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고려의 대외 관계

 

 

강의에 박스 칸이 많습니다. 내용이 많다는 얘기죠.;;

고려는 약 500년 동안 (918~1392),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우리 민족 최대의 위기도 있었지요.

몽골에 한방에 먹혔다면 지금쯤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고구려가 민족의 방파제였다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역시 그에 못지않게 민족의 방패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영광의 혹은 치욕의 역사를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1. 거란의 침입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19강 강의> 

 

1차 침입은 성종(993),

2차 침입은 목종이 강조의 변으로 시해당한 직후인 현종1년 (1010),

3차 침입은 현종9년 (1018)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거란은 왜 고려를 쳐들어 왔을까요? 영토를 넓히기 위해?

중국의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완성했다고 하잖아요. 이 만리장성은 그 당시부터 (기원전 3세기) 북방의 유목민족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조금씩 쌓았다고 하니 그때부터 중국의 농경민족은 유목민족에게 시달렸던 것입니다. 거란도 그런 유목민족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유목민족들은 유목이라는 특성상 쳐들어오면 식량 따위를 빼앗고 금방 초원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요 거란족은 야심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만리장성 이남의 기름진 옥토에서 눌러 살기로 한 거지요.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은 발해도 무너뜨리고 송나라를 공격합니다. 그러자니 후방의 고려가 켕깁니다. 송나라와 친한 고려가 뒤통수를 치면 곤란한 거지요. 거란의 목적은 고려 땅보다는 고려와 화친을 맺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게 말로 하지, 왜 군대를 끌고 왔냐고요? 소위 ‘눈앞의 현실’ 즉 힘을 보여주어야 화친이든 뭐든 말을 잘 듣지 않겠습니까?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00>

 

1차 침입에서 거란의 소손녕은 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왜 고구려 땅을 갖고 있느냐 우리 땅이니 내놔라 어쩌고 하면서 으름장을 놓는데, 요걸 간파한 서희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너네랑 놀려고 해도 여진이 방해한다, 여진이 차지한 강동6주를 우리한테 주면 송과는 안 놀고 너네랑만 친하게 지내겠다, 요렇게 세치 혀로 나불나불(죄송함다;;), 거란을 물리치고 당당히 압록강 동쪽의 6주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고려는 거란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송과 몰래 교류를 합니다. 거란은 당연히 약이 오르겠지요. 그런데 마침 이 때 강조의 변이 터집니다. 혹시 <천추태후>라는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전 안 봤지만 채시라가 천추태후 역을 한 것은 기억합니다. 이 천추태후가 목종의 엄마죠. 김치양이라는 남자와 얼레리 꼴레리 하고 막 하여튼 그랬다지요. 여하튼 이 목종이 강조에 의해 폐위되면서 천추태후가 실각하고 현종이 즉위한 사건이 강조의 변입니다. 거란은 강조의 변을 구실 삼아 2차 침입을 합니다. 이때 개경까지 함락되어 현종이 피난을 가고 난리가 아니었답니다. 그래서 아마 개경에 나성을 쌓게 되는 것이겠지요. 하여튼 앞으로 현종이 친조를 하겠다고 약속하고 강화를 맺습니다. 하지만 거란이 퇴각하는 길에 양규가 활약하여 큰 타격을 입힙니다. 양규는 이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하지만 고려가 어떤 국가입니까? 북방 유목민에게 그렇게 호락호락 친조를 할 민족이 아닙니다. 현종은 개경에 돌아온 뒤 거란에게 쌩깝니다. 거란은 또 당한셈이지요. 다시 공격. 이것이 3차침입니다. 여기서 강감찬이 귀주에서 대활약합니다. 귀주대첩으로 거란을 막아냅니다.

 

3차례에 걸친 거란과의 싸움으로 송-요-고려의 세력 균형이 유지됩니다. 고려를 굴복시키지 못한 거란은 송을 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영원한 동지도 없고 적도 없는 것처럼 고려와 요는 사이좋게 지내기로 했습니다. 강동6주도 그대로 고려가 차지하고 친조 같은 굴욕도 없던 일로 하고요. 힘의 균등에 의한 평화가 찾아온 것이지요.

