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레스토랑 Less Than Nothing 시리즈 1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1부 식전에 한 잔

 

01_

‘상블랑들을 뒤흔들기’

 

 

 

 

일단 뜻이라도 알고 시작하자. 출처는 네이버다.;;

상블랑, semblant : sembler (~처럼 보이다. ~같다.)의 명사형

                          ① 가장, 겉치레(=simulacre) ② 외관, 외견

 

 

 

  1부 제목이 ‘식전에 한잔’ 이니, 뭔가 가볍지 않을까? 란 기대는, 물론 하지 않았다.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 1부는 첫 장을 ‘상블랑’ 으로 시작한다. 지젝이 불어 ‘상블랑’ 을 주제어로 삼은 것은 처음 본다. 생경하다. 『시차적 관점』에는 가상, 현상 따위로 머리를 아프게 하더니. 하긴 옮긴이께서 ‘appearance' 를 가상으로도 현상으로도 번역해주셔서 더 뒤죽박죽이 되기도 했다.

 

  여하튼 ’상블랑’ 은 뭐고, 또 이걸 뒤흔드는 건 무슨 의미인지, 앞뒤 맞춰가며 읽어내면 성공이지만, 그렇게는 못했다.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에 나오는 ‘8개의 가정’ 을 가지고 마구 흔들어대는 바람에 멀미만 심하게 했다. 지젝이 어떻게 비트켄슈타인부터 시작해서 플라톤을 거쳐 라캉과 헤겔, 그리고 바디우에 도달하는지 일관성 있게 그려내고 싶었으나, 언제나처럼 또 실패다. 할 수 없이 군데군데 마음에 드는 구절과 나름 이해가 가는 조각들을 모아 놓는 걸로 대신한다.

 

 

 

 

1. 말해질 수 없는 것은 보여져야한다.

 

 

 

  우리 귀에 익숙한 명제는 물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하나마나한 말이다. 불가능한 것을 금지하는 것이니까. 그럼 비트켄슈타인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이 명제에는 보태야 하는 것이 있다. 논리적 형식이라는 것은 말해질 수는 없고, 보여 질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다르다. 말할 수 없다면 침묵할 수밖에 없지만, 보여질 수는 있다. 대표적인 예가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다. 공포는 내용으로 재현될 수 없지만, 미학적 형식 속에 기입될 수 있다. 다큐멘터리적 재현은 불가능하지만, 예술적 형식을 통해 보여 질 수 있다.

 

 

「가상〔출현〕 속에는 그것 아래 감추어져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진리가 들어 있다. 바로 거기에 플라톤의 심오한 통찰이 있다. 즉 이데아는 가상 아래 감추어진 현실이 아니다 (플라톤은 이 감추어진 현실이 영원히 변화하는, 변질시키고 변질되는 물질의 현실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데아는 다름 아닌 가상의 형상이며, 이러한 형상 자체이다.) - 또는 라캉이 플라톤의 요점을 간결하게 해서 표현하고 있는 바로는, 초감각적인 것은 가상으로서의 가상이다. p74」

 

 

  철학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그냥 예전에 막 갖다 붙여 암기하던 식으로 하면, 말해지는 ‘내용’ 보다 보여 지는 ‘형식’ 속에, 즉 ‘실재’ 보다 ‘가상’ 속에 진리가 있다? 라기 보다, 실재는 곧 가상이다?  

 

 

 

 

2. 이데아의 출현

 

 

  플라톤은 20C에 가장 욕먹는 철학자 중 하나이다. (데카르트와 헤겔도 있다.)  ‘이데아’ ‘진리’ 가 그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바디우는 플라톤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 왜? 바디우는 유물론자지만, 아니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진리라는 ‘비물질적’ 질서의 자율성을 옹호한다. 환원주의적 유물론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어떻게 인간이란 동물이 동물성을 버리고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 어떻게 쾌락을 쫒는 인간이 대의에 헌신할 수 있는가? 어떻게 자유로운 행위가 가능한가?

