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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편지 1 ㅣ 펭귄클래식 112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정진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미술작품에 감수성이 거의 없는 나는 자연히 ‘고흐란 사나이’에 대해서도 별 생각이 없었다. 다만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 속 가사를 통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란 사나이도 있었”다는 정도를 기억할 뿐이었다.
군산으로 내려온 지 석 달, 시립도서관을 통해 주부독서회에 가입했다. 회원들은 열성적이고 분위기는 따뜻했지만, 매주 1권씩 예정된 7월의 독서목록은 무척 당혹스러웠다. 혼자라면 절대로 읽지 않을 책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릴없는 객지에서 외롭기 보다는 독서 취향에 변화를 주는 쪽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었다. 나는 <고흐의 편지>를 읽었다.
펭귄클래식 시리즈로 발행된 <고흐의 편지>1,2는 고흐가 쓴 칠백 통 이상의 편지 중 100여 통을 선별하여 싣고 있다. 이것들은 대부분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그림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화가들에 대한 비평 등, 그림에 문외한인 내게는 사실 이 많은 편지들이 따분하고 좀 지루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읽었던 것은, 책을 읽으며 생긴 몇 가지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 하나는 도대체 고흐가 어떻게 미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지 속의 고흐는 정말이지 너무너무 멀쩡할 뿐 아니라 너무너무 건강하기까지 하다. 가난한 농부들에 대한 깊은 애정,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 고난을 헤쳐 나가려는 강인한 의지, 속물적 인간에 대한 혐오... 고흐의 어떤 문장, 어떤 사유 속에도 광기의 기미를 찾을 수 없었다. 현실을 도외시한 천재적 예술가의 몽상이나 망상에 사로잡힌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고흐는 화가 조합 같은 것을 만들어 화가의 권익과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지극히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아무리 가난에 시달리고, 불투명한 미래에 좇긴다 할지라도 이런 사람이 미쳐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편지의 어디쯤에나 고흐의 광기가 흔적을 나타낼까 호기심에 이끌렸다.
그러나 고갱을 만나 두 달을 함께 싸우며 살던 고흐가 귀를 자른 후, 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지만, 사실 고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미치광이’는 아니었다. 고흐의 광기는 정신분열증 같은 정신 질환이 아니라 신경과 질환이라 할 수 있는 간질 때문에 나타난 발작이기 때문이다. 의식을 잃고, 환각을 일으키고, 자해를 하지만, 발작이 지나고 나면 그는 다시 ‘고흐’로 돌아왔다. 그의 사색과 언어, 그 어디에도 광기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편집자가 선별한 100여 통의 편지만으로 그의 상태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고흐의 편지> 속의 그는 결코 광인이 아니었다.
두 번째 나의 호기심은 동생 테오에게 있었다. 테오에게 보낸 고흐의 편지 대부분은 ‘돈’ 이야기로 끝난다. 화가로서의 꿈을 펼쳐 보이다가도, 동생 테오에게 화가가 되어야 한다고 설득하면서도, 심지어는 세상눈에 휘둘리는 테오의 세속적 태도를 꾸짖으면서도, 고흐는 언제나 동생 테오에게 모든 경제적 짐을 떠맡겼다. 물감이 필요하다, 종이가 떨어졌다, 모델료를 지급해야 한다, 건강을 위해 식사량을 조금 더 늘여야 겠다 등등... 동생 테오는 형의 끊임없는 요구들을 10년이나 들어주었다. 심지어는 테오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형은 여전히 동생 테오를 의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테오가 마지막까지 지고 가야했던 감당할 수 없는 짐이 남았으니, 형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이었다. 동생 테오는 형의 죽음에 대한 가책으로 동분서주하다, 형이 죽은 뒤 6개월 만에 쓰러져 죽었다.
내게는 고흐 자신 보다 동생 테오의 죽음이 더 충격적이었다. 나는 688통이나 되는 형의 편지에 대한 테오의 답장이 너무 궁금했다. 테오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애정으로 혹은 어떤 애증으로 형 고흐를 10년이나 뒷바라지 했던 걸까? 십년의 세월 동안 무시로 찾아왔을 갈등과 고뇌를 어떻게 극복해 냈던 걸까? 어쩌면 <테오의 편지>는 한 인간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분노에 대한 자기 고백은 아니었을까?
세 번째로 나의 관심을 붙들어 주었던 것은, 삶에 대한 고흐의 깊이 있는 사유와 진실한 행위이다.
