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칸트를 공부하였습니다.

 

칸트는 계몽주의 철학의 완성자입니다. 하지만 흄에 의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난 칸트는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자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교재에는 "계몽사상을 계몽 사상 자신의 끊임없는 의문으로부터 구해내었다."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칸트의 계몽주의에 대해서는 독일 계몽철학 잡지인 <베를린 월보>에 실린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 이라는 에세이를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칸트는 계몽을 '미성숙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이라 하였습니다. 편견이나 미신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계몽의 주체는 이성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이성은 '보편적 인간 이성' 입니다. 칸트는 인간은 누구나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보편 이성). 모든 사람이 진리의 담지체라는 생각에는 18C 프랑스혁명에 나타난 평등 사상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칸트는 콩도르세와는 달리 인간 이성이 완전 가능성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인간 이성). 인간의 이성은 오류 가능성을 지닌 부분적 이성입니다.  계몽을 통해 진리에 접근할 수는 있지만 진리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한계로 인해 인간 개개인은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이며 이런 소통과 공감의 과정을 통해 보다 나은 합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칸트의 보편적 인간 이성이라는 개념은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기반이 됩니다.

 

칸트의 철학은 비판(Kritik) 철학입니다. 칸트에게 비판이란 '한계를 명료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칸트는 합리론자들과 같이 인간의 타고난 선험적 이성을 인정합니다. 칸트는 경험에 의해 물들지 않은 선험적 이성을 순수 이성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앎이란 혼잡한 감각자료에 대한 직관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 면에서는 경험론과 인식을 같이 합니다. 칸트가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가진 감성의 직관능력과 12개의 범주 형식을 가진 오성의 개념(인식)능력의 종합 작용으로 우리는 대상물에 대한 앎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앎은 뚜렷한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순수이성은 직관에 의해 나타난 '현상' 에 대해서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물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1차원적 시간과 3차원적 공간 그리고 12개의 범주를 벗어난 물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감성과 오성의 능력을 벗어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인식이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간의 인식을 따른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가 대상에 대해 인식한 것은 순수 이성이 구성한 것입니다.  이를 칸트의 '구성설적 인식이론' 이라고 합니다.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없는 개념은 공허" 합니다. 오성의 작용없이는 보아도 본 것이 아닌 것처럼(맹목), 직관에 들어오는 감각물질 없이 추상적으로 만들어낸 개념은 텅 빈 것입니다. 여기에서 형이상학은 설 자리를 잃습니다. 순수 이성은 신, 영혼불멸 같은 감각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순수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순수이성의 조건과 인식 능력 그리고 한계를 뚜렷이 하였습니다.   『순수이성비판』으로 칸트는 흄에 의해 치명적 타격을 입은 자연과학을 복구합니다.  모든 인간이 동일한 순수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순수 이성에 의해 구성된 자연 세계는 동일한 법칙 아래 움직입니다. 자연 세계가 인과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연세계에 속합니다. 자연적 성질 즉 본능에 따라 인과성의 법칙에 따라 행동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절대적인 자발성, 자유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자유의지는 자연세계의 인과법칙과 상반됩니다. 인간에게 자유로운 의지가 없다면 인간의 행위가 오로지 자연의 법칙에 따라 결정된 것이라면 인간 사회의 윤리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로봇에게 자유가 없기 때문에 책임이 없는 것처럼 인간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없습니다. 귀책성이 없는 사회에는 도덕이 불가능합니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인간의 절대적 자발성과 자유의지 그리고 윤리학을 굳건히 세웁니다. 윤리적 행위의 지속적인 동기 유발을 위해 이론 이성에서 배제했던 형이상학적인 이념들을  실천 이성으로 하여금 요청하게 합니다.

 

자연세계와 자유세계 즉 현상계와 예지계라는 칸트의 이분법적 세계는 논리적이지만 현실적이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분리된 두 세계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두 세계를 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두 세계는 통합되어야만 합니다. 칸트는 합목적성이라는 개념을 동원한 『판단력 비판』을 써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자살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자살은 인간의 생존 본능 즉 자연 법칙에 위배됩니다. 하지만 절대적 자발성으로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자연과 자유라는 두 세계에 속한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하여야 하는 것일까요? 유치원 승합차에서 내리고 있는 어린 아이들과 갑자기 언덕 아래로 굴러내려오는 텅 빈 버스 사이를 승용차로 통과하려던 은탁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했던 것일까요? 칸트를 빌어 정의하자면 자살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자연성을 절대적 자발성을 통하여 폐기시켰다." 강유원 선생님의 설명입니다. 은탁이 죽음을 불사하고 굴러 내려오는 버스를 가로막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은 어린 생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목적 때문입니다. 생존 본능을 거스른 은탁의 철저히 자발적인 자유 의지가 윤리적 실천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다음주는 헤겔과 낭만주의 입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

p 375 ~ 390

 

강유원 강의, 2012 서양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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