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군주론 - 이탈리어 완역 결정판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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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키아벨리에게 끌린다는 것은 굶주렸다는 증거다.

 꿈꾸는 세상이 그다지 원대하지 않는데도 마음을 기대고 싶은 이상이 도무지 나아가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행보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급히 먹는 떡이 체한다지만 기다려도 너무 기다렸다. 보이는 세상이 미치도록 답답하여 화병으로 죽지 않으면 기다리다 굶어죽을 판이니 체증 따위가 뭐가 두렵단 말인가? 제발 한 발짝이라도 좋으니 뭔가 가시적인 결과 좀 보여줘. 그래야 내가 이 허기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참을 수 있지 않겠어? 군주론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마음이다. 그렇다고 군주론에 나오는 '군주는 빼앗은 땅을 안전하게 지키고 싶다면 이전 지배자의 친족을 남김없이 학살해야한다'는 말까지 동의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어쨌든 지독한 허기가 군주론으로 이끈다. 그런데 정작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쓰게 된 것도 그의 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공자와 비슷한 데가 있다. 공자처럼 그 역시 공명심이 강했고 공자가 유세했듯이 일선 정치의 무대에 서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공자와 마키아벨리, 둘 다 현실정치에 대한 지독한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바로 그 허기가 공자에겐 '논어'를, 마키아벨리에겐 '군주론'을 가져다 준 것이다. 하지만 나아간 곳은 달랐다.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비슷했다. 모두 혼돈의 도가니. 중국의 춘추전국으로, 이탈리아는 교황, 나폴리, 밀라노, 베네치아, 피란체 등의 5대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평안과는 거리가 먼 시절. 바깥을 둘러보면 지금만큼이나 갑갑증이 몸 가득 차오르던 시절이었다. 누구나 안정을 바라던 그 시대에 공자도, 마키아벨리도 어떻게 하면 안정을 얻을 수 있는가 생각했다. 비슷한 상황에 비슷한 고민이었으나 도출한 대안은 달랐다. 공자나 마키아벨리나 사람을 보는 시선을 같았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 사익추구의 경향을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공자는 칸트적인 데가 있었다. 자신의 이익만 우선하려는 경향을 막으려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했고 그러자면 무엇보다 그 누구의 이해로 기울지 않는 불편부당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칸트처럼 하나의 당위로써 중용적인 '인'을 가져왔다. 한 마디로 높은 이상을 통해 사익 추구의 경향을 '예'라는 틀로 스스로 억압하게 만들어서 한데 묶으려는 것이었다. 공자는 사람들이 그 정도는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똑똑하다면 무엇이 정말 자신을 위하는 길인지 현명하게 선택할 테지. 공자는 수염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달랐다. 마키아벨리는 공자가 사람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보았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자를 만나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바보야, 그래도 문제는 이익이야! 사람은 말이지, 죽는 것보다 자기 재산 뺏기는 것을 더 싫어한다고!"


'사람은 아버지의 원수보다 재산상의 손실을 더 오래 기억 한다'


 마키아벨리는 사람이 중심이었다. 그는 당위로는 절대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물가로 인도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당나귀를 끌고 가기 위해 당근을 눈앞에 보여주듯이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가 그 습성을 잘 이용하는데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사람들을 그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깊이 헤아리는 것. 그것이 마키아벨리에겐 '현실'이란 것이었고 정치의 바탕이었다. 인사가 만사요, 사람에 대해 제대로 통찰하면 만사불여튼튼이었다. 군주론이 정치 논문(그는 '로마사 논고'에서 군주론을 논문이라 부른다.)임에도 한비자처럼 처세술의 용도로도 읽히는 것은 이런 관점 탓이다.


 허기는 자주 조급증을 낳는다. 그건 그대로 '군주론'에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더욱 현실적이 된 것은 그의 조급증이 한몫했다. 그는 빠른 결과를 원했다. 사실 공직을 바라고 쓴 글이기도 해서 더 그랬다. 이상은 알콜 램프로 라면을 끓이는 것과 같았다. 그런 시간이라면 마키아벨리는 물론이고 군주론을 읽는(그가 염두에 두었던) 줄리아노 디 로렌초 데 메디치조차 하품할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수출해야 하는 품목에 대한 PT처럼 현실 가능한 것을 알기 쉽게 요점 정리해서 알려줘야 했다. '군주론'은 그런 스타일의 책이고 그에게 이것은 '단기 계획'이었다. 그는 늘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말했다. '군주론'은 대망의 목적을 위한 단기적인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가 바라는 대망의 진정한 모습은 '로마사 논고'에서 구체화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가 군주론을 읽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너무나 답보적인 보다 평등한 세상을 향한 이상들에게 조금이나마 숨통을 트여주려고 하는 것인데.(우리라고 한 것이 성급한 일반화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마음이 나 하나는 아니라는 바람으로 굳이 써 본다.)


 꼭 그런 세상이 오리라 믿는 우리가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 같아서 말이다. 점점 가빠져오는 호흡 때문에 아예 포기해버릴까 싶다가도 현실정치의 교본이라는 여기서 라면 행여 스포이트처럼 방울방울 떨어지더라도 그 물로 지독한 갈증을 조금이라도 달랠 것 같아서.


 어쨌거나 나는 그런 마음으로 읽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책이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술술 읽히니까. 이해하는 데 가장 적은 뇌세포와 시간을 요구하길래 읽었다. 솔직히 번역이 얼마나 정확하나 따위는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원래 번역에 까다로운 편도 아니고. 그저 원문의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술술 읽히는 번역이라면 '장땡'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허기는 해소할 수 있었냐고?


