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의 킬링필드 - “나”와 “우리”와 “세계”를 관통하는 불평등의 모든 것
예란 테르보른 지음, 이경남 옮김 / 문예춘추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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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문장이 인상적이다. 불평등은 사람을 죽인다. 비유가 아니라 '팩트'다. 미국의 흑인들만 보아도 그렇다. 2008년에 인종과 교육이 결부된 불평등은 그 약자의 위치에 있는 흑인의 수명을 평균 12년 줄였다고 한다. 러시아는 자본주의가 되고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사회주의일 때 비해서 사망률이 남자는 49%, 여자는 24% 증가했다고 한다. 물론 사회적 약자들의 수치다. 문자 그대로 불평등은 사람을 죽였다.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 계수가 증가할수록 사망률도 늘어났다. 이런 면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있는 예란 테르보른의 책 제목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그 책 제목처럼 정말로 이 세계는 '불평등의 킬링필드'이니까 말이다.



 이제 불평등을 막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자기 목숨을 지키는 일인 것이다. 혹시 당신은 살만하다고 해서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1990년대에 영국의 역학자 리처드 윌킨슨은 생명을 위협하는 불평등이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지체 높고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발표했다. 불평등의 생명에 대한 위협은 계층의 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일례로 2005년에 아이즈너와 애번즈는 상대적 박탈감이 건강을 악화시키고 사망률을 높인다는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았다. 근거로 오스카 상을 받은 배우들이 후보에 올랐다가 고배를 마신 배우들보다 평균 3년 더 오래 살았다는 것을 들었다. 노벨상 수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상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 보다 평균 수명이 더 길었다. 사실 이런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엄친아의 존재로 인해 고통받는 어린 학생들처럼 우리 역시도 상대적 박탈감이 가져다 주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 지는 경험으로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불평등의 폐해는 신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마음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스트레스가 아니라 타인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 대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될 수록 타인에 대한 불신 역시 커진다고 한다. 국민들의 행복 지수가 가장 높다는 것으로 알려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국민들은 3분의 2가 타인을 믿을만하다고 여기지만 브라질 국민들은 겨우 3%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불신의 정도가 불평등에 비례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도 타인에 대한 불신이 매우 심해졌다. 이것이 또한 최근 더욱 극심화된 불평등의 효과인지도 모르겠다. 벤지만 디즈데일리는 '국민은 하나가 아니다. 사실은 부자와 빈자라는 두 개의 국민이 있다.'라고 말했다는데 과연 불평등이 그런 역할까지 한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회 분열마저 가속화되는 것이다. 결국 불평등은 사회로 하여금 화합을 위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만들어 사회에 위기를 초래한다. 그런데 그 사회적 비용의 대부분은 소수의 재력과 권력 엘리트를 제외한 사회 성원 대다수가 부담한다. 이래저래 불평등이 심화될 수록 '돈 없고 빽 없는' 이들은 물고 뜯기게 되는 것이다. 몸도 상하고 마음도 크게 상처입지만 누구도 돌아봐주지 않는다. 불평등이 심해지면 약자들도 더욱 무시되기 때문이다. 미국이 그렇다. 의원들은 결집도 못하고 로비력도 제로에 가까운 약자들을 자신들이 일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가볍게 무시한다. 그들은 그저 표가 필요할 때만 의미있는 존재들이다. 분열로 인한 사회적 비용 부담이 증가하게 되면 약자들은 더욱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거기에 쓸 자원을 사회가 마련하기 어려운 탓이다.


 불평등을 줄여야 할 당위는 이렇게 날로 커지고 있다. 그런데 불평등은 하나의 모습이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불평등엔 모두 세 가지 모습이 있다고 한다. '생명력 불평등', '실존 불평등', '자원 불평등' 이렇게다. 생명력 불평등은 '사회 구조에 속한 인간 유기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의 불평등'을 의미하고 '실존 불평등'은 자율성, 존엄성, 자유의 정도, 존중받을 권리, 자아를 개발할 권리 등 인격과 관련해 개인이 받을 수 있는 배당의 불평등을 의미한다. 마지막 '자원의 불평등'은 '행위자로서 인간이 활동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공평하게 제공받지 못하는 불평등'이다. 이것은 하나의 '퍼스펙티브'로 한 국가나 사회의 평등화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기도 하지만 지향해야 할 지점을 말해주기도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불평등의 세 가지 모습은 상호 의존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런 차원에서 결국 평등 문제는,


 발전하고 번성할 수 있는 인간이 능력에 대해 다차원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인위적으로 방해하는 장치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p. 211)


 그러한 폭력 혹은 인위적 방해 장치를 저자는 불평등 매커니즘이라 하여 주로 네 가지 행위 범주로 구분하는데 그건 '거리두기','배제', '위계화' 그리고 '착취'다. 이렇게 특정 행위 중심으로 범주적 세분화를 하는 것은 차이와 차별 구별 문제와 같이 불평등을 논의하는데 있어 불평등과 그렇지 않은 것들 사이에 개념 혼동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오히려 불평등한 상황마저 그렇지 않은 것으로 흔히 치부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그는 역사적으로 불평등이 지나온 궤적과 지금 세계의 불평등한 실상을 드러내고 이 불평등을 완화시킬 가능한 대안적 세력과 방법을 탐구한다. 거기서 그는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더이상 산업노동자가 변화의 주축이 될 수 없는 현실임을 분명히 하고 계급적으로 동질한 이들의 연대가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이질적인 사회적 연대'에 의해 평등의 미래가 좌우될 것이라 내다본다. 거기엔 제3세계의 도시 빈민과 변변한 자기 땅 한 뙈기 없는 농민들이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서비스업 분야 종사자들과 전문적인 중산층도 포함된다. 게다가 여성이나 소수민족 그리고 동성연애자들까지 저자는 중요한 평등화의 동력으로 생각한다. 아울러 그는 말한다. 예전에는 지배엘리트들도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평등화를 추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불평등한 자들이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과 그로 인해 국가 전체가 퇴보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다시 또 이렇게 단언한다. 이제 그렇게 평등을 공급할 수 있었던 세력들은 공급량이 부족해졌다고. 즉 더이상 위로부터의 평등화 노력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제 남은 길은 단 하나 밖에 없다. 저 이질적인 평등화의 동력들이 연대해 아래로부터 평등화를 가져오는 것. 평등은 이제 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미래는 앞으로 불평등의 결전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위해 평등의 동력도 반평등의 저항 동력도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중이다. 이합집산이 되지 않고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뭔가 구심점이 필요하다. 투쟁을 선도하고 일사불란하게 조직할 수 있는 세력 같은 것이.


