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 정암고전총서 플라톤 전집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아카넷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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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logia를 '변명'이라고 번역해야 하는지 '변론'이라고 해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일반적이지만, 언젠가부터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적절하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이 책은 '변명'을 옹호하는 철학과 교수 강철웅의 2020년 번역판이다.

 

 

 

변명(辨明)은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말함' 또는 '옳고 그름을 가려 사리를 밝힘' 을 의미한다.  변론(辯論)은 '사리를 밝혀 옳고 그름을 따짐' 또는 '소송 당사자나 변호인이 법정에서 주장하거나 진술함. 혹은 그런 주장이나 진술'을 뜻한다.  두 단어 모두 '옳고 그름을 따지고 사리를 밝힌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사실상 같은 말이다. 

 

 

 

 

 

 

<미주7>

 

 

 

학술적 논쟁인지 아닌지조차 모르겠지만, 문제는 단어의 미묘한 뉘앙스에 있는 것 같다. 변명은 잘못에 대한 인정이라는 통념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주장과 배치되고, 변론은 말을 잘한다는 느낌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의도와는 어긋난다. 소크라테스는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덕(德)이라고 말한다.

 

 

 

 

<미주7>

 

 

 

변명과 변론의 '변'은 한자가 다르긴 하다. 변명은 '분별할 辨', 변론은 '말잘할 辯'이 쓰인다.  변명이 되었건 변론이 되었건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옳고 그름을 가리고' 무엇의 '사리를 밝혔'는가 이다. 

 

 

 

 

 

 <작품안내>

 

 

 

고전은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책은 내용이 핵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작품의 구성도 눈여겨 보려고 노력한다. 고전은 첫 문장이나 서사(序詞)에 주제가 축약되어 있다.  고전 강의에서 강유원 선생은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 책의 전체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해서 그 분노가 해소되는 것으로 끝난다.  호메로스는 이 철없는 영웅의 분노를 따라가며 한 인간의 성장과 트로이 전쟁의 전말과 인간세계는 물론 신의 세계까지 모두 담아낸다.

 

 

 

 

 

<17a 주> 

 

 

 

 

『소크라테스의 변명』(이하 『변명』)은 '모른다'로 시작해서 '모른다'로 끝난다.  소크라테스의 명언은 '너 자신을 알라' 이다. (물론 이 명언의 출처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이고,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비틀어 써먹었다.)  그런데 정작 소크라테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할 때, 진짜 아무것도 몰라도 단 하나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든 '모른다'에는 이 앎이 내포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잘못 알고 있거나, 아예 그 대상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의 지혜롭다고 소문난 시민들을 한 사람씩 찾아다니며  소위 논박술을 구사하여 막다른 골목으로 끝까지 몰고가 실토하게 만든 단 하나의 진실도 바로 '나는 모른다' 이다. 소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 에는 생략된 것이 있는데, '무지' 이다.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

 

이 '너'에는 소크라테스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모든 인간이 알아야만 될 단 하나의 진실이 바로 무지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깨닫게 만드는 것이 신이 부여한 자신의 소명이자 아테나이 시민에 대한 자신의 봉사라고 말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는 자는 거의 없다. 수많은 청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참하게 논박당하여 어쩔수 없이 승복했다 하더라도 가슴속에는 불타는 증오가 이글거릴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 시민의 분노와 적개심이 생명의 위협이 됨을 잘 알고 있었고, 심지어는 그 때문에 칠순의 나이에 재판정에 불려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 소명과 봉사를 포기하지 않는다.

 

피고 진술 즉 항변(apologia) 자체를 일종의 논박으로 바꾸고, 배심원에 대한 호소를 아테나이 시민에 대한 마지막 유언으로 삼아서, 소크라테스는 무지에 대한 지를 역설한다.

 

 

 

 

<해설>

 

 

왜 '나는 모른다' 에서 시작해야 하는 걸까?  앎의 출발선이기 때문이다. 신은 앎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지에 무지한 자는 앎을 갈망하지 않는다.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 소크라테스적 맥락에 접목해 보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인간이라면 앎을 욕망한다.  앎에 대한 욕망은 無知에 대한 知에서 시작되니, 인간이라면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야 한다.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경구, "너 자신을 알라."는 신이 아니라 한갓 인간임을 잊지 말라는 신의 경고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경구의 숨은 뜻을 멋지게 바꾸어 놓는다. 인간은 한계가 아니라 가능성이다. 자신의 무지를 깨달음으로써 인간은 동물적 한계에서 벗어나 신적 앎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인간은 동물과 신의 중간자이다. 신이 될 수는 없지만 신을 향할 수는 있다.  육체의 불로와 영생이 신적인 것이 아니라, 궁극의 앎이 신적인 것이다. 앎을 추구한 인간의 학문이  philo-sopia로 불린 것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지혜를 사랑하는 중간자인, 인간의 운명을 포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42a 주>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세 번의 연설을 한다. 첫 번째는 유무죄에 관련된 항변 연설이다. 배심원으로 구성된 재판관들은 유죄를 결정한다. 둘째 연설은 형량 제안 연설이다.  원고가 형량을 제안하면, 피고는 대안 형량을 제시한다. 배심원들은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아테나이 시민들에 대한 훈계와도 같은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연설은 원고가 제안한 사형이 채택되게 만든다. 재판이 끝난 후 행정 절차를 밟는 잠깐의 빈 시간 동안 소크라테스는 사형 투표자와 무죄 투표자에게 각각 마지막 연설을 한다.

 

 

"아니, 벌써 떠날 시간이 되었군요. 나는 죽으러, 여러분은 살러 갈 시간이. 우리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일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신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분명치 않습니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연설을 끝맺는다. 신이 아닌 인간은 삶이 좋은지 죽음이 좋은지 모른다. 아테나이라는 덩치 크고 굼뜬 말(馬)의 등에가 되기로 결심한 소크라테스는 전 생애를 '나는 모른다' 를 위해 살았고, 그의 사형을 선고한 재판정에서의 연설 또한 '나는 모릅니다'로 시작해 '그 누구에도 분명치 않습니다.' (누구도 모른다)로 끝낸다.

 

 

 

『변명』은 고전의 전형적 구조인 ring composition이며, 이 원환 구성은 소크라테스 사상의 거의 유일한 핵심인, 無知의 知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른다.'는 부끄러운 고백이 아니다. 앎이 최고의 덕인 진정한 인간이 되겠다는 존엄한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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