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은 구약 성경에 없는 우가릿의 일리말쿠 이야기다. 이를테면 번외 편인데, 우가릿은 이스라엘이 건국 되기 전에 번성했던 작은 도시국가이다. 길지 않은 강의에 3000여 년 전에 사라진 우가릿을 다루는 것은 이스라엘과 야훼 신앙에 끼친 영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화이자 역사이기도 해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고난을 겪으며 나라를 일으키는 과정은 고대 근동의 역사와 맞물려 전개 될수 밖에 없었다.

 

 

 

 

 

  

강사 주원준은 고대 근동학 전공자로서 EBS <명강>에서 "고대 근동 3천 년과 이스라엘"이라는 제목으로 여덟 강에 걸친 흥미로운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구약의 사람들> 11강은 이 강의를 참고하여 정리하려 한다.

 

 

 

 

 

 

1. 고대 근동

 

 

 

 

 

 

 

 

 

지도에 나타난 지역이 고대 근동의 공간적 배경이다. 근동이라는 명칭은 서구 중심적이라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고대 근동학'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연구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이 분야의 학술 용어로서는 사용되고 있다. 중등 세계사에서는 서아시아 역사로 다루는 지역이다.  

 

 

 

 

 

 

  

 

시간적으로는 청동기 문명이 발생한 기원전 3,500년 경부터 페르시아 제국이 멸망한 기원전 300년 무렵까지이다.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삼천여 년 동안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주로 강대국들이, 그 사이의 시리아-필리스티아는 약소 국가들이 명멸했다.

 

 

 

 

 

 

 

 

 

대략 보면 메소포타미아의 북부에는 아시리아, 남부에는 바빌로니아, 그리고 나일강 유역에는 이집트가 강대국으로 자리잡았다.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과 발칸 반도, 페르시아만 유역은 문명의 변방 지대로 강대국들의 영향권 아래 여러 민족들과 작은 나라들이 다투었다.

 

 

 

 

  <세계의 역사>

 

 

 

 

윌리엄 맥닐의 <세계의 역사>에 따르면, 기원전 1700년 직후와 기원전 1200년 직후 두 차례에 걸쳐 유라시아 문명의 전역에 유목민의 대대적인 침략이 있었다. 이 침략은 유럽에서 중국까지 대규모의 세력 교체와 문명의 교체를 가져왔다.  

 

 

 

 

 

 

 

 

 

첫 번째 침략으로 이집트는 힉소인의 지배를, 바빌로니아는 카슈트인의 지배를 받았다. 문명의 뿌리가 깊었던 이 지역들은 얼마 후 이민족의 지배를 물리쳤고, 이민족의 통치기에도 고유의 문명을 지켜낼 수 있었다. 침략자들이 오히려 발전된 이집트 문명과 바빌로니아 문명을 적극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창세기에서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 간 것도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힉소스인을 특정 민족이 아니고 시리아-필리스티아 혼종 민족으로 본다면 이 시기 많은 유랑민들이 이집트에 들어가 정착했을 것이다. 이집트 문화에 완전히 동화된 요셉에 대한 묘사도 힉소스인의 이집트화라는 역사적 사실과 잘 들어맞는다.

 

기원전 1500년 이후 고대 근동은 복잡한 역학 관계 속에서 이집트의 신왕국, 아나톨리아 반도의 히타이트,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미타니)가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힉소스인을 몰아낸 이집트는 적극적으로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에 진출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이민족의 침략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이집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히타이트 역시 시리아-필리스티아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기원전 1274년, 이집트 신왕국과 히타이트는 카데쉬를 두고 최초의 세계 대전을 벌인다. 강대국들은 주로 작은 국가를 통해서 싸우거나, 소규모의 국지전 형태로 다투어 왔는데, 처음으로 두 강대국이 직접 총력전을 벌였기 때문에 세계 대전이라 부른다.  

 

카데쉬 전투는 공식적으로는 승패없이 평화 조약으로 끝났지만, 이후 히타이트는 급속히 쇠퇴하여 멸망했고, 이집트 신왕국도 점차 쇠퇴하면서 고대 근동의 세력 균형이 무너졌다.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것도 이런 근동의 세력 변화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기원전 1200년 직후 농경사회는 또 한번 대대적인 유목민의 침략을 받았다. 새

로운 무기인 철기가 등장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Sea People'이 바다에서 몰려 왔다.  암흑기라 부를 만큼 철저한 파괴와 단절이 있은 후  새로운 국가들과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였다.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에 페니키아인, 아람인, 이스라엘인, 필리스티아인들이 새롭게 정착하였다.

 

 

 

 

 

 

 

 

역사 기록에서도 이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라는 표기가 람세스 2세의 아들 메르넵타의 비문에서 최초로 확인되었다. 국가가 아니고 민족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광야에서 막 들어왔거나, 판관 시대 정도로 추정된다. 

