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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ㅣ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엮음 / 동녘 / 2013년 7월
평점 :
<해체, 차이, 유령론으로 읽는 자크 데리다>
진태원
내가 일전에『아듀, 데리다』리뷰에 덧붙인, 진태원의 <해체, 차이, 유령론으로 읽는 자크 데리다>는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10번째 글이다. 본래 자리를 찾아 옮겨 놓는다.
진태원은 데리다의 방대한 작업을 요약하는 무모함 대신 세 가지 주요 개념에 집중함으로써, 데리다의 일면이나마 제대로 전달하고자 한다. 그 세 가지 개념은 해체, 차이, 유령 이다.
1. 해체
데리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해체’는 여러 번 들어 보았다. 그 만큼 많이 쓰인다는 것인데, 그렇게 널리 쓰이면 쓰일수록 원래의 의미가 희석되고 왜곡된다고 한다. 해체는 그렇게 손상된 대표적인 개념이다.
‘해체’는 데리다가 처음 사용한 말이지만, 사실은 하이데거의 ‘데스트룩치온’ 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위해 사용했다.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을 해체한다고 할 때, 이 해체는 파괴나 철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데리다가 수행했던 해체 작업은 기존의 개념적〮이데올로기적 틀을 동요시키고 기존의 위계적 대립항들을 해체·전복하는 것을 넘어서, 기존의 문제 틀에서는 사고되고 실행될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을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p313」
해체는 단순히 대립항들을 뒤집는 것이 아니다. 주인이 노예가 되고, 노예가 주인이 되는 것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틀 내에서의 자리바꿈일 뿐이다. 지배-피지배 관계라는 틀 자체는 존속된다. 데리다의 해체란 말하자면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아닌 새로운 인간관계를, 새로운 틀을 발명해 내는 것이다. 데리다는 ‘문자기록’이라는 사례로 해체 작업을 보여주는데, 이걸 요약하기는 어렵고, 적절한 비유였는지 모르지만, 단순무식하게 노예-주인에 비유해 보았다.
해체를 이렇게 볼수 있다면, 해체는 지젝이 분석하는 헤겔의 '부정의 부정'과 비슷한 것 같다. 기존의 대립항을 전복하는 것은 기존의 틀 내에서 그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다. 노예가 주인이 되는 것. 이것이 첫 번째 부정이다. 그 다음 이 관계의 틀 자체를 해체하는 것. 지배-피지배라는 형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부정, 부정의 부정이다.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정-반-합 삼항조가 아니다. 합은 없다. 두 번의 ‘반’에 의해 ‘정’은 그 틀 자체가 붕괴되는, 이중의 부정을 당한다. 물론 지젝이 해석하는 헤겔이 이렇다고 나는 읽었다.
데리다의 해체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해체는 해체의 대상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해체의 가능성 내지 잠재성들이 어떤 균열과 모순 또는 맹목을 통해, 증상을 통해 이러저러한 텍스트적인 또는 콘텍스트적인 사건들로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p316」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 텍스트의 맹목점은 텍스트의 가장 본질적인 논리와 절차의 귀결이라는 점에서 텍스트 내재적인 동시에 텍스트의 고유한 논리와 관점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설명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텍스트 외재적이기도 합니다. p317」
라캉의 용어 중에 ‘외밀한’ 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안이면서 동시에 밖인. 맹목점은 누빔점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어쩌면 대상a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텍스트를 떠받치는 동시에 해체하는 지점이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과도 같은 지위가 아닐까? 그리고 이 맹목점은 반드시 ‘삐딱하게’ 보아야만 보일 것이고. 시차적 관점. 라캉과 지젝에 너무 딱 들어맞아서 좀 긴가민가 싶지만, 거칠게 보는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해체의 이런 성격을 따져보면 ‘해체’는 적절한 번역어가 아니라고 진태원은 주장한다. ‘탈구축’이 더 적절하단다. 왜냐하면 “본질주의적이고 동일성 중심적이고 위계적인 기존의 질서를 되풀이 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 내지 짜임새를 형성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2. 차연 또는 차이
