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곡

 

 

 

 

 

 

너는 이제 연옥에 도착했다.

오르막길로 빙 둘러쳐진 비탈이 보이느냐?

거기 벌어진 틈이 바로 그곳의 문이다. (49~51)

 

 

 

겸손을 상징하는 갈대 띠를 두르고 가파른 절벽을 힘겹게 올랐던 단테의 눈 앞에 연옥의 문이 보인다. 사실은 성녀 루치아가 잠든 단테를 안아 올려 놓은 것이다.

 

문 앞에는 천사 문지기가 앉아 있고, 그 아래로 세 개의 계단이 놓여 있다. 반들 반들 닦인 첫 번째 계단은 죄를 비추는 양심을, 거칠고 검붉은 두 번째 계단은 죄의 고백을, 벌겋게 이글거리는 느낌의 세 번째 계단은 형벌을 달게 받으려는 의지를 상징한다. (주11)

 

 

 

 

 

 

 

 

그러자 그는 칼 끝으로 내 이마에

일곱 개의 P자를 그었다.

"들어가거든 이 상처를 씻어 버려라!" (112~114)

 

 

천사가 단테의 이마에 그은 일곱 개의 P는 연옥의 산에서 씻어내야 하는 일곱 가지의 죄이다. P는 라틴어 Peccato, 죄를 의미한다.  기독교도가 아니어서 조심스럽지만, 단테의 P는 야훼가 카인에게 새겨준 표식을 떠오르게 한다.  이 표식은 추방의 낙인이 아니라 아무도 카인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야훼의 보증이다.

둘 다 희망을 품고 있다.  

 

 

 

 

 

 

 

 

 

단테는 일곱 개의 산허리를 돌며 연옥의 산꼭대기로 올라야 한다. 하나씩 순례를 마칠 때마다 천사가 나타나 다음 길을 알려 주면, 이마의 P도 하나씩 사라진다.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하는 지옥의 문과 달리, 연옥의 문은 희망과 함께 들어간다.

 

 

 

 

 

 

 

 

 

 

10곡

 

 

 

 

 

 

 

 

첫 번째 둘레에는 오만한 죄를 지은 영혼들이(100) 바위를 이고 구부린 채 걷고 있다.

 

 

 

 

 

 

 

 

 

 

11곡

 

 

 

오만의 죄를 지은 영혼들은 세상의 명성에 취했던 자들이다. 고대 희랍에서도 신들의 응징은 인간들의 오만, 휘브리스(Hubris)에 가장 가혹했다.

 

 

속세의 명성이란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에 지나지 않으니

이 길 저 길로 옮겨 다니다가

방향이 바뀌는 대로 이름도 바뀌게 되는 법이오. (100~102)

 

 

 

 

 

 

 

 

 

12곡

 

 

 

올림푸스의 신들과 겨루려다 징벌을 받은 희랍 신화 속 불행한 인간들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항한 구약 성경 속의 여러 인물들이 첫 번째 둘레에서 그 오만의 죄를 참회하고 있다. 

 

『신곡』을 읽다 보면 기독교 이외에는 아무런 사상도 없었을 것 같은 중세에 대한 통념이 깨어진다. 르네상스의 새벽이 밝아 오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서양의 사상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조화 혹은 투쟁의 역사라고 하더니, 이 방대한 서사시가 실증하고 있는 듯하다.

 

 

"네 이마 위에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P자들이, 방금 하나 지워졌듯이,

앞으로 완전히 지워질 때

 

너의 발길은 선한 희망과 함께

더 가벼워질 것이다. 오르는 길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질 것이다." (121~126)

 

 

 

첫 번째 둘레의 순례가 끝나자 천사가 나타나 날개로 이마를 스치고, 다음 둘레로 오르는 계단을 알려 준다. 단테는 몸이 가벼워 짐을 느끼는데, P자 하나가 모르는 사이 지워졌다.

 

 

 

 

 

 

 

 

 

13곡

 

 

 

두 번째 둘레는 질투의 죄(38)를 정화하는 곳이다. 조금 잔인하게도 이 영혼들의 눈썹은 모두 철사로 꿰매져 있어 앞을 보지 못하고 고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14곡

 

 

 

"나의 피는 언제나 질투로 부글부글 끓었소.(82)"라고 말하는 귀도 델 두카가 단테의 요청에 따라 긴 이야기를 한다.  정쟁에 휘말렸던 두카는 13세기 이탈리아의 끝없는 혼란과 투쟁을 개탄한다.

 

 

자 토스카나 사람이여, 이제 그만 가 보시오!

나는 이제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울고 싶소.

우리 얘기가 마음을 슬프게 하기 때문이오. (124~126)

 

 

이탈리아의 13세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21세기의 대한민국 독자가 읽기에 지치도록 되풀이 되는 이탈리아의 정쟁은 사실 지루하고 의미가 없다. 다만 해방 이후 우리 정치사에 등장한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이 『신곡』 같은 작품에 묘사되어 있다면, 지금도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들까지 지옥이나 연옥에서 벌을 받고 있다면, 그 재미는 상상이 간다. 전두환이 주데카에서 꽁꽁 얼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당대의 이탈리아 사람들도 그런 쾌감에 이 서사시에 열광했을 지도 모르겠다.

