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 숟가락 하나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개정판
현기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무난한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읽기가 쉽지 않았다.  제주 4.3 사건이 배경이라기에 극적인 전개와 격한 감정 따위를 예상했지만, 책은 예상밖에 잔잔했다. 유년의 풍경을 아스라이 그려내는 수채화 같은 느낌이었다. 기억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중3까지의 이야기지만, 성장소설이 아닌 회고담, 기억의 수묵화라 할 수 있다. 엄마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듣듯, 아스라하고 안온한데도, 책이 술술 넘어가지 않아 애를 먹었다. 약속시간에 늦었는데, 눈치없이 하릴없는 넋두리를 늘어놓는 할머니에게 붙들린듯, 마음이 다른곳으로 널을 뛰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책이 눈에 안들어와 마음이 산란한지 잘 모르겠다. 점점 서정적인 책들을 읽기가 어려워진다. 눈이 뻑뻑해지는 것처럼, 마음도 뻑뻑해지는 것일까... 너무 많이 보아버려, 이제 아무 감흥이 없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일까...

 

여든이 넘은 엄마는 남루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몇 년전에 강풀 원작의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함께 보았는데, 엄마는 조금 언짢아 했다. 쪼글쪼글 늙은 것들이 연애질하는 것도 보기 흉하고, 치매 걸린 마누라와 자살하는 늙은 부부의 이야기도 심란하다고 했다. 오히려 나는  보지 않는 아이돌들의 춤을 더 좋아한다. 언뜻 생각하면 노인들 눈에 망칙해 보이지 않을까 싶은데, 엄마는 그 터질듯한 생명력에 매혹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래전에 홍상수의 첫 번째 영화 <생활의 발견> 을 보았을 때, 나도 그랬다. 내가 살던 곳과 너무 닮아, 너무 끔찍하게 현실적이라, 너무 영화같지가 않아 지루했다. 운동화 두짝만 질질 끌고 나가면 보게 되는 풍경을 굳이 스크린에서 또 봐야 하다니, 짜증이 일었다. 영화는 영화니까, 드라마는 드라마니까, 소설은 소설이니까 보는데....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미 너무 많이 보아버린 회고담이다. 작가들은 나이가 들면 그렇게 유년의 기억들로 돌아가나 보다. 독서회에서 몇 달 전에 읽은 『관촌 수필』도 그렇고, 지금은 책 이름도 금새 기억해 내지 못하지만, 젊은 시절 읽었던 여러 책들이 이런 유형의 회고담들이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이 책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유난히 담담하다. 유년에 겪은 4.3이 그저 스치듯 지나가버리니, 독자를 빨아들이는 극적인 사건이 따로 있을리가 없다. 평양냉면의 밋밋한 맛 같다고나 해야할까. 내게도 이 정도의 이야기는 있는데 하는 생각이 이 책을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처럼 읽게 한 것 같다. 나는 회고록을 좋아하지 않는다, 평양 냉면의 맛을 모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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