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이 글은 리뷰 상품을 세움판으로 잘못 선택해 올렸던 예전 글입니다. 예전 글을 비공개로하고(댓글들이 있어서)  민음사판 리뷰로 다시 올려 놓습니다.

 

다시 읽은 『이방인』은 생각보다 간결했다. 이상도 하지, 내 기억의 어디에도 『이방인』에 대한 옛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스무 서넛 무렵 까뮈에 푹 빠진 나는, 서점과 헌책방을 가리지 않고 까뮈의 책들을 찾아 다녔다. 온라인 서점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사실 나는 까뮈의 소설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재미도 없었고 이해도 못했다.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그의 두 편의 시론試論 (당시 책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었다. 나는 시론이 뭔지도 몰랐다.)인, 『시지프의 신화』와 『반항인』이었다.

 

『시지프의 신화』의 첫 문장은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이다. 『이방인』의 첫 문장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이다. 까뮈를 대표하는 두 문장에 모두 죽음이 있다. 까뮈의 세계는 ‘죽음’과의 대면이다. 그의 시론들인, 『시지프의 신화』는 부조리와 자살, 『반항인』은 살인과 반항을 탐색하고 있다. (링크『시지프의 신화』와 『반항인』에 관한 리뷰) 이 두 작품은 엄밀한 상관관계에 있는데, 사실 까뮈의 모든 작품이 그렇다. 까뮈는 노벨 문학상 소감을 통해, 그의 작품들이 상호 관련성 아래 철저히 기획된 것임을 밝혔다.

 

「 “나는 처음 시작 때부터 내 작품 세계의 정확한 계획을 세워가지고 있었다. 나는 우선 부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세 가지 형식으로. 그것이 소설로는 『이방인』, 극으로는 「칼리굴라」와「오해」, 사상적으로는 『시지프의 신화』였다. 나는 또 세 가지 형식으로 긍정을 표현하기로 예정하고 있었다. 소설로는 『페스트』, 극으로는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반항하는 인간』이 그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벌써 사랑의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세 번째 층도 막연하게나마 생각했다.”  이와 같이 부정(부조리), 긍정(반항), 사랑 등의 발전 단계를 전제로 한 작품 세계의 체계적 청사진은 이미 그가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기록해 온 『작가 수첩』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랑을 주제로 하는 “세 번째 층”은 작가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인하여 실현을 보지 못했다. 『이방인』은 그러니까 카뮈가 구상한 첫째 번 층위인 “부정”, 즉 “부조리” 삼부작 중 하나로 그에게는 최초의 소설에 해당한다. 철학적 에세이는 설명하고 소설은 묘사하고 연극은 이 부조리의 감정에 생명과 운동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 한가운데로 1939년 가을에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이 관통한다. p170~1」

 

 

 

 

 

이 책들의 일관된 주제는 죽음이다. 그러나 까뮈의 ‘죽음’은 개인적 죽음이 아니다. 자살과 살인 혹은 사형이라는 죽음의 방식을 통해 세계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이에 끝까지 맞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려는(그러나 헛된) 인간 반항의 정신과 그 행위를 철학적, 역사적, 예술적으로 탐구하는 작업이다. 까뮈의 출발점은 서양 근대정신의 바탕인 “신은 죽었다”와 그러므로 모든 것은 인간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절망적 세계인식이다. 신의 죽음이 절망적인 이유는 “모든 것은 허용되어 있다” 가 해방과 기쁨의 외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 대한 결박임을 쓰디쓰게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신, 옳고 그름의 가치 기준인 대타자의 부재는 이제 인간 자신이 그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함을 뜻한다.

 

인간은 무엇으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어떻게 세계를 통일시킬 것인가? 이 험난한 과정이 서구 근대 사상의 역사다. 근대의 주인은 ‘이성’이다. 그러나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 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성은 또 다른 신이 되어 인간을 억압했다. 이성이 지배한 서구 근대의 역사는 1,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 파국으로 귀결되었다. 신을 죽이고 건설한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도, 퇴폐적 자본주의에 대한 반동인 나치즘 체제도, 계급 없는 유토피아를 지향한 공산주의 체제도 모두 대재앙을 초래했다. 세계는 통일되지 못했고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존재할 뿐이다. 세계는 비합리적이다.

