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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카페 Less Than Nothing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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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물 자체 The thing itself : 라캉

 

 

 

08_

헤겔의 독자로서의 라캉

 

 

 

 

 

0.

 

 

  헤겔을 읽기 위해서는‘개념의 인내’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지젝 독해 역시 어떤 종류의 것이든‘인내’가 요구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8장은 특히 그렇다. 크게 어렵지는 않지만 헤겔과 라캉과 지젝이 만나는 곳에 이르기까지, 길은 얽혀있고, 긍정은 부정의 시작에 불과하므로, 인내를 잃지 않아야 한다.  

 

 

 

1. 이성의 간지

 

 

  간지는 간사한 지혜다. 그러나 헤겔의 간지는 교활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가장 공공연한 행위가 가장 위대한 간지이다.

 

 

  「헤겔은 적을 파괴하는 최선의 방법은 적으로 하여금 잠재력을 마음껏 펼치도록 해당 되는 장場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으로, 그렇게 되면 성공은 실패가 되리라는 것을 장담하고 있다. 모든 외적 장애물의 결여는 그를 자기 자신의 입장의 비정합성이라는 절대적으로 내속적인 장애물에 직면하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p914~5」

 

 

  그러므로 이성의 간지는 이성의 힘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차라리 ‘비이성’ 에 대한 신뢰를 포함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 보여주는 것이 이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단지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가 하고 있는 추상적인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펼쳐내도록 추동했을 뿐이다.

 

 

  「참가자들은 본인들이 말하는 것에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의 심연에 직면하며, 그렇게 권위를 부여하는 통상적인 토대에 의지하려는 순간 그러한 권위 부여는 실패한다. p921」

 

 

  정의의 이름으로 전쟁을 역설하는 젊은이가 있다고 하자.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단순하다. “그런데 정의가 뭐지?” 정의에 답하려는 순간 그는 이성의 간지에 걸려든다. 정의의 토대는 그 이름만큼 탄탄하지 못하다. 누구에게 정의인가?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정의인가? ... 소크라테스는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 자신을 공격하게 만들뿐이다. 이성의 간지 또한 그렇다.

 

 

 

 

2. 라캉적 활인법

 

 

  활인법? 의인법도 아니고 무엇일까? 이런 단어가 적어도 네이버 사전에는 없다. 어떤 단어를 번역한 것인지 상당히 궁금하다.  여하튼, 

 

 

 「활인법은 “부재하는 또는 상상 속의 사람이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으로 제시되는” 비유법으로 규정된다. 보통은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자연, 상품, 진리 자체....)이 어떤 말을 한 것으로 돌리는 것은 라캉에게서는 단지 말하기 자체의 이차적 복잡화만이 아니라 말하기 자체의 조건이다. ‘언표의 주체’와 ‘언표된 것의 주체’라는 라캉의 구분은 바로 이 방향을 가리키지 않는가? 내가 말할 때 말하는 것은 결코 ‘나 자신’일 수 없다. -나는 나의 상징적 정체성인 픽션에 의존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말하기는 ‘간접적이다.’ “당신을 사랑해”는 “연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구조를 갖는다. 따라서 활인법은 무질이 잘 알고 있던 기묘한 분열을 함축하고 있다. 즉 ‘특성 없는 인간은 인간 없는 특성에 의해, 그러한 특성의 소유자로 알려진 주체 없는 특성들로 보충되어야 하는 것이다. p923~4」

 

 

  “너는 누굴 믿니, 네 눈이야 내 말이야?”에서 우리가 믿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말이다. 경멸해 마지않을 인간도 법복을 입고 있으면 우리는 그를 존중할 수밖에 없다. 판결을 내릴 때, 그를 통해 말하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법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활인법이다.

 

 

  「‘원초적 활인법’은 실제로는 상징적 질서 자체의, 상징적 권한을 인수한 주체(그것을 통해 자신을 구성하는 주체)의 활인법이다. p926」

 

 

  「‘내가 말한다’와 ‘타자가 나를 통해 말한다’는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를 통해 ‘말할’ 때, 말하는 것은 큰 타자가 아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타자의 실패들, 간극들, 비정합성들에 대한 진리이다. p928」

 

 