  여기서 바디우가 찾은 방법은 플라톤을 유물론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는 관념론과 유물론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유물론’ 과 ‘변증법적 유물론’이 대립하고 있다. 민주주의적 유물론은 ‘오직 몸체들과 언어들만 있다’ 로 압축된다. 변증법법적 유물론은 여기에 간단히 하나를 덧붙인다. “ ...진리들은 예외로 하고” . 이 무조음의 세계에서 바디우가 붙잡고자 하는 것은 ‘진리’와 ‘사건’ 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무엇인가? 이데아의 존재론적 지위는 ‘순수한 출현’ 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가상이 현실에 나타날 수 있는가?’ 라는 헤겔적 문제와 동일하다.

 

 

  「플라톤의 무언의 교훈은 모든 것이 가상이며, 가상과 현실 사이에 명확한 분리선을 긋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은 ‘가상으로서의 가상’이며, 본질은 가상 내부에서 가상과는 반대로 나타나며, 가상과 본질 사이의 구분은 가상 자체 속에 기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질과 가상 사이의 간극이 가상에 내속적인 한, 다시 말해 본질이 단지 자체 내에 반영된 가상에 불과한 한 가상은 무를 배경으로 한 가상이다. -나타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는 무로부터 나타난다. p85」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의 마지막은 오직 무만이 존재하며 모든 과정은 ‘무로부터 무를 통해 무까지’ 발생한다는 명제를 암시한다. 비록 플라톤 자신은 이데아를 존재론화하여, 현실의 너머에 있는 ‘진실된’ 현실로 보았지만, 그의 무언의 교훈은 이데아란 ‘비물질적’이며, ‘잠재적인 실체’ 즉 ‘순수 출현’ 이라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 교훈에 관한 대화편이다.

 

 

 

 

3. 픽션들로부터 상블랑들로

 

 

  가상, 픽션, 상블랑.. 막 혼란스럽다. 가상은 무엇의 번역인지도 궁금하다. 딱 잘라서 개념을 정의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빗금친 주체)가 뭐예요?(내가 예전에 댓글로 누군가에게 한 질문이다;;)” 라고 묻거나 “존재가 뭐예요?” 라 묻는 것만큼 생뚱맞을 것이다. 그리스 이래 철학의 오랜 물음들을 단 몇 줄로 설명하라는 요구니까. 여하튼 여기서 지젝은 픽션과 상블랑을 이렇게 구분한다.

 

 

  「하지만 여기서 근본적인 모호성이 작동하고 있는데, 라캉이 계속해서 픽션들에서 상블랑으로 이동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의 상징적 픽션과 시뮬라크르라는 의미에서의 상블랑이 구분되는 것이다. 비록 두 경우 모두 우리가 그것이 단지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환상이 작동한다는 점은 같지만 이 둘을 나누는 섬세한 선이 있다. p97~8 」

 

 

  라캉은 상블랑 개념의 열쇠로 먼저 벤담의 픽션을 언급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픽션이란 ‘그래도 그것은 돈다.’ 의 논리를 가진다. 픽션의 수수께끼는 그 비밀이 밝혀져도 작동한다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상품물신’이 그렇다. 마르크스 이래로 그것의 작동방식이 다 까발려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상품은 물신으로 작용한다. 신은 존재한 적도 없지만, 크리스마스에는 케잌을 먹는다. 귀신을 믿지 않지만, 그래도 제사는 지내고, 이사는 손 없는 날에 간다. 주식은 숫자 놀음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경제를 움직인다. 인간은 환상을 찰떡같이 믿기 때문이 아니라, 믿는 척 할 수 있기 때문에 동물과 구별된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픽션은 가능할까?