 하나는 얻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을 너무 과대평가 하지 말라는 거.

 그러고 보니 재확인이다. 그렇지 않아도 허기는 깨닫게 한다. 사람은 결코 멀리 내다보지 않는다는 것을(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다. 알지만 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다. 뭐가 옳은 지는 알지만 내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안 한다는 뉘앙스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죽을 때까지 유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는 옳은 걸 안다면 행동하리라 생각했지만 여보세요,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거든요.) 사람은 그만한 그릇이 못된다. 역사 속의 몇몇 영웅들 때문에 무량할 것 같지만 어불성설! 그러면 이런 분통터지는 세상이 되지 않았겠지.


 그러고 보니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이런 말을 하더라.


 군주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무릇 백성이란 다정하게 다독이거나 아니면 철저히 제압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사람은 작은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을 꾀하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보복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법이다. 부득불 백성에게 피해를 끼칠 경우 그들의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철저히 제압할 필요가 있다.(P. 74~75)


 지금 우리가 당하는 그대로가 아닌가. 습관처럼 해외 유람하시는 저 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하시는 분도 군주론은 읽었나보다.

 그러면 이런 말도 좀 새겨두실 것이지.


 공화국 체제 하에서는 군주국에 비해 더 큰 활력과 증오, 더 큰 복수심이 작동한다. 과거의 자유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결코 잠자코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P. 97)


 아니면 그 뒤의 말에 더 집중하기로 하셨나?


 가장 확실한 방안은 그런 체제를 말살하는 것이다.(P. 97)


 진짜라면 소름이 쫙!

 그러면 이런 말도 좀 읽었다면,


인간은 해롭게 생각된 사람으로부터 뜻밖의 은혜를 입으면 더욱 고마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백성은 자신의 지지로 보위에 오른 군주보다 이런 군주에게 더 우호적이다. 군주는 다양한 방법으로 백성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다만 하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원칙은 군주는 늘 백성을 자기편으로 삼아두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역경에 처했을때 속수무책의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P. 134)


 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요. 절반이 아니라. 그것도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데.


 그러니 이런 말은 더욱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네요.


 군주는 앞서 언급한 선한 품성을 구비하지 못할지라도 마치 이를 구비한 것처럼 가장할 필요가 있다. 장담컨대 실제로 그런 뛰어난 품성을 구비해 행동으로 옮기면 군주에게 해롭지만 구비한 것처럼 가장하면 오히려 이롭다. 자비롭고, 신의 있고, 정직하고, 인정 많고, 신앙심이 깊은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리하는 게 좋다.(P. 195)


 적어도 자기가 한 약속은 지키는 척이라도...


 그리고 이런 말도...


 군주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탐욕스럽게도 백성의 재산과 부녀자를 빼앗는데 있다. 대다수 백성은 군주가 그들의 재산과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한 대략 자족하며 살아간다. 군주의 경계 대상은 소수의 야심 많은 귀족들이다.(P. 199)


 어쩌다 리뷰가 이렇게 되었나? 군주론의 말들이 너무나 현실적이라 나도 모르게 지금의 현실에다 이입해버렸나 보다. 냉정해질 수가 없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인데 그럴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좋은 리뷰 쓰는 것은 애당초 포기했다. 읽을 때부터 분통, 푸념, 넋두리의 짬뽕이 될 것을 알았다. 그런 시대니까. 제정신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시대니까. 그러니 이 리뷰로 군주론이 어떤지 가늠하려 하지 말라. 직접 읽고 스스로 군주론의 초상화를 그리는 게 좋겠다.


 부록으로 이탈리아의 역사, 군주론의 출현배경 및 그 용어 설명, 거기에 군주론과 관련한 서한을 비롯 마키아벨리의 삶과 사상 그리고 군주론의 인명사전까지 거의 책의 절반 가까운 분량을 차지하는 두툼한 부연 설명이 있으니 그게 이 글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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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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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에는 늘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있기 마련이다.

 흔히들 불행이라 부르는 명함을 들고 불현듯 방문하는 이런 불청객 때문에 삶은 자주 맨발로 작두를 타는 듯한 불안을 가지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개인의 삶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에도 이런 불청객의 방문은 얼마든지 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97년의 IMF일 것이다. 예고 없이 찾아온 그 불청객은 내일의 희망을 갖고 착실히 살아가던 평범한 가정들을 일거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집을 가진 자는 집을 잃었고  둥지 안의 새들처럼 도란도란 살던 가족들은 뿔뿔히 흩어지기도 했다. 삽시간에 절망과 공포가 교차하는 거리로 나앉게 된 이들은 새삼 삶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뼈져리게 느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여기엔 그들이 책임질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한 것은 어릴 때부터 어른들 말씀이나 교과서에서 배워왔던 그대로 성실하게 자기 맡은 바를 다해 살았던 것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렸다. 경악말고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라는 대로만 하면 이대로 계속 순탄하게 살아가리라는 생각을 IMF는 비웃으며 뿌리채 뽑아버렸다. 삶은 그들이 믿었던 것보다 훨씬 허약했다. 자신이 아무리 잘하고 열심히 한다고 한들 조금만 큰 바람이 불어도 쉽게 꺼져버릴 등잔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분명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IMF는 그렇게 기존의 가치관을 전복시켰다. 아버지의 말씀은 더이상 신뢰의 대상이 아니었고 믿음을 얻지 못한 기성의 권위들은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코스모스는 사라지고 카오스의 우주가 도래했다. 더구나 그 우주에 도사린 예측불허의 불청객이 가지는 압도적인 힘은 허무마저 가져왔다. 많은 이들이 이제 삶은 항로없는 비행이며 온전히 자기만이 항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기에 어디선가 주입된 머리 속의 말들은 그저 공허한 관념에 불과했고 오로지 손으로 쥘 수 있는 현실적인 것들만 유일한 가치로 여겨졌다.