  꿈이나 말실수, 증상을 통해 드러나는 것 역시 타자의 간극과 실패들이다. 1950년대의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라고 했지만, 그 이후 타자 자체가 빗금처진 타자임을 알고 난 뒤의 라캉은 무의식을 타자의 간극과 실패들을 등록하는 담론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므로 이성의 간지는 뒤에서 몰래 끈을 조종하는 신비스러운 정신이 아니다. “헤겔적인 이성의 간지 이념은 자신의 실현의 실패 속에서, 그것을 통해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이것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Great Expectation”은 핍이 세속적으로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Great Expectation의 의미 자체를 바꾸어 놓음으로써 실현된다. 세속적 성공의 기회를 용감하게 포기함으로써, 그 실패를 통해 핍은 성공한다. “주인공은 시련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성격이 바뀔 뿐만 아니라 그의 성격을 평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윤리적 기준 자체가 바뀐다.”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헤겔 고유의 해결책은 진정 철저한 변화는 자기 관계 맺기적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변화를 평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들의 좌표 자체를 바꾼다. 다시 말해 진정한 변화는 자기 자신의 기준을 정한다. 그것은 오직 그것으로부터 유래하는 기준에 의해서만 평가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부정의 부정'이다. 즉 실패를 진정한 성공으로 바꾸어놓는 관점의 전환인 것이다. p932」

 

 

  변화는 외부의 기준에 의해서 인지되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 기준에 의하면 핍은 여전히 실패한 인물이다. 핍의 성공은 세속적 관점을 버리고 성공의 좌표 자체를 바꾼 사람의 눈에만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의 변증법적 전도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일도,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관점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성공의 필연적 실패 이야기, 주체가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성공’은 실패 자체 속에서 성공을 인식할 수 있는 관점의 반성적 전환뿐이라는 이야기이다.”

 

 

 

 

3. 라캉, 마르크스, 하이데거

 

 

  라캉은 <로마 보고>를 즈음해 치료의 종결을 헤겔적인 절대적 앎의 위치로 규정했다. 정신분석적 치료의 목적을 상징화의 완성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헤겔과의 차이가 없지는 않은데, 정신분석가는 결코 상징화/드러남이 완성되는 지점에 이를 수 없다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라캉을 이렇게 ‘약한 헤겔주의자’로 읽는 것은 틀렸다. 그것은 라캉에 앞서 헤겔에 대한 이해가 틀렸기 때문이다. (라캉의 생각은 후기에 와서 바뀐다.)

 

 

  「다시 말해 상징화의 완성, 존재의 완전한 드러남 등으로서의 절대적 앎은 헤겔적 ‘화해’를 이미 항상 여기 있는 어떤 것, 그리하여 단지 인수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서보다는 도달해야 할 이념으로 바꾸어버림으로써 완전히 요점을 놓치고 만다. 여기서는 헤겔적 시간성이 핵심이다. 즉 우리는 기적적으로 상처를 치유함으로써가 아니라 ‘현재의 십자가 위에서 장미’를 인식함으로써, 그러한 화해는 항상 우리가 소외로 (오)인하는 것 속에서 이미 이루어져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화해’를 행한다. p936~7」

 

 

  「그 결과 헤겔은 정말 증상을 다룰 수 있게 된다. - 모든 보편성은 현실성 속에서는 자신을 침해하는 하나의 초과를 낳는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헤겔적 총체성은 규정상 ‘자기모순적이며’, 적대적이며, 비정합적이다. ‘진리’인 전체는 진리 더하기 그것의 증상들로, 자신의 비진리를 폭로하는 의도치 않은 결과이다. p937」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는 필수적으로 공황을 유발한다고 했을 때, 그가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증상이다.

 

 

  「이 모두에서 기본적인 전제는 전체는 결코 정말로 전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전체라는 개념은 모두 무엇인가를 빼먹으며, 변증법적 노력은 다름 아니라 이러한 초과를 포함시키기 위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노력이다. 증상들은 결코 단지 기본적으로 건강한 체계의 이차적 실패나 왜곡이 아니다. - 그것들은 체계의 바로 한가운데서 무엇인가가 ‘썩었다는 것’(적대적이고 비정합적이다)을 알려주는 표시들이다. p937」

 

 

  증상은 썩은 사과 같은 것이 아니다. 도려내면 되거나, 애초에 잘 길러 썩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증상을 도려내면 체계 자체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증상은 체계의 진리이자, 체계 자체가 결코 ‘전체’일 수 없음에 대한 증표이다.