 저자는 그 세력을 중산층으로 본다. 이제 자본주의의 핵심 영역에서 산업근로자의 세력이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당분간 평등의 기회는 노동운동의 힘과 리더십의 능력이 아니라 중산층의 방향 정립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p. 224)


 또한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새로운 21세기 '중산층' 시대가 바로 평등주의자들이 활약할 무대가 되어야 한다. 중산층의 모호한 계급 개념이나 제각각인 규모를 평가하는 문제는 지금으로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근로자, 농부, 전문가 같은 지배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갖지 않은, 가난하지도 부자도 아닌 계층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금 지구를 소유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p. 226)


 예란 테르보른이 이렇게 중산층에 기대를 거는 것은 모호하고 어찌보면 텅 비어있는 것도 같은 정체성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잘 연대할 수 있으리라 보기 때문인 듯 하다. 무색의 물이 하나로 잘 섞이듯이 말이다. 중산층에 대한 낙관론일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지극히 현실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차라리 그 모호한 정체성을 디딤돌 삼아 세력을 만들어나가자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작금은 중산층 붕괴의 시대. 세계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중산층이 여지없이 내려앉고 있다. 과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중산층에게 그 역할을 맡길 것인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쩌면 이 위기 때문에 더욱 중산층이 자기 보호를 위해서라도 단단히 연대하리라 기대하는 것일까? 저자는 아직 여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사실 우리나라를 보면 불안한 예감이 든다. 중산층에게 닥친 위기가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 집값을 보전하기 위해 불평등을 조장하는 당에게 표를 주는 것으로. 또한 임대아파트와 같이 있는 아파트 주민들이 임대아파트 아이들이 자신의 단지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학교로 가는 통학로 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문을 달아 막아버리듯 빈자들을 격리시키려 들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점점 게토화 되어가는 형편이니. 그러므로 더욱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등화의 염원을 가지고 이성적 판단과 실천적 노력을 할 수 있는 중산층을 키워낼 것인가가 아닐까 싶다. 지금으로 봐선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꽤나 어려운 문제다.


 '불평등의 킬링필드'는 이런 이야기다. 불평등의 전모를 밝혀주는 책이라고나 할까? 최근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었다. 이 책이 초유의 관심을 받았던 것은 불평등한 현실을 상세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제 불평등은 외면할 수 없는 화두가 되었다. 더구나 수명까지 줄어든다고 하지 않는가? 진지하게 살피고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그를 위한 출발의 책으로 삼을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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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위 - 꿈에서 달아나다
온다 리쿠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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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다 리쿠의 소설들은 외부의 감각으로 충만합니다.

 일본은 늘 단일한 풍경만을 가지고 있다고 일본의 지식인들은 말해왔습니다. 바깥에 눈을 돌리지도, 외부에 있는 타자가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지도 않는, 고인 물과도 같은 존재가 바로 일본이라고 말이죠. 그 풍경을 찟는 것. 그 틈으로 외부의 바람이 들어오도록 하는 것. 그것이 가라타니 고진, 아사다 아키라, 하스미 시게히코, 아즈마 히로키등 현재 일본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지식인들의 한결같은 바람이었습니다. 언제나 그 풍경만을 유지한다면 일본에겐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고인 물의 미래가 썩은 물로 정해져있듯이 말이죠.


 어쩌면 거기에 공명한 것일까요? 온다 리쿠의 소설들은 많은 부분 외부에서 무언가가 엄습해 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얼른 기억나는 것은 2000년에 나온 '달의 뒷면'이군요. 잭 피니의 '바디 스내치'를 독특하게 패러디한 이 소설은 곳곳에 뻗어있는 수로로 유명한 야나쿠로를 무대로 사람을 똑같이 복제하는 물 안의 무언가에 대한 공포를 그리고 있는데 결국 두려워하던 타자로 '내'가 변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뒤에 나온 2004년 작, 'Q&A'도 그랬습니다. 쇼핑몰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달아나기 시작하고 그러다 발에 밟히거나 떠밀려서 죽거나 다친 이들이 많이 발생하는데 아무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 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원인은 끝까지 수수께끼로 남고 그 여파로 인해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존재들로 점점 변해갑니다.


 이와 같이 온다 리쿠는 잊을만하면 느닷없이 출현한 정체불명의 타자와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내'가 변해버리는 이야기를 줄곧 해왔던 것 같습니다. 외부에 내가 노출되는 일이 나의 파괴가 아닌, 나의 구원이 되는 이야기를. 거기에 우리는 또 하나의 작품을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2011년에 나온, '몽위'입니다.



 '몽위'는 '꿈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불교의 그 많은 관음보살 중에는 '몽위관음'이라는 보살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정식 명칭은 아니고 사람들이 만들어 부르는 이름입니다. 불길한 꿈을 꾸었을 때 이 관음보살에게 빌면 좋은 꿈으로 바꿔주기 때문이라는 군요. '몽위'는 바로 그 '몽위관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목대로 '몽위'는 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까운 미래라고 해 두죠. 소설은 꿈을 기계 장치를 이용해 타인들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시대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제 꿈이 깨고 나면 망각으로 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원하기만 한다면 그 꿈을 녹화해두고 보고 싶을 때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시대인 것입니다. 그것을 '몽찰'이라 부릅니다.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꿈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게 직업인 사람들입니다.


