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공부에 대한 갈망을 불러 일으키나 봅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에로스를 결핍과 갈망으로 정의합니다.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갈망하는 존재인 에로스는 지혜로운자와 무지한자 사이의 중간 존재입니다. 아예 무지한 사람은 지혜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무지하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모르는 것을 욕망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지혜로운자는 더 이상의 지혜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지혜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갈망은 무지에 대한 앎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것은 스스로의 무지함을 알아야 비로소 앎이 시작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앎은 더 큰 앎을 가리키고, 그렇게 앎은 끝없이 더 넓은 앎의 세계를 지시하며 앎에 대한 채워지지 않을 갈망을 불러 일으킵니다. 소크라테스가 스스로를 가장 무지한자로 생각했던 것은 가장 많이 알기 때문이라는 역설이 가능해지는 이유입니다. 소크라테스도,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롭다는 신탁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을 공부하며 동양 지혜의 정수인 『논어』를 읽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 해석의 『논어』를 매일 한장씩 읽기로 했습니다. 혼자서는 지켜지지 않을 듯하여 밴드를 만들고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매일 한장씩 밴드에 올려야 하는데 한자를 거의 몰라서 처음에는 읽기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음을 알고 해석을 보충해가며 한장씩 읽은 것이 벌써 한달 반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한자 자체는 더 아는것이 거의 없습니다. 이번 목표는 단지 『논어』라는 책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를 알고, 현재의 나에게도 어떤 울림을 주는지를 느끼는 정도입니다.
오늘 밴드 회원들의 첫 모임을 가졌습니다. 한달에 한번씩이라도 모여 그동안의 공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정기 만남을 계획했습니다. 다섯 명이 모였습니다. 學而편과 爲政편에서 각자 마음에 든 장을 골라와서 설명을 더하고 그 문장에 비추어 오늘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다음 모임에는 쓰는 것도 병행해 보려고 합니다. 본인이 선택한 문장만이라도 쓸 줄 안다면 몹시 뿌듯할 것 같아서 입니다. 다음 모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논어』는 출판된 책도 많고 책에 따라 해석도 다양합니다. 인터넷에도 자료는 충분히 많습니다. 우리는 좀 쉬운 이해를 위해 『식탁 위의 논어』 저자가 만든 인터넷 방송을 참고 하기로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