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조권의 개념에 이어 수조권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11강, 20강, 29강, 주제사 21강, 주제사 22강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고대(신라)의 제도는 녹읍제와 녹읍제의 폐지, 그리고 녹읍제 부활로 이어집니다. 고려 이후의 수조권과는 달리 고대 녹읍제는 수조권(여기서는 조세에 대한 수취 권한으로 한정하겠습니다.)에 더하여 공물과 역에 대한 권리를 관리에게 부여합니다. 수취에 대한 국가의 권리를 몽땅 이양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역은 곧 군사력을 의미하고, 이는 왕권약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신라 중대에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신문왕이 이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죠. 그래서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합니다. 관료전은 역을 제외한 수조권과 공물에 대한 권리입니다. 하지만 신문왕 사후 얼마 가지 않아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합니다. 왕권이 약화되었다는 의미이죠.
신문왕과 경덕왕 사이의 왕인 성덕왕 때 국가가 백성에게 직접 정전을 지급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정전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들이 있지만, 정전은 국가의 토지 장악력이 상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문왕에 이은 성덕왕 때까지는 왕권이 꽤 강했다는 뜻입니다.

고려 토지제의 기본은 전시과입니다. 田과 柴, 곡물과 땔나무입니다. 관리는 직역의 대가로 녹봉과 함께 곡물과 땔나무를 거두어들일 권리를 갖습니다. 18과로 나누어 전지와 시지의 크기를 결정하는데, 18과인 이유는 관리의 품계가 총9품, 각각의 품계에 정품과 종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도 마찬가지로 18과입니다. 대상 토지는 전국의 토지입니다.
전시과는 5대 경종 때 처음 시행되어 시정전시과, 7대 목종 때 개정하여 개정전시과, 11대 문종 때 다시 개정하여 경정전시과의 순으로 발전됩니다. 개정될 때마다 지급 대상이 줄어듭니다. 시정전시과는 전직과 현직 모두에게 줄뿐 아니라 관품에 더하여 인품도 고려하여 지급합니다. 개정전시과는 인품을 빼고 전, 현직 관리에게 관품에 따라서만 지급합니다. 경정전시과는 여기에 전직을 또 뺍니다. 오직 현직 관리에게만 관품에 따라 지급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18대 의종 때 무신의 난과 23대 고종 때 몽골 침입을 거치며 전시과 제도는 거의 붕괴됩니다. 몽골은 전 국토를 유린하고 있고 왕실은 강화도로 도망가 있는데 무슨 제도가 남아 날 수 있겠습니까? 개경으로 환도한 24대 원종은 유명무실한 전시과를 폐지하고 녹과전을 실시합니다.
녹과전은 관리에게 녹봉을 지급하지 않고 오로지 토지에 대한 수조권만을 주는 것입니다. 이때 대상 지역은 경기도에 한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경기지역이 수조권의 대상으로 한정되는 것은 조선의 과전법에서도 이어집니다. 여하튼 기존의 녹봉과 수조권을 지급하던 것에서 녹봉을 주지 않는 것은 아마도 몽골의 침입으로 창고가 텅 비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녹과전은 전시과에서 과전법으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전법은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때 실시되었지만, 사실상 고려가 아니라 조선의 토지제도입니다.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은 이미 위화도 회군을 거쳐 조선 건국의 기초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위화도 회군이 권문세족의 정치 권력을 빼앗은 것이라면,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권문세족의 대농장을 몰수하고 신진사대부가 주축인 관리들에게 수조권을 지급한 것입니다. 물론 기본 1/10세로 돌아감으로써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 주었습니다.
과전법은 전,현직 관리들에게 경기지역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주었습니다. 또한 수신전과 휼양전이라는 이름으로 관리가 사망했을 때, 부인과 자식에 대한 생계 대책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수신전과 휼양전은 세습됩니다. 직역의 대가인 수조권은 세습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고려와 조선 모두 수조권은 세습불가입니다. 그런데 수신전과 휼양전의 존재로 인해 사실상 세습의 길이 열립니다. 그 결과 과전이 부족하게 되어, 세조에 와서는 수신전과 휼양전 자체가 폐지됩니다.
