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 요나

 

 

 

'고래' 뱃속의 요나는 아니라고 한다. 히브리어 '닥 가돌' , 어떤 큰 물고기, a big fish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고래를 떠올리게 했을 뿐이다.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할 때 대적했던 왕 역시 '파라오'이었을 뿐인데, 람세스2세로 자동 변환되어 온 것처럼 말이다.

 

이 이야기는 예언자의 소명, 혹은 종교인의 그리고 사람들의 소명에 관한 성찰이다.

 

 

 

 

 

요나는 하느님을 거슬러 도망을 갔다.

 

 

 

 

 

 

 

 

손오공의 부처님 손바닥처럼 요나도 하느님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소명을 받는다. 한번 죽었다 살아나서 참된 깨달음과 실천에 나선 것이다.

 

 

 

 

 

 

 

요나가 처음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에게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인은 확신에 찬 사람이 아니다. 종교인은 "믿습니까?" 라고 하지 않는다. 요나는 과묵하고 머뭇거리고 질문하는 사람이다. 그 머뭇거림은 성찰이다.  신은 확신에 찬 사람이 아니라 요나같이 의심하는 사람에게 온다.  확신은 신의 것이고, 머뭇거림은 인간의 것이다.

 

 

 

 

 

 

 

소명 (召命)은 '보카치오' 라는 라틴어에 뿌리를 둔다. 영어로 vocation은 소명, 직업, 천직 등으로 쓰인다. 하느님이 불러 일을 맡기는 것, 혹은 그 일이다.

 

요나는 하느님의 소명의 의미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신의 행위의 올바름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세상을 거슬러 힘들게 외쳐야 했다.

 

모든 직업에는 이런 차원이 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을 거슬러야 했던 것처럼 권력자에 맞서야 할 때가, 요나가 선원들에 들려 바다에 빠져야 했던 것처럼 평범한 이웃들과 대결해야 할 때가, 바다와 풍랑이 요나를 삼켰던 것처럼 자연적 재난에 휩쓸릴 때가, 큰 물고기 속에 요나가 갇혀야 했던 것처럼 예상치 못한 어떤 운명이 덮쳐 올 때가 있다. 직업이 소명이라면 세상에 거슬러 그 천직을 지켜야 할 때가 있다.

 

 

 

교회는 "믿습니까?"에 "믿쑵니다."로 합창하는 곳이 아니다.  종교가 없는 나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른다.  막연히 한 줄기 빛 속에 무릎 꿇은 한 사람의 흔들리는 눈빛과 뜨거운 눈물이 떠오를 뿐이다.

 

 

 

 

 

 

 

 

13강 엘리야

 

 

 

엘리야는 유일신교의 토대를 닦은 예언가이다. 고대 근동 다신교의 시대에 엘리야는 오직 야훼 하느님에 대한 '유일 섬김'을 주창했다.

 

 

 

 

 

유일신교는 유대교가 처음이 아니다. 고대 이집트의 신왕국 시기에 아텐(아톤?) 신을 숭배하는 유일신 개혁이 있었다.

 

 

같은 프로그램인 클래스e에 열 개의 강으로 구성된 <고대 이집트>라는 강의가 있다. 국내 유일의 '이집트 고고학자'라고 소개된 곽민수 소장의 강의이다.  주원준 강의에 잠깐씩 소개되는 이집트와 조금 다른 부분도 있는데, 아케나텐 개혁과 관련하여 인용하려 한다.

 

 

 

 

 

 

 

 

 

신왕국의 14세기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시대인데,  유일신 개혁이 일어난 것이 이 시기다.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 아멘호테프 4세가 본격화 하였다.

 

 

 

 

 

 

 

 

 

태양신의 상징이던 태양 원반을 따로 떼어 내어 '아텐' 신으로 모셨다. 원반 아래로 태양 빛살이 퍼져 나가고 그 끝에는 손들이 그려져 있다. 아멘호테프 4세는 스스로를 아케나텐이라고 불렀다.