 삶이든,사회든 똑같이 불청객은 불안과 허무를 동시에 가져와서는 우리가 디디고 있는 발판을 없애 버린다. 만화영화에 나오는, 열심히 달리다가 뒤늦게 자신이 허공 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캐릭터와 똑같이 우리들도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날 안심시켰던 그 모든 것이 단순한 착각에 불과했구나 하는 통렬한 깨달음과 함께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을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뭐랄까, 리부트(reboot)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 즉 모든 것을 다시금 시작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실연이나 이혼을 겪고 다시는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이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다시 처음부터 알아가고 맞춰가야 한다는 게 싫어.' 근원적인 측면에서 이와 똑같은 이유로 우리는 불청객을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문학도 불청객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도 불청객만큼이나 내가 딛고 있는 '발판 빼내기'의 전문가라는 뜻이다. 문학을 읽다보면 때로 경험하지 않는가?  문학이 그동안 보이지 않던 세상의 창살을 문득 드러내어 내가 지금까지 조악한 편견에 갇혀 있었음을 일깨우더니 결국 갑자기 내 발 아래 놓여진 아득한 허공을 느끼게 만드는 경우가 말이다. 흔히들 문학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달라지게 만든다고 하는데 바로 그 느낌을 달리 일컫는 말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일변시키는 것을 문학이 가져다 주는 자유라고 말한다.


 그들의 말이 옳다면 불청객은 꼭 회피의 대상만은 아니다. 그들이 주로 하는 발판의 제거는 아득한 추락의 공포와 함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스스로 정립해야 한다는 지겨움마저 가져다 주지만 사실은 그 추락의 깊이만큼 우리를 해방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포기하고 싶지 않은 안정이란 것도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길들여진 결과일지도 모른다.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의 토끼와 같이 너무나 거기에 익숙해져서 아무리 내 목숨이 경각에 처해 있더라도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고양이를 기른다. 원래는 '길냥이'였다. 야생의 습성이 강했기에 처음 집에서 키울 때 아주 애를 먹었다. 늘 바깥으로 달아나려고 해서 어떻게 나가지 못하게 하느냐가 매일의 고민이었다. 그랬는데 1년이 흐른 지금 이제는 도통 집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안아 들고서 문을 열면 내게서 빠져나가려고 기를 쓴다. 이제 어떻게 데리고 나가느냐가 고민이 되었다. 이 정도로 고양이는 이미 자신이 속한 세계가 바뀌었다. 지금 이 세계에 너무 길들여진 탓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내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는 것은 결국 세상이 만든 창살을 우리 스스로의 한계로 여기고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내 집에 편히 거한다는 '안주'는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만든 감옥일지도 모른다.


 이렇다면 불청객은 오히려 열쇠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문을 열고 사실은 히키코모리나 다를 바 없는 우리들을 밖으로 내모는 존재인 것이다. 물론 불청객은 기존 세계의 파괴와 허무를 가져온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 파괴와 허무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안다. 그가 파괴하는 것은 실은 나를 규정하고 있는 틀이며 허무 역시도 그 틀을 떠받치는 근거의 삭제를 위해서라는 걸 말이다. 결국 그는 나를 얽매고 있는 사슬을 풀어주는 존재다. 그렇다면 실은 환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여기까지는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라는 단편집을 읽고 느낀 것을 갈무리한 것이다.

 이 단편집엔 모두 8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읽다보면 모든 단편에 면면히 흐르는 공통점을 깨닫게 된다. 바로 불청객의 존재이다. 8개의 단편 모두 불청객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삶에 느닷없이 출몰해서는 삶을 이전과 다르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도 똑같다.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5년만에 갑자기 돌아온 오빠와 그가 데리고 온 여자가 집안에 일으키는 변화나 '이사'에서 믿고 맡겼던 포장이사업자들의 주인공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의 파괴. '보물선'에서 가장 이기적인 자본주의적인 삶을 살던 이에게 가장 이타적인 삶을 살던 이가 문득 찾아와 선사한 불행이라든가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갑자기 찾아온 과거의 인연들이 가져온 혼돈(그들이 찾아오는 계기가 하필이면 '지진'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모두가 그렇다. 이렇게 8개의 단편 모두 누군가가 꼭 찾아와서는(그들은 '엄습'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문득 도래한다.) 나이테처럼 지울 수 없는 파문을 남기는 동일한 패턴을 반복한다. 그러니 하나의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김영하는 왜 이렇게 자꾸 불청객을 등장시키는 것일까? 그것도 늘 혼란과 불안을 가져다주는 불청객을 말이다.


