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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바치는 심장 ㅣ 문득 시리즈 3
에드거 앨런 포 지음, 박미영 옮김 / 스피리투스 / 2019년 7월
평점 :
어렸을 때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검은 고양이>와 <어셔가의 몰락>등 몇 편을 읽은 적이 있다. 아마도 초등학교 고학년 때로 기억되는데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책이 귀한 시절이라 무엇이든 좋았다. 읽다보니 두 작품의 오싹하고 충격적인 장면과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모르그가의 살인사건>도 기억에 있는데 나머지는 처음 접하는 작품이다. 두세 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망하고 부유한 상인이었던 숙부 존 앨런에게 입양되어 풍족한 생활과 남부럽지 않은 교육을 받기도 했다. 사촌인 버지니아 클렘과 결혼하여 10년 남짓 행복했지만 버지니아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절망에 빠진 에드거는 극심한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에 빠지게 된다. 부모의 죽음과 입양으로 두 개의 성을 가진 에드거는 ‘존재의 분리’로 인한 불안의 정서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 거의가 음울한 분위기와 폭력성, 복수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특히 검은 고양이는 오랜만에 다시 읽어도 참으로 섬뜩한 이야기였다. 사형선고를 받고 내일이면 죽을 몸이 되어 ‘영혼의 짐’을 덜겠다는 고백적 형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릴 적부터 유순하고 정이 많은 성품이었던 ‘내’가 비슷한 성향의 아내와 결혼하여 애완동물을 기르면서 나름 행복한 생활을 하는 듯하다. 그런데 술이라는 마귀가 붙어 아내는 물론 동물들에게도 학대가 시작된다. 고양이의 한 쪽 눈을 파내고 급기야는 아내를 끔찍하게 살해하더니 시신을 은폐하기에 이른다. 끝까지 숨길 수 있었던 승리감에 벅차오르면서도 뭔가를 알려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데... 선한 인간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잔혹함을 어떻게 이렇게 섬세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싶다. 그의 작품들은 인간 내면의 음습한 심연이 어떤 인과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소름끼치도록 자세하게 드러나 있다.
<구덩이와 추>는 종교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나’가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빠져나오게 되는 과정을 몰입도 있게 그려냈다. 감방의 바닥은 악취가 진동하는 구덩이가 있고 천장에서는 거대한 강철 추가 진폭을 넓히며 점점 하강하면서 끔찍한 공포감을 자아내고 있다. 몸은 결박된 채 배당된 음식을 탐욕스런 쥐들에게 빼앗긴 나는 지혜를 짜내기 시작한다. 남은 음식을 결박에 골고루 발라 누워 있다가 냄새를 맡고 달려온 쥐떼들에 의해 결박된 몸은 자유를 찾는다.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어떻게 그런 묘안을 떠올렸을까.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더 절망적인 불지옥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한 치 발 디딜 곳도 없는 감옥 안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찰나 어디선가 뻗어 온 구원의 손길 덕분에 목숨을 건진다. 벼랑위에 선 인간이 강렬한 삶의 의지로 결국 스스로를 구원한 예를 접하기도 한다. 특별한 일 없는 소박한 삶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절망을 빠져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깨닫곤 한다.
<일러바치는 심장>은 제목이 풍기는 뉘앙스가 의아했었다. 여기서도 신경질적이고, ‘천국과 지상의 온갖 소리’가 들리는 ‘내’가 나온다. 그는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나 건강한지, 그리고 차분한지 살펴보라고 한다. 그 늙은이를 사랑했다고 했다. 목적도 열정도 없는데 ‘그 생각’ 일단 싹트고 나자 밤이고 낮이고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생각’이란 노인을 죽이는 것이다. 맨 정신으로 그 작업을 하고 완벽하게 흔적을 없애고 승리감에 도취된다. 그런데 별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채 돌아가려는 경찰을 자꾸만 불러 세운다. <검은 고양이>에서도 마찬가지다. 힌트를 주려고 안달을 한다.