 

 

  「증상은 큰 타자를 침식하는 것, 타자가 그 속에서 간극, 비정합성, 실패, 무능을 드러내는 것이다. 라캉이 ‘나, 진리가 말한다’고 쓸 때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실체적인 ‘큰 타자’가 말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타자의 실패가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수는 총체성의 진리의 종속적 계기 속으로 지양될 수 있는 부분적 비진리인 반면 증상은 총체성의 억압된 진리의 부분적 드러남, 총체성이 허위임을 드러내는 진리이다. p943」

 

 

  그런데 증상은 이미 있는 어떤 것의 표현이 아니다.

 

 

  「증상은 이미 주체 속에 깊숙이 머물고 있는 어떤 실체적 내용의 부차적 표현이 아니다. - 반대로 증상은 ‘열려 있으며’, 미래에서 오며, 오직 증상을 통해서만 존재하게 되는 내용을 가리킨다.p944」

 

 

  ‘여성은 남성의 증상이다.’를 읽는 지젝의 방식은 이렇다. 애인의 성향에 따라 정치적 대의를 바꾸는 어떤 시인에 대한 일화가 있다. 애인이 여성 우익 파시스트일 때는 군사적 규율과 애국적 희생을 찬양하고, 공산주의 여성과 사귀면 게릴라전을 찬양하고, 히피 여자와 사랑하면 약물과 초월적 명상에 대한 글을 썼다. 여기에서 규정적 요소는 여성이다. 남성은 여성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뀐다. 증상이 총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남성은 자신의 증상들을 향해 방향을 잡으며, 삶에 정합성을 주기 위해 그것에 매달린다. 그리고 헤겔적인 이성의 간지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즉 이성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간이라는 대리인들을 이용하는 막후의 비밀스러운 힘이 아니다. 오직 각자의 특수한 목적을 추구하는 대리인들밖에 없으며, 그들이 ‘자기생산적으로’ 하는 것이 좀 더 큰 유형으로 조직된다. p946」

 

 

  이 절의 제목은 ‘라캉, 마르크스, 하이데거’ 인데 막상 마르크스와 하이데거에 관한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다. 계속 이성의 간지와 관련된 총체성, 증상, 비전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따라서 나도 하이데거는 그냥 대충 통과 ;;

 

 

 

 

4. 전도의 ‘마력’

 

 

  지젝의 책 중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가 있다. 이 제목은 헤겔의 『정신현상학』 서문 중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따온 것이다.

 

 

  「참으로 정신이 이러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바로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며 그것과 함께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머묾으로써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화시킬 수 있는 마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p949」

 

 

  증상은 도려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썩어 있다는 징표라는 의미에서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것을 직시함으로써,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은 주문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부정적인 것이 변증법적 전도를 일으키면 그것이 바로 긍정적인 것이 된다.

 

 

  「본래적인 의미의 변증법적 전도는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으로 전도되는 것, 불가능성의 조건이 가능성의 조건으로 전도되는 것, 장애물이 가능하게 해주는 작인으로 전도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초월성이 내재적으로 전도되는 것, 언표의 주체가 언표된 내용 속에 포함되는 것이기도 하다.

  자체 내로의 이러한 전도는 변증법적 과정에 핵심적이다. 먼저 물의 단순한 표시(속성, 반영, 왜곡)처럼 보이는 것은 물 자체임이 드러난다. 만약 관념이 자신을 적절히 나타낼 수 없으면, 만약 그러한 나타냄이 왜곡되거나 결함이 있으면 그것은 동시에 관념 자체의 한계 또는 결함을 알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편적 관념은 항상 왜곡된 또는 전이된 방식으로 출현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왜곡 또는 전치, 자신과 관련한 특수성의 자기-부적합성에 다름 아니다. p958」

 

 

 

 

5. 반성과 전제

 

 

  철학 책을 조금 읽기 시작한 독자가 가장 궁금해 하지만 막상 똑 부러진 대답을 듣기가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가 “주체란 무엇인가?”가 아닐까 싶다. 지젝의 여러 책들에도 주체는 빈번하게 나오는 개념이지만 나는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지젝은 6장에서 주체는 사람과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했다. 그러면 주체는 무엇인가?

