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TV애니메이션 원화로 읽는 더모던 감성 클래식 3
진 웹스터 지음, 애니메이션 <키다리 아저씨> 원화 그림, 허윤정 옮김 / 더모던 / 201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적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같은 제목의 이야기를 접한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이 이야기의 일부로 기억한다. 인기 있던 TV만화도 작정하고 본 적이 없어 대략의 줄거리만 알고 있어서 오히려 더욱 재미있게 읽지 않았나 싶다. 고아라는, 어쩌면 불행일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긍정적인 성격으로 자신과 주변의 많은 것들을 사랑하며 유쾌하게 성장해가는 모습은 빨간 머리 앤이 자연스럽게 겹친다. 앤에게 영혼의 단짝 다이애나가 있다면 주디의 영혼의 단짝은 키다리 아저씨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일방적인 의무감으로 써야하는 편지이긴 했지만, 주디는 의무감을 떠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더 즐기는 듯했으니까. 더 모던의 감성클래식 작품은 처음 갖게 되었는데 품격 있는 양장본에 TV에니메이션 원화가 들어 있어 읽는 재미와 소장의 기쁨도 누렸다. 이야기는 우울한 수요일과 주디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낸 편지로 짜여 있다.

 

 존 그리어 고아원에서 열여덟 살 최고령이 된 제루샤 애벗은 97명의 어린 고아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허드레 일꾼으로 우울한 수요일을 보내던 어느 날 원장실에 불려가 재단 이사 중 한 부자 신사가 대학을 보내주고 작가로 키우기로 했다는 제안을 듣는다. 그 보답으로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한 달에 한 번 편지로 쓸 것, 절대로 답장을 기대하지 말고 빚을 갚는 마음으로 꼬박꼬박 쓰라는 특이한 조건이다. 이름도 밝히는 것을 꺼려하니 존 스미스 씨 앞이라고 써서 비서를 통해 전달하라면서. 평생 고아원을 떠나본 적이 없는 주디에게 정말 놀랍고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키 큰 뒷모습을 상상하며 키다리 아저씨라고 칭하기로 하고 자신은 제루샤 애벗이라는 이름 대신 주디라고 불러달라는 부탁과 함께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고아원을 떠나 처음 기차를 타고 신났던 일, 행복한 대학생활의 이야기, 그런 생활이 가능하도록 도움을 준 아저씨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새 친구 샐리 맥브라이드와 줄리아를 소개하고 혼자서 방을 쓰게 된 이야기, 농구부에 뽑힌 이야기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모두 편지에 쏟아낸다. 도움을 받는 입장이라고 해서 결코 의기소침해 하지 않는다. 고아원의 목표란 게 아흔일곱 명의 고아 모두를 아흔일곱 명의 쌍둥이로 만든다는 획일적인 교육제도를 비판하기도 한다. 자존심 강하고 영리하며 당돌함이 느껴지는 주디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곡을 찌르면서도 감수성 풍부하고 발랄한 소녀의 모습도 보인다.

 

아저씨도 아시겠지만 대학에서 진짜 어려운 건 공부가 아닙니다. 노는 거예요. 다른 아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저는 반도 못 알아들어요. 아무래도 (저를 뺀 제 또래 아이들이 과거에 다들 경험했던 일과 관련된 우스갯소리들 같은데, 전 이 세계에서 이방인이고 그녀들의 언어를 몰라요. 그럴 땐 정말 비참한 기분이 듭니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어요.’(P48)

 

 고아원에서 자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지만 불쑥 튀어나오는 말에 자신도 깜짝 놀라게 되는 장면은 얼마나 안쓰럽고도 귀여운지. 질문을 해도 대답을 주지 않는 키다리 아저씨에게 심술이 나서 퉁명스럽게 편지를 썼다가도 금세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는 주디의 순수한 마음에 웃음이 나기도 한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상황을 편지에 썼다가 아름다운 장미꽃을 받고는 너무 행복해서 엉엉 울었다는 주디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첫 방학을 맞아 석 달 동안은 난생 처음 록 윌로우 농장에서 보낼 수 있게 되어 기대감으로 부푼 이야기, 줄리아의 삼촌인 저비스 펜들턴 씨와 학교 교정을 산책하고 대화하고 차를 마신 이야기를 자랑하는데...

 

 

아저씨, 저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 상상력이라고 생각해요. 상상력이 있어야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요. 친절과 공감과 이해심도 생겨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상상력을 키워 줘야 해요. 하지만 존 그리어 고아원은 상상력의 싹만 보여도 즉시 잘라 버려요. 그곳에서 장려하는 자질이라곤 오직 의무감뿐이지요. 저는 아이들에게 의무라는 단어도 알려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단어예요. 아이들은 뭐든지 의무감에서 하면 안 돼요. 사랑에서 우러나와서 해야 해요.(P178)

 

 고아원을 떠나 처음으로 세상의 품에 안겨 생활하면서 처음엔 고아원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했지만 조금씩 배우고 넓은 마음으로 변화하는 주디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어디 고아원에만 그치는 이야기일까. 제도적인 교육 전반이 상상력과 창의력은 무시한 채 획일적인 상품을 찍어내기에 급급하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남의 입장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에서 공감과 이해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의무보다는 사랑의 마음이 우선이라는 주디의 말에 움찔하지 않을 수 없다.