차연은 디페랑스diffèrance의 우리말 번역이다. 디페랑스diffèrance는 차이diffèrence라는 단어에서 ‘e'를 ‘a'로 의도적으로 오기해 데리다가 만든 신조어다. e든 a든 하여튼 이 단어의 어근인 diffèrer은 ‘다르다, 차이나다’ 란 의미와 동시에 ‘지연하다, 연기하다’는 뜻을 가진다. 우리말 ‘차연’은 여기에 착안해 차이의 差와 지연의 延을 합쳐 만든 번역어다. 그런데 진태원은 ‘차연’이란 번역어에 이의를 제기한다. 번역어의 문제란 곧바로 디페랑스의 철학적 개념에 대한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에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진태원의 설명과 관계없이 내 생각에 철학적 개념어의 번역은 늘 우리에게 골칫거리로 보인다. 그것이 신조어일 경우엔 더욱 그렇다. 같은 알파벳을 사용하는 언어권에는 별 문제도 아니다. 서로 번역하지 않아도 불어나 독어 영어는 눈치로도 대충 감을 잡을 수 있다. 우리에겐 끝도 없이 씨름할 일에다, 합의도 못보고, 번역자마다 다른 단어를 갖다 붙이고, 그 피해는 결국 일반인 독자에게 고스란히 넘어간다. 가타리가 과타리가 되는 것은 애교지만, 예지적·본체적·가상적이 모두 noumenal의 번역어라면, 이런 빌어먹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플라톤의 『공화국』정도는 눈치로 때려잡아야 한다는 말인가. 『국가』가 『정체』인 것은 그렇다 쳐도, ... 하여튼 나는 플라톤이 공화국도 쓰고, 국가도 쓴 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일반인 독자의 수준이다. 번역어의 엄격함만큼이나 대중성도 좀 고려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그러기 위해 번역어의 통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태원은 차연이라는 번역어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e를 a로 오기한 데리다의 의도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e와 a의 발음은 둘 다 디페랑스다. 음성으로는 구별되지 않고, 오로지 문자로만 구별되게 만든 것이다. 데리다는 문자기록이 음성이나 말에 대해 홀대받는 전통에 반대하며, 문자기록이 ‘로고스 자체를 성립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 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럼 우리는 ‘차으’ 라고 해야 되나? 경상도 사투리는 ‘ㅡ’와 ‘l'가 비슷한 발음으로 들리기도 한다. 우리에겐 어떤 번역어를 쓰든 그 의미를 온전히 번역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두 번째는 ‘기원의 탈구축’ 이라는 데리다의 의도인데, 내용이 어렵다. 짧은 설명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고, 여튼 ‘기원의 탈구축’이란 ‘자기-차이화’의 효과들을 낳는다고 한다. 기원은 어떤 움직이지 않는 근원이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하며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한다고 하는데, 여하튼 어렵고, 진태원은 이런 점에서 ‘차연’은 지나치게 협소한 번역어라고 주장한다.
세 번째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다. 데리다는 e를 a로 오기함으로써, 서양 학계에 자연스레 배어 있는 ‘음성 중심주의’를 일깨우고자 한다. 내게는 차연도 충분히 낯설긴 하지만, 이 낯설기와 데리다의 낯설기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 우리에게는 해결방법이 별로 없을 것 같아 보인다.
진태원은 차연의 대안으로 김남두 교수와 이성원 교수가 주장한 차이差移를 지지한다. 差異에서 異를 移로 바꾼. 이것이 세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대안이라는데, 한문을 가지고 와서 낯설게 하기, 새로운 합성어 운운하는 것이 글쎄 내게는 별로 그럴듯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 보다 데리다의 개념으로 ‘해체’ 만큼이나 유명한 ‘차연’에 대해, 번역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데리다가 실제로 사용한 사례 등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그런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차연이 혹은 차이가 뭐라는 건지 잘 감이 안 온다.
3. 유령론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데리다의 책이 있다. ‘의’ 의 애매성 혹은 이중성을 짐작하겠지만, 마르크스의 유령이란 마르크스라는 유령으로 읽을 수도 있고, 마르크스에게 나타나는 유령으로 읽을 수도 있다. 데리다는 이 둘 다를 가리키고 있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라는 유령은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끊임없이 되돌아 올 수밖에 없다고 데리다는 주장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서 마르크스의 이론적 유산 없이는 누구도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기 때문 p330” 이다.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해방의 운동’ 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억압과 착취가 존속하는 한 마르크스의 유령은 우리 곁을 배회하며 해방운동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마르크스 역시 자신의 유령에 시달린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도 물신숭배도 없는 세계를 믿었지만, 아무런 환영 없는, 유령 없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 곧 상품 이전의, 교환가치 이전의 순수한 기원, 순수한 사용가치의 낙원(원시공산주의)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상품 이후의, 물신 숭배 이후의 가상 없는, 환영 없는 사회(공산주의)도 존재하지 않 p335” 았다.
그렇다면 유령은 사라져야 할까? 데리다는 여기서 오히려 그 필요성을 역설한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The time is out of joint" 는 유령이 출몰하는 시간이다. 시간의 이음매가 어긋난 순간, 그 틈새로 유령은 출현한다. 시간이 딱 맞물려 연속적으로 정확히 흐르는 세계는 인과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어떠한 전복, 어떠한 균열도 불가능한 세계이다. 이 근원적인 탈구의 시간, out of joint, 은 “메시아적인 장래가 도래하기 위한 조건이자 정의가 실행되기 위한 기회p336”이다.