 

 

  「본래적인 의미의 인간의 언어는 오직 픽션이 현실보다 중요할 때, 가면 아래의 어리석은 현실보다 가면 속에 더 많은 진실이 있을 때, 상징적 호칭(아버지, 판사...)의 경험적 담지자의 현실보다 그러한 상징적 호칭 속에 더 많은 진실이 들어 있을 때만 기능한다. 플라톤적인 초감각적 이데아는 모방의 모방이며, 가상으로서의 가상이라는 라캉의 지적이 옳은 것은 이 때문이다. -즉 실체를 가진 현실의 표면에 나타나는 어떤 것 말이다. p100」

 

 

  픽션과 상블랑을 나누는 ‘섬세한 선’ 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상블랑은 ‘무의 가면(베일)’ 이라고 한다.

 

 

  「상블랑에 대한 핵심적인 공식은 밀레에 의해 제안되었다. 즉 상블랑은 무의 가면(베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물신과의 연관성은 저절로 나타난다. 물신 또한 공백을 감추는 대상인 것이다. 상블랑은 베일과도 같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음〔무〕를 감추는 베일이다. - 베일 아래 무엇인가 감추어져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의 기능이다. p100」

 

 

  포도를 진짜로 실감나게 그린 제욱시스보다 커튼을 진짜처럼 그린 파라시오스가 이겼다는 그리스의 일화에 비유할 수 있다. 제욱시스의 그림에는 새가 달려들어 포도를 쪼아 먹으려 했다. 그런데 파라시오스의 그림을 보고 제욱시스는 그림을 봐야하니 커튼을 걷어달라고 부탁했다. 파라시오스의 그림은 마치 커튼 뒤에 무엇이, 즉 진짜 그림이 있는 것과 같은 환상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상블랑이다.

 

 

  그러면 ‘상블랑을 뒤흔들기’는 또 무엇인가? ‘모든 담론은 상블랑이다.’ 는 공식이 있다. 라캉의 성구분 공식에 따르면, 모든 담론이 상블랑이기 위해서는, 상블랑이 아닌 담론 하나가 예외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예외를 통해 상블랑이 아닌 담론에 가닿는 것 말고, 다른 방법 즉 여성적 공식에 의한 방법이 있다.

 

 

  「즉 예외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수의 담론들을 ‘비전체’로 다루는 것을 통해, 그러한 담론들의 비정합성을, 불가능성의 점들을 식별해내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라캉이 후기 강의에서 ‘상블랑들을 뒤흔들기’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가상들 너머, 가상들의 예외가 아니라 비정합적인 비전체에 가닿는 것 말이다. p102」

 

 

  예외를 통한 방식은 가상들 너머에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이 믿었던 이데아의 현존 같은 것.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에서 부딪힌 것은 실재란 가상의 가상일뿐이라는 것이다. 상블랑이라는 ‘베일’은 그 너머에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즉 ‘무’를 가리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상은 아니다. 가상은 그 자체로 비정합적이고, 비전체라는 사실 자체가 바로 우리를 실재에 가닿게 해준다.

 

 

  「단지 가상들의 상호작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실재도 있다. - 하지만 이 실재는 접근 불가능한 물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막는 간극, 부분 투시도법을 통해 지각된 대상에 대한 우리의 l관점을 왜곡시키는 적대성의 ‘바위’ 이다. 따라서 ‘진리’는 어떤 관점주의적 왜곡도 없이 대상을 ‘직접’ 봄으로써 접근할 수 있는 사물의 ‘실재’ 상태가 아니라 관점주의적 왜곡 자체를 초래하는 적대성의 실재 자체이다. p103」

 

 

  상블랑을 흔든다는 것은 이 ‘비정합성’ 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블랑은 완전한 베일이 아니다. 상블랑들은 비전체이다. 완전하지 않은 그 틈이 실재이다. 혹은 상블랑은 라캉의 대상 a와 같은 것이 아닐까? 대상a 역시 환상을 유지시켜주는 스크린, 베일이다. 베일 아래의 무를 감추기도 하지만 동시에 베일 아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지시하기도 한다. 구멍을 가리키는 대상a야 말로 흔들려진 상블랑은 아닐까?

