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현재보다 과거가 더 알기 쉽다. 중·고등학교 과정만 거치면 중국의 전근대 역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중국은 어떤 나라인지, 특히 1978년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은 어떤 국가인지 파악하기란 매우 힘들다.

 

중국은 자유 시장 경제를 운용하고 있다. 이런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인가?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인가? 

시진핑의 강력한 일인 권력의 공고화는 서구 세계의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이런 중국은 일인 독재 체제인가? 인민의 공화국인가? 

소련은 붕괴하고 북한은 세습 군주국이 되었다. 중국은 어떻게 체제 변화 없이 경제 성장을 이루고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었는가?

 

막연한 물음과 떠도는 풍문 사이에서 깨진 거울 조각들에 비춰진 중국은 기괴하고 일그러진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중국 정치체제에 대한 이 탄탄하고 학문적인 강의가 고마운 것은 진짜 중국을 볼 수 있는 자그마하지만 온전한 거울을 얻은 것 같기 때문이다.

 

 

 

 

 

5강에서 8강까지는 이 강좌의 제 2부로서, 엘리트 정치의 앞선 두 유형인 일인 지배 체제와 원로 지배 체제의 구체적 특징을 사례와 함께 분석한다.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열쇠는 집단 지도 체제인데, 이 체제에 대한 이해는 선행한 두 체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16강으로 구성된 이 강좌의 전반부는 후반부 강의를 위한 예비 공부인 셈이다.

 

 

 

 

 

 

5강. 마오쩌둥과  일인 지배 ① : 이론

 

 

 

 

중화(中華)의 세계에서 동이(東夷)로 살아온 우리에게 세계의 중심이었던 중국은 익숙하다.

 

 

 

 

 

중국 역사상 세계 경제 시장의 40%를 차지했던 당왕조(618~907)와 30% 이상을 차지했던 청왕조 (1616~1912)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번성한 시기였다. 

 

 

 

  

 

 

 

청왕조 말기, 1840년 영국의 침략으로 시작된 아편 전쟁은 중국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중국의 근대는 1840년부터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기 전까지이다. 중국인들은 이 시기를 '굴욕의 100년' 이라고 부른다. 중국 역사상 세계 무대의 중심에서 벗어난 유일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중국을 파이처럼 나누어 가지며, '동아시아의 병자'라 조롱했다.

 

 

 

 

 

 

 

마오쩌둥은 이 '굴욕의 100년' 을 끝장 낸 지도자이다.  대장정을 이끌고, 국공 내전을 승리함으로써 중국을 다시 통일하고, 마침내 노동자·농민의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했다. 

 

 

 

 

 

 

중국 인민들은 마오쩌둥을 공산당으로, 공산당을 마오쩌둥으로 생각했다.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의 권위는 법과 제도 따위와는 무관한 그 이름 자체, 그 카리스마에 있었다.

 

 

 

 

 

 

1949년 건국 당시에 이미 인민들에게는 마오쩌둥이 황제였고, 1956년 이후부터는 마오쩌둥 스스로에게도 자신은 사회주의 황제였다.

 

 

 

 

 

 

 

 

당헌에 규정된 집체 영도와 개인 숭배 금지를 무시하고, 마오쩌둥 1인 체제를 공식화 했다.  

 

 

 

 

 

추종자들이 발 빠르게 호응하고, 마오쩌둥은 공산당 위에 군림하는 황제로서 다른 혁명 지도자들과 군신 관계를 형성했다.

 

 

 

 

 

마오쩌둥에 대한 극단적 숭배와 1인 지배는 1966년~1976년의 문화 대혁명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6. 마오쩌둥과 1인 지배 체제 ② : 사례

 

 

 

 

 

 

마오쩌둥의 일인 지배 체제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1958년의 대약진 운동과 1966년 시작한 문화 대혁명이다. 두 사건은 워낙 유명해서 중국의 현대사에서 빼놓고 갈 수 없는 장면이다. 

 

이 강의에서는 우리에게 다소 낯설은 '5개년 국민 경제 및 사회 발전 계획' 을 중심으로 이들 사건과 마오쩌둥의 일인 지배의 생생한 모습을 살펴 본다.