 

 

  「주체는 결코 직접적으로, 긍정적인 실체적 독립체로 주어지지 않으며, 우리는 결코 주체를 직접적으로 마주치지 않으며 그것은 두 개의 시니피앙 사이에 〔존재하는〕것으로 ‘가정된’ 깜박거리는 공백일 뿐이다. 즉 정확히 ‘주체’란 무엇인가? 하나의 발언을 생각해 보라 -이 발언은 어떻게, 언제 ‘주체화되는가?’어떤 재귀적 특징이 주체적 태도를 거기에 써넣을 때 그렇게 된다.- 이러한 엄밀한 의미에서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에게 주체를 대표할’ 수 있다. 주체는 이러한 재귀적 비틀기, 이러한 왜곡을 설명하기 위해 가정되어야 하는 부재하는 X이다. 그리고 여기서 라캉은 끝까지 밀고 나간다. 즉 주체는 의미작용의 사슬의 외적인 관찰자-청취자에 의해 가정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가정이다. 주체는 하나의 물로서의 자신에게는, 예지체적 동일성 속에서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에게 영원히 사로잡히게 된다. 나를 사로잡는 대상으로서의 나의 형상들이 아니라면 모든 분신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 타자들은 나를 위한 가정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그에 못지않게 나를 위한 하나의 가정이다. 즉 추정되지만 결코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아무리 면밀히 또는 깊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더라도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특수한 생각들, 특정한 정신 상태, 지각들, 감정들 뿐 결코 ‘자아’는 아니라는 흄의 유명한 견해는 요점을 놓치고 있다. 즉 이처럼 주체가 결코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에게 접근 불가능한 것은 그것이 ‘자아’라는 것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p963~4」

 

 

  주체는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가정’ 이며, ‘출현’ 이다.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지만 하여튼 그렇다고 한다. 사람도 아니고 자아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고 접근도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고 가정된 X, 혹은 그 보다는 가정 자체, ... 이것이 주체란다.  

 

 

 

 

 

6. 상호주체성을 넘어

 

 

  조금 쉬워 보이는 것에서 시작하자. 키스란? “입 닥쳐! 내가 네 입을 닫음으로써 우리 관계를 망치려고 위협하는 간극을 닫도록 하자!” 라는 말에 다름 아니라면? 그래서 매춘부들이 고객과의 키스를 거절하는 것에는 어떤 진리가 있다. “그것은 이방인이 입을 막는 것에 주체성의 심연을 넘겨주고 싶지는 않다는 신호이다.”

 

 

  「키스는 ‘언어의 힘을 빠져 나가는 질문’에 대한, 라캉이 ‘케 부오이’라고 부르는 것에 다름 아닌 것에 대한, 즉 타자의 욕망의 심연과 관련된 질문에 대한 답이다. 키스는 육체적 실재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통해 심연의 원천을 닫아버리는 방식으로 이 심연을 진정시키기 위한 어설프지만 필사적인 조치이다. p969」

 

 

  드라마에서도 많이 봐온 장면이다. 대답이 궁할 때 흔히 남자가 여자에게 써 먹는 수법. 물론 대개 사랑의 이름으로 여자는 쉽게 자신의 ‘주체성의 심연’을 넘겨주고 사태는 봉합된다.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볼까. 성경은 왜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도 하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도 할까? 답은 체스터튼이 준다. 그 둘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웃은 “규정상 너무 가까이에 있는 불청객” 들을 가리킨다.

 

 

  「말라부는 생명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엄밀하게 논리적으로 다수의 주체들을 연역해내고 있음에도 또 다른 주체와의 마주침에는, 즉 주체가 자신 밖에서, 자신 앞에서 또한 주체라고 주장하는 세계 속의 또 다른 살아 있는 존재와 마주친다는 사실 속에는 환원 불가능한 스캔들, 트라우마적이고 전혀 예기치 못한 어떤 것이 들어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p973」

 

 

  어설프게 이해한 것을 대충 말하자면 이런 것이 아닐까? 정신이 외화된 것이 세계라면, 그 세계는 내 것이고 의식을 가진 주체는 나뿐이어야 할 텐데, 또 다른 주체가 나타나 자기도 똑 같은 정신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엄청 황당무계스럽다, 뭐 이런..