데리다의 이 out of joint는 벤야민의 통찰과 일맥상통 한다. 그런데 데리다 자신은 벤야민과는 유사성 못지 않게 중대한 차이가 있다고 역설했다. 어떻게?
진태원은 이 질문을 궁금증으로 남기며 데리다 강의를 끝맺는다.
“그런데 혹시 여기에는 무언가 부인의 태도가 있지 않을까요? 현대 사상의 핵심 중 하나가 이 문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p337"
<줄리아 크리스테바, 혐오스러운 매혹의 영역으로>
조광제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프랑스 현대철학을 대표하는 12명 중에 한 명인 것은 뜻밖이었다. 발리바르와 랑시에르도 끼지 못한 자리에 그녀가 앉을 수 있는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살짝 의심스러운 눈으로 이 글을 읽기 시작했다.
크리스테바의 사유체계를 대변하는 개념은 ‘기호분석학’ 이라고 한다. 크리스테바 자신이 기호학을 정신분석학적인 기반에 접목시켜 만든 논리로서, 이를 바탕으로 ‘세미오틱, 시니피앙스, 아브젝트, 아브젝시옹 ’ 같은 독특한 개념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크리스테바를 읽기 위해서는 이 낯선 용어들의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아브젝트’는 프로이트의 ‘두려운 낯섦 Unheimliche' 이란 개념과 관련이 있다. ‘두려운 낯섦 Unheimliche'이란 평소에 아주 친숙하던 것이 한순간 느닷없이 섬뜩한 이질감을 풍길 때 쓰는 개념인데, ‘아브젝트’는 반대로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 갑자기 매혹적으로 느껴질 때 성립하는 개념이다.
‘아브젝트’ 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와도 유사한 개념이다. ‘호모 사케르’는 사회로부터 추방된 존재다. 사회 구성원도 아니니 , ‘호모 사케르’를 죽여도 상관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의의 제물로도 사용할 수 없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가 한 사회 내에서 배재된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는 한 개인 내에서 버려져야 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주체가 자아를 형성하려면 반드시 아브젝트를 축출해야 한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와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 이 두 개념은 한 쪽은 사회적이고 다른 쪽은 개인적이라는 점에서 다르긴 하지만, 그 구조가 워낙 유사합니다. 그런데 크리스테바는 개인과 사회집단의 현존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면서, 사회는 모성적인 내지는 여성적인 것을 아브젝트로 축출함으로써 그 현존을 유지한다고 봅니다. 크리스테바에게 호모 사케르는 바로 모성과 여성성이었던 것입니다. p346」
이 정도가 옮겨 볼 수 있는 대략적인 내용이다. 그래서 이 아브젝트를 체험하는 ‘아브젝시옹’의 경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왜 주체에게 필수적인 과정인지, 또 그것을 왜 모성과 같은 것으로 보는지에 대해서는 이 글을 직접 읽어 볼 수밖에 없다. 워낙 낯선 용어들이라 그것에 친밀해지기 위해서는 달리 질러 갈 길이 없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독특한 개념이라고는 하는데, 라캉의 정신분석을 기초로 해서 그런지, 용어의 생소함에 비해서, 그 내용이 그리 독창적인 것 같지는 않다. 낯설어 보이는데, 또 어딘지 친숙하다. 그래서 매혹적인가? 그 건 모르겠다.
<다시, 알랭 바디우의 진리 철학>
서용순
‘진리’ 가 촌스러워진 건 언제부터일까? 니체와 하이데거부터라는데, 어쨌든 프랑스 현대 철학에 와서 정점을 찍었다고 한다. 공식용어로는 ‘근대철학 비판’으로, 저널리즘 용어로는 ‘포스트-근대(모던)’ 라 불리는 이 철학적 경향은, 한 마디로 ‘진리와 주체’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므로 프랑스 현대철학의 12번째 마지막 주자인, 알랭 바디우가 ‘다시, 진리’를 주창하는 것은 꽤 흥미롭다. ‘포스트-근대’가 정점을 지나 어떤 한계에 부딪힌 징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의 ‘진리’는 존재의 진리이다. 그러나 바디우의 존재는 일자가 아니라 ‘다수’다. 그러나 이 다수는 세계에 나타나는 순간 ‘일자화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존재를 ‘무엇무엇’으로 부르는 순간, 존재는 일자로 간주되고 다수성은 억압된다.
‘사건’은 존재의 억압된 모습이 드러나는 계기다. 이 사건을 통해 존재의 진리인 ‘다수’의 윤곽이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습을 식별할 수 없고, 명명할 수 없다.
‘주체’는 이 진리 사건에 충실함으로써 ‘구성되는’ 결과물이다. 주체는 바디우 철학의 핵심이다. 주체의 충실성이 없다면 ‘사건’은 그저 지나가는 소란에 지나지 않는다.