수신전과 휼양전은 고려의 구분전 및 한인전의 성격과 유사합니다. 단 고려의 구분전과 한인전은 6급 이하 하급 관리의 유족과 직역이 없는 자식에게 각각 지급합니다. 그런데 6급 이하 관리의 직은 원칙적으로 세습되기 때문에 구분전과 한인전은 직이 세습되는 동시에 소멸됩니다. 직이 세습되면 직역에 대한 수조권이 자연 세습되기 때문에 구분전과 한인전은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고려말 공양왕 때 처음 실시된 과전법은 조선 7대 세조 때에 직전법으로 바뀝니다. 역시 토지 부족의 문제입니다. 수신전과 휼양전도 없애고, 전직 관리도 제외하고 오로지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관리가 퇴직을 하거나 죽으면 남은 가족의 생계가 막막해집니다. 현직에 있을 때 최대한 긁어모아야 합니다.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집니다. 또한 무엇보다 내 땅에 대한 욕구가 증가합니다. 퇴직 시 반환해야 하는 수조지가 아니라 세습이 가능한 사유지가 필요해 집니다. 이런 상황에 따라 수조권을 기반으로 한 전주전객제는 쇠퇴하고 소유권을 중심으로 한 지주전호제가 우세해집니다. 수조권과 소유권의 대립에서 소유권이 승리하게 됩니다.
급기야 13대 명종에 와서는 직전법이 폐지되고 녹봉제가 전면 실시됩니다. 그동안 녹봉과 함께 수조권이 지급되던 것이 순전히 녹봉만 지급되는 방식으로 전환됩니다. 이는 곧 수조권의 폐지이며, 전주전객제라는 토지 제도의 소멸입니다. 조선 전기의 마지막 무렵에 와서 그동안 우리를 숱하게 괴롭히던 수조권이 마침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와우 ^^
조선의 토지 제도에서 아직 남은 것이 있습니다. 조선은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을 가질 만큼 기록이 풍부한 국가입니다. 단순히 토지지급 방식뿐만 아니라 이런 제도 아래 실제로 관리들이 어떻게 수조권을 행사했는지, 즉 조세의 수취방식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더 자세한 공부를 ;;
과전법 아래에서 수취방식은 처음 답험손실법이 시행되다가 4대 세종 때에 공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수취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해마다 풍흉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수조권은 정률제입니다. 기본이 수확량의 1/10세입니다. 매해 수확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매해 수조권을 가진 관리가 가져가는 양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을 어떻게 정해야 할까요? 보는 사람에 따라 대풍일수도 있고 조금 괜찮은 수확일 수도 있습니다. 수취방식은 이런 문제 때문에 발생합니다.
답험손실법은 전주인 관리 자신이 답사하여 직접 결정하는 것입니다. 3등급으로 나누었는데, 고양이 손에 생선을 맡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많이 가져가려고 하겠지요? 이 때문에 우리의 세종대왕께서 대규모의 여론조사를 하셨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수취법을 결정하면 가장 합리적이겠는가를 자그만치 17만 명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공법입니다.
공법은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분6등 법을, 당해 연도의 풍흉에 따라 연분9등 법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연분9등은 해마다 달라집니다. 상상에서 하하 까지 9단계입니다.

1결은 300두의 수확을 할 수 있는 토지의 면적입니다. 결은 토지의 절대 크기가 아니라, 토지의 수확량에 따른 면적입니다. 토지가 비옥할수록 1결의 크기는 작고 토지의 질이 나쁠수록 1결의 크기는 커집니다. 이론적으로는 관리가 어떤 상태의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갖든 문제가 없습니다. 전분6등급으로 낮은 등급의 땅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 절대 면적은 그만큼 계산해서 더 커질 것이기 때문에 관리의 입장에서 결을 기준으로 한 수조권은 매우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전분6등이 아니라 연분9등입니다. 예를 들어 70결의 수조권을 가진 관리가 중중년에 거둘 수 있는 곡물의 양은 얼마일까요? 두(斗)라는 단위는 참고로 예전에 우리도 쓰던 말입니다. 쌀 한말, 두말 할 때의 그 말이 바로 두(斗)입니다. 그러나 공법은 매우 복잡하여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최저세율인 1결당 4두가 이후 관행처럼 굳어지다가, 조선후기에 가서 영정법으로 법제화됩니다. 땅을 많이 가진 지주에게 매우 유리한 제도였습니다.
여하튼 공법은 풍흉의 정도와 토지의 비옥도를 수조권을 가진 전주가 아니라 국가에서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법은 매우 복잡합니다. 관리가 농간을 저지를 수 있는 여지도 여전합니다. 기준만 국가가 정해줄 뿐 수취는 전주가 직접하기 때문입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겠지요?
성종 때 등장한 수취방식이 관수관급제입니다. 수조권은 관리에게 여전히 있지만 수취는 전주가 아니라 관, 즉 국가에서 직접해서 관리에게 전달해 주는 방식입니다. 100두를 수취하면 그대로 100두를 전주에게 말 그대로 전달만 합니다. 관리의 부정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다가 명종 때 직전법이 폐지되고 녹봉제가 전면 시행되면서 관수관급제도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세를 걷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수조권은 국가가 가진 조세의 권리를 관리에게 이양해 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조권이 소멸되면 조세의 권리는 국가가 가집니다. 국가가 직접 조세를 걷어서, 직급에 따라 녹봉을 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