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쉬는 날이 많아서 4월은 마지막주에도 철학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너무 오래 쉬면 감이 안잡힌다는 일부 회원의 의견에 따른 것인데요. 진도는 나가지 않고 따로 자료를 준비하여 모였습니다. 일곱 명이 함께하였습니다.

 

강유원의 『철학 고전 강의』 를 오늘의 텍스트로 삼았습니다. 물론 회원들은 이 책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간략히 소개하는 형식을 취하였습니다. 철학사 공부가 끝나고 철학을 조금 더 공부하고 싶은 분들이 계신다면 언젠가 같이 읽어볼까 하던 책입니다. 이 기회에 조금 소개해 드리면 관심을 가질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는 소망을 가졌는데,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첫 시간>에 나오는 철학의 개념, 철학적 태도,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철학자들과 그들의 고전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였습니다. 강유원이 강의에서 다룬  철학자들은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입니다.  철학사 공부에서 지난주까지 중세철학을 마쳤기 때문에 이들 중에서 우리가 이미 공부한 플라톤에 관한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강유원의 강의에서는 플라톤 텍스트로 『파이돈』과 『국가』를 읽고 있습니다.  『파이돈』을 가지고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인 이데아론을, 『국가』에서는 정치 공동체론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천학 텍스트인 『국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아래 『국가』의 발췌문은 『철학 고전 강의』 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한 것입니다.

 

 

 

515c~515e

그래서 내가 말했네. “그러면 생각해보게. 만약에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식으로 사태가 자연스레 진행된다면, 이들이 결박에서 풀려나고 어리석음에서 치유되는 것이 어떤 것이겠는지 말일세. 가령 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풀려나서는, 갑자기 일어어서서 목을 돌리고 걸어가 그 불빛 쪽으로 쳐다보도록 강요당할 경우에, 그는 이 모든 걸 하면서 고통스러워할 것이고, 또한 전에는 그 그림자들만 보았을 뿐인 실물들을 눈부심 때문에 볼 수도 없을 걸세. 만약에 누군가가 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전에는 그가 엉터리를 보았지만, 이제는 진짜(실재 : ta on)에 좀은 더 가까이 와 있고 또한 한결 더한 실상을 향하여 있어서, 더욱 옳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면, 더군다나 지나가는 것들 각각을 그에게 가리켜 보이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서는 대답하도록 강요한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으로 자네는 생각하는가? 그는 당혹해 하며, 앞서 보게 된 것들을 방금 지적받은 것들보다도 더 진실된 것들로 믿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훨씬 더 진실된 것들로 믿을 겁니다.” 그가 말했네.

"또한 만약에 그로 하여금 그 불빛 자체를 보도록 강요한다면, 그는 눈이 아파서, 자신이 바라볼 수 있는 것들로 향해 달아날 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방금 지적받은 것들보다도 정말로 더 명확한 것들이라고 믿지 않겠는가?”

"그럴 것입니다.” 그가 대답했네.

 

 

515e~516a

“그러나 만약에 누군가가 그를 이곳으로부터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 길을 통해 억지로 끌고 간다면, 그래서 그를 햇빛 속으로 끌어내올 때까지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또한 자신이 끌리어온 데 대해 짜증을 내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가 빛에 이르게 되면, 그의 눈은 광휘로 가득 차서, 이제는 진짜들이라고 하는 것들 중의 어느 것 하나도 볼 수 없게 되지 않겠는가? 내가 물었네.

”적어도 당장에는 볼 수는 없겠죠.“ 그가 대답했네.