 꿈의 해석.

 그게 그들의 직업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프로이트가 같은 제목의 책을 출간한 것이 1900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 이상 지나서 꿈 자체를 영상 데이터로 보존할 수 있게 된 지도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다. 그야말로 눈으로 '꿈'을 보고 진짜로 꿈의 해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P. 28)


 '몽위'의 주인공인 히로아키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이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은 한 여성 때문이었습니다. 고토 유이키. 형의 약혼자지만 히로아키 자신도 정말 사랑했던 여자. 그녀는 일본인 최초로 예지몽을 꿀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는 늘 하나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바로 꿈을 바꾸는 것. 늘 남의 불행을 예언하는 꿈을 더이상 꾸지 않는 것이었죠. 그 꿈으로 인해 삶이 너무 힘겨웠으니까요. '몽위'는 그녀의 절실한 바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죽어버렸습니다. 10년 전, 예지몽으로 꾸었던 화재 사고를 막으려다 그만 자신도 그 화마에 휩싸여 버린 것이죠. 히로아키는 그녀를 잃은 슬픔 때문에 '꿈해석자'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몽위'를 바랐던 그녀의 소망을 그런 식으로 뒤늦게나마 이뤄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10년 뒤, 우연히 히로아키는 도서관에서 스치듯이 고토 유이키를 봅니다. 마지막에 목격된 모습 그대로 도서관의 복도에 문득 나타난 것입니다. 히로아키는 얼른 쫓지만 모퉁이를 돌자 홀연히 사라져 버립니다. 히로아키는 유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동시에 한 학교에서 같은 아이들 모두가 동일한 꿈을 꾸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건 교실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이었는데 거기 있었던 반 아이들 모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을 못합니다. 하지만 모두 계속해서 악몽을 꾸게 됩니다. 걱정된 부모들이 의뢰를 해왔고 결국 아이들 모두의 꿈을 몽찰하기로 결정납니다. 바로 그 일을 히로아키가 맡게 됩니다. 몽찰을 해보니 그 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공통의 인물이 있었고 결국 그 인물이 바로 죽은 고토 유이키라는 게 밝혀집니다. 도대체 이 아이들의 꿈과 고토 유이키가 어떤 식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인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사이 이번엔 아예 학교에 있던 사람들 전체가 사라져 버리는 기이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라지는 사건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던 자동차 무리의 운전자들 역시 한 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데...


 '몽위'는 이런 이야기 입니다. 후반까지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일이 계속 벌어집니다. 몽찰이 가능해진 시대에 대한 묘사도 꽤나 디테일하고 등장인물의 심리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더욱 손에서 놓기가 힘들어집니다. 다시 말해 이야기 자체에 몰입시키는 온다 리쿠의 능력은 여기서도 한껏 발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


 결국 히로아키는 '달의 뒷면'과 'Q&A'의 주인공이 그랬듯이 단일한 자기의 세계가 허물어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가 반복해서 꾸는 꿈처럼 한결 같았던 풍경이 찢어지고 그 틈새로 바깥의 타자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사건이 전개될수록 그는 점점 더 많이 보게 됩니다. 죽은 고토 유이키의 유령을. 그렇게 완전 바깥의 타자를.


 아마도 히로아키를 꿈해석자로 만든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석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을 타자에게 내어주는 일이니까요. 진정한 해석은 언제나 해석하려는 대상 안으로 최대한 들어갔을 때라야 가능합니다. 그 내부로 들어가 타자의 눈으로 보지 않는 한 참된 해석은 이루어지지 않죠. 정신분석에 있어 꿈의 해석이 그렇지 않던가요? 분석가는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피분석자의 내면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던가요? 공교롭데고 히로아키의 해석은 '꿈을 읽는다'는 점에서 독서와 많이 닮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온다 리쿠는 굉장한 독서가로 유명하지요. 반드시 1년에 200권은 꼭 읽는다고 하던가요? 아무튼 그녀의 작품엔 사실 왕성한 독서가로서의 그녀의 경험이 밑받침 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에 외부의 감각이 충만한 것도 그 때문이죠. 무엇보다 읽기란 포르투칼의 시인인 페르난도 페소아가 말했듯이 '타인의 손을 통해 꾸는 꿈'이니까요. 들뢰즈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읽는다는 것은 '타자-되기'의 과정이라고.


 그렇게 읽는다는 것은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일입니다. 독서가 여전히 유용독하다면 쾌락이 아니라 경험의 폭을 한껏 넓혀주기 때문이겠죠. 수많은 '타자-되기'의 경험들을 통해서 말이죠. 이해의 깊이는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에 섰을 때 가장 깊어지는 법입니다. 독서를 하게 되면 세계와 타인에 대한 헤아림의 수심이 깊어지는 것도 그 때문일테죠.  과연 히로아키와 같은 꿈해석자들은 '몽찰 멀미'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몽찰 멀미'가 뭔고 하면 몽찰을 너무 많이 해서 꿈과 타인의 몽찰 혹은 현실과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렵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지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된다는 것이죠. '몽찰 멀미'는 꿈과 현실을 뒤섞어 하나로 만들어 버립니다. 절대적인 경계로 나뉘어 있던 것들을 말이죠. 들뢰즈가 읽기를 정의했던 것, 즉 '타자-되기'를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꿈과 현실이 뒤섞이듯, 나와 타자가 뒤섞이게 됩니다. 소설에서 융이 말했던 '집단 무의식'이 자주 나오는 것도 바로 이것을 드러내려는 것이죠. 그 덕분에 결국 히로아키는 이전의 자신이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저 너머의 진실에 이르게 됩니다. 그 여정의 끝에서 온다 리쿠는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과도 같았던 '몽위'는 진정 과연 어떻게 해서 가능해지는 것인가를 아주 제대로 보여줍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꿈을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꿈을 바라보는 나를 바꾸는 데 있음을. 똑같이 보는 대상인 타자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 타자를 바라보는 나를 변화시키는 게 나를 구원으로 이르게 하는 진정한 '몽위'임을 말이죠.


