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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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두 번째 묶음은 나치와 철학자들 : 니체, 하이데거, 아렌트, 벤야민 이다. 물론 내 마음대로 묶음일 뿐, 저자들은 나치에 관해 별 말을 하지 않는다. 작은 지면으로 핵심만 소개하기도 바쁜 터에, 민감한 곁가지까지 건드릴 여유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냥 호기심으로 묶어보았다. 서양 철학을 읽다보면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는데, 유난히 유대인 철학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유대인은 전 세계 인구 70억 명 중 1300~1400만 명 정도다. 대략 1/500 의 비율인데, 이 책에만 해도 마르크스, 프로이트, 후설, 룩셈부르크, 벤야민, 아도르노, 아렌트 까지 7명이나 되니 놀랍다. 유대인이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이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사상적 흐름을 주도하는 철학계의 거장들을 보면 늘 의문이 든다. 이런 인물들을 배출한 민족임에도, 어떻게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그렇게 야만적일 수 있는지. 이천년 전의, 신화인지 뭔지도 모를 말씀 하나를 근거로, 이천년을 살아온 민족을 몰아내고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지. 나치와 지금의 이스라엘이 근본적으로 동일함을 그들이 어떻게 모를 수 있는지. 이 책을 보다 문득 생각이 나서, 나치와 유대인과 철학을 엮어 보았다.

 

 

 

니체는 나치와 직접적으로는 연관이 없다. 히틀러가 그의 이미지를 나치의 ‘초인’ 이론에서 따왔다고 해서 자동 연상되는 불운을 겪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히틀러의 철학자들』에는 칸트, 헤겔, 포이어바흐, 피히테 등이 줄줄이 히틀러에 의해 엮인 모양이고, 그 중에서도 니체는 히틀러에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철학자로 선정된 모양이다. 니체의 의도와 상관이 있든 없든 여하튼 히틀러가 니체의 사상에서 뭔가 영감을 받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니체 편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힘에의 의지’를 읽으며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수박겉핥기식의 개론과 주마간산 식 독서가 합작한 폐해겠지만, ‘힘에의 의지’ 라는 말 자체가 풍기는 뉘앙스만으로도 히틀러가 좋아했겠다 싶다.

 

나는 오랫동안 ‘힘에의 의지’ 라는 말을 오해했다. 우리말 ‘힘에의 의지’는 뭔가 힘에 의지하고 싶어 하는 수동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데 ‘힘에의 의지’ 란 힘을 향한 의지, 힘을 갖고 싶어 하는 의지라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럴 때 ‘의지’ 란 마치 어떤 실체처럼 느껴지지만, 저자에 의하면 번개와 같은 것이다. ‘번개가 치다’에서, 문장 구조상으로는 번개라는 실체가 있고, '치다'는 번개의 행위로 보이지만, 실제로 번개는 칠 때만 존재하지, 가만히 있는 번개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번개의 존재는 곧 번개의 생성이다. 의지란 곧 힘에의 추구이다. “니체에게 이 세계는 다수의 힘에의 의지들의 거대한 관계의 네트워크입니다. 힘에의 의지는 주지하다시피 ‘항상 힘 상승과 강화와 지배를 추구하는 의지작용’입니다. 지배와 더 많은 힘 그리고 더 강해짐에 대한 추구는 의지들에 내재하는 본성입니다. 즉 모든 의지는 힘의 상승과 강화 및 지배를 추구하지요. 그래서 힘에의 의지는 다른 의지들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립하는 제3의 의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의지들은 그것이 의지인 한에서 힘 상승을 추구하며, 그래서 모든 의지를 힘에의 의지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는 이런 힘에의 의지들이 구성해내는 관계-세계인 것이고요. p84” 그다지 쉬운 설명은 아닌데, 힘에의 의지는 실체적 행위자가 아니라는 것과 관계적 운동이기 때문에 독립적인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니체의 세계는 모든 힘들이 동시에 각축하는 관계-세계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개인은 세계 전체와의 동시적 상호작용에 의해 공동으로 구성되는 개인이고, 세계도 공동으로 구성되는 세계입니다. 이것은 개인과 세계에 대한 근대적 모델로부터 완전한 전회를 이루는 새로운 모델이지요. 근대적 개인은 일종의 원자적-실체적 개인입니다. 즉 원자적인 ‘나’의 존립이 먼저 전제되고, 타인과의 관계 맺음은 그 후의 일이며, 그 관계의 유무에 무관하게 ‘나’는 ‘나’로서 존립합니다. 근대적 사유는 바로 이런 개인관을 토대로 개인과 공동체와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하지만 니체의 관계론은 이런 원자적-실체적 모델 자체를 폐기합니다. p100” 관계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에만 가능한 것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니체 철학의 본질은 복수성이다. 니체는 위대한 사건들을 믿은 것이 아니라 사건의 복수적 의미를 믿었다.