‘나는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끼고 그들이 갔으면 하게 되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귓속에서 종이 울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앉아 수다를 떨었다. 종소리는 점점 더 뚜렷해졌다. 계속해서 더 뚜렷해졌다. 나는 그 기분을 떨치려 더 신나게 말했다. 마침내 그 소리가 내 귓속에서 나는 게 아님을 깨닫게 될 때까지.’(P105)
'저걸 듣지 못했을 수가 있나? 전능하신 주여! 아니, 아니! 저들은 들었다! 의심하고 있다! 알고 있다! 내 두려움을 비웃고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이든 이 고통보다는 낫겠지! 무엇이든 이 조롱보다는 견딜 만하겠지! 저들의 위선적인 미소를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제 다시! 들어봐라! 더 크게! 더 크게! 더 크게!
“악당들 같으니!” 나는 비명을 질렀다. “더는 숨기지 말아요! 인정할 테니까! 바닥 널빤지를 뜯어요! 여기, 여기! 그 끔찍한 심장 박동 소리라고요!”(P106~107)
가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흉측한 기사가 떠오른다. 여기 나오는 주인공은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하는 걸까. 수사를 하러 온 경찰이 증거를 찾지는 못하고 시시한 일로 언쟁을 벌이는데 ‘나’는 오히려 격분한다. 일부러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불안하고 점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고 곧 터질 것만 같다. 그렇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까. 누군가 일러바치지 않았는데 양심 한 조각이 남아서 자신을 괴롭힌다. 폭발할 것 같은 심장 박동, 그것이 바로 일러바치는 심장이었다! 인체기관인 심장을 의인화 한 기발함과 고통스런 마음의 표현이 제목에 절묘하게 묻어난다.
복수에 대한 이야기는 <아몬틸라도 술통>과 <절름발이 개구리>에도 나온다. 포르투나토에게 온갖 모욕과 상처를 받은 ‘나’는 그에게 복수하기로 다짐한다. 그것을 협박하거나 미리 입 밖에 내지 않고 알아채지 못하게 준비하는 것이 방법이다. 와인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포르투나토를 술통이 있는 지하실로 유인을 해서 술에 취하게 하고 회반죽을 친다. 일련의 ‘작업을 하면서도 ‘나’는 그저 가벼운 복수를 하는 듯이 후련한 마음이 된다. 우리는 종종 극과 극인 인간의 양면을 종종 접한다. 봉사와 희생으로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거나 흉측한 살인을 하고 웃음을 남기는 소름끼치는 모습 말이다. 두 얼굴의 표정을 한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오싹하게 다가온다.
농담과 장난을 너무 좋아하는 왕에게 난쟁이 어릿광대가 있었으니 ‘절름발이 개구리’다. 절름발이 개구리는 또 하나의 난쟁이 소녀 트리페타와 함께 각자의 고향에서 끌려와 왕에게 선물로 바쳐진 신세다. 축제가 있던 밤 두 사람을 불러 놓고 와인을 마셨다하면 거의 광기 상태가 되는 절름발이 개구리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고 그 반응을 즐긴다. 또 다시 재미있는 ‘장난’을 주문하는 왕에게 ‘여덟 마리 오랑우탄’이라는 유흥거리를 제안하는데... 왕과 일곱 대신은 쇠사슬로 한데 묶여 횃불 속에 타오르는 신세가 된다. 복수 치고는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찮은 광대라고 놀려대고 가지고 노는 장난감처럼 대하다가 큰 코 다친 셈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던가. 하물며 사람이라면.
에드거 앨런 포는 스트븐 킹,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아서 코난 도일 등 많은 위대한 범죄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또 ‘단편 소설의 창시자’, ‘근대 환상문학의 창시자’, ‘추리소설의 창시자’, ‘공포소설의 완성자’ 등의 평가와 찬양을 받았으며 보들레르나 말라르메 같은 유럽의 작가들에겐 당대에 이미 그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자신의 분리의 불안을 떨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어떤 곳’을 꿈꾸며 살아야 했던 ‘비참한 영광’의 작가이기도 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그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70여 편이나 되는 단편을 써내려가는 동안에 어느 정도 고통이 치유되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밝음 이면에 존재하는 어둠을 똑똑히 바라봄으로써 함께 살아가는 인간세상이 조금은 이해되려나.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