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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이본 세라트의 '히틀러의 철학자들'은  철학책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 복원의 책이다. 논의 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형식은 일종의 파문과도 같다. 고요한 수면 위로 하나의 돌이 떨어지면 그것을 중심으로 동심원들이 퍼져 나간다. 가면 갈수록 동심원은 희미해진다. 중심의 동심원이 가장 뚜렷하다. 책은 이와 똑같다. 히틀러 시대의 철학자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시대 가장 정점에 섰던 히틀러에서 시작해 페이지 수가 늘어갈 수록 점점 그로 부터 멀리 떨어진 인물들을 배치시키는 것이다. 히틀러로 시작하여 그 뒤에는 히틀러 사상에 정당성을 주었거나 나치즘에 부역한 철학자들을 또 그 뒤에는 유대인이란 태생 때문에 또는 동조하지 않아서 망명하거나 유태인이 아니면서도 신념대로 행동하다가 죽은 철학자를 이야기 한다. 놀랍게도 이본 세라트는 나치즘을 낳게한 원흉으로 칸트와 헤겔까지 들먹이는데 여기서부터 이 책이 가진 문제점은 드러나고 만다.



 분명 나는 문제라 말했다. 솔직히 난 이 책이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편협함의 산물이 아닐까도 싶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이제 말하려 한다. 일단 칸트와 헤겔부터.


 그녀가 칸트와 헤겔을 부정적인 철학자로 본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딱 하나다. 유대교와 유대인을 폄하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기존의 편견을 몰아내는 대신 자신만의 또 다른 편견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미개하고 비합리적인 모든 것에 화를 참지 못했는데 특히 고대의 한 종교가 그의 표적이 되었다. 바로 유대교였다. 칸트는 유대교를 시대에 역행하는 종교로 여겼으며 유대인을 미신적이고 미개하며 비합리적인 민족으로 규정했다.(...) 종교가 이성에 근거해야 한다고 믿었던 칸트는 이성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대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종교적 이해에 관한 논문 '순수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칸트는 유대교는 사실상 종교가 아니라 한 부족민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 불과했다.(P. 73)


 다음은 헤겔이다.


 헤겔은 유대인을 유럽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모자라 그들을 인류 문명 바깥에 있는 열등한 존재로 분류했다.

 "유대인은 그들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생존해 있다. 사실상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 역사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본질은 사라지고 단지 송장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유대인이 보통 이하의 열등한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모시는 신도 열등한 신이었다. 헤겔은 이렇게 썼다.

 "다른 신들을 용인할 수 없는 유일한 신은 오직 편협한 유대인들의 신뿐이다. 그들의 엄격하고 민족적인 신은 질투의 화신이다."(P. 77)


 이걸 나치를 낳은 악의 철학자로 칸트와 헤겔을 가져온 이유다. 하하하! 원, 이런!

 실상 그녀가 인용한 칸트의 말에서 난 틀린 점을 도저히 못 찾겠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신과 종교에 대해 말한 것을 보면 분명 그렇게 여겼으리라 본다. 유대교만 특별히 편견을 가지고 대한 것이 아니다. 그에겐 사실 그 어떤 종교든 비합리적이었다. 그런 칸트에게 유대인들이 유대교를 내세우는 것은(선민의식이 강한 그들은 유독 내세우지 않았던가?) 분명 시대를 역행하는 일로 보였을 것이다. 헤겔은 더 우스꽝스럽다. 헤겔이 그들이 모시는 신을 열등하다고 말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질투의 화신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솔직히 구약을 읽으면 신에 대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구약의 신은 늘 믿음을 시험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무조건 믿을 것을 강요하며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도시나 세계를 한 순간에 멸망시켜 버린다. 이런 신을 두고 사랑과 평화의 신이라 운운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거기다 이것은 그저 헤겔이란 한 사람의 견해에 불과하다. 이런 말도 못하는가? 무조건 좋게 보아야 하는 것인가? 편견은 진실을 왜곡해서 보는 걸 이르는 것이지 그저 부정적 견해에 불과한 것을 두고 편견이라 말하지 않는다. 비판을 무조건 편견으로 치부하는 것이야 말로 이본 세라트가 그토록 증오하고 있는 나치즘의 철학과 닮은 꼴이다. 타자를 객관적인 잣대로 헤아리지 않는 그 유아독존적 아집 말이다.