 

히브리인들은 기원전 11세기 무렵 처음으로 국가를 건설했다. 기원전 1000년 이후 고대 근동은 새로운 안정을 찾으며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 들었다.  패권은 신아시리아 제국  → 신바빌로니아 제국 → 페르시아 제국으로 이어졌다.  건국 직후 짧은 풍요를 누렸던 이스라엘은 새로운 시련을 맞았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 되었다가, 신아시리아 제국과 신 바빌로니아 제국에게 각각 멸망하였다.

 

 

 

 

 

 

 

2. 우가릿과 바알 신앙

 

 

우가릿은 기원전 12세기 이전에 시리아-필리스티아 지방에 번성했던 도시 국가이다.  풍요로운 항구 도시로 군사력은 약했으나, 발달된 문화를 꽃피웠다. 기원전 1200년 직후의 '파괴와 단절' 로 이 지역의 다른 많은 도시국가들과 함께 소멸했다.

 

 

 

 

 

 

 

1928년 시리아에서 삼천 년간 땅 속에 묻혀 있던 우가릿의 지하 무덤이 발굴되었다. 쏟아져 나온 토판에서 우가릿의 독자적 문자와 풍부한 전승이 발견되었다. 우가릿어는 살짝 변형된 아카드어인데, 문법이 히브리어와 매우 유사해서 요즘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우가릿어를 배워야 할 정도라고 한다.  문학적 완성도가 놀라운 신화들이 여럿 발견 되었는데, 구약 성경에는 죄악시 되고 있는 바알 신의 이야기가 풍부하고, 구약과 표현법이 비슷한 내용들이 매우 많다.

 

흡사한 문법과 비슷한 이야기 등 구약에 스며든 우가릿 문화의 흔적을 연구해 보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군사력은 약하나 경제와 문화가 발전했던 우가릿 같은 국가를 이스라엘이 국가 건설의 모델로 삼지 않았나 추정할 수 있다.

 

 

 

 

 

 

 

우가릿 토판들 중 최고의 문학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바알 신화>, <아크하루 서사시>, <키르타 이야기>는 모두 일리말쿠라는 사람이 쓴 것이다. 그의 긴 직함을 보면, 왕의 고위 관리이자, 대사제이며, 서기관이다.

 

 

 

 

 

 

 

 

<바알 신화>를 보면 우가릿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종합적임을 알 수 있다. 인간과 종교, 정치와 외교를 통합하여 보려했던 태도가 이스라엘의 신화에도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구약 성경도 세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뚜렷이 드러난다.

 

 

 

 

 

 

 

바알은 풍우신이다.  고대 근동의 건조 지대에서 비와 바람은 풍요의 상징이다. 하다두, 테슈브, 타르훈자, 토르 등 민족마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히브리인들도 시리아-필리스티아 지방에 정착하고 농사를 짓게 되자 바알신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야훼만을 섬겨야 하는 히브리인의 신앙과 바알신 숭배는 공존하기 힘들다.

 

 

 

 

 

 

 

 

야훼 신앙을 보통 유일신교라고 하는데, 강사 주원준은 'monotheism' 즉 '다른 신은 없다'라기 보다는 'monolatry', 한 분만 섬기라는 '유일 섬김'이 더 적합하다고 말한다.

 

 

 

 

 

 

 

 

유랑하는 민족이 아니라 정착하여 국가를 건설한 이스라엘의 왕들은 다른 신을 받아들이려 하는 경향을 보인다. 주변 국가들과의 외교가 종종 신들의 교류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농경과 외교 등에 있어서 유일 섬김 보다는 다신 숭배가 유리했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갈등이 구약 성경 곧곧에 드러난다.

 

므나쎄, 아합과 이제벨, 엘리야의 카르멜산 전투는 이 갈등을 잘 보여준다. <모비딕>의 주인공 에이허브 선장의 모델인 아합은 바알 숭배로 엄청난 비난을 받아 왔지만, 아합의 주장은 야훼 대신 바알을 믿자는 것이 아니라 야훼도 믿고 바알도 믿자는 것이다.

 

 

 

 

 

 

 

이슬라엘이 우가릿을 본보기로 삼았고 구약 성경도 우가릿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우가릿이 많은 신들을 숭배했던 반면 이스라엘은 끝까지 야훼 유일섬김을 고수했다는 점이다.

 

 

 

 

 

 

 

 

유일 섬김 사상은 이후 하느님을 이스라엘 민족의 신에서 세계의 유일신으로 확장하는 밑바탕이 된다. 

 

이스라엘과 우가릿의 또 하나 큰 차이점은 바알 신화에는 역사적 배경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야훼는 역사에 임하여 직접 개입하는 신이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면밀히 읽으면 역사적 사실과 일치시킬 수 있는 부분이 많지만 우가릿의 신화에서는 찾을 수 없다.

 

 

 

 

 

 

 

다양한 신을 통해 다양한 소망을 기원했던 고대 근동 사회에서 오직 야훼만을 섬겼던 독특한 히브리인의 역사와 그런 자기 백성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는 독특한 야훼신의 이야기는 남은 네 개의 강의에 계속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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