 

중국은 1953년 한국 전쟁 직후 시작한 1차 5개년 계획이 지금까지 지속되어 2021년부터는 14차 5개년 계획을 실시하고 있다.

 

1차 5개년 계획은 큰 성공을 거두어 중국 역사의 황금기에 기여하였다.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의 수립부터 1956년 공산당 8차 당대회까지를 현대 중국의 황금기라고 한다.

 

이때까지는 마오쩌둥도 공산당 당헌에 기반하여 지도부 내의 협의를 통해 권력을 운용하였다. 

 

 

 

 

 

 

마오쩌둥의 권력 운용 방식의 변화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2차 5개년 국민 경제 및 사회 발전계획이 수립되는 과정이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 공산당 및 노동당 회의에서 흐루쇼프는 15년 후에 소련이 미국의 경제를 추월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로 낙인 찍고 있던 마오쩌둥은 이에 맞서 중국도 15년 후에 영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즉흥적인 발언을 한다.

 

 

 

 

 

마오쩌둥의 선언은 그대로 2차 5개년 국민 경제 및 사회 발전 계획의 목표가 된다.  중국내의 경제 발전 상황이나 가용 자원 등에 대한 고려 없이 마오쩌둥의 선언을 실현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 대약진 운동이다.

 

 

 

 

 

 

 

경제 발전의 기준으로 제시된 것은 두 가지다.  농업 부문의 식량 생산량과 공업 부문의 철강 생산량이다.  건국 이후 분배했던 토지를 사실상 빼앗아 인민 공사 단위의 집단 영농을 실시했다. 인민공사는 1958년 설립된 중화 인민 공화국의 농촌 행정 경제의 기본 단위이다. 

 

집단 농장은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저하시켰다. 목표량에 미치지 못하는 생산량에도 불구하고 목표량을 기준으로 생산물을 수취함에 따라 빈손이 된 농민들은 기아 상태로 내몰렸다.

 

 

 

 

 

 

 

 

 

 

철 생산을 위한 주먹구구식 제련 방식은 웃지도 못할 온갖 해프닝을 쏟아내며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

 

 

 

 

 

 

 

대약진 운동 기간 굶어 죽은 중국인은 3,500만 명에서 4,500만 명까지 추정되고 있다.

 

대약진 운동의 참혹한 결과는 공산당 최고 지도부 내의 분열을 가져왔다. 대약진 운동이 중단되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주도한 경제 회복 운동이 추진되었다. 경제 원상 복구를 위해 집단 영농을 완화하고 생산 의욕을 고취하였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덩샤오핑의 그 유명한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이다.

 

순조로운 경제 회복 운동을 우려의 눈으로 보고 있던 마오쩌둥은 2년 만에 이를 중단시키고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주장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주자파로 낙인찍고 대중 운동을 통해 수정주의 노선을 비판하려 하였다.

 

사회주의 교육 운동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결국 1966년의 문화 대혁명이라는 더욱 파괴적인 정신 운동의 단초가 된다.

 

 

 

 

 

 

 

3차 5개년 계획도 마오쩌둥 1인 지배의 독단적이고 비합리적인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963년부터 실시된 3차 5개년 계획의 초기 목표는 국민 생활 개선이었다. 그런데 1년 뒤 마오쩌둥은 이 목표를 전면 변경하여 미국의 핵 공격에 대비한 제3선 계획을 명령한다.

 

서쪽 해안가(1선)와 내륙의 공업 도시(2선)에 집중된 중화학 공업 단지를 내륙 산속의 지하에 건설하라는 것이다.  국민 경제를 위해 지출되어 할 예산이 핵 공격에 대비한 지하 공업 기지 건설에 투입되면서 막대한 자원이 낭비되었다.

 

 

 

 

 

 

1958년 무렵부터 공산당의 권력 기구들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마오쩌둥의 참모 기구로 전락했다. 마오쩌둥은 법과 제도 위에 군림하는 사회주의 황제로 국가 정책을 마음대로 좌우했지만, 아무도 잘못을 논의할 수 없었다. 중화 인민 공화국은 인민의 주권도 공화의 이상도 잃어 가는 듯했다. 

