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분더킨트
니콜라이 그로츠니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4월
평점 :
분더킨트(Wunderkind). 놀라운 아이'라는 뜻의 독일어로 우리나라로 치면 신동을 뜻한다. 모차르트가 어린 나이에 놀라운 그의 재능을 발휘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 때부터 주로 예술적 방면의 신동들을 흔히들 '분더킨트'라고 부르는 게 관례가 되었다. 불가리아 출신의 소설가 니콜라이 그로츠니의 첫 장편 소설 제목이 바로 '분더킨트'다. 소설의 배경은 아직 사회주의가 무너지기 전, 80년대 말의 불가리아. 당연히 사회주의 국가다. 개인의 자유보다 사회에 대한 의무를 중요시여겼던 그 곳에서 그보다 더욱 규율과 엄격한 훈련을 강조하는 음악원에서 공부해야 했던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콘스탄틴, 이리나, 알렉산더, 바딤. 남들과 다른 재능으로 일찍 다른 궤도의 삶을 걸어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주인공 찰리 파커는 말한다.
'재능은 축복이자 저주다.'라고. 과연 그 말 그대로 파커는 범죄와 맞서 세상을 구할 재능을 얻었지만 결국 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만 하는 저주를 받았다. 모난 돌이 정을 맞듯이 남들과 다르기에 짊어져야 하는 굴레.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선 그걸 '카인의 표지'라 부른다. 남들과 다르다는 그 표식은 외적으로는 타인들의 경탄을 받아 우쭐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질시로 인해 고독을 무릅쓰게 되기도 한다. 반면 내적으로는 끝없는 갈망을 낳는다. 이만한 재능이 있는데 어찌 남들처럼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낮은 울타리 속에 안주하는 평범한 이들을 깔보며 자기에겐 그와 다른 삶이 허락되어 있다고 여긴다. 더 높이 날아오르려 애를 쓰고 그럴 힘 역시 자기에게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비상은 오로지 소수에게만 허락되고 대부분은 밀납으로 만든 날개가 되어 결국 이카루스처럼 추락하고 만다.
무당벌레가 내게 경고한 적 있었다. 경주에서 제일 먼저 탈락하는 건 재능 있는 아이이고, 두 번째로 떠나는 건 야망 있는 아이라고. 오직 로봇 같은 아이만 끝까지 버틴다고. 그게 대부분의 피아노 음반이 견딜 수 없이 형편없는 이유라고. 재능 있는 동시에 야망에 넘칠 수는 없다고. (p. 58)
천재에 대한 이카루스의 비유는 적절하다.
이카루스의 비행은 어리석음의 활공이 아니다. 사실은 주체성의 확장이다. 그건 세상이 가해오는 중력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자신을 장악하려는 세계로부터 멀리 탈주하여 온전한 주체가 되려는 '도주선'. 하지만 거기에는 저주가 뒤따른다. 세계가 나눠 받던 책임을 이제 스스로 온전히 도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라는 울타리가 더욱 크고 유혹적으로 보이는 때는 언제나 그 울타리의 바깥에 있을 때다. 지금까지는 사회라는 비행기 꼬리 날개에 가만히 앉아서 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순수하게 자신의 두 날개로만 움직여야 한다. 광활한 하늘의 자유가 몽땅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 되는 것이다. 이카루스의 비행은 필연적으로 아틀라스적 책임으로 향하게 된다. 스파이더맨은 언제나 현명하다. 위대한 힘엔 반드시 커다란 책임이 뒤따른다. 온전한 주체가 되게 만드는 왕관을 쓰려면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
쉽지가 않다. 너무 곧은 대나무는 쉬이 부러진다. 이카루스는 가장 높이 떠올랐을 때 추락한다. 한껏 뻗어나간 주체성은 때로 제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꺽어질 수 있다. 사실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인 것이다. 자유와 책임 사이. 주체화와 공존 사이의.
'분더킨트'의 아이들은 이카루스의 후예들이다.
독립적이고 진정한 자신이 되어 보려 했으나, 그걸 이루어줄 수 있는 자유를 꿈꿨으나 결국 좌절된 이들의 이야기다. 소설의 주 무대가 몰락 이전의 사회주의 국가가 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천재가 상징하는 한껏 뻗어나가려는 주체성과 그걸 가로막는 사회의 대립을 선명하게 강조하기 위해서다. 소설은 첫 문장부터 이것을 암시한다.