 

10여 년 전 나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뭐라고 말했는지 지금은 다 잊어버렸고, 그때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려웠다. 그 때 니체를 읽은 이유는 순전히 들뢰즈 때문이다. 이진경이 일으킨 들뢰즈 바람이 우리나라에 한창 불던 시절이다. 소련 몰락 후의 좌파 철학의 대표주자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생성, 탈주, 유목, 되기, 기계’ 따위 개념이 덕분에 유행했다. 들뢰즈는 니체를 덮쳐서, 자신의 아이를 낳았다. 들뢰즈는 철학적 비역질로 유명하다. “나는 어떤 작가의 등에 달라붙어서 그의 애를 만들어낸다고 상상했지. 그것은 그의 아이가 될 것이고, 흉물스러울 것이었지. 그것이 그의 아이라는 사실이 아주 중요해. 실제로 그 작가는 내가 시키는 대로 말을 해야 했으니까. <신체 없는 기관>” 니체도 들뢰즈의 여러 상대들 중 하나이다.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은 그렇게 탄생한 아이일 것이다. 여하튼 10여 년 전 쯤, 니체는 들뢰즈의 파트너로 우리에게 왔던 것 같다.

 

 

 

벤야민은 나치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인 철학자이다. 유대인인 벤야민은 1940년 망명 도중 스페인 국경마을에서 자살했다. 프랑스로 귀환되어 나치에게 인계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자살로 몰아갔다. 그런데 2000년대 초 어느 매체에, 벤야민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스파이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나치가 아니라 스탈린이 그를 살해해야 했던 이유는 그의 「역사철학 테제」때문이란 것이다. 벤야민이 프랑스에서 스페인 국경을 넘을 때 품안에 「테제」의 초고를 품고 있었는데, 이를 알고 있었던 스탈린이 어떻게 해서든 이 테제에 근거한 새로운 책의 간행을 막으려고 그를 죽였다. 나는 이 웃긴 이야기를 지젝의 『시차적 관점』 서주에서 읽었는데, 지젝은 스탈린이 설혹 「테제」를 읽었다 하더라도 그의 관점에서는 「테제」의 진정한 차원을 간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일축했다. 「역사철학 테제」는, 그 불가능한 소문을 퍼뜨린 매체에,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에 대한 짧지만 충격적인 분석’ 으로 소개되어 있다.

 

여러 책들에서 벤야민이란 이름을 보게 되면서 나도 벤야민을 읽어보려 한 적이 몇 번 있다. 그런데 번번이 실패했다. 명성만큼 혹은 인용된 문구만큼 그렇게 매력적인 벤야민을 찾기가 어려웠다.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출간되었을 당시, 그 무시무시한 두께에 놀라며 책을 펼쳤는데, 두께도 두께려니와 왜 이런 내용을 이렇게 시시콜콜 묘사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 바로 덮었다. 다음으로는 그 유명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였는데, 여기서도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전문을 읽게 된 「역사철학 테제」는 정말 훌륭했다. 체스 두는 자동인형과 난장이의 비유로 시작하는 제 1 테제를 비롯해 클레의 천사 그림으로 진보를 설명하는 제 9 테제 등 우리가 어디선가 보았던 유명한 문장들의 출처가 바로 이 「테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벤야민 편은 이런 것들을 다루지는 않는다. 매체철학과 도시공간에 관한 논문들을 쓴 저자는 거두절미하고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을 파고든다. 아우라는 원래 ‘신비한 기운’ 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벤야민이 예술과 관련해 사용하면서 매우 논쟁적인 철학 개념이 되었다고 한다.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한마디로 ‘아우라의 몰락’ 이라고 규정했다. 저자는 아우라가 무엇인지, 왜 벤야민이 몰락을 말했는지, 그리고 현대 문화예술에서 몰락했다던 아우라가 어떻게 재아우라화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예술 쪽에는 완전 문외한이라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아우라는 아우라지 뭐.

 

 

 

나치와 철학자를 말할 때 가장 문제적인 인물은 아마도 하이데거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변명의 여지없이 나치에 가담한 철학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를 무시하고 현대철학을 말할 수는 없다. 하이데거주의자들은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나치 가담은 잠깐 동안의 실수에 불과할 뿐이며 그의 철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의 주요 이론서에는 어김없이 하이데거를 등장시키는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은 하이데거의 ‘위대함’은 나치에 참여했음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 그 참여가 하이데거의 ‘위대함’을 구성하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는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는 나치에 의해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임명된 뒤 나치당원이 되지만, 10개월 만에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나치즘’이 인종-기술주의적인 니힐리즘에 의해 배반당했다고 비판했을 뿐, 그 내적 위대함에 대해서는 여전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1930년대 내내 하이데거는 일관되게 이 배반당한 ‘내적 위대함’, 나치 운동의 세계사적 잠재성을 구원하고자 노력했다. 지젝은 하이데거의 오류를 나치의 오류와 동일한, ‘비겁함’ 에 있었다고 본다. “나치의 ‘용기’는 그들 사회의 핵심 특질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공격하지 않은 비겁함에 의해 지탱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히틀러의 폭력은 가장 끔찍한 순간에서조차 여전히 ‘존재적’인 것으로, 나치 운동이 부르주아적 공동 존재의 근본 좌표와 대결-의문시-해체하는 실제적인 ‘비장소’가 되지 못한 무능을 폭로하는 무력한 행위로의 이행이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 자신의 나치 참여 역시 일종의 행위로의 이행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안에서 발견한 이론적 곤경을 해소하지 못한 무능을 증명하는 파괴적인 분출이 아니었을까?”

