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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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첫 번째 묶음은 혁명의 대명사 마르크스와 로자 룩셈부르크 이다.

 

 

사실 이런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을 정도의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마르크스는 어떤 식으로든 익숙한 이름이다. 조금씩은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겨우 이십여 쪽에 저자가 마르크스의 무엇을 담아낼 지가 나는 더 궁금했다. 본격적인 사상을 담기에는 지면이 너무 짧고, 대강 훑기에는 너무 잘 알려진 터라 저자의 고심이 컸을 것 같았다. 저자의 선택은 곧바로 19세기로 날아가는 것이다. 19세기는 흔히 부르주아의 시대라 불릴 만큼 자본주의가 급성장한 시기다. 이 시기를 살아가면서 마르크스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고, 어떤 이야기를 했으며,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집중하겠다고 저자는 밝힌다. 그의 삶을 통해 사상을 따라가는 방식이다. 그 과정에 마르크스의 핵심개념들이 짤막하게 소개되고 있는데, 여기서 요약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나만 기록해 두자면,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자신의 고유한 업적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이 가치의 원천임을 밝힌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가 계급으로 분화되어 있고 계급투쟁이 역사를 추동한다는 것을 밝힌 데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이 투쟁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해 나아가는 경향이 있음을 밝힌 데 있다” 고 했다는 것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의심스럽지만, 왜냐하면 대부분의 좌파철학자들도 역사적 유물론은 폐기한 것 같으니 말이다, 어쨌든 마르크스가 집중한 것은 이 발전의 ‘경향’ 이라고 한다. 사실 노동가치설 하면 우리는 대뜸 마르크스를 떠올리지만, 노동가치설이야말로 자유주의 부르주아 사상가들의 경제학이라고 한다. 홉스에 이은 로크가 사적 소유권의 근거로 내세운 것도 노동가치설이다. 원래 주인이 없는 자연물, 즉 하느님이 만드신 땅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은 그 땅에 나의 노동력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식민지 팽창시절 아메리카 대륙에 간 백인들이 먼저 달려가서 깃발을 꽂으면 자기 땅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깃발을 꽂고, 울타리를 세운 ‘노동’ 이 사적 소유권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말이 나왔으니 곧바로 연상되는 것이 식민지 전쟁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바로 극에 달한 식민지 쟁탈 전쟁이었는데, 마르크스는 자본의 잉여가치를 최종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식민지 전쟁은 필연적임을 역설했다. 자본은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잉여가치를 유통과정에서 실현해야 한다. 상품은 생산이 아니라 소비를 통해서 최종 가치가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임금으로는 이 잉여가치 분을 모두 구매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은 잉여가치의 실현을 위해 부단히 비자본주의적 시장을 자본주의적 시장으로 포섭해야 한다는 강제에 직면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근대에는 국경의 끊임없는 확장을 통한 시장 확대의 경향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식민주의 전쟁의 필연성이 있지요. 식민주의 전쟁은 원주민들을 그들이 속한 자연 환경에서 폭력적으로 분리시키는 시초축적 전쟁의 확장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시장 확대를 둘러싼 자본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수반하고요. 이것이 제국주의 전쟁의 기초가 됩니다. p33~4” 스페인이 처음 남아메리카를 점령했을 때만 해도 수탈은 주로 식민지의 자원에 집중되었다. 식민지에 혈안이 된 이유가 은광이나 금광 따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더욱 절실해 진 것은 생산한 상품을 판매할 자본주의적 시장이었다. 단순히 가정해서, 노동자는 TV 1대 값의 임금을 받고, 적어도 TV 두 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남는 한 대의 TV는 누가 구매할 수 있는가? 노동자에게는 두 대를 살 수 있는 구매력이 없다. 이 남는 TV 즉 잉여가치는 다른 곳에서 판매되어 한다. 식민지는 그렇게 해서 잉여가치를 실현할 자본주의 시장으로 재편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른바 ‘근대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뉴 라이트를 비롯해 떠들썩하게 우리를 웃겼던 문창극 같은 사람들이 찬양하는 일제 강점기 근대화론이라는 것이, 우리나라도 자본주의 시장으로 편입되어, 제국의 상품을 살 수 있는 소비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는 약삭빠르게 살아남아 이제 우리의 잉여가치를 실현해 줄 제3국으로 진출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도 거대자본의 이익일 뿐이다. 여하튼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은 자본주의의 법칙 상 제국주의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전 세계를 재빠르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 바꾸어 놓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는 철저히 수탈당하고,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에게도 수탈의 콩고물이 배분되었다. 마르크스가 1848년,『공산당 선언』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지만, 콩고물에 현혹된 제국의 노동자들과 좌파들조차도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하며, 프롤레타리아의 형제애를 배반해 버렸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한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 2명 중 한 명이다. 둘 다 전쟁이 끝난 후 살해당했다. 로자가 유명해 진 것은 ‘로자 대 베른슈타인 논쟁’, 즉 수정주의 논쟁 때문이다. “수정주의 이론을 대표한 사람이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이고요. 로자와 베른슈타인 논쟁의 핵심은 자본주의가 붕괴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였지요... 수정주의자들이 정통 맑스주의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자본주의가 계속된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가 위기를 극복하는 ‘적응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p141”