 나는 그걸 이 단편집이 쓰인 사회적 상황에서 이유를 찾고 싶다. 단편집은 원래 2004년에 나왔는데 대부분 2000년을 언저리로 해서 쓰인 것들이다. 말하자면 IMF와 미국의 9.11 사태의 여파가 꽤 강력하던 시기의 산물인 것이다. 개인들이 불현듯 도래한 외부적인 힘에 마구 휘둘리던 시기. 내내 등장하는 불청객은 바로 그 힘의 은유가 아닐런지. 정말 우리에게 도래했었던 현실의 반영으로써 말이다. 그 때 우리들은 종횡무진 쏟아져 들어오는 불청객들 때문에 좌충우돌 하느라 잔뜩 불안했었다. 그들은 멀쩡히 안방에서 잘 살고 있는 아버지를 방에 갇히게 만든 '오빠'였고 애지중지하던 골동품을 부셔버린 '포장이사업자'였으며 남부러울 것 없었던 '재만'을 피고인 신분으로 국정원에 불러가게 만든 '형식'이었다. 불청객 때문에 삶은 쪼들리고 상처입었으며 완전히 부서지기도 했다. 어찌 불청객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김영하는 8개의 단편을 통하여 내내 묻는다. 과연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을까?

 물론 불청객은 날선 톱니바퀴와 같다. 그들과 마주하면 소설의 인물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깍여나가게 된다. 하지만 김영하는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꼭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아직 그것이 독인지 아니면 득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바로 그 자화상을 아직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마음이 나는 '오빠가 돌아왔다'의 단편들을 끌고간 동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은 그 때의 우리들은 상황 한가운데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바람을 이리저리 타느라 정신이 없어서 거울을 볼 때 필요한 객관적인 거리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내 몸에 와 닿는 피부의 아픔과 몸의 힘겨움만으로 불청객을 막연히 두려워하고 불안해할 뿐이었다. 우리에겐 거울이 필요했는데 김영하는 아마도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주려는 것 같다. 제대로 된 삶의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는 우리들을 위해 그 자화상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거울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단편들은 모두 하나의 실험이며 그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불청객과 대면한 나의 자화상을 제대로 보기 위한 거리를 만들어주려는 데 있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단편들이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부분에서 느닷없이 끝나는 게 아닐까 한다.


 단편들 모두가 '기승전'만 있다. 여기엔 '결'다운 '결'이 없다. 불쑥 들어왔다 불쑥 나가버리는 불청객 같다.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더욱 실제 삶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삶도 죽음에 이르기 전에는 '결'이 없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엔 결말이 주는 바로 이 황당함이 실은 김영하의 노림수 같다. 바로 브레히트의 '소외효과' 같은 것 말이다. '소외효과'란 연극을 아주 인위적으로 만들어 관객을 연극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관객을 하나의 대등한 참여자로서 연극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기 위해 인위적인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것을 김영하가 쓰는 것 같다. 엉성한 상태의 이야기 덩어리로 만들어서 이야기가 아니라 거기에 내재된 나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음미하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거울로써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설의 바퀴 하나를 빼버린 것과 같다. 끊임없이 덜커덕거리는 마차 위에서 어떻게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까? 그보다는 왜 이리 불편할까 하면서 내내 나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 단편들은 불청객스럽다. 불청객이라는 존재야말로 '결' 자체를 거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청객은 틀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온전히 자신이 원하는 길을 마련해주고자 함인데 분명한 '결'이 있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틀이 되어버릴 테니까 말이다. 혹은 그래서 더욱 '결'은 없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불청객이 사실은 오롯이 우리 스스로 항로를 개척하게 만들기 위한 존재라면 진정한 '결'은 소설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소설이 우리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결'은 어디까지나 우리 마음에 있을 수밖에 없다.  정말로 김영하는 이것을 배려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꽤 매너 좋은 불청객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삶의 모퉁이마다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불청객은 늘 마주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삶이 허약하기에 이 불청객들은 아무래도 불안한 존재이지만 '오빠가 돌아왔다'는 무조건 회피할 게 아니라 환대할 필요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들로 인해 나 자신이 더욱 나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불청객은 순수한 응시를 가져다 준다. 나도 모르는 새에 세상이 덧씌웠던 시선에서 해방되어 나의 참된 시선으로 나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청객이 두려웠던 것은 내 진실된 모습을 확인하기가 두려웠던 데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것 같다. 나에 대한 신뢰가 바로 불청객에 대한 환대를 낳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오빠가 돌아왔다' 단편에서 왜 이혼해서 오래도록 따로 살던 엄마가 오빠가 데려온 여자에게 그렇게 했는지 또 오빠의 귀환을 계기로 바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는 지가 이해된다. 세상이 내 선택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내 선택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세상이든 상관없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니까. 분명 '오빠가 돌아왔다'의 불청객들은 궁극적으로 그 믿음을 우리에게 주기 위한 전령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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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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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이국기의 재래. 정말 반갑다.


'십이국기' 1권, 가제본의 모습


 저자인 오노 후유미를 좋아한다. 그녀의 주 특기라고 한다면 호러다. 아마도 누군가의 기억에는 꽤나 무서운 이야기를 잘도 쓰는 여성 작가로 남아 있으리라. 나는 그 때문에 그녀를 좋아한다. 오노 후유미에게 있어 공포는 목적이 아니다. 실은 수단에 불과하다. 오노 후유미의 진짜 관심은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그녀는 변혁을 갈망한다. 그녀는 일본 사회의 현재 모습에 염증을 느낀다.자기가 속한 일본이라는 사회가 좀 더 올바른 쪽으로 자리잡히길 바란다는 뜻이다. 그런데 달라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그 사유의 과정을 오노 후유미는 소설로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녀는 '사회파' 작가다. 미스터리가 아닌 호러를 주 특기로 한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분명 오노 후유미의 완성형은 '시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최고 걸작이더라도 완전한 무에서 태어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시귀'와 같은 최고 걸작이 태어나도록 산파 같은 역할을 한 작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귀' 바로 전에 나온 이 작품, '십이국기'이다.