 

 

 

 

 

 

 

 

아텐신 이외의 모든 신들을 없애고, 신전을 폐쇄하였다. 아텐신에 대한 제사도 신관이 아니라 파라오와 왕족이 직접 모셨다. 신전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이집트 경제는 마비되었고, 신관들을 중심으로 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도굴되지 않은 유일한 무덤의 주인, 소년왕 투탕카멘 시대에 이미 아케나텐의 유일신 개혁에 대한 흔적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긴 이집트의 역사에서 유일신 사상은 오직 아케나텐의 통치 약 20년간의 아주 짧은 시간에만 존재했을 뿐이다.  

 

 

 

 

 

 

 

 

다분히 감정적인 적의가 묻어나는 아케나텐 없애기 작업은 다양한 유물에서 발견된다. 심지어는 아케나텐의 미이라에서도 그 얼굴과 이름이 지워져 있다.

 

 

 

 

 

 

 

 

유일신 개혁이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오랜 전통과 관습을 무시한 파라오의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추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개혁은 이집트 신왕국을 내분으로 몰고 갔고, 이후 막강했던 신왕국의 국력은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집트보다 300~400년 이후에 발생한 이스라엘의 유일신 개혁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큰 차이라면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에 대항하여 탄압을 받으면서 유일 섬김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아합은 야훼를 배척한 왕이 아니었다. 아합은 야훼도 믿고 바알도 믿은 것이다. 전쟁을 나갈 때는 야훼를, 풍요와 치유를 위해서는 바알을 섬겼다. 다신교는 고대 근동의 관습이었고, 이웃 국가들과의 교류를 위해서도 다양한 신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아합은 폭군이 아니라 유연하고 합리적인 통치자에 가깝다.

 

 

 

 

 

 

 

엘리야는 이에 반대하여, 유일 섬김만을 강조했다.  수많은 야훼 사제들이 모두 바알을 받아들였을 때도 끝까지 야훼만의 사제로 혼자 남았다. 유일 섬김으로 번역하는 Monolatria의 latria는 예배하다, 섬기다란 뜻이다.  엘리야의 시대에는 다른 신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만을 섬기라고 했던 것이다. 유일 섬김은 후대에 유일신론으로 발전한다.

 

엘리야는 반만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님을 설파했다. 세상 물정에 맞추어, 편리한 대로, 이익을 쫓기 시작하면, 원칙은 무너지고 만다. 아합은 야훼 신앙을 탄압했기 때문에 악인이 아니다.  적당히 믿자는 달콤한 유혹을 퍼뜨렸기 때문에 악인인 것이다. 이 신, 저 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면 야훼는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14강 예레미야

 

 

 

구약 성경의 독특함을 보여주는 것 중의 하나가 예언자들이다.  고대 근동의 대다수 예언자들이 통치 도구로서의 기능을 했다면,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언자들은 왕들에게 저항하고 백성들의 잘못을 질책하였다.

 

 

 

 

 

 

고대 유물과 기록에 나타난 예언들을 보면, 재미있는 의문이 하나 생긴다. 예언가들이나 통치자들은 예언을 믿었을까? 안 믿었을까?

 