 

 

  「내 앞에서 또 다른 자기의식과 조우하게 될 때 내 안에는 나뿐만 아니라 나와 마주하고 있는 자기의식을 인류라는 종의 단순한 구성원들로 환원시키는 것에 저항하는 무엇인가 (이것은 단순히 자기 중심벽이 아니라 자기의식이라는 개념 자체 안에 있는 어떤 것이다)가 나타나게 된다. 즉 그러한 마주침을 충격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거기서 두 보편성이 오직 하나의 보편성만을 위한 공간이 있는 곳에서 만나는 것이다. p974」

 

 

  「따라서 원초적인 만남에서 타자는 내가 인정의 상호주체적 공간을 공유하는 또 다른 주체일 뿐만 아니라 트라우마적 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초과가 본래 셈해질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주체들은 결코 1+1+1...이 아니다. 항상 이 계열에 자신을 추가하는 대상적 초과가 있다. ..물론 이러한 초과적인 유령적 대상은 주체의 대리인, 대상으로서의 주체 자체, 주체의 불가능한-실재적 대상적 맞짝이다. p975」

 

 

 

 

7. 충동 대 의지

 

 

  “헤겔은 충동을 사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7장에서 다루었던 주제이다. 지젝의 결론은 헤겔 자신은 채 주제화하지 못했지만 헤겔적 변증법의 핵심은 바로 죽음충동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8장에서 지젝은 헤겔의 힘 개념을 들어 죽음충동과의 근접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충동은 곧바로 힘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충동은 좌절당한 힘이다. 충동은 목표를 맞추지 못하고 실패를 되풀이 하는데, 이 반복이 바로 충동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충동은 또한 자연적인 것도 문화적인 것도 아니다. 충동은 자연 상태의 문화다. 칸트가 교육이 길들이려하는 것은 인간 안의 동물적 본성이 아니라‘난폭함’이라고 할 때의 그 난폭함과 상동적이다.

  그러나 충동은 의지와 대립적인 것도 아니다. 사진으로 표현하자면, 충동은 의지의 음화이다.

 

 

  「그것은 대상을 내쫓고, 잃어버리고, 간극을 도입하라는 독려이지 그것을 극복하라는 독려가 아니다. 따라서 심지어 의지는 충동에 대한 대항-운동, 통제와 지배의 심급인 에고의 경제에 ‘탈주체화된’ 충동을 ‘다시-기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p982」

 

 

  라캉의 충동 공식은 ‘$-D’이다. 라캉의 유명한 공식들 중 충동 공식은 유독 왜 요구와 관련되어 있을까 궁금했다.

  충동은 요구 너머의 간극이나, 요구 속에 있는 요구 이상의 어떤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요구가 하는 말 자체이다. 이와 달리 욕망은 늘 욕망하는 것 이상의 것을 욕망하므로써, ‘그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야’를 반복한다. 욕망은 히스테리적이지만,  충동은 히스테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안티고네가 요구하는 것이  충동을 잘 보여준다.

 

 

  「그녀의 무조건적인 요구는 오빠를 제대로 상징적으로 매장하라는 것이며, 그녀는 그것을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고집한다. 그녀가 무엇이든 그녀는 히스테리하지 않다. 그녀는 그녀가 말 그대로 원하는 것을 원한다. 그 자체로 그녀의 행위는 의식과 무의식의 대립을 넘어서며, 또한 영원한 불문법을 포함해 모든 큰 타자의 형상들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심연과도 같은 자유의 행위이며,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p984」

 

 

 

 

8. 자기의식의 무의식

 

 

  몸이 힘들면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몸이 팔팔하면 정신도 따라서 맑아진다고 할 수는 없다. 육체가 없으면 정신도 없다. 그렇다고 육체가 정신의 전부는 아니다. <자기의식의 무의식> 이 어려운 것이, 내용 때문인지 내 몸 상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정리가 잘 안 된다. 한 문장만 인용하고 끝내야 겠다.

 

 

  「인간의 욕망은 항상 욕망하는 것에 대한 욕망이라는 라캉의 말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칸트적 재귀성을 형식적으로 그대로 복제한 형태로 나는 결코 단지 직접 대상을 욕망하지 않으며, 항상 재귀적으로 이 욕망과 관계한다. - 나는 그것을 욕망하기를 욕망할 수 있으며, 그것을 욕망하는 것을 증오할 수 있으며, 나의 이 욕망에 무관심해 중립적으로 보아 넘길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의 이러한 재귀성의 철학적 결과는 핵심적이다. 그것은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사이의 대립이 의식과 자기의식 사이의 대립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무의식은 어떤 종류의 전-재귀적이고, 단정 이전의 원시적 기질로 나중에 의식적 재귀성에 의해 가공되는 것이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주체에게서 가장 철저하게 ‘무의식적인 것’은 자기의식 자체, 즉 재귀적으로 의식적 태도와 관련 맺는 방식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적 주체는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보다 정확하게는 후일의 칸트적-헤겔적 자기의식 속에서 정교화 되는 것과 동일하다. p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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