 '십이국기'는 판타지다. 오노 후유미의 주 특기인 호러는 아닌 것이다. '십이국기'는 출판사가 먼저 제의해서 쓰게 되었는데 그 때까지 오노 후유미는 판타지의 '판'자도 경험해보지 못한 '초짜'였다. 그래도 그녀는 이쯤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도전했다. 오노 후유미의 작품을 읽어보면 대번에 알 수 있겠지만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그녀가 추구하는 것이다. 출판사는 당시 유행 중이던 중세 유럽 스타일의 판타지를 원했다. 하지만 오노 후유미는 거기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전혀 모르는 것으로 하기 보다는 그래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중세 유럽은 잘 몰랐지만 고대 중국이라면 잘 알았다. 그래서 판타지의 세계를 그 쪽으로 설정했다. 그리하여 당시로서는 독특한 판타지인 '십이국기'가 태어났다.


 오노 후유미로 하여금 '십이국기'를 쓰게 한 또 하나의 유인(incentive)이 있었으니 바로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 영웅 전설'이다.



 오노 후유미는 그 소설을 좋아했는데 그러다 주인공 황제인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실은 영원히 죽지 않는 , 말하자면 불로불사이고 그러다 나쁜 왕이 되어 버리면 바로 불로불사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기초가 되어 '십이국기'의 독특한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이번에 나오는 1권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에서 여주인공 요코의 여행 동반자가 되는 라쿠슌을통해 다음과 같이 말해지고 있다.


 "한 임금이... 오 백 년?"

 "물론이지. 왕은 신이야. 사람이 아니야. 하늘은 그 왕의 기량만큼 나라를 맡기지. 그러니까 능력 있는 왕일수록 치세가 길어."

 "흐음..."

 "왕이 바뀌면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어. 그만큼 좋은 왕을 얻은 나라는 풍요로워지지. 특히 연왕은 여러 개혁을 이룬 수완가야. 명군이라면 종왕도 명군이지만, 주국은 안온하고 안국은 활기 있다고들 하지." (p. 321)


 '요코'와 쥐인 '라쿠슌'


  뭔가 '성군지상주의'랄까? 플라톤의 '철인' 사상 비슷한 냄새가 난다. 오노 후유미가 '은하 영웅 전설'의 자장 안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즉, 민주주의를 만능의 체제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십이국기'의 나라들은 동시대 일본의 곁에 있다. 주인공 요코는 타임슬립을 통해 과거로 가지 않는다. 갑자기 나타난 '게이키'라는 정체불명의 존재에 의해 '십이국기' 사람들이 '허해'라 부르는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즉 '십이국기'와 요코가 살던 현대 일본은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나라를 이루고 있는 근본 체제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십이국기'가 '은하 영웅 전설'처럼 현재의 일본과 전혀 다른 체제를 상상하고 그것을 일종의 대차대조표 삼아 거꾸로 지금 체제의 대안을 그려보는 오노 후유미만의 사유 실험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오노 후유미는 '십이국기'의 체제를 정교하게 세공한다. 1권을 읽으면서 다 알 수 있는 부분인데다가 설명하다 자칫 스포일러를 남발할 수 있기에 여기서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다. 분명 소설을 읽다보면 오노 후유미가 설정에 꽤나 공을 들였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시귀'도 그렇고, '흑사의 섬'도 그렇고 이런 아주 정교한 배경의 설정이야말로 오노 후유미의 특기라 할 만하다. 읽다보면 오노 후유미가 정작 이야기보다 오히려 이렇게, 저렇게 세계를 만들고 질서를 구축하는데 더 재미를 느끼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스스로 즐기지 않으면 그만한 공을 들이기가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그녀가 왜 하필이면 이런 개인적 역량이 나라의 운명마저 좌지우지 하는 설정을 하게 된 것인가가 드러난다. 1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코의 여정은 오노 후유미가 그런 체제를 상정했던 이유의 설명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서 오노 후유미가 그녀의 모든 작품을 통털어 천착하고 있는 '혼종'의 주제가 나타난다. 멀리 돌아왔지만 이쯤에서 오노 후유미가 왜 호러를 즐겨 쓰는지 말해야 할 것 같다. 오노 후유미에겐 언제나 외부의 감각이 중요하다. 폐쇄된 자아를 허물고 바깥으로 눈과 마음을 열게 만드는 감각이다. 오노 후유미는 그 '변화', 궁극엔 '혼종'이 구원의 통로라고 여긴다. 자아든 사회든 할 것 없이 말이다. 그녀에게 가장 끔찍한 것은 '고인 웅덩이'다. 외부에겐 일체 마음을 열지 않고 기존 자신의 것만 오로지 고집하는 것을 그녀는 혐오한다. 그건 일본이 바깥의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이 하나도 없는 폐쇄 사회인 것에 대한 그녀의 염증에서 기인한다. 그녀가 호러를 쓰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바람과도 같은 외부의 감각으로 벽을 흔들려는 것이다. 내부를 허무는데 호러만큼 충격을 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십이국기'에도 변하지 않는다. 주인공 요코의 여정은 정확히 이것을 보여준다. 처음 '허해'를 건너온 요코는 절망한다. 그녀가 전혀 모르는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혼자서. 게다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첫 여정에서의 요코의 모습

('허해'를 건너온 뒤, 요코는 원래 부분만 빨강이던 머리카락이 모두 빨강이 되었고,

얼굴과 모습이 이전과 달라졌다. 나중에 여행하는 나라의 옷으로 갈아 입는데 사람들은 요코를 사내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 '허해'를 건넌 뒤, 요코는 철저한 '타자'가 되는 것이다.


