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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58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먼저 읽은 회원들의 반응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고 중국 소설을 좋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개구리도 물론 좋아하지 않고. 그런데 책은 재미있었다. 처음 약간만 참고 넘기면 자연스럽게 빨려들어가는 흡인력이 있다. 가슴을 울리거나 머리를 한동안 멍하게 하는 그런 감동에 빠지지는 못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내게 나쁜 소설은 지루하거나 엉성하거나 너무 감각적인 것들이다.
그런데 마음은 복잡해졌다. 우리말로 옮기면 진짜 비인간적으로 들리는 '계획생육' 이란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걸까? 어떤 책에서 보았는데, 멜서스가 구빈법에 반대한 이유가 경악스러웠다. 빈민들을 죽지 않게 도와주면 그것이 결국 빈민들에게 더 나쁘다는 것이다. 자식을 낳아 인구를 증가시키면 환경이 더욱 나빠진다. 일자리 구하기는 더 어렵고 입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돌아가는 식량이 더 적어지고 화장실 따위의 위생 환경도 더 나빠지고. 인구가 줄어야 살아있는 사람이 그 나마 더 나은 환경에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근근이 목숨만 붙여 자식이나 낳게하는 구빈법은 더 나쁜 정책이라는 주장이다. 현대의 우리 생각에는 악질적이고 비인도적으로 들리지만 그 당시에는 그럴듯하게 들렸던 것 같다. 구빈법 논쟁에서 반대자들이 승리했다는 것을 보면.
『개구리』의 '계획생육'도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발상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한 세대 전만해도 실행했던 '산아제한' 역시 그렇다.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면한다!" 라는 기발하면서도 어딘지 해학적인 표어가 참 인상적이었다. 중국의 '계획생육'은 지금도 실시하고 있는 주요 정책이라고 한다. 이 정책 때문에 무호적자도 엄청나고 혼외자식도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소설을 읽어보면 참 무지막지하게도 실행했다. 그만큼 중국인의 특히 중국 농촌의 반감이 극심했다. 그걸 보면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 '산아제한'에 적응했는지가 더 신기할 정도이다. 왜 그랬을까?
새마을 정책으로 농촌이 단번에 해체되고 도시로 밀려든 산업노동자들이 많았기 때문일까? 좁은 땅덩어리의 우리나라는 중국 대륙보다 도시화가 훨씬 빨리 진행되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느끼는 거지만 도시빈민은 농촌의 소작농 보다도 더 살기 어렵다. 제일 비참한 사람들이 도시 빈민이다. 서너 평짜리 토굴 같은 벌집 외에는 딱히 나가 숨쉴 곳도 없다. 아득바득 자식을 셋,넷 낳아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 같다. 그리고 도시는 상대적 빈곤을 피부로 곧바로 느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엄청난 빈부격차에 욕망은 터질듯이 부풀어 오르고 삶은 극심한 좌절 속에 빠진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하나만 낳아 잘 먹이고 잘 입히겠다 이를 깨물게 될 것 같다. 농촌은 거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숨이 좀 트이지 않았을까? 사실 나는 잘 모른다. 농촌에 살지도 않았고 이런 현상을 깊이 생각해 본적도 없다. 그냥 그렇지 않을까 싶다. 특히 요즘의 극빈자 노인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 든다. 빛도 들지 않는 한평짜리 어두운 방에서 겨우 숨만 쉬는 도시 노인들 보다는 똑 같은 독거노인이라도 들에 나가 야채라도 뜯는 노인들이 한결 건강해 보인다. 뭐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든, 도시화가 더 빨리 진행되었건 한국인의 욕망이 중국인들의 것 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든 하여튼 우리는 『개구리』에 나오는 그런 비극 없이 산아제한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낸 것은 사실이다.
중국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계획생육'을 하는 것은 우리 보다 훨씬 절박한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일 것 같다. 조금 먹고 살만해진 '고구마 세대'를 거치면서 20년 만에 중국인구가 3억명이 늘었다니, 멜서스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는다는 학설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생각하면 아찔하기는 하다. '계획생육'이 기본적으로 나쁜 정책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농민들의 의식이 그것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이성적 계도가 되지 않으니 강제적으로 시행할 수밖에 없고, 반감이 크면 클수록 하나의 예외도 어떤 정상도 참작할 수가 없다. 무자비한 원칙을 고수하지 않으면 제도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극은 그 대상이 사람 그것도 산모와 태아에 있다는 것이다. '계획 생육'은 임신 자체를 제한하는 것에서 나아가 불법으로 임신한 태아를 강제 낙태시키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묵인하게 되면 너도 나도 불법 임신을 하게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 만큼 중국 농민들의 자식에 대한 특히 아들에 대한 집착은 강하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여기서 인도주의 정신을 들먹이는 것은 쉽다. 멜서스의 구빈법 반대가 경악스럽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분명히 있다. 아무 대책 없이 태어나서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가는 수없이 많은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오늘도 TV화면에서 인도주의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다. 그렇게 만든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 선진국의 구조적 수탈을 막아야 하는 것이겠지만, 아이들이 대책없이 태어나는 것 역시 방지해야 한다. 거기에다가 하느님이 주신 자식 운운하는 것은 죄악이다.
『개구리』의 '계획생육'의 문제는 그들이 이성을 거부하는 농민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 몇 권 읽어 보지 않았지만, 중국 근현대사의 인민들은 유난히 무지하다. 아Q가 그들의 전형이다. '계획생육'을 해서 더 나은 환경에서 살 것인가, 전통의 방식을 고수할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이다. 전 지구적 인구 증가가 재앙이 될 수 있겠지만 일단은 그들의 선택이 우선이다. 선택을 하려면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필요하다. 중국 인민들에게 결여된 것은 이성이고, 이성을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데 교육을 하려면 먼저 인구의 제한이 필요하다. 한정된 자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를 교육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할까? '계획생육'을 먼저 강제해야 할까? 인민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먼저 교육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