 

그러므로 인간 실존의 조건은 부조리이다. 부조리란 “희구하는 정신과 실망을 주는 세계 사이의 단절, 통일에 대한 나의 향수, 여러 갈래로 분산된 우주, 그리고 그것들을 사로잡는 모순이다.『시지프의 신화』p68 ”   인간과 세계 사이의 단절이 부조리다. 인간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세계는 그 자체로 무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이 단절, 이 간극, 이 대립이 사실은 인간과 세계를 연결해 주는 유일한 끈이다. 이 대립을 부정하는 것은 그것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세계의 무의미에 실망하여 자살하거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신으로 돌아가는 것은 모두 패배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조리한 세계를 사는 인간에게 유일하게 긍정적 입장은 ‘반항’ 이다. 반항은 인간과 세계와의 끊임없는 대결이다. 반항은 어떠한 통일이나 주인도 거부하고 순간순간 세계를 문제 삼는 것이다.

 

까뮈는 부조리가 소설 속에서 유지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했다. 그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카라마조프, 키릴로프 등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고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자신의 작품 『이방인』과 『페스트』야말로 20세기 이후, 부조리한 인간에 대한 가장 치열한 탐색일 것이다.

 

 

 

 

 

『이방인』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한 젊은 청년이 알제의 어느 바닷가에서 아랍인 한 사람을 살해했다. 수사 결과 그 청년은 얼마 전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렀는데, 울지도 않고 그 다음날 바로 여자와 만나 수영과 섹스를 했다. 재판정은 아랍인에 대한 살해 사실보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무심한 태도’를 문제 삼아 이 청년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사형 집행 전 교도소 부속사제가 회개를 설득하지만 그는 격렬히 거부하고, 행복을 느끼며 죽음을 기다린다.

 

『이방인』에는 세 가지 ‘죽음’이 나온다. 엄마의 자연사, 아랍인의 살해, 뫼르소의 사형이다. 죽음은 이 책의 주제이자 형식이기도 하다. 1부는 엄마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해변에서의 아랍인 살해로 끝난다. 2부는 아랍인 살해에 따른 재판으로 시작해서 사형이 언도된 뫼르소가 집행을 기다리는 것으로 끝난다. 소설 전체의 시작과 끝에 죽음이 배치되어 있고, 이 두 죽음은 또 다른 죽음으로 매개되어 있다. 아랍인 살해는 1부의 종결과 2부의 시작을 연결하는 매개체이다. 사실 아랍인의 죽음은 매개 역할 이외에는 별 다른 중요성이 없다. “태양 때문이다.” 라는 이해할 수 없는 뫼르소의 진술 때문에, 아랍인 살해의 원인을 놓고 독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지만, 소설 자체에서 그의 죽음은 특별한 의미로 취급되지 않는다. 살해자인 뫼르소에게도 설명하기 힘든 부조리한 사건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일까? 프랑스 식민지였던 당시 알제리의 현실에 비추어서도 사형은 예상 밖의 가혹한 판결이라고 한다. 뫼르소는 까뮈와 같이 프랑스 이주민 혈통의 백인이다. 백인이 아랍인을, 식민 종주국 국민(?)이 식민지 원주민을 쏘아 죽인 것은 중죄로 취급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뫼르소의 진정한 범죄는 무엇일까? 그것은 재판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국선 변호사는 처음 만난 날, 재판에서 이길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면서,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질문을 한다. 다만 문제가 될 것이 있다면,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에서 보여준 태도일 뿐이라는 듯이. 그날 마음이 아팠느냐고 질문한다.  “그러나 나는 자문해 보는 습관을 좀 잃어버려서,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대답했다. 물론 나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그러자 변호사는 내 말을 가로막았는데, 매우 흥분한 듯이 보였다. 그는 그러한 말은 법정에서나 예심판사의 방에서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며 나를 다그쳤다. p75"  재판정이 오직 관심을 갖는 것은 뫼르소가 엄마의 장례식 날 보였던 '무심한 태도' 이다. 배심원 앞에서의 실제 재판에서도 어찌나 모든 것이 엄마의 죽음에 집중되었던지 변호사마저 이렇게 외친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아니면 살인을 한 것으로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p107” 그러나 검사는 이 두 가지에는 본질적인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범죄자의 마음으로 자기의 어머니를 매장했으므로, 나는 이 사람의 유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p108"  이 엉뚱해 보이는 주장은 그러나 방청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변호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야 했다.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기는 했지만, 뫼르소는 검사가 주장하는 본질적인 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엄마의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무심한 태도'가 살인 자체 보다 더 극악한 죄악으로 비난받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를 무용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아버지를 살해한 잔학한 범죄보다 뫼르소의 ‘무감각함’이 더 전율스런 공포가 된다. 부친 살해는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부정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법 혹은 사회의 가치 체계이다. 그러나 이 적극적 살해와 증오는 그것 자체에 대한 ‘무심함’ 보다는 덜 치명적이다. 아버지를 죽인 아들은 그 스스로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뫼르소는 모든 가치에 대해 무심하다. 세계는 어떤 의미도 없다. 인간들이 헛되이 부여한 가공의 의미만이 있을 뿐이다. 뫼르소는 인간들의 이 절망적 노력을 ‘무심함’으로 무력화시킨다. 그러나 어떤 가치 체계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사회를 인간들은 견뎌낼 수 없다. 그러므로 뫼르소의 무심함은 용서될 수 없다. 그것은 세계 전체를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까뮈 스스로가 밝혔듯이  “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p141 ”