 

 

 

 

 

 

 

 

 

15곡

 

 

 

"자비를 베푸는 자들은 복되도다."와 "질투를 이긴 자여,

즐거워 하라!"라는 노랫소리가 뒤에서 울려왔다. (38~39)

 

 

둘째 둘레의 순례가 끝나고 세째 둘레로 오르는 계단을 천사가 알려 준다. 이마의 P도 하나 더 지워졌다.

 

 

 

 

 

 

 

 

 

16곡

 

 

 

세 번째 둘레에는 분노의 죄(24)를 지은 영혼들이 먹구름 같은 연기에 휩싸여 걷고 있다.  단테는 보이지 않는 영혼에게 세상이 사악해진 원인을 묻는다. 영혼의 답에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섭리의 문제가 담겨 있다.

 

 

"형제여 세상은 눈이 멀었소.

당신이 살던 세상은 분명 눈이 멀었소!

 

사람들은 모든 것이 어떤 예정된 계획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모든 원인을 하늘에 돌리려고 하오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신들의 자유의지는

없어질 것이며, 선에 대한 기쁨도

악에 대한 슬픔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오.

 

하늘이 사람들의 행동을 주관하시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은 아니오. 모두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릇된 것과 옳은 것을 구분하는

 

스스로의 빛을 지니고 있소. 자유의지는,

처음에는 하늘과의 갈등으로 상처를 입고 약해졌지만,

잘 키우기만 하면 모든 장애를 극복할 수 있소.

 

인간들은 더 위대한 힘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들이오.

사람들의 마음을 창조한 더 고귀한 성품에 속해 있지요.

하늘도 이것을 넘어서서 통제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세상이 어지럽다고 해도

원인은 사람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오!

이제 그 점을 잘 설명해 주겠소." (65~87)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에 대한 물음은 자명해 보이지만 그리 간단치가 않다.  모든 것이 신의 섭리라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책임이 없고, 책임이 없다면 윤리가 불가능하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신이 전지전능하다고 할 수 있는가? 라고 천진하게 물어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할 때, 그 모든 것에 인간의 악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모든 것일 수가 있는가? 라고 논리적 모순을 지적해 봄직도 하다.

 

 

기원전에도 이런 고민이 있었다.  『오뒷세이아』 에서 제우스는 이렇게 한탄한다.  "아아, 인간들은 걸핏하면 신들을 탓하곤 하지요. / 그들은 재앙이 우리에게서 비롯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 자신의/ 못된 짓으로 정해진 몫 이상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오. (1권 32~34)"

 

 

슬쩍 피해간 느낌이 든다. 신들이 운명을 정하지만 완벽한 그물을 짜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들린다. 그물코 사이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드나들 만하다는 것일까. 인간의 고통을 신의 탓으로 인정하는 신은 없다. 아니 인간 사회는 없다. 인간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는 어떤 규율도 법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물론 읽어 본적도 없고 읽어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귓결에 들은 바로는 스콜라 철학이 죽도록 씨름한 주제가 이성과 신앙의 조화이다. 이성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고, 증명했다고도 믿었으니 그 사유가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아퀴나스가 끝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성 앞에서 펜을 꺾으면서 스콜라 철학은 종말을 맞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스콜라 철학은 신이 인간에게 준 이성이 인간을 잘못된 길로 이끌 수가 없음을 확신하며 이성의 빛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근대의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찾았을까. 인간의 자유의지에 족쇄를 채우고 나선 것은 근대의 과학이다. 뉴턴이 완성한 17세기 과학적 사유의 성과는 "하나의 질서 잡힌 닫힌 우주" 즉 cosmos 이다.  자연이 인과 법칙에 따라 기계처럼 움직인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이다. 인간도 자연의 산물이다. 이 법칙에는 신의 법칙과는 달리 자유의지가 끼어들 틈이 없다. 칸트는 자연법칙과 인간의 자유의지, 양쪽 모두를 구해내기 위해 자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을 나누었다. 이론 이성은 과학을, 실천 이성은 윤리학을 구하는 빛이 되었다.

 

현대는 어떨까?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또 다른 시험에 든 듯하다. 뇌과학에 대한 대중 강연을 들으면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선택이 사실은 호르몬의 분비에 의한 사후적 선택이라는 등의 알송달송한 말들을 한다.

 

공지능 시대는 자유의지의 문제를 한층 어렵게 만든다. 입력한 대로 출력하는 컴퓨터가 아니라 빅 데이터로 스스로 학습하고 사고하는 AI 는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된 주체가 될까. 신과 인간 사이의 자유의지 문제는 인간과 AI 사이의 자유의지 문제로 치환될 지도 모르겠다. AI 시대가 썩 반갑지도 않고, 어떤 모습일지 상상도 힘들고, 아는 것도 없지만,  많은 영화들이 그려내는 디스토피아를 보면 머리가 복잡해 진다.