“사건에 충실한 주체는 진리의 일부로서 진리를 상황에 강제하는 후사건적 실천을 행한다. p387"
바디우는 그 명성에 비해 번역된 저서가 많지 않다. 대표작 <존재와 사건>, <세계의 논리>도 번역되지 않았다. 그러니 겨우 10여 페이지 정도의 설명으로, 바디우의 ‘진리-사건-주체’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우리 일반 독자로서는 별반 차이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경험으로는 조금 차이가 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꾸벅꾸벅 졸아가며 꾸역꾸역 읽어 놓으면, 이런 입문서를 읽을 때 퍼뜩하고 떠오르는, ‘묘계’가 있다. 정약용은 ‘묘계질서’를 강조했는데, 책을 읽다가 문뜩 떠오르는 깨달음을 재빨리 기록해 두라는 것이다. 입문서를 읽고 저자의 원서를 읽으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원서를 일단 읽어 놓고 입문서로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뒤늦은 되새김질이 더 많이 소화시킬 수도 있다.
바디우의 『조건들』은 번역되어 있다. 읽을 때 말할 수 없이 지루하고 어려웠다. 제목도 이게 뭐야 했는데, 오늘 보니 ‘철학의 조건들’ 이란 뜻이었다. 바디우에게 진리는 도래하는 것, 즉 생산되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진리를 생산할까? 철학일 것 같지만, 철학은 아니다. 철학은 불임이다.
진리의 생산 영역은 네 가지다. ‘정치, 과학, 예술, 사랑’ 이다. 이 네 가지를 ‘진리의 유적 절차들’이라 부르고, 이것이 ‘철학의 조건들’ 이다. 왜냐하면 이 네 가지 영역에서 진리가 생산되면, 철학은 이 진리를 ‘사유’ 하는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리가 맞는지 아닌지 따지는 작업을 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가 아니고, 다수이다. 어떤 하나가 특권화 되어 영원한 진리로 군림하는 것을 막아내는 것이 철학의 의무이다.
『조건들』을 읽을 때, {정치, 과학, 예술, 사랑}!!! 도대체 어떻게 모으면 저렇게 집합이 되나 싶고, 공통점도 하나 없고, 진리는 또 어떻게 생산한다는 건지 이해도 안됐다. 그런데 서용순의 설명에 의하면, 바디우가 억지로 조합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 이래로 철학사에서 논의되어 왔던 영역들이라고 한다. 하나 더 신학이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진리를 생산할 신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제외되고, 저렇게 네 가지가 남았단다. 그런데 신이 말했다고 하면 뭐든 진리로 여겨졌던 중세를 생각하면, 예술이 진리를 생산한다거나, 과학이 진리를 생산한다는 말이 조금 현실적으로 이해가 된다. 과학이 상처를 많이 입긴 했지만, 지금도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만 하면 군소리 없이 인정되는 그런 시대이니, 과학이 진리를 생산하고 있다는 말도 맞는 것 같다. 예술이 진리인 사람도 있고, 정치가 진리인 사람도 있다.
바디우는 ‘마오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곧 68혁명 세대란 뜻이다. 68혁명이 문화대혁명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 68혁명의 특징은 ‘국가나 국가 제도’와 철저히 단절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드골은 “그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 수 없다‘고 까지 했다. 권력이나 제도의 변혁을 요구하지 않고, 평등자유를 주장하니 너무 추상적으로 들렸나 보다.
하여튼 바디우의 정치적 사유는 68혁명에서 출발한다. 바디우 정치철학의 핵심이 ‘국가에서 벗어나기’에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그런데 철저히 국가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권력 제도 안에서 국가 밖을 사유하는 것은 너무나 막연해 보인다. 그래서 이들이 요청하는 것은 ‘상상력’ 이다.
「바디우가 볼 때 68혁명이 제기하는 정치적 대안은 ‘당 없는 정치’입니다. 제도권 정치 정당에 대한 지속적인 거부와 관료제에 대한 혐오, 권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정치적 실천, 제도권 좌파 정치와의 거리두기. 이 모든 것은 68혁명이 우리에게 남겨 놓은 정치적 과제라는 것입니다. 68혁명의 유산은 대중의 직접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끝없는 상상력을 요청하고, 지속적인 실천 속에서 그 형태를 창안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바디우에 따르면 그 시작은 우선 제도적 정치와 단절하는 것입니다. 」p395
제도적 정치와 단절하고 국가와 거리를 두고 권력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는 정치적 실천이 어떤 것일까? 나의 ‘상상력’은 어리둥절할 뿐이지만, 바디우는 여전히 상상력을 요청하고 있다.
*** 다 읽었다!! 드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