 솔직히 말해 이 시대에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보편적이었다. 독일만이 아니었다. 전 유럽적 상황이었다. 이본 세라트는 욕하려면 세익스피어에게도 해야 했다. 그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을 더없는 속물에다 악덕 상인으로 묘사했으니까 말이다. 영국이 독일과 싸워서 면제부를 준 것인가?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드레퓌스 사건도 그렇다. 드레퓌스가 그토록 말도 안되는 누명을 썼던 것은 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란 사실 때문에 명확한 반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처형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만큼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가 깊었다. 왜 그랬을까? 유럽인들이 이유도 없이 그랬을 리는 없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그 뿌리깊은 증오의 이유는 드러난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고리의 금융업자였다. 그들이 믿는 신은 아무런 노동없이 남에게서 뭔가 받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고 똑같이 이자도 죄악의 과실로 여겼지만 그토록 신을 믿는다는 그들이 그것은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높은 고리로 앞뒤 가리지 않고 자본을 모았다. 덕분에 거대한 부는 유대인들 손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인들에게 유대인들은 이민자에 불과했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에 체류한 동남아시아 노동자가 이건희가 된 것과 같았다.  토박이들 눈에 곱게 보일리 없었다. 거기다 유대인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도, 그 부를 신이 명령한 대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는 것도 아니었다. 악착같이 거머쥘 뿐이고 없는 이들을 무시할 뿐이었다. 단테도 그 희생양이었다. 그는 금융업자들을 가장 뜨거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묘사했다. 증오는 아무 이유없이 태어나지 않는다. 분명 연기나게 한 뭔가가 있다. 그에 대한 자성없이 유대인들을 비난한다고 해서 편협하다 비판하는 건 그것이야말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이본 세라트는 편협하다. 정말 이 책 끝까지 그녀에게는 오로지 유대주의만 보이기 때문이다. 


 리뷰가 길어질 수 있기에 세세하게 다 말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서 유대인들에게 그만한 비극을 안겼는데 어떻게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학을 뗐다. 세라트는 정말 한나 아렌트가 무슨 이유로 그것을 말했는 지 모른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녀야말로 자신이 말하는 것에 몰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정답을 정해놓고 대상을 보고 있으니 편견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문체는 더욱 노골적이다. 부역한 철학자들에겐 더없이 신랄하지만 망명해야했거나 희생당한 철학자들은 무슨 신념에 따른 영웅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사실 벤야민과 아도르노는 안타까운 피해자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유대인인 그들이 독일에 어찌 남아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에겐 이미 철학자의 양심으로 선택할 기회마저 없었다. 그저 망명하는 것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이 책을 읽고 개인적으로 아도르노에게 좀 한심함을 느꼈다. 지금 자신의 조국 독일에선 자신과 같은 유대인들이 속절없이 죽어가는데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그레타 가르보를 만난 일 같은 것을 글로 쓰고 있으니. 발터 벤야민은 정말 불쌍했지만 아도르노의 미국 망명 생활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유대인 망명자들과 많은 교제도 가져 고독도 없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었다. 여기서 이본 세라트는 또 웃긴 짓을 한다. 당시 얼마나 유명한 유대인들이 많았는지 언급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전쟁에도 불구하고 창조적인 작업을 지속해나갔다는 것도 콕 집어 넣는다. '알았다. 알았어. 너네들 정말 대단해. 이제 그만!'하고 싶을 정도다.


 분명 2차 대전에서 유대인들은 피해자였다. 그들의 학살은 정말 우리 인류가 두고두고 반성해야 한다. 하지만 그 때의 피해자가 유대인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가장 많이 희생된 것도 아니다. 사실 나치에 의해 가장 많이 희생된 것은 집시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희생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당한 비극 때문에 문장마다 분노를 드러냈던 이본 세라트도 여기에 대해선 침묵이다.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치 당한 이들은 유대인 밖에 없는 것 같다. 이왕 칸트와 헤겔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근대 자체에 배태되어 있던 인종 편견을 드러내려 작정했다면 반유대주의만 말할 것이 아니라 집시들이 당한 비극까지 말해야 했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멸하려 했던 건 그들이 외래적 존재였고 그만큼 약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이데거 식으로 말해 동일자와 타자에서 유대인들은 타자였다. 어차피 경계 바깥의 존재였기에 쉽게 바깥으로 내버릴 수 잇는 존재였던 것이다. 나치즘의 해악은 거기에 있다. 동일하지 않은 존재들은 무조건 배제해 버린다는 것. 타자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 거기에 유대인들과 집시는 똑같은 존재들이었다. 집시가 입은 피해가 여전히 '블랙아웃'인 것도 그만큼 그들의 지위가 열악하기 때문이다. 가장 약자는 누구도 돌아다보지 않는다. 정작 같은 피해를 입은 이들마저 마찬가지다.


 결국 그들도 그들이 왜 그런 비극을 겪어야 했는지 잊어버리고 같은 가해자가 되어 버렸다. 바로 얼마전에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미사일을 쏘아 민간인들을 비롯 어린아이까지 죽게 만들지않았던가. 남의 영토를 억지로 빼앗아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공존을 모르다.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로 부터 엄청난 피해를 받았으면서도 그들의 지금 모습은 나치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들 스스로 그들의 희생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본 세라트는 그토록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들을 비난하면서 왜 똑같은 일을 저지르는 현재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인지? 스스로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면 신랄한 비판의 칼날은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겨누어져야 한다.


 이 책은 분명 철학이 정치의 시녀가 되는 사태를 비관하여 그 반복을 막는 성찰을 위해서 쓰였을 것이다. 진정한 성찰은 부머랭이다. 결국은 나의 허물을 되돌아 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본 세라트의 성찰은 돌아오지 않는 부머랭이다. 적의만 있다. 그녀 역시 유대주의의 시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공감도 배움도 반쪽에 불과하다. 역사로부터 진정한 교훈을 이끌어 내려면 언제나 탐구하는 자 스스로도 객관적 중립의 위치에 서야 한다. 저자는 한 쪽에 너무 치우쳤다. 에필로그에서 말한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대로 찾고 싶다면 그녀 역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게 좋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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