 

 

 

 

 

 

 

 

7. 덩샤오핑과 원로 지배   : 이론

 

 

 

 

 

 

 

중국의 정치 체제 중 가장 특이한 것이 원로 지배인 것 같다.  원로 지배 체제는 덩샤오핑 시대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덩샤오핑 1인 지배 체제가 아니라 8명의 원로들의 합의를 통한 집단 지배 형태이다.  1인 지배에서 집단 지도 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정치 형태로 중국 역사의 특수성에 의해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원로 지배 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이중 권력 구조이다.  원로들로 구성된 비공식 정치와 법과 제도에 근거한 공식 정치이다.  실무는 공식 정치가 맡지만 최종 결정권은 원로에게 있다.

 

 

 

 

 

 

 

 

마오쩌둥 사후 문화 대혁명에 의해 숙청되었던 원로들이 복권되고, 1978년부터는 원로들이 권력을 장악한다.  혁명 원로들은 개인적 카리스마에 더불어 폭넓은 인적 관계망, 즉 꽌시를 통해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원로들도 초기에는 공식 직위를 차지했다. 이후 1987년 13차 당대회에서 덩샤오핑이 혁명 원로들의 퇴진을 제안하면서, 기형적인 이중 지배 체제가 탄생했다.

 

처음에는 퇴진을 거부하며 버티기에 들어 갔으나 각종 정치·경제적 특혜를 약속 받고 혁명 원로들은 공산당의 최고위직에서 물러났다.  단, 덩샤오핑만은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으로 실권을 유지했다.

 

 

 

 

 

 

 

그렇다면 왜 공식 정치가 등장하게 되었을까?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완전히 멈추었던 공식 기구와 국가 기관을 재건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마오쩌둥과 같은 독재자가 등장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집단 지도 체제를 구성하는 것이 중요 했다.  

 

또한 개혁·개방을 위해서는 법과 제도가 확립되어야 했다. 외국인과 시장 주체들의 활발한 경제 활동을 보장하고 촉진하기 위해서는 구속력 있는 법과 규정이 필요했다.

 

 

 

 

 

 

 

 

혁명 원로들이 물러났지만 실권은 여전히 원로들에게 있었다.  원로들은 세 가지 장치를 통해 공식 정치를 좌우하였다.

 

 

   

 

 

  

 

첫째는 덩샤오핑을 통한 권력 행사이다. 덩샤오핑은 카리스마에 있어서도, 제도적 직위에 있어서도 실질적인 일인자였다.  군은 당에 절대 복종해야 했지만, 당권과 군권이 분리된 상태에서 권력은 군권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1987년 당내 비밀 회의는 "덩사오핑 동지가 최종 결정권을 행사한다."라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덩샤오핑에게 공식 정치를 통제하는 비토권을 줌과 동시에 집단 지도 하의 권력 마비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둘째는 퇴진 원로들로 구성된 중앙 고문 위원회를 통한 방법이다. 중앙 고문 위원회는 합법적으로 정치국원들에게 정책을 제안하고 조언할 수 있었다.

 

 

 

 

 

 

 

 

셋째는 파벌을 통한 권력 행사이다. 공식 기구의 주요 직위에 혁명 원로들의 파벌을 임명하여 영향력을 발휘했다.  혁명 원로의 양대 산맥은 개혁파의 덩샤오핑과 보수파의 천윈이다. 

 

 

 

 

 

 

덩샤오핑의 개혁파에는 후야오방,  자오쯔양,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 등이 대표적이다.

 

 

 

 

 

 

 

천윈의 보수파에는 장쩌민과 리펑 등이 있다.

 

 

 

 

 

 

 

 8. 덩샤오핑과 원로 지배 ② : 사례

 

 

 

 

개혁·개방과 함께 시작된 원로 지배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무수한 일화를 만들었다.  사회주의의 기본 원리를 지키면서 시장 경제와 사적 소유를 도입하려는 중국의 시도는 어떤 나라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었다.  혁명 원로들도 그 방법은 알지 못했지만 그 방향만은 뚜렷했다.

 

이런 상황에서 원로들의 비공식 정치는 공식 정치를 좌우하며 실권을 행사하였고,  원로들이 독단으로 공산당 총서기를 갈아치우는 사태가 연달아 발생하였다.

