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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ㅣ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평점 :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네 번째 묶음은 총 12명의 철학자 중 묶여지지 않는 나머지이면서, 각각 철학의 새로운 장을 펼친 태두 혹은 거두 3인이시다. : 정신분석학의 프로이트, 현상학의 후설, 해석학의 가다머.
인간 역사의 3대 굴욕 혹은 세 번의 혁명은 프로이트의 잘 알려진 이야기다. 첫 번째가 ‘코페르니쿠스의 천체 혁명’이다. 우주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쫓겨난 인간의 범우주적굴욕. 두 번째는 ‘다윈의 진화론’이다. 인간은 신이 특별히 만든 창조물이 아니라 진화의 산물일 뿐. 세 번째는 프로이트 자신이 주창자인 ‘무의식의 혁명’ 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주인조차 아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되시겠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바로 이 무의식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프로이트 편 저자는 ‘이드, 에고, 수퍼에고’ 로 이루어진 정신기구, 욕망과 충동, 꿈 등에 관해 다루고 있다. 이 중 무의식의 작동법칙을 드러내주는 꿈에 대해 조금 정리해 놓겠다.
꿈은 크게 꿈의 내용과 꿈 사고로 나뉜다. 우리가 꿈에서 본 꿈이 꿈의 내용이며, 이 꿈이 의미하는 바를 꿈 사고라고 한다. 꿈의 내용과 사고가 분리되는 이유는 의식의 검열 때문이다. 수배자가 검색대를 통과하기 위해 변장을 하듯이 무의식 역시 의식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꿈을 기괴하고 비논리적인 모습으로 바꾸어버린다. 이 과정을 꿈 작업이라고 하는데, 전치와 압축이라는 두 가지 방법이 이용된다. “꿈 작업은 압축과 전치를 통해 잠재된 꿈 사고를 드러난 꿈 내용으로 바꾸는 작업이고, 꿈의 해석은 드러난 꿈 내용 속에서 잠재된 꿈 사고를 찾아나가는 작업입니다. p64” 여기서 꿈의 해석은 물론 우리가 심심풀이로 하는 해몽과는 다르다. 그런데 왜 무의식은 의식의 검열을 피해야 하는 걸까? 무의식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욕망이나 충동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꿈은 결국 숨겨진 무의식적 욕망의 표현이다. 무의식의 욕망은 꿈뿐만 아니라 농담, 말실수, 실착행위 그리고 증상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라캉은 ‘증상은 곧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증상은 숨겨진 나의 본질과 무의식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증상을 덮어놓고 부벙해서는안되고 증상을 통해서 본질, 숨겨져 있는 욕망을 그대로 찾아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p73”
서양 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것저것 읽어본지가 10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 가장 개념이 잡히지 않는 것 중 하나가 ‘현상학’ 이다. 몇 년 전 현상학이 뭔지 도대체 아리송하던 차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발견했다. 그러나 ‘바로 이거야’ 라는 흥분도 잠깐, 곧바로 좌절하고 말았다. 이해가 불가능한 내용이었다. 그 책의 목차에 등장한 철학자가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였으니, 이들의 철학이 현상학과 관련이 있구만 하는 확인이 성과라면 성과였을 뿐이다.
그래서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후설편이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대중 강연이니 어쩌면 쉽고도 똑 부러진 설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하트라는 교수를 인용해 후설의 현상학은 ‘수많은 거봉을 품고 있는 웅장한 산맥’ 이라고 표현한다. 알프스산맥이나 에베레스트 정도 된다는 말일 테니, 동네 뒷산도 헉헉거리는 처지에 덤비는 것은 언감생심이 분명하다. 저자 역시 짧은 지면으로 약수터 산책객들을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이끌 중뿔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성마른 기대가 민망했으나, 어떻게 약수터라도...
