된다.
우타가와 히로시게 그림.
센류(川柳)
하이후 야나기다루(誹風柳多留)(1765-1840)
달아나면서 ‘두고 봐!’ 하는 것은 졌다는 얘기
(p275)
입은 가볍고 엉덩이는 무거운 우리집 식객
(p277)
인간 행동에서 재치와 풍자의 해학을 담았다는 센류 중 두 시가 눈에 띄었다.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소재라서 더욱 정겹다. 아웅다웅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이 그려지고 ‘말’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이렇게 짤막하게 묘사한 시를 보니 유머와 재치가 느껴진다. 나와 좀 다르더라도 그러려니 할 수 있는 넓은 아량을 베푼다면 또 어우렁더우렁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매미의 함성이 한창인 무더운 여름이다. 폭염으로 인해 책읽기도 집중이 잘 안 될 정도다. 이럴 땐 여백이 많은 시를 읽으며 더위를 달래보는 건 어떨까. 짤막한 하이쿠와 와카, 센류를 읽으며 옛 문인들의 일상과 마음을 엿보는 즐거움이 있다. 옛사람들이 살던 모습과 풍경을 담은 우키요에도 덤으로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