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자신에게 적절한 형벌을 제의 



1차 재판인 유무죄 판결에서 유죄가 결정되자, 형량을 선고하는 2차 재판이 시작된다.  절차상 원고와 피고는 각각 형량을 제안하고, 재판관들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형량을 절충한 판결은 불가하다. 



1권 35e~38b가 2차 재판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목숨을 건 만용처럼 보이지만, 소크라테스로서는 그의 신념에 비추어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평생을 신에 대한 봉사로 살아온 그에게 합당한 형벌이 무엇이 있겠는가?  참으로 받아 마땅한 것을 제안해야 하는 것이 형량이라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인들이 올림피아 경기에서 승리한 시민들에게 수여하는 국가가 제공하는 식권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국가가 지급하는 연금같은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타협할 줄 모르는 신념은 재판관들을 최악의 선택으로 몰고 간다. 마지막에 소크라테스가 벌금을 제안하기는 하지만 이것도 거의 조롱이나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가 판결을 사형으로 몰고가는 것은 아테나이 시민들과 함께 검토하고 캐물으며 사는 삶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어차피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Unexamined life is no life" 


강유원 선생이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을 반대하지 않았다. 타락한 민주정, 민주정의 가치를 훼손하는 관습들, 욕망에 대해 비판할 뿐이다. 


그런데 민주정이란 정의상 어떤 집단의 의견이 다수의 것으로 확인되면 정책으로 채택되는 체제이다.  어쩌면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다수가 그를 유죄로 보았고, 다수가 그에게 사형을 결정했다.  민주적인 절차에 따른 공정한 재판이었다. 그런데 왜 이 재판이 세기의 우스꽝스러운 재판,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재판이 되어버린 것일까? 


민주정에서 옮고 그름을 판단하는 '집단의 의견'이 "unexamined" 된 상태로 권리를 행사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캐묻는 삶'을 평생의 과업으로 받아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데마고그들에 현혹되어 제대로 캐묻지도 않고, 올바른 앎을 얻지도 못한 상태에서 민주정의 권리를 행사하는 시민들은 그 자체로 재앙이 된다.  소크라테스를 판결한 재판관들이 소문에 현혹되고 소피스트들에 선동된 바로 그  타락한 민주정의 시민으로, 수천년을 전해오며 어리석은 시민의 전형으로 제시되고 있다.


*16강은 35e~38b입니다. 






17강. 최후 진술 




재판은 끝났다. 행정 절차를 밟는 시간 동안 소크라테스는 마지막 연설을 한다. 강유원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사형쪽에 투표한 사람들에게는 악담을,  벌금형에 투표한 사람들에게는 덕담을 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했지만, 신은 그 사람들을 악덕과 불의로 심판할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단언은 신명(神明)재판의 성격을 뚜렷이 드러낸다. 


 


 



소크라테스의 나무람에서 벗어나는 길은 "남들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자신을 가능한 한 훌륭하게 다잡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쉽게 벗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인간은 타인에 대한 강압을 선택해 왔다. 그리고 역사는 그것을 인류의 부끄러움으로 기록한다. 




<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부끄러움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의 중심 주제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 이지만 또한 "무지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 할 줄 알라"는 뜻이기도 하다.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과일을 먹고 제일 먼저 깨달은 것, 제일 먼저 알게 된 것도 부끄러움이었다.  부끄러움은 인간의 조건이다.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창세기 3:4~7)



눈이 열리고 올바름을 분별하게 되면서부터 인간은 진정 인간이 되었다. 인간의 삶은 에덴 동산이 아니라 추방된 이 고통스럽고 부조리한 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 최초의 인간이고,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 한 자기 스스로에 대한 눈뜸과 부끄러움은 인간 제1의 조건이 될 것이다.  



*17강은 38c~41a입니다. 






18강. 최후 진술 계속과 마지막 말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둘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과 같은 것이고 죽은 사람은 그 무엇에 대해서든 그 어떤 감각도 갖고 있지 않거나, 아니면 전해지는 말마따나 어떤 바뀜, 즉 영혼이 이곳에서 딴 곳으로 옮겨 사는 일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40c)


소크라테스는 어느 쪽이 진실이든 어떤 나쁠 것도 없다고 한다. 훌륭한 사람은 살아 있을 때든 삶을 마치고 나서든 신들이, 죽은 이후에 영혼이 있다면, 돌 볼 것이니까.