이집트에는 '사후 예언'이라는 장르가 있다.  예언이 있고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건에 맞추어 예언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건을 합리화하거나 통치에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예언을 믿었던 것일까?  예언을 선전의 도구로 이용했으니, 피통치자들은 믿었다는 뜻일 것 같고,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던 통치자는 믿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신아시리아 제국에는 담키라는 관행이 있었다.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 점을 쳤는데, 점괘가 나쁠 때는 대리 왕인 담키를 내세웠다. 담키를 즉위시킨 후 죽여 버림으로써 흉한 점괘가 실현된 것으로 간주하고 좋은 점괘가 나올 때 진짜 왕을 즉위시키는 방법이다.  이들은 예언을 믿은 것일까?  믿기는 했지만, 인간의 힘으로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해가 바뀌면 토정비결부터 각종 동양 철학이 성행한다. 단순한 놀이라기에는 진지하게 몰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는 유명한 예언가들이 지옥의 깊은 고리에서 단죄를 받고 있다. 그렇게도 앞을 보고 싶어 했던 예언가들은 얼굴이 등쪽으로 돌아가 뒤만 보고 걷고 있다. 점집에 앉아 미래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사실 앞을 보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강의의 요점은 다른 곳에 있다. 믿고 안 믿고의 문제는 아니다. 강사가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은 예언을 믿었을까? 안 믿었을까? 질문해 볼 수도 있다.

 

고대 근동의 다른 예언들과의 차이점이 결정적이다. 문서로 남은 예언서들은 모두 저항하는 예언자들의 것이다. 통치의 도구로 동원된 예언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지워지고, 왕과 백성을 질타하는 예언들만 기록되어 전해진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상식과는 정반대의 역설이다. 기록의 역전이다.

 

 

 

 

 

이유는 이스라엘이 망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신아시리아에, 유다는 신바빌로니아에 망했다.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기원전 6세기 무렵에 구약 성경이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역사>

 

 

유배된 백성들과 나라 잃은 백성들은 철저한 반성을 통해 기록을 남겼다. 왕권을 지지하던 예언자들이 틀렸고, 왕에 저항하던 예언자들이 맞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히브리인들은 나라가 망했지만, 그들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망국의 원인을 성찰한 후 지배자들을 역사의 비주류로, 저항하며 탄압받던 예언자들을 역사의 주류로 뒤바꿈으로써 믿음을 고수했다. 신이 틀린 것이 아니라 신의 말을 듣지 않았던 통치자와 백성들이 틀렸음을 공인했다.

 

망국의 유배 생활에서 이렇게 부활한 예언가가 예레미야다. 예레미야는 친이집트 파와 친바빌로니아 파가 나뉘어 다투던 혼란기에 파벌 싸움에 휘말려 희생된 비운의 예언가이다. 그러나 유배 생활 중 제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이스라엘 조상의 대표가 되었다.

 

 

 

 

 

 

15강 욥

 

 

* 1월 26일에 올라 온 15강 '욥'을 덧붙입니다.

 

 

 

<욥기>는 유명하여서, 나도 몇 번이나 읽어 보았다. 그런데 도무지 알쏭달쏭했다.  첫째는 세 친구들과 욥의 말 중 누가 옳은지 판단이 힘들었다. 욥이 잘못 한 것은 없는데, 세 친구가 또 딱히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둘째, 야훼는 왜 욥을 옳다고 하는가 였다.

 

욥과 친구들의 격론이 끝난 다음에 나타난 야훼는 떠들석하게 욥을 꾸짖는다. 한마디로 한갖 미물이 뭘 안다고 신의 일에 따따부따 말이 많냐는 것이다. 이때 야훼의 말은 조금 아이 같다. 나는 이런 이런 존재다라며 과시하는데, 땅과 바다와 어둠과 빛과 하늘과 동물, 이런 것 모두 내가 만들었고 내가 먹여 살린다. 무시무시한 브헤못, 레비아탄도 내가 만들었다. 그때 너는 뭐했느냐? 는 식이다. 일종의 동문서답이다.  올바르게 산 사람에게 신은 왜 고통을 주는가? 라는 질문에는 일절 답하지 않는다.

 

 

 

 

 

더욱이 이렇게 욥을 야단친 다음에, 오히려 욥이 옳고 친구들이 틀렸다고 판결한다. 이유는 없다. 그냥 그렇게 이야기가 끝난다.