 

 

  헤겔의 변증법적 과정이라는 것 또한 상블랑들을 뒤흔드는 작업이다. 『파르메니데스』의 8개의 가정 역시 ‘뒤흔들려진 상블랑’ 이다. 거기서 우리가 부딪히는 실재는 무엇일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런데 결론적으로 픽션과 상블랑의 미세한 차이는 뭘까? 픽션이 S1이라면, 상블랑은 대상a 라고 구분해도 될까?

 

 

 

 

4. 변증술의 연습이요? 아뇨, 됐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8개의 가정을 변증술의 연습으로 본다면, 이 연습의 정확한 지위가 분명하지 않다. 아무런 분명한 결과가 없다. 유일한 결과는 정합적인 총체성은 없다, ‘큰타자’는 없다는 것이다.

 

 

  「8개의 세계들은 자신을 낳는 어떤 불가능성이나 교착 상태를 배경으로 등장한다. - 존재와 일자를, 실재와 시니피앙을 화해시킬 수 없는 불가능성, 그것들을 대칭적으로 겹치게 할 수 없는 불가능성 말이다. p111」

 

 

  큰타자 없고, 총체성 없고, 불가능성까지 나왔으면 사실 다 나온 것이다. 연습이 아니라 이것이 핵심 고갱이라는 것. 나도 여기서 더 이상은 골치아프니까, 됐습니다!! 로 끝.

 

 

 

 

5. 일자에서 덴den으로

 

 

  골치 아프기로 하면 여기가 압권이다. den은 신조어인데, 이것을 설명하려면 책 내용을 통째로 옮겨야 할 판이다. 하지만 여기서 ‘less than nothing' 이 도출되기 때문에 넘어가기도 곤란하다. 이 골칫거리의 원흉은 데모크리토스인데, 일단 읽어 보자.

 

 

  「몽매주의적 관념론자들은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 이라는 모티브를 변주하기를 좋아한다. 즉 최소한이지만 그럼에도 신성을 증언하는 존재를 말이다. 이에 대한 유물론적 대답은 'less than nothing' 이다. 그러한 대답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 유물론의 아버지인 데모크리토스였다. 이 'less than nothing' 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den이라는 놀라운 신조어에 의존했는데, 그리하여 그의 존재론의 기본공리는 “less than nothing 은 othing만큼은 존재한다 이다.” p122」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말하자면 nothing에서 'n' 을 뺀 만큼은 존재한다는 소리다. ‘thing'에서 ’nothing' 사이, 거기에 ‘othing' 이 있는 셈이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오히려 nothing보다 더 없는, less than nothing. 이게 도대체 무얼까?

 

 

  「따라서 den은 ‘no'가 없는 nothing, 어떤 것 a thing이 아니라 othing 이다. 즉 그것은 어떤 것something 이지만 아직 무nothing의 영역 내부에 있는 것, 존재론적인 살아 있는 죽은 자와 같은 것, 유령과도 같이 '어떤 것으로 나타나는 무' 이다. p 123」

 

 

  라캉은 den을 대상a와 비슷하게 설명한다. den은 일종의 ‘나눌 수 없는 잔여’ 이다. 또한 den은 존재와 비존재가 구분되지 않는 공간이다. den은 존재하지만 무인,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공백이다.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궁극적 분수령은 존재의 물질성이 아니라 없음/공백과 관련되어 있다. 유물론의 근본적 공리는 공백/없음이 (유일하게 궁극적) 실재라는 것, 즉 존재와 공백은 구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p125」

 

 

  den 그리고 ‘less than nothing' 은 결과적으로 ’실재‘ 라는 것이다. 실재라는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너머에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공백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공백은 생성적 공백으로, '본원적으로 수축된 존재 이전의 존재자' 들이 출현하는 곳이다. 지젝이 항상 주장하는, 헤겔의 <세계의 밤>과 같은 것이 아닐까?