 

거란의 침입을 받은 고려는 물론 앗 뜨거워했겠지요. 그래서 개경에 나성을 쌓고, 압록강에서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쌓습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당 침입에 대비해 쌓은 천리장성과는 다른 것이지요. 이때 초조대장경을 새깁니다. 불교의 힘으로 거란을 물리치겠다는 것이지요. 몽골 침입 때 초조대장경이 불타고 다시 판각한 대장경이 바로 팔만대장경입니다.

 

움... 너무 길었군요.

 

 

2. 여진족의 침입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19강 강의>

 

여진족은 전에 말갈족으로 불렸고 나중에 만주족으로 이름을 바꾸는 유목민족입니다. 고대에 고구려와 특히 발해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발해는 지배민족이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인의 대다수가 말갈인 즉 여진족이었습니다. 그러던 여진이 이제 중국 본토를 넘보게 된 것이지요. 여진은 금나라를 세우고(1115), 송과 손을 잡고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킵니다. 그런 다음 송을 양쯔강 쪽으로 밀어내고 화북지역까지 차지합니다. 이제 금과 남송 그리고 고려라는 새로운 삼각체제가 이루어집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06>

 

윤관이 여진을 무찌르고 동북9성을 차지한 것은 여진이 세력을 한참 키우고 있

을 때입니다. 1107년(예종)입니다. 처음에 한판 붙었다가 깨지고 난 뒤 윤관이 별무반을 만듭니다. 다시 다그닥 다그닥 말 타고 가서 샤사삭 무찌르고 동북 9성을 세웁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p139>   

 

그런데 이때 고려사회의 꼬라지는 묘~합니다. 호족의 진취적 기상은 쏙 빠지고 문벌귀족의 향락적 풍토가 판을 칩니다. 당연히 전쟁을 싫어하고, 영토가 넓어지는 것도 별로 탐탁치 않습니다. 여진족이 끊임없이 탈환을 노릴테니 관리가 더 힘들다고 판단합니다. 윤관과 백성들이 피로 얻은 동북 9성을 문벌 귀족들은 조공을 받는다는 조건 아래 여진에게 홀라당 넘겨버립니다. 여진은 이 때 돌려받은 동북9성을 거점으로 금나라를 세워 다시 고려를 압박합니다. 조공은커녕 거꾸로 고려에게 사대를 요구하지요. 문벌귀족들은 이것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이자겸, 김부식 등 개경파의 이런 사대사상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촉발하게 됩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금은 동북9성을 돌려받을 때 한 약속을 지켜 송을 강남으로 몰아내면서도 고려는 침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때 의주를 고려에 양도하기도 합니다. 금과의 화친이 전혀 무익하지만은 않았다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3. 몽골의 침입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19강 강의>

 

드디어 몽골이 고려로 쳐들어왔습니다. 13C 유라시아 제국을 일거에 통일한 그 몽골제국입니다. 1231년, 고종 18년 (고종은 조선이나 고려나 괴롭습니다.;;) 몽골 장수 살리타가 군대를 이끌고 들이닥칩니다. 이때 고려는 최우의 무신정권기입니다. 몽골은 7차례(실제로는 11차례) 침입을 하지만, 고려는 40년간 끈질기게 이 무시무시한 몽골제국을 막아냅니다. 지배층은 썩었어도 백성들은 가히 고구려의 후예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끝내 항복하여 원의 간섭을 받습니다만, 고려라는 이름만은, 즉 국가만은 잃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10~1> 

 

 특히 몽골장수 살리타를 단 한발의 화살로 꿰어 죽인 처인성(용인) 전투는 승려 장군인 김윤후와 처인성의 부곡민이 이루어낸 쾌거로 대몽항쟁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충주성을 끝까지 사수한 노비들의 중추성 전투에도 이 김윤후가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사기를 북돋우었다고 합니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 항쟁도 있지요. 이런 항쟁들이 계속되어 고려는 어떤 민족도 이토록 끈질기게 저항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몽골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이에 반해 최우 무신정권과 지배층은 강화도에서도 잔치를 열고 호화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p162>   

 

몽골 전쟁의 와중에 선덕여왕 때 지은 황룡사 9층 목탑과 거란 침입 때 판각한 초조대장경이 불탔습니다. 둘 모두 불교로 환란을 이겨내려 했던 호국불교의 상징인데요. 고려인들은 다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여 불교의 힘으로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려하였습니다. 가히 불교의 나라답습니다.