 

<욥기>는 발상 자체가 기이하다.  욥의 모든 고통은 하느님과 사탄의 내기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욥을 시험하기 위해 하느님은 사탄에게 욥을 넘긴다. 처음 읽는 순간, 하느님이 이래도 되는가?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것보다는 히브리인들이 감히 이런 불경한 생각을?, 깜짝 놀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욥기>는 기묘했다. 

 

 

 

 

 

<구약의 사람들>의 마지막 강의를 오래 (?) 기다렸다.  1월 23일에 업로드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1월 26일에야 되었다. <욥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리란 기대가 마음을 급하게 했다.

 

 

 

 

 

<욥기>는 말하자면 원본이 있는 이야기다. <바빌론 신정기> 혹은 <바빌론 욥기>라고 불리는 텍스트가 바빌로니아에 있었다. 이야기 구조도 거의 유사하다. 내용도 심지어는 세부적 표현도 그렇다. 구약성경의 <욥기>는 아마 바빌론 유수 때 읽고 들은 이야기를 야훼 신앙에 맞춰어 변형한 것으로 보인다. 욥이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식이 아니다.

 

 

 

 

 

<욥기>는 세상의 부조리, 이유 없는 고통, 의인의 고난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다. 욥과 세 명의 친구들은 논쟁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나름의 관점을 제시한다.  욥은 억울함을 토로하고, 친구들은 위로하는 듯하지만 욥에게 신의 노여움을 살 잘못이 있었을 것이라 전제한다. 논쟁은 격화되어 서로 막말을 주고 받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위로를 하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친구들은 악인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의 논리에는 정의로운 신이 주관하는 세계에서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할 리가 없다는 인과응보의 관념이 내재되어 있다. 피해자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욥은 아니라고 하지만, 네가 모르는 잘못이 분명히 있으니 찾아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을 당한 사람이 스스로 자기 죄를 찾게 만드는 무서운 논리가 친구의, 조언자의, 현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교종 프란치스코가 경계의 말씀을 하셨다. "은총의 톨게이트처럼 행동하지 마세요." 신의 말을, 신의 뜻을 안다고 행세해서는 안된다.  판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인간은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까지 하면 된다. 나머지는 신이 직접 하신다.

 

세상은 권선징악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세상은 부조리하다. 하느님은 까닭없이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욥은 사탄의 계략에 걸려든 것뿐이다.  이 부조리를 받아들일 때에만 일어설 힘이 생길 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카인은 말없이 아벨을 죽였다. 끝까지 죄 없음을 강변한 욥은 어쩌면 이런 세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세상을 만든 하느님을 배신하지 않았다. 다만 할 말을 했을 뿐이다.

 

 

 

 

 

 

<바빌론 욥기>와 구약의 <욥기>는 흡사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바빌론 욥기>는 욥과 친구들의 대화로 끝이 난다. 이 대화에는 부조리한 세상과 이런 세상을 만든 신에 대한 은근한 비판이 있다. 바빌로니아는 이런 비판도 수용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문명이었다.  <바빌론 욥기>는 인간들의 담론, 철저히 인간들의 철학이다.

 

구약의 <욥기>에는 야훼가 직접 등장한다. 구약 성경에서 야훼가 가장 길게 말하는 것도 <욥기>이다. 신은 성가신 인간들에게 일일이 설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짜증스러운 듯하다. 그런데 말씀하신다.

 

 

 

 

네가 받고 있는 고통이 이유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세상이 모두, 친구조차 인정하지 않더라도, 너의 의로움을 나는 알고 있다고, 신이 말씀 하신다.

 

<욥기>의 반전은 여기에 있다. <바빌론 욥기>와의 결정적 차이가 이것이다. 세상이 알아 주지도 않고, 오히려 고통만 당한다고 하더라도, 너의 올바름을 알아 주는 신은 있다. 그러니 불합리한 세상에 걸려 넘어지지도 말고, 너의 잘못을 찾아 자책하지도 말고, 그냥 올바르게 살아가면 된다는 위로가 있다. 올바름을 잃지 않을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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