 온다 리쿠의 '몽위'는 문득 다가온 부드러운 기척처럼 그 홀연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여정입니다. 여정이라고 한 것은 이 소설이 결말의 재미를 향하여 치닫는 소설이 아니라 과정에 더욱 집중하는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와 비슷한 경향의 온다 리쿠의 소설들은 늘 그랬죠. '달의 뒷면'도 'Q&A'도. 결말에서 플롯의 긴장을 폭발시키기 보다는 나아가는 그 단계 자체에 독자를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사실 변화라는 게 다 그렇죠. 어디까지나 '시간의 체험'이니까요. 세잔느가 그토록 많은 정물화를 그렸던 것은 시시각각 이뤄지는 사물 표면의 변화를 포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그 시간 속에 나를 내어주고 참여하기 위함이었죠. 히로아키가 꿈해석자라면 모든 미스터리를 낳는 존재인 고토 유이키는 '꿈참여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예지몽 또한 단순한 꿈이 아닌 미래의 그 시간을 뚝 떼어다 현재화시킨 것이었죠. 그렇게 고토 유이키는 세잔느처럼 그 시간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그녀가 경계 저 바깥으로 가장 멀리 나아간 존재임을 생각한다면 변화가 무엇보다 '시간의 체험'이라는 것을 온다 리쿠 스스로도 나타내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즉 그녀 스스로 이 소설이 독자에게도 그러한 참여가 되도록 원하고 있음이 뒷받침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몽위'는 하나의 부름입니다. 저 창 밖에서 부르는.

 아마도 읽고나면 스스로 창문을 열고 그 부름에 화답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어요.

 한 편, '몽위'로 더욱 깨달았습니다. 온다 리쿠는 미스터리로만 국한시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 작가 같습니다. 일본이라는 공동체를 두고 이것저것 실험하고 헤아려 보는. 그래서 더욱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013년에 나온 '밤의 밑은 부드러운 환상'도 빨리 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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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rennial Philosophy (Paperback)
Huxley, Aldous / Harper Perennial Modern Classics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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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대전이 서서히 끝나가던 1945년.
 '멋진 신세계'에서 현대 문명이 가열차게 추구하고 있는 물질주의가 가져오는 건 결국 인간 소외와 공허 밖에는 없다고 말했던 올더스 헉슬리는 한 권의 책을 발표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의 철학'이죠. 이 책이 일으킨 파장이 엄청났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우리가 흔히 '뉴에이지'라고 알고 있는 것들도 다 이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죠.

 원제는 'The Perennial Philosophy'. 책의 첫머리부터 올더스 헉슬리는 라이프니츠가 한 말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용어는 중세 때부터 있었습니다. 최초로 그 말을 쓴 것은 'Agostino Steuco'라고 합니다. 이탈리아인으로 주로 구약을 연구하던 학자였는데 당시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주도하고 있던 신플라톤주의를 그는 '영원의 철학'이라고 불렀다는 군요. 피치노는 당대 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신앙을 약화시키고 있다고까지 생각했죠. 그래서 그는 플라톤에게로 기울었습니다. 플라톤의 사상을 이길 수 있는 건 오직 그리스도 사상 밖에는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을 '경건의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그 플라톤 철학을 자신이 신봉하는 그리스도 신학과 합치고자 했죠. Steuco는 '경건의 철학'이라는 말을 살짝 바꾸어 '영원의 철학'으로 부른 것입니다. 네, 실은 조금 경멸의 의미였죠. 그건 신학이 아니라 철학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어쨌든 '영원의 철학'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실재주의를 경유해 무엇보다 영혼의 불멸성을 강조했습니다. 그 불멸하는 인간의 영혼을 중심으로 우주를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플라톤처럼 가상인 우리의 현실과 이데아인 참 세계로 나누고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을 통해 결합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인간 영혼의 목표는 초월적 존재이자 '이데아'인 신과의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보았죠. 이것은 후일 우리가 'perennialism'이라고 부르는 것이 됩니다. 영속주의 혹은 항존주의라고도 부르는 것이죠. 다년생 식물을 뜻하는 'perennia'의 뜻처럼 영원히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을 그렇게 부릅니다. 종교적 입장을 투영하자면 그 가치는 물론 신이 되겠죠. 피치노가 말했던 '신과의 합일'이 종교로서의 'perennialism'이 지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피치노처럼 기독교만이 유일의 통로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죠. 'perennialism'의 근본 목적은 신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동,서양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이론과 방법들을 하나도 허투르 보지 않고 다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거기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골라내 진정한 신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통로(흔히 '비전의 핵심'이라 이르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 바로 이것이'perennialism'입니다. 이 'perennialism'은 하나의 여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최초의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입니다.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이미 물질문명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당연히 물질문명은 참된 정신에 의해 인도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더구나 바깥은 참된 정신으로 인도되지 않은 물질문명이 어떠한 비극을 초래하는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이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에게 절박감은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36년에 나온 '가자에서 눈이 멀어'는 헉슬리의 그러한 심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죠.  그는 위안으로서든, 구원으로서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기독교는 그에게 그걸 가져다 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러했던가? 그 이유를 그는 이 책의 336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형이상학에 관해 집필하는 대부분의 유럽 및 미국의 저자들은 유대인, 그리스인, 지중해 연안 지역과 서구 유럽 사람들만이 이 주제에 관해 생각해본 것처럼 쓰고 있다. 완전히 자의적이면서 고의적인 무지가 20세기에 와서야 이렇게 드러난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불명예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제국주의는 영원한 세계 평화의 위협이 되고 있다.(p. 336)

 '멋진 신세계'와 '가자에서 눈이 멀어'에서 이미 파시즘에 대한 공포와 환멸을 드러내고 있는 그입니다.
 그런 그에게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 있다고 주장하며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는 서양의 신학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치는 자신들의 전쟁을 '제2의 십자군'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길이 필요했습니다. 하나가 아닌 다양한 길이. 모든 경계를 초월하고 동시에 아우르는 길이. 그 보편을 향한 대화. 그리하여 그는 '영원의 철학'을 썼습니다. 그냥 책이 아니라 쓴다는 것이 동시에 자기 구원의 노력이기도 한 책을. '영원의 철학'은 그런 책입니다.