 

4. 원 간섭기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19강 강의>    

 

유라시아를 지배한 몽골은 칭기즈칸 사후에 후손들이 정복지를 분할 통치합니다. 쿠빌라이는 몽골의 발흥지였던 땅과 중국을 통합하여 원나라를 세웁니다. 원나라는 고려의 독립을 인정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엄청난 간섭을 합니다. 이런 원나라에 찰싹 달라붙어 출세가도를 달리던 고려의 지배층이 권문세족입니다. 권문세족은 과거의 문벌귀족부터 전쟁을 통해 부상한 천민계층까지 다양한 세력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일단 원 간섭의 치명타는 영토축소와 다루가치 파견이겠지요. 다루가치는 일제 시대의 총독과 비슷하다고 배웠고요. 원은 화주에 쌍성총관부, 서경에 동녕부, 탐라에 탐라총관부를 두어 일대의 영토를 원의 직접적 지배 아래 둡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p162>  

 

또 독특한 기관으로 정동행성이 있습니다.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설치한 기관입니다. 이 정동행성의 부서 중 특히 이문소가 골칫거리였습니다. 이문소는 대원관계 범죄를 다스리는 기구인데, 부원세력을 규합하고 그 이권을 대변하는 기구로 변질되었습니다. 백성들의 땅을 함부로 빼앗고 행패를 부려도 고려의 지방관은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일종의 치외법권적 권리를 누렸다는 거죠. 공민왕이 개혁을 하면서 가장 먼저 폐지한 것이 바로 이문소입니다.

 

그러나 결국 원나라도 기울기 시작합니다. 중국에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주원장이 부상하면서 곧 원명 교체기가 시작됩니다. 이때를 틈타 공민왕이 개혁의 칼날을 뽑습니다. 공민왕은 정동행성이문소를 폐지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고, 요동을 칩니다. 원의 간섭을 모두 되돌려 놓습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p167>    

 

특히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합니다.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침탈한 전田과 민民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둡니다. 땅은 원 주인에게, 노비는 양인으로 회복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집니다. 광종 때 호족세력을 약화시켰던 노비안검법을 상기하라고 하셨지요?

 

그러나 역사는 똑바로 나아가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돈은 권력에 탐닉하고 공민왕은 미쳐갔습니다.(?) 환관과 자제위에 의해 공민왕이 살해당하고 고려말의 마지막 개혁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5.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최태성의 고급한국사 19강 강의> 

 

고려의 지방행정조직이 5도 양계입니다. 북계와 동계, 이 양계의 목적이 북방 민족의 침입과 왜구의 침입을 막는 것입니다. 거란침입을 겪은 현종 때에 실시된 것입니다만, 고려 말에도 이 양쪽에서 정신없이 이민족의 침략이 계속됩니다. 이때 신흥무인 세력으로 부상한 대표자가 최영과 이성계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여서 어렵지는 않습니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상세히 다루었고, <정도전을 위한 변명>이란 책도 아주 훌륭합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p177>  

 

우왕과 최영이 요동정벌을 실행한 것은 명의 주원장 때문입니다.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내놓으라며 철령위를 설치한 것입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국권침탈입니다. 그런데 이 철령위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쌍성총관부 자리라는 말도 있고 요동지역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극구 반대하다 결국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맙니다. 압록강을 다시 건넌 것이지만, 루비콘강을 건넌 것과 마찬가지죠. 위화도 회군으로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혁명파 신진사대부는 곧이어 과전법을 실시함으로써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조선 건국의 기초 작업을 마칩니다. 물론 조선건국은 이성계의 신흥무인세력과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신진사대부의 합작품입니다.

 

우왕~ 엄청 길어졌네요. 용서하세요 ~

 

 

* 이 글은 한국사 모임 카페에 올리려고 했으나 글이 용량을 초과해서 올라갈 수 없다고 하여

부득이 블로그에 올리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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