 

1년 가까이에 걸친 재판과정의 시작과 마지막에는 하느님의 구원을 주제로 한 격한 논쟁과 갈등이 놓여있다. 예심판사는 처음에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도와주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뫼르소가 쓰러진 아랍인의 시체에 다시 총 네 발을 쏜 이유를 끝내 대답하지 않자, 십자가를 꺼내 휘두르며,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뉘우쳐야 한다고 흥분한다. 예심판사에게 두 번째의 네 발은 뫼르소의 구원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잘못이고, 그 마지막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그에게 말할까 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말을 가로막고, 다시 한 번 벌떡 일어나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으면서 훈계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분연히 주저앉았다. 그럴 수는 없다고 하며 누구나, 비록 하느님을 외면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느님을 믿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신념이었고, 만약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해야 한다면 그의 삶은 무의미해지고 말리라는 것이었다. “당신은 나의 삶이 무의미해지기를 바랍니까?” 하고 그는 외쳤다. 내가 볼 때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벌써 책상 너머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을 나의 눈앞에다 내밀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야. 나는 이분께 네 죄의 용서를 구하고 있어. 어째서 너는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고통 받으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말인가?” p79~80 ”

 

변호사와 검사가 이 사건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적절한 애도이다. 그것은 사회의 질서, 법체계, 가치를 뫼르소가 인정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사회가 원하는 애도를 거부하고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한다. 한편 예심판사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그 판단의 기준이다. 한 사람이라도, 길 잃은 어린 양이 한 마리라도 있다면, 그것은 세계 전체에 대한 부정이 되는 것이다. 세계에 의미가 없다면 인간의 삶 역시 의미가 없어진다. 그는   “당신은 나의 삶이 무의미해지기를 바랍니까?”  라고 격분한다. 까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교회가 이교도들에게 그토록 가혹했던 것은 길 잃은 어린 양보다 더 나쁜 적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148” 라고 쓰고 있다. 하느님의 세계는 하나의 의문과 의심으로부터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 교회는 브루노도 갈릴레이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태양계와 같은 항성체계는 수도 없이 많고, 지구는 태양을 오늘도 돌고 있다. 그러자 신은 죽고 이성의 시대가 왔다. 그러나 신은 여전히 건재하다. 인간들은 세계의 무의미함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예심판사는 이 격렬한 감정의 분출 후에 더 이상 뫼르소에게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열한 달에 걸친 예심을 끝마친다. 그는 아마도 뫼르소를 세계에서 추방하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사형집행을 앞두고 부속사제는 뫼르소에게 하느님의 도움을 받으라고 권유한다. 뫼르소는 거절한다. 지루한 설득이 계속되는 가운데 갑자기 뫼르소가 폭발한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고함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기도를 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사제복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인 채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마음속을 송두리째 쏟아 버렸다. 그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 한 가치도 없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그에게는 없지 않으냐?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p133”  뫼르소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의 특권이 있다고 외친다. 모든 사람을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특권은 죽음이다. 우리 모두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것은 분노인 동시에 기쁨이었다.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엄마가 왜 생의 마지막에 ‘약혼자’를 만들었는지, 죽음이 임박한 그 순간에 어떤 해방감을 느꼈을지 이해되었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p135~6 ”