 모두 27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건 올더스 헉슬리가 찾아낸 모든 종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가 27가지라는 뜻도 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그 요소 하나를 각기 한 장씩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내용은 정말 광범위합니다. 불교, 도교, 유교를 비롯하여 동,서양의 종교들이 거의 다 인용되고 있으니까요. 정말 읽다보면 어떻게 이걸 다 혼자의 힘으로 찾아내고 더구나 체계적으로 정리까지 했는지, 거기 투영된 신학적 제국주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집념이 무서울 정도입니다. '과연, 듣던대로 대단하구나!' 느낄 수 밖에 없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종교학자로 명망있는 오강남 교수는 이 책에 대해 단적으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나는 그가 쓴 수많은 책 중에 단연 이 '영원의 철학'이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 단언하고 싶다.'

 저도 동의합니다. 물론 여파도 컸었지만 여기 들어간 그의 노고만으로도 그렇다고 인정해주고 싶어요. 내용도 그리 쉬운 편은 아니고 번역이 다소 불친절하여 읽는 속도가 좀 더딜 수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고 곱씹으면 이해못할 부분은 없습니다. 또한 의외로 올더스 헉슬리 스스로 자신이 개진하고자 하는 '영원의 철학'을 꽤나 체계적으로 다져놓고 있기도 합니다. 개념정리, 구분과 계층화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죠. 제가 그랬듯이 따로 노트를 준비하여 정리해가며 읽는 것도 이 책을 소화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년에 올더스 헉슬리는 신비주의로 더욱 기울었습니다. 죽을 때는 아내가 두 번이나 LSD를 놓아 되도록 그가 바라는 상태에서 세상과 작별하도록 하기도 했었죠. 이처럼 그 역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작가 켄 키지만큼이나 환각제가 깨달음을 위한 새로운 통로가 되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인식의 문'이란 책을 썼는데 짐 모리슨은 거기에 감명을 받아 나중에 자신이 조직한 락밴드의 이름을 'DOORS'라 짓기도 했습니다. 소설만큼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종교나 신비주의에 관한 책들도 영향을 많이 미쳤는데 거기에 관한 책들은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그랬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그것도 그 시기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원의 철학'을. 덕분에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헉슬리 후기 모습에 대한 궁금증을 제대로 풀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다른 많은 종교에 대해서도 이해가 풍부해진 듯 합니다. 특히 종교에 대해서라면 그것에 대한 시각을 근본부터 다시 되짚어 보게된 것 같습니다. 종교를 보다 폭넓은 시야로 이해하고 싶다면 분명 좋은 동반자가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직 책이 검색되지 않아 부득불 원서에다 리뷰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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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더킨트
니콜라이 그로츠니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분더킨트(Wunderkind)놀라운 아이'라는 뜻의 독일어로 우리나라로 치면 신동을 뜻한다. 모차르트가 어린 나이에 놀라운 그의 재능을 발휘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 때부터 주로 예술적 방면의 신동들을 흔히들 '분더킨트'라고 부르는 게 관례가 되었다. 불가리아 출신의 소설가 니콜라이 그로츠니의 첫 장편 소설 제목이 바로 '분더킨트'다. 소설의 배경은 아직 사회주의가 무너지기 전, 80년대 말의 불가리아. 당연히 사회주의 국가다. 개인의 자유보다 사회에 대한 의무를 중요시여겼던 그 곳에서 그보다 더욱 규율과 엄격한 훈련을 강조하는 음악원에서 공부해야 했던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콘스탄틴, 이리나, 알렉산더, 바딤. 남들과 다른 재능으로 일찍 다른 궤도의 삶을 걸어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주인공 찰리 파커는 말한다.

 '재능은 축복이자 저주다.'라고. 과연 그 말 그대로 파커는 범죄와 맞서 세상을 구할 재능을 얻었지만 결국 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만 하는 저주를 받았다. 모난 돌이 정을 맞듯이 남들과 다르기에 짊어져야 하는 굴레.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선 그걸 '카인의 표지'라 부른다. 남들과 다르다는 그 표식은 외적으로는 타인들의 경탄을 받아 우쭐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질시로 인해 고독을 무릅쓰게 되기도 한다. 반면 내적으로는 끝없는 갈망을 낳는다. 이만한 재능이 있는데 어찌 남들처럼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낮은 울타리 속에 안주하는 평범한 이들을 깔보며 자기에겐 그와 다른 삶이 허락되어 있다고 여긴다. 더 높이 날아오르려 애를 쓰고 그럴 힘 역시 자기에게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비상은 오로지 소수에게만 허락되고 대부분은 밀납으로 만든 날개가 되어 결국 이카루스처럼 추락하고 만다.


 무당벌레가 내게 경고한 적 있었다. 경주에서 제일 먼저 탈락하는 건 재능 있는 아이이고, 두 번째로 떠나는 건 야망 있는 아이라고. 오직 로봇 같은 아이만 끝까지 버틴다고. 그게 대부분의 피아노 음반이 견딜 수 없이 형편없는 이유라고. 재능 있는 동시에 야망에 넘칠 수는 없다고. (p. 58)

 천재에 대한 이카루스의 비유는 적절하다.