 

 

 

 

 

 

 

 

 

 

17곡

 

 

 

 

네 번째 둘레에는 태만의 죄를 지은 영혼들이 부리나케 달리고 있다.  선을 사랑했으나 태만하여 이행하지 못한 영혼들이다.  여기서 베르길리우스는 두 가지 사랑에 대하여 말한다.

 

 

 

자연적인 사랑은 그르치는 일이 없지만

이성적인 사랑은 나쁜 목적을 지니거나

넘치거나 모자라서 잘못되는 경우가 있지.

 

사랑이 첫째의 선을 똑바로 향하고

둘째의 선을 스스로 조절하면

사악한 쾌락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이 악으로 기울거나

넘치거나 모자라게 선을 추구할 때

피조물은 창조주의 일을 거스르게 된다.

 

사랑이란 사람들 안에 자리하는

모든 덕행의 씨앗이 되기도 하고

벌을 받아 마땅한 행동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 (94~105)

 

 

 

 

 

 

 

 

 

 

 

18곡

 

 

 

 

단테는 좋은 사랑과 나쁜 사랑을 구분하는 법을 묻는다. 베르길리우스는 인간 이성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답한다. 여기서 이성의 빛에 대한 단테의 사유가 베르길리우스의 입을 빌려 펼쳐진다. 

 

 

 

"나는 이성이 보는 만큼만

설명할 수 있을 뿐 나머지는 신앙의 문제니,

베아트리체를 기다려라.

 

인간의 실체적 형상은 물질과 떨어져 있으나

동시에 물질과 결합되어 있기도 하며,

자체 내에 이성적 능력을 함유한다.

 

이는 그대로는 파악되지 않고 오직

나무의 생명이 푸른 잎으로 증명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작동과 효과를 통해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성의 근본 규칙이

어디서 오는지, 원초적 욕구들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하며,

 

마치 꿀벌이 꿀을 만드는 본능을 갖고 있듯이

사람들도 그런 규칙과 욕구를 안에 지니고 있을 뿐.

그 근본적인 의지는 칭찬이나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다른 의지들은 이 근본적인 의지에 부합하고,

사람들은 충고하는 이성의 타고난 능력을 지녔으니

합의를 나오게 하는 문턱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좋고 나쁜 사랑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기본 원리다.

 

이성의 깊이를 실증한 사람들은 이러한

타고난 자유를 알았기에

세상에 윤리를 남겼다. 이제

 

사람 안에 타오르는 사랑은 모두

필요에 따른 것이라 생각하자. 사람들은

그런 사랑을 지탱할 힘을 아직 지니고 있으니,

 

이러한 고귀한 힘을 베아트리체는

지유의지라고 알고 있을 터이니, 그분이

너에게 이런 말을 하거든 잘 명심하여라!" (46~75)

 

 

 

 

 

<아테나 학당 中. 라파엘로>

 

 

 

 

형상과 질료(물질)가  하나로 합쳐져서만 드러난다고 하는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Usia 개념과 비슷한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형상은 이데아의 세계에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안에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반대하고 눈앞의 사물에서 진리를 추구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일원론적 세계관을 제시한다. 

 

스콜라 철학은 12세기에 새롭게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완성된다. 잘은 모르지만 『신곡』에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로 그리고 단테로 이어지는 사상의 흐름이 드러나는 듯하다.

 

 

 

 

 

 

 

 

19곡

 

 

 

 

다섯 번째 둘레에는 탐욕의 죄를 지은 영혼들이 엎드려 통곡하고 있다.

 

 

 

탐욕은 선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망쳐 버렸고

사랑 없는 삶은 헛된 것이었소. (121~122)

 

 

 

 

 

 

 

 

 

20곡

 

 

 

 

 

 

 

 

 

프랑스의 카페 왕조를 개창한 위그 카페가 유럽의 탐욕스러운 군주들을 개탄한다. 

 

 

늙어 빠진 탐욕의 암늑대여, 너 하느님의 심판을 받길! (10)

 

 

 

<지옥편> 1곡의 검은 숲속에서 단테를 막아 선 세 마리의 짐승들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처음으로 나오는 부분이다.

 

 

 

 

 

 

 

차이나는 클라스와 EBS 강의의 자료 화면이 다르다. 같은 강사의 강의여서 조금 혼란스러웠는데, 20곡 10행에 의하면 암늑대는 음욕이 아니고 탐욕의 상징이다.

 

 

 

 

 

 

 

 

21곡

 

 

 

 

다섯 번째 둘레에서 순례자는 베르길리우스를 흠모하는 로마의 시인 스타티우스를 만난다.  스타티우스는 베르길리우스를 "나의 어머니, 내 문학의 유모" 라고 찬양한다.

 

스타티우스는 죄를 모두 씻어내고 영혼이 깨끗해 졌는데, 이때 온산이 진동한다.

 

 

 

이 산의 진동은 어떤 영혼이 깨끗해졌음을

느끼고 몸을 일으켜 세우거나

단번에 위로 올라갈 때 생깁니다.

 

오직 올라가려는 의지만이 영혼의 정화를 증명하며,

정화된 영혼은 자기 자리를 바꿀 정도로

자유로워진 의지를 갖게 되는 거지요.  (5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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