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기독교보다는 불교적 세계관에 더 끌리는 편입니다. 苦集滅道. 중생을 깨우침은 에 있을 것이지만 문득문득 한순간에 에 이르기를 갈망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인생의 리셋버튼을 누르는 것에 대한 갈망' 이 아니라 우주의 티끌로도 남고 싶지 않은 소멸에의 갈망입니다.

신천지를 잘 모르지만 귓결에 들은 말로는 12지파와 십사만 사천 명. 요한 묵시록에서 구원을 약속한 하느님의 종들입니다. 현실에서는 출구가 없지만 약속된 그날이 오면 맨 먼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 과연 그것을 진짜로 믿고 있는 것일까요?

근대의 밤하늘은 별이 없다고 합니다. 가야할 길의 지도가 되어주던 별이 없는, 이 없는, 깜깜한 길을 걸어야 하는 근대인은 눈앞의 욕망을 쫓습니다. 눈앞에 있는 것들은 유한한 물질입니다. 나눌수록 커지는 사랑도, 나눌수록 아름다운 선함도 아닌 이 슬픈 물질은 더 많이 움켜쥐어야만 빛이 납니다. 별빛은 아니어도 삶의 길을 밝히는 불타는 욕망의 덩어리입니다.

하늘에 별도, 손아귀에 돈도 없는 인간들은 무의미한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붙잡아야 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사기꾼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십사만 사천 명이 함께 잡으려는 지푸라기는 금강석보다 더 단단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칠십팔억의 인간이 움켜쥐려 목숨을 거는 부가 지푸라기와 다르기는 한 것일까요?

인간의 역사는 지푸라기의 역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푸라기가 욕망이 되고 욕망이 별이 되어 인간은 무엇인가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꿈이 없는 인간은 인간일 수 없으니까요. 헛 꿈이든 가짜 꿈이든 그런게 있다면 진짜 꿈이든,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만들어 주는 것이 꿈입니다. 철학(형이상학)이, 종교가, 혹은 사이비 종교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인간의 꿈 때문일테니까요.

은 두려운 갈망입니다. 하지만 를 닦아 업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삶은 영원회귀하며 에 이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산다는 것입니다. 삶은 길 위에 있고 그 길은 걸어보지 않고는 알 수도 없고 끝나지도 않습니다. 천국을 예약하는 리셋 버튼이란 것도, 단숨에 이르는 도 없습니다. 겪어야 할 것들을 겪고 싸워야 할 것들과 싸우고 두려워해야 할 것들에 얼어 붙으며 그 끝에 다다랐을 때 그때 아마도 무엇인가가 보이겠지요.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 찰나의 순간 누추했던 삶의 의미도 드러나겠지요. 신적 앎이란 것이 있기를 바랍니다. 는 파토스인 것 같아요. 희랍인들이 즐겨 말했다는, 파테이 마토스.

 

리셋 버튼 없이, 천국에의 환상없이 滅에 이르기 위해 소소한 삶에 정성을 기울입니다.

 

 

 3부 시대를 읽는 주제 서평들 _ 근대와 정치 그리고 인간

    4. 열린 지향점으로서의 이념과 독단 : <약속된 장소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