 

'엄청나게 커다란 기쁨만 중요한 게 아녜요. 작은 것에서부터 큰 기쁨을 끌어내는 것, 그게 바로 행복의 참된 비결이고, 그러려면 바로 현재를 살아야 해요! 지난 일을 영원히 후회하거나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으로 사는 거예요. 농사 짓듯이요. 농사에는 조방농법과 집약농법이 있어요. 저는 집약농법처럼, 매 순간을 즐기며 살아갈 거예요. 또 매 순간을 즐기는 내 자신을 지각할 거예요.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가는 게 아니라, 경주를 해요. 오직 저 멀리 지평선에 놓여 있는 결승점에 도달하려고 안간힘으로 달리는 거예요. 그렇게 한참 달리다 보면 숨이 턱까지 차서 헐떡거리게 되고, 그러면 아름답고 평화로운 전원 속을 지나오면서도 그 풍경을 다 놓치고 말아요. 결승점에 이르러서야 깨닫죠. 자신들이 늙고 지쳐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결승점에 도달하느냐 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요. 저는 길가에 앉아 소소한 행복을 많이 쌓기로 했어요.‘(P243~244)

 

 요즘 소확행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고 있다. 소박한 일로 행복을 찾는 일과 현재를 제대로 살자는 말이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는 지금을 제대로 살 수 없다. 행복한 하루하루가 쌓여갈 때 우리의 삶이 대체로 행복했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천천히 풍경도 음미하며 소소한 행복을 쌓기로 했다는 주디의 말이 다시금 위안과 힘을 준다.

 

'3학년에는 경제학을 선택했어요. 다방면으로 유익한 학문이죠. 경제학을 끝내면 자선과 개혁과목을 듣겠어요. 그 과목을 수강하면 고아원 경영에 훤해지겠죠. 제게 선거권이 있다면 바람직한 유권자가 될 것 같지 않으세요? 지난주에 저는 스물한 살이 되었답니다. 저처럼 정직하고 교양 있고 양심적이며 지성을 갖춘 시민을 내팽개치다니 이 나라에 얼마나 큰 손해인가요.’(P229)

 

보세요, 아저씨. 저는 지금 눈앞의 유혹을 완강히 외면한 채 오로지 일에만 전념하고 있어요. 부디 언짢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저씨의 친절함에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아이라고 여기지도 말아 주세요. 언제나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있어요. 아저씨의 은혜를 갚는 유일한 방법은 매우 쓸모 있는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여자도 시민일까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매우 쓸로 있는 사람이 될게요. 아저씨가 저 매우 쓸모 있는 사람을 내가 키워냈소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 정도로요.’(P259)

 

 학업에 쓰이는 돈 이외의 것을 더 주려고 하거나 유럽에 보내주려고 하는 아저씨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할 줄도 안다. 이런 주디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고아였지만 교육의 혜택을 받으며 당당하고 성숙한 어른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마음이 흐뭇해진다. 받은 것에 멈추지 않고 글쓰기를 통해 자립을 꿈꾸며 쓸모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소설이 계기가 되어 당시 여성에게 없었던 선거권이 주어졌고 고아들의 처우 개선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단다. 문학의 힘이란 역시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분은 말이죠! , 그분은 평상시 그대로인데 전 그분을 그리워하고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해요. 온 세상이 텅 빈 듯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어요. 달빛이 미워져요. 달빛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그분이 곁에 없어 함께 볼 수 없으니까요. 아저씨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으시죠? 제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거예요. 아니라면 제가 뭐라 설명해도 모르실 테고요.(P303)

 

 

주디가 드디어 사랑에 빠졌나보다

달빛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함께 바라볼 사람이 곁에 없다고 아쉬워한다.

맥브라이드 가족의 초대를 받아 별장으로 놀러갈 꿈에 잔뜩 부풀어 있었는데 거기에 가지 말고 록 윌로우 농장으로 가라는 아저씨의 명령에 주디의 상심은 이룰 말할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세상에, 눈치 없는 주디처럼 나도 마지막 부분에 와서야 알았다. 멋진 반전이다

 

 이 작품을 즐기기 위해서는 두 번 읽기를 권하고 있다. 한번은 주디의 학교생활과 성장의 스토리를 따라 가는 것, 두 번째는 키다리 아저씨인 저비스의 관점으로 읽어보라는 것이다. 고아 소녀를 후원하고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을까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세상의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고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해 가는 주디의 모습을 보면서 나를 돌아다볼 수 있었다. 내게도 키다리 아저씨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만 해 보았지, 내가 주디였다면 그런 상황에 초긍정적인 성격과 당당한 태도로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을까. 좀 더 현재를 소중히 하고 소소한 행복을 쌓으며 살아가고 싶어졌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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