 거기서 요코는 철저한 이방인이다. '허해'를 건너온 자들을 '해객'이라 부르는데 요코가 있는 나라는 그 해객을 체포하려 한다. 더구나 한 번 '허해'를 건너오면 다시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기에 버려졌다. 그녀에게 익숙한 것들은 모두 '허해' 건너편에 있다. 여기는 그 경계의 바깥인 것이다. 외부의 감각이 압도적으로 충만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서 그녀는 선택해야 한다. 예전의 나를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변할 것인가? 변한다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코의 여정은 내면의 여정이다. 거기서 요코는 비로소 진실한 인간 관계가 어떤 것인지 눈을 뜨고, 인간 존재에게 있어 확실한 경계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그녀 역시도 지금까지 그녀가 생각해왔던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이러한 요코의 변화가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에 투영된 오노 후유미의 본심이 아닐까 싶다. '십이국기'는 그런 면에서 '시귀'와 연결되며 그 보다 긴 호홉으로 '나와 타자', '변화와 혼종'의 주제를 천착한다.('십이국기'는 아직도 완간되지 않았다.)


 '십이국기'는 예전에 '조은세상'에서 발간한 적이 있다. '애니메이션'마저 우리나라에서 방영했기에 아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전에 나온 판본은 두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하나는 엉성한 번역이고 다른 하나는 삽화가 대부분 삭제된 것이었다. 나는 지금 가제본을 받아 읽었고 가제본을 받을 때 엘릭시르가 먼저 밝히기를 가제본엔 삽화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였기에 삽화 쪽은 뭐라 말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번역에 관해서라면 가히 '일취월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일단, 이전의 혼란스럽기만 했던 표기와 호칭 부분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어 대화도 한결 산뜻하게 들려온다. 덕분에 더욱 쉽게 지금 읽고 있는 상황을 머리에 그릴 수 있었다. 번역만큼은 믿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솔직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번역한 이가 '시귀'를 번역한 추지나이기 때문이다.  삽화에 관해서라면 정식 발매본엔 신조사의 재간행본 그대로 야마다 아키히로의 일러스트가 삭제 없이 모두 들어간다고 한다. 야마다 아키히로의 일러스트를 좋아했다면 이번 '십이국기'는 '반드시 소장!'이 아닐까 싶다.


 자세한 사항은 엘릭시르가 보내온 'Q&A'를 참조.

  


  어쨌거나 십이국기의 재래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완결까지 다 나온다고 하니, 이러다 영영 결말을 못 보게 되는 것 아닌가 우려하고 걱정하며 절망했던 나에게는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을만큼 기쁜 소식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하고 마음 힘든 것 투성이인 요즘, 이렇게 나마 또 조금 숨 쉴만한 것을 얻는 것 같다. 오래도록 나의 산소 호흡기가 되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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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4-11-04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잠깐만요... 헤르메스님 서재 놀러왔다가 이런 소름끼치고 머리털이 곤두서고 숨이 턱 막히는 소식이.......
와........ 헤르메스님한테 먼저 반갑다고 인사했어야 하는데.....
결말까지................... 와....

오드득 2014-11-05 02:36   좋아요 0 | URL
오! 소이진님 방가방가~!!
워떻게 지낸데요? 정말 많이 궁금했어요~^ ^
사실 이 소식 들었을 때 소이진님도 많이 좋아하겠구나 생각했었어요.
역시 그러네요. 저와 똑같이~!!
같이 제발 완결까지 무사히 나올 수 있도록 빌자구요~^ ^
그리고 잘 지내고 있는 거죠? ^ ^
 
신의 손 밀리언셀러 클럽 104
모치즈키 료코 지음, 김우진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골키퍼나 투수처럼 손으로 하는 일에 남다른 능력을 가진 친구에게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오, 그는 정말 신의 손을 가졌어."


 또한 때로 인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을 예감했을 때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건 정말 신의 손이 한 일이야."


 '신의 손',

 그것은 재능이자 운명이다. 신이 허락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라 여기기에 얼른 운명으로 생각되는 지도 모른다. 니체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운명적인 것은 비극의 아우라를 가진다. 하물며 그것에겐 죽음의 냄새마저 도사린다. 죽음처럼 미리 결정되어 있고 도저히 변경 불가능한 탓이다. 그래서일까? 죽음이 불행이듯 운명은 자주 저주처럼 여겨진다. 그러니까 이런 말도 가능하다. 재능은 곧 저주라고.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어느 날 아주 오래된 나무를 본다.

 수백 년을 산 나무다. 장자의 옆에서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 나무는 말이죠, 그저 오래 살고 있다 뿐이지 별 쓸모는 없어요. 집을 지을 수도 없고 문짝으로도, 바퀴로도 도대체 사용할 수가 없어요. 아마 세상에 이렇게 쓸모없는 나무도 찾아보기 힘들 걸요." 그러자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 때문에 이 나무는 이토록 오래살 수 있었던 것일세." 나무는 아무런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가 아는 많은 천재들은 제대로 천수를 누리지 못했는데 이 사실을 대비해 보면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주인공 피터 파커의 다음과 같은 말은 꽤나 설득적이다.