 이카루스의 비행은 어리석음의 활공이 아니다. 사실은 주체성의 확장이다. 그건 세상이 가해오는 중력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자신을 장악하려는 세계로부터 멀리 탈주하여 온전한 주체가 되려는 '도주선'. 하지만 거기에는 저주가 뒤따른다. 세계가 나눠 받던 책임을 이제 스스로 온전히 도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라는 울타리가 더욱 크고 유혹적으로 보이는 때는 언제나 그 울타리의 바깥에 있을 때다. 지금까지는 사회라는 비행기 꼬리 날개에 가만히 앉아서 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순수하게 자신의 두 날개로만 움직여야 한다. 광활한 하늘의 자유가 몽땅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 되는 것이다. 이카루스의 비행은 필연적으로 아틀라스적 책임으로 향하게 된다. 스파이더맨은 언제나 현명하다. 위대한 힘엔 반드시 커다란 책임이 뒤따른다. 온전한 주체가 되게 만드는 왕관을 쓰려면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

 쉽지가 않다. 너무 곧은 대나무는 쉬이 부러진다. 이카루스는 가장 높이 떠올랐을 때 추락한다. 한껏 뻗어나간 주체성은 때로 제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꺽어질 수 있다. 사실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인 것이다. 자유와 책임 사이. 주체화와 공존 사이의.

 '분더킨트'의 아이들은 이카루스의 후예들이다.

  독립적이고 진정한 자신이 되어 보려 했으나, 그걸 이루어줄 수 있는 자유를 꿈꿨으나 결국 좌절된 이들의 이야기다. 소설의 주 무대가 몰락 이전의 사회주의 국가가 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천재가 상징하는 한껏 뻗어나가려는 주체성과 그걸 가로막는 사회의 대립을 선명하게 강조하기 위해서다. 소설은 첫 문장부터 이것을 암시한다.


 소피아(불가리아의 수도)의 하늘은 화강암이다.(p. 11)

 도시는 돌의 이미지를 가지고 음악원은 감옥의 이미지를 가진다. 화자 콘스탄틴은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과 활동하는 삶에 대해 내내 그런 이미지의 단어들을 남발한다. 학교가 시키는 교육을 그저 잘 따라가는 아이들은 모두 멍청한 로봇들이고 자신은 '자유의 조건적 본성을 이해하는 예외적 지혜를 타고난 실험실 쥐'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그것을 지배하는 어른들에 대한 콘스탄틴의 어조는 꽤나 신랄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른들은 녹턴을 연주할 수 없다. 그들의 연주를 따라해 보라. 루바토, 말문이 막히는 화성 해결. 거짓된 좌절, 연출된 신랄함. 토악질이 나온다.(p. 70)

 이건 투쟁이다. 자신의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끝없이 달려드는 사회라는 가시 덤불을 헤쳐나가는! 450페이지에 이르는 '분더킨트'의 여정은 그 기록이다.

 그런데 발터 벤야민은 정말로 존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 비유했다. 그는 언젠가 지인 게르숌 숄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화 하나를 추신으로 덧붙였다. 그게 바로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이야기였다. 미녀가 진리고 가시 덤불을 헤쳐나가는 왕자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미녀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진리는 그저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는 어디까지나 적극적인 구애의 순간 끝에라야 간신히 눈을 뜨는 존재다. 깊은 잠에 빠진 미녀를 알랑한 키스 정도로 깨울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 잠든 자를 깨울 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 양 어깨를 잡고 마구 뒤흔들거나 때리기도 한다. 그렇다. 발터 벤야민은 말한다. 진리는 때려서 자기 말을 듣게 해야 하는 존재라고.

 진리가 하이데거가 말했듯 존재가 드러나는 틈이라면 결국 주체가 온전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 소설의 이카루스 후예들이 걸었듯이 투쟁말고는 답이 없다. 헤겔이 말했듯이 노예가 계속 주인으로 있으려면 항구적인 노동 밖에는 없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날아가는 새에게 죽음은 언제 오는가? 바로 그 날개 짓을 멈출 때라고. 결국 소설에서 그들의 추락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그 싸움을 스스로 멈춘 때가 아니었던가? 사랑을 멈춘 때가 아니었던가?

 콘스탄틴이 모든 희망을 잃고 무덤과도 같은 지하로 잠적했을 때조차 역사는 계속 움직이고 투쟁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90년,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순간은 찾아오고 만다. 그 마지막 장에서 콘스탄틴의 자유를 뜻하는 쇼팽 에튀드 C단조는 찬란히 울려퍼진다. 이 소설이 남들이 말하듯이 실패의 기록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내게만은 이 소설은 부단한 투쟁만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이라는 걸 보여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 장의 구분이 그렇다. 이 소설은 음악가로 장을 구분하고 있다. 1장은 라흐마니노프, 2장은 쇼팽 이렇게.

 음악가마다 상징하는 것이 다르다. 어떤 음악가는 세상이 가하는 억압을, 또 어떤 음악가는 절망을 상징한다. 가장 많이 나오는 작곡가는 쇼팽인데 그는 콘스탄틴의 자유(세상과 싸워 획득한다는 의미에서)를 상징하고 있다. 그가 자주 연습하는 쇼팽의 에튀드란 그야말로 자기 주체성의 상징인 것이다. 차례를 보면 쇼팽이 참 많이 나옴을 알 수 있다. 그건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콘스탄틴이 그 숱한 사회의 위협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읽는 순간, 어느새 내게 상황을 핑계대지 말고 억압에 굴하지도 말며 시대가 아무리 절망을 주더라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여 '분더킨트'란, 신동이 아니라 원래 뜻 그대로 놀라운 아이로 보였다.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는, 그러한 놀라운 아이. 콘스탄틴.