고흐는 아버지와 끝없는 갈등을 겪었다. 그는 ‘나 자신을 찾았는데, 내가 바로 개야’라고 한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가 본능적으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느끼고 있어. 두 사람은 커다란 털북숭이 개가 젖은 발로 기를 쓰고 집안에 들어오는 것을 꺼림칙해 하듯이 나를 집에 들이지 않으려 하지.”(p322) 그러나 고흐는 스스로 개가 되는 것이 세상에 순응하며 사는 삶 보다는 낫다고 오히려 동생을 질타한다.
“나는 너한테, 내가 이른바 개 같은 길을 택하고 있고, 그런 개로 남아 가난하게 화가가 될 것이고, 자연 속에 사는 인간이길 원한다고 말하는 거야. 머릿속이 항상 이것을 지키고 저것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찬 사람은, 그런 것을 지키느라고 정말이지 자연에서 멀어졌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어서도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살다가 보며 누구든 흑백조차 분간하지 못하게 돼버리기 십상이지. 원래 생각하고 믿던 자신과 완전히 딴판이 되는 거야. 예를 들어 볼까? 지금까지 너는 가장 고약한 의미에서 사내로서의 열등함을 두려워하고 있지. 왜 네 영혼 속에서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꺼뜨리고 죽이려 드는 거지? 그래. 네가 두려워하는 것이 사실이 될지도 몰라. 혹시 별 볼일 없어지진 않을까? 왠지 알아? 그건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에 복종하고 순응하면서, 세상이 시키는 대로, 세상에 절대로 맞서지 않고 대중 여론을 따르기 때문이야! (이 멍청아!)”(p328)
고흐는 경제적 삶을 전적으로 동생에게 의존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절대로 꺾지 않는다. 어쩌면 동생 테오가 세상에 ‘복종하고 순응하면서,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고흐 자신 때문일지도 모르는데도 고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당당하게 혹은 뻔뻔하게 동생을 멍청이라고 질타한다.
고흐는 그림을 시작한 이후, 늘 인물화가가 되기를 원했다. 모델료가 없어서 정물이나 풍경을 그려야 할 때도 많았지만, 고흐의 관심은 늘 사람, 가난한 삶 속에 거칠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있었다. 고흐는 사람을 사랑했다. 사촌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이 “안돼, 절대로 안돼.”라는 말로 단호히 거절당한 이후 고흐는 거리의 여자 시엔을 사랑한다. 이 문제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지만, 고흐는 결코 시엔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그녀나 나나 둘 다 함께 걸으며 짐을 나누는 불행한 인간이지. 바로 그렇기에 불행이란 행복으로 가는 길이 되고 인간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내게 되는 거야.”(p231) 시엔과의 관계가 끝나고, 동생 테오 역시 거리의 여자와 한때 사랑에 빠져 비난받을 때, 고흐는 이렇게 썼다.
“너도 나도 차갑고 무자비한 길에서 풀이 죽고 슬픈 여자와 마주쳤어. 그러고 너나 나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고 인간적 양심을 따랐지. 이런 만남은 마치 계시와 비슷해 보여. 최소한 그 창백하고 슬픈 모습에서 어둠 속에 떠오르는 에케-호모를 연상시키기도 하고..”(p281).
에케-호모란 “원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본티오 빌라도가 한 말(요한 19 : 5)” (다음 백과사전)로서 15~17 세기 서구 미술의 주요 주제였다고 한다. ‘차갑고 무자비한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풀이 죽고 슬픈 여자’ 에게 고흐는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고흐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늘 책 읽기를 권유했다, 빅토르 위고나 디킨스 등등. 고흐는 천재적 광기에 사로잡혀 하루 밤에 걸작을 만들어내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창백하고 슬픈’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거칠고 투박한 ‘삶’의 모습을 꼼꼼히 담아내는 사유의 화가였다. 고흐는 해바라기에 대한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지만, 언제나 ‘감자 먹는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간직한 ‘농촌 생활화가’ 이고자 했다.
1890년 7월 27일, 권총으로 자신의 복부를 쏜 후, 이틀 만에 빈센트 반 고흐는 죽었다. 그의 영원한 지원자였던 동생 테오 역시 6개월 뒤 형의 뒤를 따르듯 죽었다. 질 떨어지는 물감, 값 싼 화폭, 거친 음식조차 늘 궁핍했던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은 지금 경매시장의 가장 값비싼 그림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의 <해바라기>는 500억이 넘는 돈에 낙찰되어 일본의 어느 전시관에 결려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란 사나이도 있었는데”란 노랫말로 남아있다.
광인 아닌 광인으로, 불행 아닌 불행 속에 살다간 ‘고흐란 사나이'가 있었고, 그는 10년 동안 897점의 그림을, 18년 동안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688통의 편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