 

 

 

 

 

6.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파르메니데스』의 결론이 나온다. 항상 모호한 지젝의 표현치고는 이례적으로,

 

 

  「이제 결론을 내리자. 『파르메니데스』의 2부에서 1부로, 즉 이데아의 지위로 돌아가 본다면 결과는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체에 고유한 존재론적 현실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들은 순수하게 잠재적인 참조점들로 지속된다. 즉 유일하게 적절한 결론은 영원한 이데아는 존재에 참여하지 않는 일자와 타자들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들의 지위는 순수하게 잠재적이다. 이 잠재적 지위는 위대한 반플라톤주의자 중 하나인 들뢰즈에 의해 명확하게 밝혀진 바 있다. 잠재적인 것이라는 들뢰즈의 개념은 현재 사방에 만연한 가상현실이라는 주제와는 정반대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가상현실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의 현실(라캉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것이 실재이다) 이다. ...잠재적인 것의 현실은 잠재적인 것 그 자체의 현실을, 그것의 실제적인 효과와 결과들을 나타낸다. p140~1」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순수하게 잠재적인 참조점이라는 결론은 지젝이 단독으로 내린 결론이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의 논리에 따라 도출된 것이다. 플라톤이 자기 역설에 부딪힌 셈이다. 어쨌든 여기서 플라톤과 반플라톤주의자 들뢰즈가 일치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데아란 잠재적인 것의 현실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것 자체의 실제적인 효과와 결과들을 가진다. 이것이 라캉의 실재이기도 하다.

 

 

 

 

7. 플라톤이 아니라 고르기아스가 원조-스탈린주의자이다!

 

 

  ‘아버지냐 더 나쁜 것이냐’ 의 선택에서 윤리적 선택은 ‘더 나쁜 것’ 이라는 라캉의 주장을 지젝은 줄기차게 반복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더 나쁜 것을 선택해야 할까? 여기에서 비로소 그 명료한 답이 제시된다.

 

 

  「 물론 이 ‘더 나쁜 것의 선택’은 실패하지만 그러한 실패 속에서 그러한 양자택일적인 장 전체를 잠식하며, 그리하여 그것의 두 항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p142」

 

 

  실패를 통과하지 않고, 곧바로 진리를 획득할 수는 없다, 고 누누이 강조했는데, 여기서 조금 더 명확한 표현은 그 실패를 통해서만 그런 강요된 선택의 장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 더 나쁜 것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 라기보다는, 그럼으로써 그런 대립항을 벗어나 새로운 좌표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1장의 결론부분이다.  

 

 

  「소피스트들은 말과 사물 사이의 신화적 통일성을 깨뜨리고 말을 사물로부터 분리시키는 간극을 말놀이 방식으로 고수했다. 그리고 본래적 의미의 철학은 오직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서만, 소피스트들이 열어놓은 간극을 닫고 말을 위한 진리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신화로 -하지만 새로운 합리성의 조건 하에- 되돌아가려는 시도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이곳에 플라톤을 위치시켜야 한다. 그는 먼저 이데아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이러한 토대를 마련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러한 토대의 취약성을 받아들여야 하게 되자 소피스트들과 진리 사이의 명확한 분리선을 재확정하기 위해 오랜 투쟁에 몰두하게 되었다. 소피스트적 유혹에 맞서 투쟁한 철학자들의 계보가 헤겔, 어떤 의미에서는 또한 자신의 진리를 입증하는 어떤 외적 토대도 없는 상징적인 것의 자기참조적 놀이를 포용하는 궁극적인 소피스트이기도 한 이 ‘최후의 철학자’와 함께 끝나는 것은 철학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헤겔에게 진리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상징적 과정에 내재적이다. - 진리는 외적 기준이 아니라 ‘실용적 모순’, 담론적 과정의 내적 (비)정합성, 언표된 내용과 언표의 입장(위치) 사이의 간극에 의해 가늠된다. p156」

 

 

 

 

 

정리하고 나서 ...

