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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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세 번째 묶음은 프랑크푸르트학파로, 1세대 아도르노, 2세대 하버마스, 3세대 호네트 이다. 호네트편 저자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개요와 각 세대별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해 잘 요약해 놓고 있어 먼저 인용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30년대부터 독일 프랑크푸르트 소재 사회연구소에서 호르크하이머를 중심으로 공동 연구를 추진했던 일단의 연구자들을 지칭한다. 철학 주도의 학제 간 공동연구를 통해 현존 사회를 비판하고 대안적 사회를 모색한 이들의 이론은 흔히 ‘비판이론’ 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단일한 사회비판 모델이나 대안적 사회상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세대와 시대에 따라 그들의 비판이론도 변화해 왔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1세대는 『계몽의 변증법』을 공동 집필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로 대표된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초기에 맑스주의를 표방했으나, 나치 치하의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이들의 패러다임도 전환을 겪었다. 미국 독점 자본주의의 비인간성과 전체주의로 변질된 스탈린체제, 그리고 나치의 가공할 폭력 앞에서 그들은 인류의 문화 과정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했다. 『계몽의 변증법』은 그 결과물이다. 인류의 역사는 계몽의 역사이며, 계몽의 과정은 현대사회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끝은 ‘새로운 야만’ 으로 귀결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신을 대신하며, 자연을 지배하고 조작했지만, 근대사회는 결국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물질중심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주의자로서, 계몽의 미완이 야만을 불러왔다고 판단했다.

 

푸랑크푸르트학파의 2세대로는 단연 하버마스가 유명하다. 하버마스는 우리가 보기에 대단히 상식적이다. 그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 은 쉽게 말하면 소통만 잘 되면 된다는 정도로 보인다. 근대의 합리성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 합리성이다. 그런데 도구적 합리성이 점점 우세한 힘을 가지며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파괴해 버리면서, 현대 물질문명의 문제를 야기했다. 그러므로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활성화된다면 『계몽의 변증법』이 문제 제기한 야만성은 극복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3세대 대표주자는 호네트이다. 호네트의 이론은 ‘인정’과 ‘무시’라는 일상적 언어로 전개된다. 인간은 인정을 받음으로써 아무런 훼손 없이 자아실현에 이를 수 있으며, 인정의 반대는 무시이다. 인간은 사회구성원으로써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끝없이 ‘인정투쟁’을 벌인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아도르노편은 그러나 프랑크푸르트학파나 『계몽의 변증법』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다만 칸트와 헤겔의 비판적 사유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을 소개하고 있다. 아도르노는 이론의 실천과정에서 피할 수 없이 발생하는 폭력의 문제에 깊이 고민하며 예술에 집중했다. 예술은 사회적 폭력을 흡수하는 상징체계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을 엄격히 구별한 그의 태도는 현실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실천을 원했던 학생들과 충돌했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하버마스편은 의사소통행위이론과 생활세계 식민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버마스 철학의 핵심개념은 이성적 ‘대화’라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대화 속에서 갈등을 넘어선 공존과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하버마스는 인간의 행위 유형을 ‘도구적 행위’, ‘전략적 행위’, ‘의사소통 행위’ 로 구별한다. 『계몽의 변증법』은 문명화 과정 전체를 인간의 자연 지배, 타자 지배, 자기 지배 등의 도구적 행위 과정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인간에게는 타자를 도구화하지 않고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의사소통 행위의 가능성이 존재함을 보았다. 의사소통행위는 사회적 행위자들이 상호 이해를 목적으로 서로의 행위 계획을 조정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하버마스는 또한 생활세계와 체계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모든 사회는 그것의 존속을 위해 물질적 차원과 상징적 차원에서의 재생산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지요. 하버마스는 상징적 차원의 재생산을 생활세계에, 물질적 차원의 재생산을 체계에 할당합니다. 상징적 차원의 통합과 재생산, 물질적 차원의 통합과 재생산이 각각 생활세계와 체계라는 개념을 통해 포착됩니다.p317” 그런데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진화는 체계의 명령이 생활세계에 침투하는 ‘생활세계 식민화’를 야기한다. 다시 말해 화폐나 권력 같은 물적 차원이 생활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런 병리적 현상을 해소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활성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고 토의민주주의를 주장한다. 토의민주주의는 시민사회의 공론을 기초로 입법 행위를 함으로써 국민주권의 이념을 실현하고, 체계의 생활세계 식민화를 제어하려는 기획이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생활세계 식민화 테제를 도출하던 1980년대는 복지국가의 틀이 유지되고 있던 때인데 반해,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하버마스의 이론이 얼마나 적절한 시대진단인가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하다.

 

하버마스의 이론은 우리 일반인의 상식과 딱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무리 소통을 외쳐도 불통만 심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소통이론이라는 것이 현실성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인간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인가?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호네트편은 그의 ‘인정이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정과 무시라는 그의 개념은 우리가 쓰는 일반적인 뜻과 비슷하다. 여기서 인정은 현존성, 동등성, 독특성에 대한 인정이 기본이 된다. 첫째는 무시 즉 안 보이는 사람 취급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존재를 인정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권리의 동등성을 인정하는 것, 셋째는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등 개별적 독특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타인의 존재를 인정할 때, 구성원 개개인의 자아실현이 보장되는 사회가 가능하다. 호네트는 인정과 긍정적 자기의식과의 관계를 세 가지 유형을 들어 설명한다. 사랑은 자신감을, 권리의 부여는 자존심을, 사회적 연대는 자부심을 가져다준다. 한 사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적 배려, 권리 부여, 사회적 연대 등의 사회적 인정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느냐에 따라 사회의 건강성이 결정된다. 인정이 아니라 무시가 횡행하는 사회는 병리적 사회이며, 이런 사회일수록 구성원의 인정투쟁이 격화될 수밖에 없다. 사회의 도덕적 진보는 인정투쟁을 통해 사회적 인정의 대상과 내용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은 매우 상식적이고 평이해 보인다. 우리가 합리적 이성을 믿을 수 있는 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은 매우 현실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사회가 흘러가는 모양을 보면, 인간에게 과연 소통이라는 것이, 상호인정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당장 우리나라의 동서로 갈라진 지역차별과 적대부터가 소통의 불가능성을 입증하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진정 합리적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상호 인정과 소통이 가능하다면, 세월호 참사라는 명백한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이렇게 대립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보면 비단 이 빈관적 상황은 우리민족만의 비합리성 때문인 것 같지도 않다. 의자와 소파까지 가져다 놓고 가자지구에 떨어지는 백리탄을 관람하며 맥주를 즐긴다는 이스라엘 국민들을 보라. 스데롯 시네마! 저것이 합리적 이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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