 

 

516a~516b

“그러기에 그가 높은 곳의 것들을 보게 되려면, 익숙해짐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네. 처음에는 그림자들을 제일 쉽게 보게 될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물속에 비친 사람들이나 또는 다른 것들의 상들을 보게 될 것이며, 실물들은 그런 뒤에야 보게 될 걸세. 또한 이것들에서 더 나아가, 하늘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를 밤에 별빛과 달빛을 봄으로써 더 쉽게 관찰하게 될 걸세. 낮에 해와 햇빛을 봄으로써 그것들을 관찰하는 것보다도 말일세.”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그가 해를, 물속이나 다른 자리에 있는 해의 투영으로서가 아니라 제자리에 있는 해를 그 자체로서 보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관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516c~517a

“어떤가? 이 사람이 최초의 거처와 그곳에 있어서의 지혜 그리고 그때의 동료 죄수들을 상기하고서는, 자신의 변화로 해서 자신은 행복하다고 여기되, 그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라고 자넨 생각지 않는가?”

“그러고말고요.”

(.....)

그래서 내가 말했네. “그러면 이 점 또한 생각해보게. 만약에 이런 사람이 다시 동굴로 내려가서 이전의 같은 자리에 앉는다면, 그가 갑작스레 햇빛에서 벗어나왔으므로, 그의 눈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럴 것입니다.” 그가 대답했네.

“그렇지만, 만약에 그가 줄곧 그곳에서 죄수 상태로 있던 그들과 그 그림자들을 다시 판별해봄에 있어서 경합을 벌이도록 요구받는다면, 그것도 눈이 제 기능을 회복도 하기 전의 시력이 약한 때에 그런 요구를 받는다면, 어둠에 익숙해지는 이 시간이 아주 짧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는 비웃음을 자초하지 않겠는가? 또한 그에 대해서, 그가 위로 올라가더니 눈을 버려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올라가려고 애쓸 가치조자 없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기들을 풀어주고서는 위로 인도해 가려고 꾀하는 자를, 자신들의 손으로 어떻게든 붙잡아서 죽일 수만 있다면, 그를 죽여버리려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러려 할 것입니다.”

 

 

517a~517b

“그러면, 여보게나 글라우콘! 이 전체 비유를 앞서 언급된 것들에다 적용시켜야만 하네. 시각을 통해서 드러나는 곳을 감옥의 거처에다 비유하는 한편으로, 감옥 속의 불빛을 태양의 힘에다 비유함으로써 말일세. 그리고 위로 ‘오름’과 높은 곳에 있는 것들의 구경을 자네가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영역’으로 향한 혼의 등정으로 간주한다면, 자네는 내 기대에 적중한 셈이 될 걸세. 자네는 이걸 듣고 싶어하니 말일세. 그렇지만 그게 진실인지 어쩐지는 아마도 신이나 알 걸세. 아무튼 내가 보기에는 이런 것 같으이. 인식할 수 있는 영역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그리고 각고 끝에 보게 되는 것이 ‘좋음(善: to agathon)의 이데아’이네. 그러나 일단 이를 본 다음에는, 이것이 모든 것에 있어서 모든 옳고 아름다운 것의 원인이라고, 또한 ‘가시적 영역’에 있어서는 빛과 이 빛의 주인을 낳고,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영역’에서도 스스로 주인으로서 진리와 지성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또 장차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슬기롭게 행하고자 하는 자는 이 이데아를 보아야만(idein) 한다고 결론을 내려야만 하네.” 내가 말했네.

“저로서 할 수 있는 한은 저 역시 생각을 같이합니다.” 그가 말했네.

“자 그러면 이 점에 대해서도 의견을 같이하여, 놀라는 일이 없도록 하게. 즉 이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인간사에 마음쓰고 싶어하지 않고, 이들의 혼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지내기를 열망한다는 사실을 말일세. 그건, 이 경우 앞서 말한 비유대로라면,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일세.” 내가 말했네.