 

뫼르소는 신의 구원을 거부하고 인간들의 증오를 선택한다. 무관심한 세계에 마음을 열고, 행복을 느낀다. 고뇌와 함께 희망이 사라지자 행복을 찾은 것이다. 『이방인』은 『시지프의 신화』와 함께 부정 계열의 삼부작에 속하지만, ‘행복’ 이란 말로 끝이 난다. 뫼르소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희망을 버리고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희망이란 구원에의 희망 혹은 세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다. 이 희망은 투항이다. 부조리한 세계와의 힘겨운 긴장에 지쳐 인간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까뮈는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은 신에 달려 있으며 우리들은 신의 의지에 반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시지프의 신화』p141”  고 했다. 자신의 관심은  “구원의 호소 없이 살 수 있는가를 아는 것” 이 전부라고 말했다. 『이방인』은 그 가능성을 그려내고 있다. 독자로서는 선뜻 동의하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신의 죽음은 서양 근대사의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다. 구원을 거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소설도 불분명하고 세계도 분명하지 않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반항하는 인간” 을 주장하기 위해 까뮈가 철학뿐만 아니라 소설과 희곡의 형식을 택해야 했던 이유도 이 불분명함 때문이다.  “만약 세계가 명료한 것이라면 예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시지프의 신화』p130 ” ,  “표현은 사고가 끝난 곳에서 시작된다. 『시지프의 신화』p130”  고 했다. 그러니 『이방인』을 논리적으로 읽기 힘들다고 해서 서둘러 실망할 일은 아니다. 뫼르소가 아랍인을 왜 죽였는지 답하지 못한 것처럼 우리 역시 『이방인』에 대해 쉽게 이야기 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뫼르소의 ‘태양’처럼 우리에게도 ‘뫼르소의 행복’ 이 어렴풋이 떠오른다면... 그것으로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정서 판 『이방인』을 두고 알라딘 서점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논쟁에 대해 한마디만 하고 싶다. 논쟁이 한창 일 때는 『이방인』을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되었고, 이정서 판 역시 보지 못했던지라, 어느 편이 더 논리적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정서 측에서 “정당방위” 라고 주장했다는 말을 듣고 관심을 끊어 버렸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음사 판으로 다시 『이방인』을 읽고 나니, 문득 그 심각해 보였던 논쟁이 우스꽝스러운 난리굿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랍인의 살해 원인이 정당방위라는 해석은 『이방인』을 그리고 까뮈의 부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아랍인의 살해는 권태 속에 살아가던 뫼르소가 어느 날 “왜?” 하는 물음에 직면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살해는 우연적이고, 사건은 부조리하다. 그것이 명료했다면, 『이방인』이 어떻게 사르트르의 말처럼 “부조리에 관해서, 그리고 부조리에 맞서 쓰인 책”이 될 수 있었겠는가! 정당방위라면, 『이방인』은 살인 사건에 관한 하나의 흥미로운 판례에 불과했을 것이다. 세세한 번역의 문제에 관해서는 불어 원서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무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트윗 친구의 번역관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글이 관련되어 싸움질 중인 상황 혹은 글 내의 생각을 싸움질의 에너지가 담기게 옮겨야 한다는 것.” “옮기는 작업이 아니더라도 독해란 그런 것이고 말의 힘을 안다는 것은 말과 맥락의 투쟁을 느끼는 것과도 같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