"이것(스파이더맨 능력)은 축복이자 저주다!"


 '신의 손'은 그 모순을 함축한 말이다.

 이를테면 카인의 표식이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바람에 신으로부터 영원한 유랑의 형벌을 받는다. 그는 신에게 애원한다. '이런 살인자의 몸으로 세상으로 나갔다간 저의 죄 때문에 언제 다른 사람들 손에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자 신은 카인의 이마에 표식을 준다. 그리고 세상에 선포한다. '이 표식을 가진 자를 건드리면 내가 똑같이 보복하리라.' 카인은 안심하고 세상에 나간다. 표식을 가진 탓인지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다. 동시에 아무도 자기 곁에 다가오지 않는다.


 카인이 잘 보여주듯이 피터 파커가 말하는 저주란 고독이다. '신의 손'은 에덴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화염검처럼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질시와 몰이해라는 가위로 싹둑! 

 천재가 불길한 것은 묘지를 배회하는 유령과도 같은 그림자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홀로 죽거나 고독에 미쳐서 광기의 희생양이 될 미래를 예언하는 것과도 같은 그림자를...


 소설 '신의 손'에 드리워진 것도 그런 그림자다.


이 소설은 14회 일본 미스터리 대상 신인상 수상작인 '대회화전'으로 먼저 소개된 바 있는 모치즈키 료코의 데뷔작이다.


2004년 집영사문고본으로 첫 간행되었을 때의 표지.

 이름에서 이미 알아차렸을 지도 모르지만 료코는 여성작가다. 1959년에 태어났으니 데뷔작은 40대 중후반에 나온 셈이다. 흔한 말로 늦깎이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기에 추측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무명 작가로서의 삶이 길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추측을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이 소설, '신의 손' 때문이다. 소설이 저자 료코와 똑같은 여성 작가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기스기 교코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녀를 만나 그녀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그녀를 '신의 손'이라 부른다. 그녀는 분명 신이 부여했으리라 여길 정도로 재능이 있었고 글에 대한 열정은 더 커서 어마어마한 양의 작품을 남겼으나 한 번도 출간되지 못했다. '신의 손'을 가졌으나 내내 무명 작가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몸 속에 괴물을 한 마리 키우는 것과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녀는 세상에 작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에 절망한 나머지 자신이 키우던 괴물에 끝내 먹혀버린 것일까?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져 버린다. 어차피 소수만 알고 있었던 존재. 그 이름은 곧 세상에서 잊혀져 버린다.

 그런데 10년 후, 불현듯 그 이름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대중과 평단의 호평 속에 공신력 있는 문학상을 받은 한 소설이 실은 기스기 교코의 작품을 훔친 것이라는 고발이 나온 것이다. 고발한 주체는 다카오카 마키라는 여성.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의사인 히로세를 통해 기스기 교코와 내연의 관계였다는 편집자 미무라에게 자신의 원고를 보내 그것을 증명하려 한다. 미무라가 그 원고를 본 결과, 놀랍게도 그것은 분명 기스기 교코의 것이었다. 더구나 그 원고는 단 한 번도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다카오카 마키가 사라진 기스기 교코일까? 미무라는 히로세를 만나 그 진상을 알아보려 한다. 밝혀진 사실은 다카오카 마키는 기스기 교코가 아니라는 것. 더구나 그 둘 사이엔 아무런 접점조차 없다. 생판 남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카오카 마키는 어떻게 세상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기스기 교코의 원고를 가지게 된 것일까? 미스터리는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미스터리는 누구도 몰랐던 기스기 교코의 진실된 초상으로 인도한다.

 기스기 교코의 초상을 보았을 때, 얼른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바로 '다락방의 미친 여자'다.

 '제인 에어'에 나오는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는 페미니즘에 있어 또 하나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그것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남성 중심 문명에 편입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의 여성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사회의 가장 구석진 자리(격리된 공간의 일종으로써)인 다락방에 갇힌 것이다. 물론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재능으로나 지성으로나 오히려 정상인들보다 더 비범하다. 실은 바로 그 때문에 다락방에 갇힌 것이다. 그녀의 재능과 지성으로 남성 사회를 유지시키는 남성만이 가지는 전유물들을 획득하여 남자들을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에게 그건 전복의 징후였고 더구나 길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에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여,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을 보이지 않는 다락방에다 가두게 된 것이다. '광기'의 팻말을 여성의 목에다 걸거나 '괴물'로 치부하여...