그런데 이런 영혼의 관념은 당대 아테나이인들에게는 생소했다. 영혼은 육체와 함께 있을 때만 살아 있고, 육체의 소멸과 동시에 그림자처럼 힘을 잃는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처럼 영혼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고, 영원불멸하다는 생각은 그에게 새로운 신을 믿는다는 혐의를 둘 만했다. 


소크라테스는 죽어서 만나보고 싶은 영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영혼들을 검토하고 탐문하면서 지내는 일이 즐겁고 최대로 좋은 일일 것이라고 할 때는 들뜬 아이 같기도 하다. 


" 팔라메데스와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 그리고 옛날 사람들 가운데 부정의한 심판 때문에 죽은 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될 때마다, 나 자신이 겪은 일들과 저분들이 겪은 일들을 견주어 보면서 보내는 삶이 말입니다." (41b) 


부정의한 심판 때문에 죽은 사람으로 아이아스를 들고 있는데, 아이아스는 <일리아스>에 나오는 대표적 영웅으로 오뒷세우스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두고 경쟁하다가 표결에서 패하고 자결한 인물이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한 기사를 참고하면 좋겠다.  박경귀원장 고전특강(45) - 트로이 전쟁 영웅 아이아스의 죽음 (mediapen.com)


 






아이아스가 용장이라면 오뒷세우스는 지장이다. 다시 말하면 우직하고 용맹한 아이아스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맨 앞에 나서서 싸웠다면, 오뒷세우스는 트로이의 목마를 고안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꾀를 써서 공을 세웠다.  아킬레우스의 아름다운 무구를 갖는 다는 것은 트로이아 전쟁에서 가장 큰 공헌을 세웠음을 인정받는 것이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기 때문에 결국 장수들의 투표로 승자를 가리게 된다.  지략이 뛰어난 오뒷세우스는 화려한 말솜씨로 장수들을 설득하여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차지한다.  


소크라테스가 '부정의한 심판 때문에 죽은'  인물로 아이아스를 꼽은 것은 화려한 언변을 가진 오뒷세우스를 소피스트에,  오뒷세우스의 말빨에 모욕 당한 아이아스를 소크라테스 자신에게 비유했기 때문인 것 같다.  콕 집어 말하지는 않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들 가운데 누가 지혜로운지, 그리고 누가 지혜롭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은 아닌지 하는 것들"을 탐문하고 싶다고 말함으로써 '지략이 뛰어난' 오뒷세우스를 은근히 비꼬는 것 같다. 



여기서 강유원 선생이 보는 관점은 조금 다르다. 이 문제는 오뒷세우스냐 아이아스냐를 공정하게 선택하는 데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 다 각각의 주장대로 공헌이 있고 각자의 관점에서는 자신의 공로를 우위에 놓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아이아스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두 영웅을 화합시켜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 방법은 없는 것인가? 아이아스의 자결은 공동체의 분열이며 막대한 손실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오뒷세우스와 아이아스의 지휘관인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리더십이다.  리더, 특히 민주정에서 정치 지도자의 역할은 충돌하는 집단들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설득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다수의 결정이 어느쪽의 의견을 채택하든 반대편도 그 결정에 승복하도록 설득해 내는 것이 훌륭한 지도자의 역할이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언론은 대중에게 핵심 쟁점을 제시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며 공정한 토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올바른 민주정을 위해 도입해야 할 새로운 무엇에 대해 고민했다. 강유원 선생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아이아스의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정체.국가>에서 플라톤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최선자 정체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 같다.  아가멤논이 지혜로운 철학자였으면 아이아스와 오뒷세우스의 갈등을 원만하게 조율했을 것이고, 설혹 오뒷세우스가 투표에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아이아스가  흔쾌히 승복할 수 있도록 공정한 게임의 룰을 만들고 관리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는 아이아스를 매개로 <정체.국가>로 가는 플라톤 사상의 단초가 있다는 말을 강유원 선생은 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소크라테스의 변론>의 마지막  문장들이다.  강유원 선생이 고전은 형식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을  강의 앞 부분에서 강조한 바가 있다.  대표적인 형식으로 원환 구조, Ring Composition이 있다.  <변론>도 그렇다.  첫 문장을 다시 읽어 보자. 


"아테네인 여러분, 나를 고발한 사람들로 인해 여러분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난 알지 못합니다." (17a)


'나는 알지 못합니다'로 시작하여,  ' 신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분명치 않습니다.'로 끝을 맺는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가 소크라테스 사상의 핵심이라면, 이 원환 구조는 주제를 핵심적으로 드러낸다. 


* 18강은 41a~42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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