 한 가지 이 소설을 말하는 데 있어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소설의 문장이다. 문장이 참 좋다. 작가 자신이 원래 피아니스트 출신이라서 그런걸까? 문장들이 꽤나 감각적이다. 참신하며 독특한 표현들의 오케스트라 할까. 어쩐지 아슈케나지의 월광 소나타를 듣는 것도 같다. 그가 연탄하는 음 하나하나가 청자에게 모두 선명한 울림으로 다가오듯 니콜라이 그로츠니의 문장들도 그랬던 것이다. 일요일 오후 기제킹이 연주하는 드뷔시의 프렐류드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정작 콘스탄틴은 드뷔시 같은 인상주의파를 끔찍이도 싫어했지만.

 콘스탄틴은 원래 작가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불가리아 음악원을 다닐 당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인 것이다. 동구권이 몰락했을 때 그는 이제까지 배운 것을 모조리 포기하고 재즈를 배운다며 미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버클리 음대에 들어가 졸업을 코 앞에 두었을 때 이번에는 느닷없이 티벳과 인도로 떠나버렸다. 그러다 지금은 작가가 되었다. 콘스탄틴처럼 작가도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뻗어온 것이다. 영화 '아비정전'에 나오는 발없는 새처럼. 결코 머무르지 않고 자기만의 비상을 계속하면서.

 즉 소설의 지향과 삶의 지향이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분더킨트'는 그런 새의 첫 노래이다.

 다음은 어떤 노래일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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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이본 세라트의 '히틀러의 철학자들'은  철학책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 복원의 책이다. 논의 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형식은 일종의 파문과도 같다. 고요한 수면 위로 하나의 돌이 떨어지면 그것을 중심으로 동심원들이 퍼져 나간다. 가면 갈수록 동심원은 희미해진다. 중심의 동심원이 가장 뚜렷하다. 책은 이와 똑같다. 히틀러 시대의 철학자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시대 가장 정점에 섰던 히틀러에서 시작해 페이지 수가 늘어갈 수록 점점 그로 부터 멀리 떨어진 인물들을 배치시키는 것이다. 히틀러로 시작하여 그 뒤에는 히틀러 사상에 정당성을 주었거나 나치즘에 부역한 철학자들을 또 그 뒤에는 유대인이란 태생 때문에 또는 동조하지 않아서 망명하거나 유태인이 아니면서도 신념대로 행동하다가 죽은 철학자를 이야기 한다. 놀랍게도 이본 세라트는 나치즘을 낳게한 원흉으로 칸트와 헤겔까지 들먹이는데 여기서부터 이 책이 가진 문제점은 드러나고 만다.



 분명 나는 문제라 말했다. 솔직히 난 이 책이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편협함의 산물이 아닐까도 싶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이제 말하려 한다. 일단 칸트와 헤겔부터.


 그녀가 칸트와 헤겔을 부정적인 철학자로 본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딱 하나다. 유대교와 유대인을 폄하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기존의 편견을 몰아내는 대신 자신만의 또 다른 편견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미개하고 비합리적인 모든 것에 화를 참지 못했는데 특히 고대의 한 종교가 그의 표적이 되었다. 바로 유대교였다. 칸트는 유대교를 시대에 역행하는 종교로 여겼으며 유대인을 미신적이고 미개하며 비합리적인 민족으로 규정했다.(...) 종교가 이성에 근거해야 한다고 믿었던 칸트는 이성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대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종교적 이해에 관한 논문 '순수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칸트는 유대교는 사실상 종교가 아니라 한 부족민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 불과했다.(P. 73)


 다음은 헤겔이다.


 헤겔은 유대인을 유럽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모자라 그들을 인류 문명 바깥에 있는 열등한 존재로 분류했다.

 "유대인은 그들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생존해 있다. 사실상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 역사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본질은 사라지고 단지 송장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유대인이 보통 이하의 열등한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모시는 신도 열등한 신이었다. 헤겔은 이렇게 썼다.

 "다른 신들을 용인할 수 없는 유일한 신은 오직 편협한 유대인들의 신뿐이다. 그들의 엄격하고 민족적인 신은 질투의 화신이다."(P. 77)


 이걸 나치를 낳은 악의 철학자로 칸트와 헤겔을 가져온 이유다. 하하하! 원, 이런!

 실상 그녀가 인용한 칸트의 말에서 난 틀린 점을 도저히 못 찾겠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신과 종교에 대해 말한 것을 보면 분명 그렇게 여겼으리라 본다. 유대교만 특별히 편견을 가지고 대한 것이 아니다. 그에겐 사실 그 어떤 종교든 비합리적이었다. 그런 칸트에게 유대인들이 유대교를 내세우는 것은(선민의식이 강한 그들은 유독 내세우지 않았던가?) 분명 시대를 역행하는 일로 보였을 것이다. 헤겔은 더 우스꽝스럽다. 헤겔이 그들이 모시는 신을 열등하다고 말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질투의 화신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솔직히 구약을 읽으면 신에 대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구약의 신은 늘 믿음을 시험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무조건 믿을 것을 강요하며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도시나 세계를 한 순간에 멸망시켜 버린다. 이런 신을 두고 사랑과 평화의 신이라 운운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거기다 이것은 그저 헤겔이란 한 사람의 견해에 불과하다. 이런 말도 못하는가? 무조건 좋게 보아야 하는 것인가? 편견은 진실을 왜곡해서 보는 걸 이르는 것이지 그저 부정적 견해에 불과한 것을 두고 편견이라 말하지 않는다. 비판을 무조건 편견으로 치부하는 것이야 말로 이본 세라트가 그토록 증오하고 있는 나치즘의 철학과 닮은 꼴이다. 타자를 객관적인 잣대로 헤아리지 않는 그 유아독존적 아집 말이다.