후설이 현상학을 창시하게 된 배경은 20세기 들어와 실증주의가 발호하면서 철학에 위기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설이 보는 실증주의는 실증 과학이 모든 학문의 토대가 된다고 주장하는 그릇된 철학이다. 여기서 실증주의는 실증 과학과는 다르다. 실증 과학은 과학이고 실증주의는 철학인데, 후설이 비판하는 것은 철학으로서의 실증주의이다. 실증주의는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인식되지 않는 다양한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현상학은 뇌 과학과 같은 의식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뇌 과학 역시 현상학의 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상학은 뇌 과학이 의식을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후설의 ‘현상학적 심리학’ 과 ‘초월론적 현상학’ 은 내적 지각의 능력을 토대로 의식의 신비를 해명하려는, 의식에 관한 현상학이다. 내용 설명은 어차피 수박겉핥기가 될 것이 다분하기 때문에 생략한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마지막 주자는 가다머다. ‘해석학을 존재론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20세기 철학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철학자’ 로 소개되어 있다. 그래서 가다머를 ‘존재론적 해석자’ 라고 부르는데, 그가 추구했던 것은 ‘사람이 어떤 존재냐는 문제’ 다. 여하튼 꼴이 일단 해석학부터 알아야 할 것 같은데, 해석학이라고 검색하면 먼저 미적분에서 발전한 수학분야라는 설명부터 나온다. 그리고 역사, 성서 등등에 ‘해석학’이 붙어 줄줄이 뜬다. ‘해석의 이론과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 이라는 동어반복 같은 사전적 의미를 보니, 해석할만한 분야에는 다 해석학이 있을 듯하다. 그런데 영미 분석철학이니 뭐 그런 것은 들어봤어도 해석 철학은 조금 생소하다. 분석과 해석은 사촌지간 아닌가? 숙질간인가? 다행히(?) 그저께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이 배달되었으니, 조만간 분석철학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혈통 비교는 그 때 가서 해보고, 일단은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가다머 편의 저자 설명을 조금만 덧붙여 놓는다.
가다머는 나치의 출현으로 무엇보다, 과학기술문명이 우리 삶을 어떻게 오도하는지에 대해 깊이 파고들었다. 거의 모든 현대철학자들처럼 가다머 역시 그 원인을 데카르트 이래 절대화된 ‘도구적 이성’에서 찾아낸다. 현대철학 시리즈를 보면 데카르트는 만악의 근원처럼 보인다. 신으로부터 인간을 독립시킨 프로메테우스적 영웅이 악마의 화신으로 추락한 셈이다. 오! 데카르트... 그러나 현대는 여전히 ‘modern' 이기도 하다. 여하튼 가다머는 나치 독일의 현실을, ‘자신을 절대화함으로 자신 외의 모든 것을 대상화와 배제, 차별하는’ 도구적 이성의 오만함 때문으로 규정한다.
가다머는 도구적 이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긴 성찰 끝에 고대 희랍에서 근대의 이성과는 다른, 삶의 현실성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유의 전체성을 만나게 된다. 그 결과 근대의 이성과 다른 새로운 이성 개념으로서의 ‘이해’를 제안한다. “가다머가 말하는 이해는 무엇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라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로 융합하면서 나를 있게 하는 전체성의 지평을 가리킵니다. 나와 이해를 분리할 수 없는 하나 안에서 파악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우리는 달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이해를 달리함으로 존재도 달리한다는 것이지요. p294” 이성과 이해의 차이는 우리가 흔히 쓰는 일상어의 뉘앙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너를 이해해’ 는 ‘나는 너를 이성적으로 다 파악했어.’ 와는 다르다. 가다머의 말이 이런 뜻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여하튼 이해는 곧 존재라는 의미에서 가다머를 ‘존재론적 해석학자’ 라고 부른다. 가다머는 이해는 곧 적용이자 해석이라고도 한다. ‘이해는 언제나 이미 적용이며, 적용은 또 해석’ 이다. 이해와 적용과 해석은 앎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생성해 나오는 삶의 일이다. 이것이 가다머 철학의 특징이다. 이러 가다머에 대해 과거로 회귀하고, 주관주의에 빠지고, 무비판적이고, 자기이해 중심이라는 비판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라고 묻고 있지만, 알 리가 있겠는가, 다만 저자의 권유대로 가다머의 대표작 『진리와 방법』을 정독해 본다면 어렴풋이나마 판단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그러자면 가다머의 비판자들의 책도 다 읽어보아야 한다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