소피아(불가리아의 수도)의 하늘은 화강암이다.(p. 11)
도시는 돌의 이미지를 가지고 음악원은 감옥의 이미지를 가진다. 화자 콘스탄틴은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과 활동하는 삶에 대해 내내 그런 이미지의 단어들을 남발한다. 학교가 시키는 교육을 그저 잘 따라가는 아이들은 모두 멍청한 로봇들이고 자신은 '자유의 조건적 본성을 이해하는 예외적 지혜를 타고난 실험실 쥐'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그것을 지배하는 어른들에 대한 콘스탄틴의 어조는 꽤나 신랄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른들은 녹턴을 연주할 수 없다. 그들의 연주를 따라해 보라. 루바토, 말문이 막히는 화성 해결. 거짓된 좌절, 연출된 신랄함. 토악질이 나온다.(p. 70)
이건 투쟁이다. 자신의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끝없이 달려드는 사회라는 가시 덤불을 헤쳐나가는! 450페이지에 이르는 '분더킨트'의 여정은 그 기록이다.
그런데 발터 벤야민은 정말로 존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 비유했다. 그는 언젠가 지인 게르숌 숄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화 하나를 추신으로 덧붙였다. 그게 바로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이야기였다. 미녀가 진리고 가시 덤불을 헤쳐나가는 왕자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미녀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진리는 그저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는 어디까지나 적극적인 구애의 순간 끝에라야 간신히 눈을 뜨는 존재다. 깊은 잠에 빠진 미녀를 알랑한 키스 정도로 깨울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 잠든 자를 깨울 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 양 어깨를 잡고 마구 뒤흔들거나 때리기도 한다. 그렇다. 발터 벤야민은 말한다. 진리는 때려서 자기 말을 듣게 해야 하는 존재라고.
진리가 하이데거가 말했듯 존재가 드러나는 틈이라면 결국 주체가 온전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 소설의 이카루스 후예들이 걸었듯이 투쟁말고는 답이 없다. 헤겔이 말했듯이 노예가 계속 주인으로 있으려면 항구적인 노동 밖에는 없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날아가는 새에게 죽음은 언제 오는가? 바로 그 날개 짓을 멈출 때라고. 결국 소설에서 그들의 추락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그 싸움을 스스로 멈춘 때가 아니었던가? 사랑을 멈춘 때가 아니었던가?
콘스탄틴이 모든 희망을 잃고 무덤과도 같은 지하로 잠적했을 때조차 역사는 계속 움직이고 투쟁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90년,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순간은 찾아오고 만다. 그 마지막 장에서 콘스탄틴의 자유를 뜻하는 쇼팽 에튀드 C단조는 찬란히 울려퍼진다. 이 소설이 남들이 말하듯이 실패의 기록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내게만은 이 소설은 부단한 투쟁만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이라는 걸 보여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 장의 구분이 그렇다. 이 소설은 음악가로 장을 구분하고 있다. 1장은 라흐마니노프, 2장은 쇼팽 이렇게.
음악가마다 상징하는 것이 다르다. 어떤 음악가는 세상이 가하는 억압을, 또 어떤 음악가는 절망을 상징한다. 가장 많이 나오는 작곡가는 쇼팽인데 그는 콘스탄틴의 자유(세상과 싸워 획득한다는 의미에서)를 상징하고 있다. 그가 자주 연습하는 쇼팽의 에튀드란 그야말로 자기 주체성의 상징인 것이다. 차례를 보면 쇼팽이 참 많이 나옴을 알 수 있다. 그건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콘스탄틴이 그 숱한 사회의 위협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읽는 순간, 어느새 내게 상황을 핑계대지 말고 억압에 굴하지도 말며 시대가 아무리 절망을 주더라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여 '분더킨트'란, 신동이 아니라 원래 뜻 그대로 놀라운 아이로 보였다.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는, 그러한 놀라운 아이. 콘스탄틴.
한 가지 이 소설을 말하는 데 있어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소설의 문장이다. 문장이 참 좋다. 작가 자신이 원래 피아니스트 출신이라서 그런걸까? 문장들이 꽤나 감각적이다. 참신하며 독특한 표현들의 오케스트라 할까. 어쩐지 아슈케나지의 월광 소나타를 듣는 것도 같다. 그가 연탄하는 음 하나하나가 청자에게 모두 선명한 울림으로 다가오듯 니콜라이 그로츠니의 문장들도 그랬던 것이다. 일요일 오후 기제킹이 연주하는 드뷔시의 프렐류드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정작 콘스탄틴은 드뷔시 같은 인상주의파를 끔찍이도 싫어했지만.
콘스탄틴은 원래 작가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불가리아 음악원을 다닐 당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인 것이다. 동구권이 몰락했을 때 그는 이제까지 배운 것을 모조리 포기하고 재즈를 배운다며 미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버클리 음대에 들어가 졸업을 코 앞에 두었을 때 이번에는 느닷없이 티벳과 인도로 떠나버렸다. 그러다 지금은 작가가 되었다. 콘스탄틴처럼 작가도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뻗어온 것이다. 영화 '아비정전'에 나오는 발없는 새처럼. 결코 머무르지 않고 자기만의 비상을 계속하면서.
즉 소설의 지향과 삶의 지향이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분더킨트'는 그런 새의 첫 노래이다.
다음은 어떤 노래일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