 

 

 

 

 

 

 

후야오방은 1982년 공산당 12차 당대회에서 총서기로 임명되었다. 국무원 총리 자오쯔양과 함께 덩샤오핑의 지휘 아래 개혁·개방을 실행하였다.

 

사무엘 헌팅턴이 '제 3의 민주화 물결'이라 부른 전 세계적인 민주화 운동이 1974년 포르투갈에서 시작되어 남유럽을 휩쓸고, 라틴 아메리카로 건너 갔다가, 동아시아를 뒤흔든 것이 1986년 무렵이었다.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가 축출되고, 중국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6.10항쟁도 이 흐름 속에 있었다.

 

 

 

 

 

 

학생 시위에 대해 혁명 원로들은 무력 진압을 요구했다. 그러나 후야오방이 대화로 풀기를 주장하자 원로 지배는 후야오방 퇴진을 결의했다. 후야오방의 퇴진에는 경제 정책을 둘러싼 자오쯔양과의 갈등과 원로들에 대한 불경죄 등도 영향을 미쳤다.

 

처음 원로들은 1987년 13차 당대회를 통해 후야오방을 명예롭게 퇴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1986년 말부터 1987년 초까지 중국 20여 개의 대학들이 격렬한 시위에 나서고 후야오방이 이를 진압하지 않자 혁명 원로들은 후야오방을 즉각 불명예 퇴진시켜 버렸다.

 

 

 

 

 

 

 

 

당헌에 의하면 정치국원 및 정치국 상무위원과 총서기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 선출한다.  원로들의 후야오방 퇴진은 당헌을 무시하고 퇴진 시기와 방법까지 모든 것을 원로들의 비공식 회의로 결정해 버린 초법적 독단이었다. 절차상의 심각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 원로 지배 체제의 생생한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중국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천안문 사건도 후야오방의 불명예 퇴진과 관련되어 있다.

 

천안문 사건은 천안문 민주화 운동과 이에 대한 강제 진압을 통칭한다.

 

 

 

 

 

 

 

 

 

 

 

총서기에서는 쫓겨났지만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후야오방이 1989년 4월 정치국 회의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하였다. 

 

후야오방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학생들의 추모 물결이 거세게 일어 났다. 대학생들은 후야오방에게 커다란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다. 학생들을 보호하려 하다 후야오방이 총서기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안문의 추모 물결은 언론 자유와 부패 당정 간부 처벌이라는 정치적 슬로건으로 발전했다.  시위가 격화되자 원로 회의는 강력 대응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고, "학생 운동은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동란이다."라고 선언한 원로 지배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 진압을 자행했다. 

 

 

 

 

 

 

 

 

후야오방 퇴진 후 총서기로 선출되었던 자오쯔양이 이 과정에서 원로 지배에 의해 2년 만에 파면 당했다.  자오쯔양이 천안문 사건의 무력 진압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공산당 총서기로 당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것과 비밀 결의 누설 등의 사유로 원로 회의는 자오쯔양의 퇴진을 결의하고 후임자를 논의했다. 

 

 

 

 

 

 

정치국 상무위원도 아니었던 상하이 당서기 장쩌민이 갑자기 총서기로 부상한 것은 순전히 원로들의 결정이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그리고 장쩌민까지,  1978년부터 1992년 사이 14년 간의 원로 지배 시기에 공산당 총서기가 어떻게 선출되고 어떻게 쫓겨났는가를 보면 원로 지배 체제의 본 모습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원로 지배 체제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었다. 고령의 원로들이 쇠진하고 하나 둘 사망하면서 1992년에는 공식 정치를 회복하고 집단 지도 체제가 확립되었다.

 

 

 

 

1강~ 8강은 이 강좌의 예비 공부에 해당한다.  강좌의 목적은 현재 중국의 정치 체제를 명확히 알고 세계 속의 중국, 수천 년 역사의 이웃으로서의 중국을 똑바로 이해하자는 데 있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의 집단 지도 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내용과 사례는 9강~16강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6강과 8강의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사례도 그러하지만, 사례를 통한 체제 이해는 직접 강의를 들어 봐야 그 생생함과 놀라움과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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