 

 

  1장에서 지젝은 ‘상블랑’ 이란 새로운 개념과 『파르메니데스』의 8개의 가정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것들을 따라가기가 매우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꼼꼼이 읽으며 정리해 나가자니, 사실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껏 지젝이 라캉과 헤겔을 들어 해 왔던 내용을 플라톤을 통해 다시 들여다 본 것에 지나지 않은가 싶다. 지젝이 갑자기 플라톤에 몰두하는 것은 아마도 바디우와 합류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상블랑이라는 ‘무의 베일’은 스크린으로서의 대상a와 유사한 느낌이 들고, 이것을 뒤흔든다는 것은 대상a가 베일일 뿐만 아니라 그 아래의 공백을 지시하는 이중적인 기능을 갖는다는 것과 상통한다.

  den이라는 괴상한 신조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 역시, 헤겔의 <세계의 밤>을 설명할 때와 유사해 보인다. 머리와 사지가 따로따로 피 흘리며 출몰하는 유령들의 밤은 주체가 탄생하는 공백이다. 실재란 그 무의 공간 혹은 더 정확히는 ‘less than nothing' 의 공백이다.

 

  플라톤이 규정하려 했던 이데아란 이 실재에 다름 아님을 밝히고 싶은 것이 1장의 목적이 아닌가 싶다. 플라톤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 의해서, 『파르메니데스』에서 부딪힌 이 곤경에 의해서 이데아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less than nothing' 이 그냥 nothing이 아닌 것처럼, 이 이데아- 실재는 실존하지 않지만, 현실의 참조점으로서 자체의 효과와 결과를 가진다. 이것 역시 지젝이 늘 주장해오던 ‘수행력 performative' 과 비슷하다. 픽션을 설명하면서 사례로 들었던 상품물신이 가지는 수행력 말이다. 주식시장의 원리도 이런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상징계가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지만, 수행력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실재계와 같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지젝은 픽션과 상블랑 사이 미세한 선을 긋기 위해서 복잡하게 설명했지만, 그 미세함과는 별개로 상징계와 실재계, 픽션과 상블랑은 수행능력을 가지고 있다.

 

  1장에 관한 개략적인 이해인데, 제대로 읽었는지 자신은 없다. 엄밀히 말하면, 틀린 부분이 많겠지만, 엄밀하자면 책을 통째로 베끼는 수밖에 없으니, 오류가 많더라도 나름대로 정리해 보는 것이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요약했다.

  내용의 대다수는 책에 나오는 구절들이나, 군데군데 사견이 섞여 있기도 하다. 표시가 팍나게 급이 다른 표현들은 물론 내 것인데, 혹시 몰라 '바탕체'로 표기했다. 그래도 섞인 표현들은  분리하기도 만만치않고, 모두 다 ' ~라고 했다',' 지젝이 말하기를~' 등으로 쓰기도 그렇고 해서 뒤섞인 채 버려두었다. 의심이 가는 부분은 꼭 책을 찾아 비교해 보시면 좋겠다. 혹시 이 글을 다 읽으신 분이 계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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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8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보고 갑니다 ^^

말리 2014-03-18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머리 아퍼 2014-04-19 0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 읽었어요. 이건 철학 심리학이 아니라, 대승기신론 유식론 반야심경 진공묘유네요. ㅎㅎ
11차원의 끈이론, 중첩 확률 비국소적 EPR실험... 아 ~~고만 생각 해야지.

말리 2014-04-20 07:59   좋아요 0 | URL
정확하지도 않은 글을 읽으시느라 머리가 아프셨다니 죄송합니다.;; 이 책은 지젝이 자신의 헤겔 철학을 야심차게 완결한 내용이라, 지젝 책 중에서도 어렵습니다. 이 책은 철학이지만 심리학은 아니고요, 헤겔과 라캉의 결합이니 그렇게 말할 수있다면 정신분석적 관점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런지... 여하튼 읽으시고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