 

 

518b~518d

“그런데 만일에 이게 진실이라면, 우리는 이것들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야만 하네. 즉 교육이란 어떤 사람들이 공언하여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일세. 그들은 주장하길, 혼 안에 지식(인식:epistέmέ) 이 있지 않을 때, 마치 보지 못하는 눈에 시각을 넣어주듯, 자신들이 지식을 넣어준다고 하네.” 내가 말했네.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들 주장합니다.” 그가 말했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논의는 각자의 혼 안에 있는 이‘ 힘’과 각자가 이해하는 데 있어서 사용하는 기관(수단:organon)을, 이를테면 눈이 어둠에서 밝음으로 향하는 것은 몸 전체와 함께 돌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듯, 마찬가지로 혼 전체와 함께 생성계에서 전환해야만 된다는 걸 시사하고 있네. 또한 이는 ‘실재(to on)’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밝은 것을 관상하면서도 견디어낼 수 있게 될 때까지 해야만 된다는 걸 말일세. 한데, 이것을 우리가 ‘좋음’이라 말하겠지?” 내가 말했네.

“네”

“그러니까 바로 이것의 전환(periagόgέ)에는 방책이 있음직하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하면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전환을 하게 될 것인지와 관련된 방책 말일세. 이는 그것에다 보는 능력을 생기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능력을 지니고는 있되, 바르게 방향이 잡히지도 않았지만, 보아야 할 곳을 보지도 않는 자에게 그러도록 해주게 될 방책일세.” 내가 말했네.

 

 

519a~519d

“(...) 그건 변변찮은 시력을 가져서가 아니라, 이를 ‘나쁨’에 봉사토록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 그것이 더 날카롭게 볼수록 그만큼 더 나쁜 일들을 하게 되기 때문이란 걸 말일세.”

(...)

“그러니까 나라의 수립자들인 우리의 할 일은 가장 훌륭한 성향을 지닌 자들로 하여금 앞서 우리가 가장 큰 것이라고 말한 배움에 이르도록, 그래서 ‘좋음’을 보게끔 그 오르막을 오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되, 이들이 일단 이 길을 올라, 그것을 충분히 보게 되면, 이제 이들이 허용받고 있는 걸 이들에게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것일세.” 내가 말했네.

“그게 어떤 것인데요?”

“바로 거기에 머물러 있으려 할 뿐, 저들 죄수들 곁으로 다시 내려가서 저들과 함께 노고와 명예를, 이게 다소 하찮은 것이건 대단한 것이건 간에,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일세.”내가 말했네.

 

 

 

519d~520a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들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게 되며, 이들로서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데도 우리가 이들로 하여금 더 못한 삶을 살도록 만들게 될 텐데요?” 그가 말했네.

“여보게, 자네 또 잊었네. 법(nomos)은 이런 것에, 즉 나라에 있어서 어느 한 부류가 각별하게 잘 지내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게 아니라, 온 나라 안에 이것이 실현되도록 강구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는 걸 말일세. 법은 시민들을 설득과 강제에 의해서 화합하게 하고, 각자가 공동체에 이롭도록 해줄 수 있는 이익을 서로들 나누어줄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그런다네. 또한 법은 나라에 그런 사람들이 생기도록 하는데, 이는 각자가 내키는 대로 향하도록 내버려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 자체가 나라의 단합을 위해 이 사람들을 십분 이용하기 위해서일세.” 내가 말했네.

 

 

 

519d~520a

"그러면 이제는 이 문제를, 즉 그런 사람들이 이 나라에 어떤 방식으로 생기게 되며, 또한 어떻게 이들을 광명으로 인도하게 될 것인지를 우리가 생각해보기를 자네는 원하는가? 마치 어떤 이들이 지하 세계로부터 신들에게로 올라갔다고 전하듯 말일세.“

“왜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반문했네.

“이건 물론 ‘조가비(도편) 돌려 던지기’가 아니라, 밤과도 같은 낮에서 진짜 낮으로 향하는 ‘혼의 전환(psychέs periagόgέ)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지혜의 사랑)이라고 우리가 말하게 될 실재(to on)로 향한 등정(오름)일 것 같으이.”

 

 

592b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걸 보고 싶어하는 자를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보고서 자신을 거기에 정착시키고 싶어하는 자를 위해서 하늘에 본(paradeigma)으로서 바쳐져 있다네. 그러나 그게 어디에 있건 또는 어디에 있게 되건 다를 게 아무것도 없으이. 그는 이 나라만의 통치를 하지, 다른 어떤 나라의 정치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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