 

베른슈타인의 근거는 마르크스의 예언과는 달리 영국과 독일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위기를 겪으면서도 붕괴되지 않고 살아남았고, 이들 국가의 노동자들이 조금씩이나마 살기가 좋아졌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주의가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 자본주의 국가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마르크스 편에서 살펴보았듯이 식민지 수탈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식민지 전쟁을 찬성했다. 수정주의의 물적 토대가 바로 제국주의이기 때문이다. 당시 제 2 인터내셔널에는 네 가지 커다란 논쟁이 있었는데, 수정주의 논쟁, 제국주의 논쟁, 총파업 혹은 대중파업 논쟁 그리고 반전 논쟁이다. 여기서 수정주의 논쟁은 식민지 논쟁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그 틀 안에서 선진국 상층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보장받으려 했던 수정주의자들에 맞서 제국주의라는 틀로 자본주의를 새롭게 이해해야 하고 자본주의 붕괴의 필연성은 변함이 없다고 주장한 이들이 바로 로자와 레닌이었습니다. 당시에 이들은 스스로를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 라고 불렀지요. p142”

 

수정주의자들은 자본가 계급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가장 전형적인 논리는 우리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의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입을 통해 듣는 것과 똑같다.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지역을 문명화하기 위해 식민지를 지배한다는 것으로, 그들이 말하는 문명은 기독교, 근대 계몽주의,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자국의 상층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 민중을 배반했다. “이것이 수정주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결정적 차이이자 20세기 내내 서유럽 사민주의와 나머지 지역의 사회주의를 갈라놓은 지점입니다.p147” 한마디로 수정주의자들의, 자본주의는 붕괴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실질 이익도 증가했다는 주장은, 식민지 민중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과 착취에 눈감은 결과이다. 로자는 이런 수정주의 노선에 반대하며, 자본주의의 붕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려 노력했다.

 

로자는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붕괴를 어떻게 확신했을까? “로자는 혁명의 객관적 조건으로서의 자본주의의 붕괴는 경제적 붕괴로 나타나지 않고, 정치적 충돌을 통해 나타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의 형태로 말입니다. 그녀가 판단하기에 지구상에는 이미 비자본주의 영역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선진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전 세계가 거의 분할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서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을 위해서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지배하는 식민지를 재분할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당시 제국주의 국가들 앞에 남은 역사적 과정은 식민지를 재분할하기 위한 충돌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세계적인 규모의 제국주의 전쟁이 닥칠 것이라고 로자가 판단한 이유입니다. 불행히도 그렇게 됐고요p147~8”

 

그러나 자본주의는 붕괴하지 않았다. 그러면 로자는 폐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마르크스와 함께 말이다. 아마도 보는 사람들의 관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거대한 괴물로 성장 중이고, 소련의 공산주의는 채 한 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붕괴했다. 이것으로 역사는 종결된 것일까? 이미 철 지난 유행으로 취급되지만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이 이루어진 것일까? 자본주의가 변신을 거듭하며 위기 속에 살아남았듯, 자본주의에 대항한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역시 단지 어떤 과정 속의 침체기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다음 시대의 역사가 그 답을 말해 줄지도 모르겠다.

 

로자의 유명한 책 『사회 개량이냐 혁명이냐』에 대해 한마디만 덧붙이겠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한 책인데, 언뜻 보기에는 베른슈타인이 개량을, 로자가 혁명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이분법은 베른슈타인이 만든 것이고, 로자는 이 문제 설정 자체가 잘못되어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혁명이냐 개량이냐는 찬 소시지냐 뜨거운 소시지냐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혁명과 개량은 같은 범주의 것이 아니라, 혁명이 상위의 개념이다. 혁명으로 가는 길에 개량적 전술도 있고, 무장봉기의 전술도 있다. 민주주의를 부르주아식 의회민주주의의 동의어로 보면 의회민주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운동은 테러가 되어 버린다. 로자는 의회민주주의가 충분히 민주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근본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로자에게 그것은 파리 코뮨이나 소련의 소비에트와 같은 민중의 기구인 ‘평의회’ 였다. 그러므로 로자를 폭력적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며, 2001년 베를린 시의 ‘로자 기념조형물’을 반대한 우파의 주장은, 80년 전 수정주의자들의 그것과 닮았다. 로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다르지만, 더욱 본질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려 한 혁명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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