 솔직히 말해 이 시대에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보편적이었다. 독일만이 아니었다. 전 유럽적 상황이었다. 이본 세라트는 욕하려면 세익스피어에게도 해야 했다. 그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을 더없는 속물에다 악덕 상인으로 묘사했으니까 말이다. 영국이 독일과 싸워서 면제부를 준 것인가?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드레퓌스 사건도 그렇다. 드레퓌스가 그토록 말도 안되는 누명을 썼던 것은 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란 사실 때문에 명확한 반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처형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만큼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가 깊었다. 왜 그랬을까? 유럽인들이 이유도 없이 그랬을 리는 없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그 뿌리깊은 증오의 이유는 드러난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고리의 금융업자였다. 그들이 믿는 신은 아무런 노동없이 남에게서 뭔가 받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고 똑같이 이자도 죄악의 과실로 여겼지만 그토록 신을 믿는다는 그들이 그것은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높은 고리로 앞뒤 가리지 않고 자본을 모았다. 덕분에 거대한 부는 유대인들 손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인들에게 유대인들은 이민자에 불과했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에 체류한 동남아시아 노동자가 이건희가 된 것과 같았다.  토박이들 눈에 곱게 보일리 없었다. 거기다 유대인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도, 그 부를 신이 명령한 대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는 것도 아니었다. 악착같이 거머쥘 뿐이고 없는 이들을 무시할 뿐이었다. 단테도 그 희생양이었다. 그는 금융업자들을 가장 뜨거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묘사했다. 증오는 아무 이유없이 태어나지 않는다. 분명 연기나게 한 뭔가가 있다. 그에 대한 자성없이 유대인들을 비난한다고 해서 편협하다 비판하는 건 그것이야말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이본 세라트는 편협하다. 정말 이 책 끝까지 그녀에게는 오로지 유대주의만 보이기 때문이다. 


 리뷰가 길어질 수 있기에 세세하게 다 말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서 유대인들에게 그만한 비극을 안겼는데 어떻게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학을 뗐다. 세라트는 정말 한나 아렌트가 무슨 이유로 그것을 말했는 지 모른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녀야말로 자신이 말하는 것에 몰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정답을 정해놓고 대상을 보고 있으니 편견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문체는 더욱 노골적이다. 부역한 철학자들에겐 더없이 신랄하지만 망명해야했거나 희생당한 철학자들은 무슨 신념에 따른 영웅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사실 벤야민과 아도르노는 안타까운 피해자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유대인인 그들이 독일에 어찌 남아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에겐 이미 철학자의 양심으로 선택할 기회마저 없었다. 그저 망명하는 것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이 책을 읽고 개인적으로 아도르노에게 좀 한심함을 느꼈다. 지금 자신의 조국 독일에선 자신과 같은 유대인들이 속절없이 죽어가는데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그레타 가르보를 만난 일 같은 것을 글로 쓰고 있으니. 발터 벤야민은 정말 불쌍했지만 아도르노의 미국 망명 생활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유대인 망명자들과 많은 교제도 가져 고독도 없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었다. 여기서 이본 세라트는 또 웃긴 짓을 한다. 당시 얼마나 유명한 유대인들이 많았는지 언급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전쟁에도 불구하고 창조적인 작업을 지속해나갔다는 것도 콕 집어 넣는다. '알았다. 알았어. 너네들 정말 대단해. 이제 그만!'하고 싶을 정도다.


 분명 2차 대전에서 유대인들은 피해자였다. 그들의 학살은 정말 우리 인류가 두고두고 반성해야 한다. 하지만 그 때의 피해자가 유대인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가장 많이 희생된 것도 아니다. 사실 나치에 의해 가장 많이 희생된 것은 집시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희생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당한 비극 때문에 문장마다 분노를 드러냈던 이본 세라트도 여기에 대해선 침묵이다.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치 당한 이들은 유대인 밖에 없는 것 같다. 이왕 칸트와 헤겔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근대 자체에 배태되어 있던 인종 편견을 드러내려 작정했다면 반유대주의만 말할 것이 아니라 집시들이 당한 비극까지 말해야 했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멸하려 했던 건 그들이 외래적 존재였고 그만큼 약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이데거 식으로 말해 동일자와 타자에서 유대인들은 타자였다. 어차피 경계 바깥의 존재였기에 쉽게 바깥으로 내버릴 수 잇는 존재였던 것이다. 나치즘의 해악은 거기에 있다. 동일하지 않은 존재들은 무조건 배제해 버린다는 것. 타자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 거기에 유대인들과 집시는 똑같은 존재들이었다. 집시가 입은 피해가 여전히 '블랙아웃'인 것도 그만큼 그들의 지위가 열악하기 때문이다. 가장 약자는 누구도 돌아다보지 않는다. 정작 같은 피해를 입은 이들마저 마찬가지다.


 결국 그들도 그들이 왜 그런 비극을 겪어야 했는지 잊어버리고 같은 가해자가 되어 버렸다. 바로 얼마전에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미사일을 쏘아 민간인들을 비롯 어린아이까지 죽게 만들지않았던가. 남의 영토를 억지로 빼앗아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공존을 모르다.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로 부터 엄청난 피해를 받았으면서도 그들의 지금 모습은 나치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들 스스로 그들의 희생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본 세라트는 그토록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들을 비난하면서 왜 똑같은 일을 저지르는 현재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인지? 스스로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면 신랄한 비판의 칼날은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겨누어져야 한다.


 이 책은 분명 철학이 정치의 시녀가 되는 사태를 비관하여 그 반복을 막는 성찰을 위해서 쓰였을 것이다. 진정한 성찰은 부머랭이다. 결국은 나의 허물을 되돌아 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본 세라트의 성찰은 돌아오지 않는 부머랭이다. 적의만 있다. 그녀 역시 유대주의의 시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공감도 배움도 반쪽에 불과하다. 역사로부터 진정한 교훈을 이끌어 내려면 언제나 탐구하는 자 스스로도 객관적 중립의 위치에 서야 한다. 저자는 한 쪽에 너무 치우쳤다. 에필로그에서 말한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대로 찾고 싶다면 그녀 역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게 좋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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