 

나치즘은 민족(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의 무능과 병폐에 반대하여 조직된 일종의 사회주의 정당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를 공격하지 못하고, 독일인민의 분노가 유대인을 향하도록 돌려놓음으로써, 오히려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도록 복무했을 뿐이다. 지젝은 이것을 비겁함이라 부른다. 하이데거가 지지했던 나치즘은 비겁했던 현실의 나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킬 내적 위대함을 지닌 나치였다. 그러나 지젝은 하이데거 역시 자신의 이론적 곤경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했던 바로 그 비겁함 때문에 나치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물론 지젝은 그 ‘이론’에 대해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지만, 하이데거의 이론이란 것은 정말 이해하기 쉽지 않다. 오죽했으면 그의 『존재와 시간』을 두고 독일 사람들도 독일어가 맞는지 의심스러워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하이데거 관련 글을 읽다보면 존재, 존재자, 존재적, 존재론적 같은 ‘존’ 자 돌림 단어들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그러니 여기서 하이데거가 처한 이론적 곤경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런데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하이데거 편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이데거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저자의 말대로 쉽고 분명한 편이다. 그래서 밋밋하다. 이런 정도면 왜 하이데거를 우회해서는 현대철학을 말하기 어려운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실 『How to read 하이데거』라는 입문서를 읽고 놀란 적이 있다. 하이데거에 대한 악명 때문에 잔뜩 긴장했는데, 의외로 너무 술술 읽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에 대한 내 생각은 쉽게 접근하면 그 어떤 사상 보다 쉽고,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무슨 말인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어렵다로 정리되어 있다. 어려운 것이 좋은 것은 아닌데, 어려움 속에는 쉬움 속에 없는 독특한 무엇이 있다. 읽기의 즐거움은 사실 그 독특함을 발견하는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의 ‘존~’ 시리즈는 그렇게 밋밋한 개념은 아닌 듯싶다.

 

 

 

유대인인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다. 18살에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하이데거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현대 철학계의 거의 유일한 여성 철학자인 아렌트와 하이데거의 사랑은 나이차, 불륜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나치와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나치의 박해가 심해지자 아렌트는 미국으로 망명하는데, 돈도 없고 영어도 잘 하지 못했던 아렌트는 5년 동안 가사 도우미 일을 했다고 한다. 아렌트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이었다. 1960년 아렌트는 미국 <뉴요커>란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서 직접 이 재판을 지켜본 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을 썼다. ‘악의 평범성’ 이란 말로 유명해 진 이 책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악마도 괴물도 아닌 평범하고 성실한 생활인임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그렇다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그 악마적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렌트의 결론은 악의 평범성이란 사유의 부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그저 명령에 충실하게 따랐을 뿐, 그 명령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전혀 사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의 아렌트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묻는 능력과 직결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묻지 못했던 아이히만의 모습. 이 모습은 오늘날 열심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악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p277”

 

저자는 첫 부분에서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잠시 언급하는데, 아렌트에 대한 비난에 비약이 있음을 지적한다. 아렌트의 활동적 삶, vita activa는 정치적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병철이 말하는 과잉활동hyperactivity 와는 다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ur ,작업work, 행위act로 나눈다. 노동이란 농사, 가사 같이 생존과 직결되는 일이며, 작업은 집, 옷 등을 만드는 일에 해당한다. 행위란 희랍세계의 폴리스에서 행해지던 활동과 같은 공적인 행위이다. 폴리스시민들은 폴리스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을 정치적인 것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폴리스에서 사는 동물’이다가 ‘정치적 동물’ 이다로 번역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폴리스적인 삶에 대비되는 것이 사적인 삶, 오이코노미아(oikonomia)다. economy 의 어원인 오이코노미아는 가정경영,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희랍시대에 먹고사는 일은 가정에서 해결해야 할 사적인 영역이었다. 아렌트의 노동과 작업은 오이코노미아에, 행위는 정치적 삶에 해당된다. 이런 분류를 통해 아렌트는 사라져 가는 정치 영역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렌트 사상의 핵심을 두 가지만 짚자면 정치의 회복과 깊은 사유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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