 실제로 19세기에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던 글쓰기를 과감하게 감행했던 여성들은 모두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굴레를 뒤집어 써야만 했다. 글을 쓰려는 여자들은 그 시기 남자들에게, 그것도 작가인 남자들에겐 더욱 주제 넘은 건방진 짓이었고 그 어떤 미덕으로도 상쇄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악행이었다. 정말로 그랬다. 그러므로 감히 펜을 통해 경계를 넘으려 했던 여성들은 당연히 쏟아지는 비난과 격리를 감수해야 했다. 쓴다는 것엔 그만한 위험이 뒤따랐다. 재능은 그녀들에게 저주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신의 손'의 기스기 교코 역시도 그렇다. 그녀는 현대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오직 그것만이 그녀 삶의 전부다. 그녀는 미친 듯이 글을 쓴다. 수 년간 오로지 열정만으로 골방에 틀어박혀 글을 썼다. 엄청난 양의 글을. 남성들은 그녀를 길들일 수 없었다. 여기서 길들인다는 것은 그녀에게서 펜을 뺏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녀가 남성 사회에 전혀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암시로 그녀가 쓰는 글들은 대부분 범죄와 파멸 그리고 죽음이라는 어두운 이야기들이다. 사회의 안정된 기반을 허무는 이야기들. 그렇게 그녀는 격리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오로지 남성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주의 깊게도 교코를 상대하는 편집자들은 모두 남성으로 소설은 설정하고 있다. 19세기 여성들이 글을 쓰는 남성 작가들에게 포위되어 다락방에 '미친 여자'로 갇히게 되었듯이 교코 또한 똑같이 갇히는 것이다. 정녕 기스기 교코는 19세기 여성 작가들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신의 손'은 사실 이런 이야기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미스터리이고 결국 기스기 교코의 실종과 오랜 세월이 지나 불현듯 도래한 그녀 원고의 비밀도 풀리지만 보다 심층적으로 보자면 남성의 음경이라 할 수 있는 펜을 차지하기 위해 분투했던 여성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너무 식상한 표현이라 쓰기 싫지만 이만큼 그걸 선명히 드러내는 말도 또 없는 것 같아서 부득불 쓴다.) 여성의 해방과 자유를 향한 몸부림과도 같은.

 과연 그녀는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결말에 밝혀지는 비밀은 누구에게는 실패로 읽혀질 수 있을 것 같지만 난 성공으로 보인다. 그녀는 그것으로 모든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성들에게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존재로 남는다. 영원한 물음표의 존재. 19세기의 상황으로 보자면 그것이야 말로 남성만의 전유물이었던 펜을 되차지한 여성의 모습이랄 수 있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가장 독립된 여성의 모습이니까.

 광기가 투쟁이고 격리가 해방이다. 이런 비틀림이야말로 남성 중심 세계의 중력으로부터 여성들을 벗어나게 만드는 날개인 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결말을 긍정적으로 본다. 더구나 뒤늦게 출현한 원고는 교코를 둘러싼 모든 남성 가해자에게 그대로 복수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투쟁(그렇게 불러도 좋다면)은 성공한 것이다. 같은 여성 작가인 모치즈키 료코는 어쩌면 아직은 무명 여성 작가로서 데뷔하기 험난했던 경험으로 교코에게 빙의되어 이 소설을 써내려 갔던 지도 모른다. 교코가 토해낸 언어들은 그대로 소설을 쓰던 당시 료코의 심정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료코인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게 교코로 한 것은 아닐까?

 이런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은 료코가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먼저 알려진 '대회화전'과 꽤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회화전'의 전개는 좀 '스타카토'적인 면이 있었는데 '신의 손'은 '레가토'적인 면이 강하다. 그 이음새를 단단히 하는 것이 투명하게 묘사하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다. 그래서 더욱 교코의 고독과 방황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어쩌면 남자인 나보다도 지금도 펜을 들고 기꺼이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되려는 여성들이 더 공감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신의 손'은 그런 그녀들을 위한 연가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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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맨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6
오리하라 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그랜드 맨션'은 2013년에 나온 오리하라 이치의 소설이다. 이게 정말 얼마만에 만나보는 그의 작품인가? 1951년에 태어나 1988년에 '다섯 개의 밀실'로 데뷔한 오리하라 이치는 도착 3부작과 '~자' 시리즈를 비롯하여 정말 많은 작품을 썼는데 그래도 내게는 오리하라 이치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서술 트릭'이다. 분명 명실상부한 그의 대표작인 '도착의 론도'로 처음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도착의 론도' 자체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이다.


 여기서 오리하라 이치는 자신이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서술 트릭을 사용할 수 있는지 가득 보여준다. 서술트릭의 효과는 결말에서 뒤통수를 맞고 반드시 다시 읽게 된다는 것인데 '도착의 론도'가 꼭 그랬다. 그렇지 않아도 서술 트릭에서 유독 강세를 보이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아니, 일본만이 유일하게 서술 트릭을 다룬 작품들이 여전히 나오고 있다. 오리하라 이치는 거기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여줬던 작가라 할 수 있었다. '도착 3부작'은 마치 서술 트릭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나를 실험하려는 듯한 인상마저 짙게 풍기는데 그만한 재능이 바탕되어 있기에 할 수 있는 실험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 나온 '그랜드 맨션'도 도착 3부작의 노선을 따른다.

 즉 서술 트릭이 주가 되는 작품이다.


 표지가 너무 멋지기에 아무래도 표지 이야기부터 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보았을 때 역대급 표지라 생각했다.

 이 정도로 책에 대한 호기심을 부채질하는 표지가 또 있을까 싶다. 작가의 이름이 뭐든 장르가 뭐든 상관없이 닥치고 펼쳐서 읽고 싶어진다. 원래 책을 위해 만들어진 표지가 아니라고 하는데도 책 내용과 묘하게 상통한다. '그랜드 맨션'은 같은 공동 주택에 사는 서로 다른 7명을 하나의 단편마다 하나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연작 소설처럼 되어 있는데 그 중 밀실 살인을 다룬 '시간의 구멍'이 바로 표지의 그림과 상관있다. '시간의 구멍'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설정을 따왔는데 거기서 라스꼴리니코프의 역할을 맡은 미스터리 소설 수집광 청년은 정말 구하고 싶은 책이 드디어 나왔으나 수중에 돈이 없어 구할 수 없게 되자 평소 쌓아놓은 현금이 많다고 자랑하던 옆집 할머니의 돈을 훔쳐올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죄와 벌'에서의 전당포 주인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영국 드라마 '유토피아' 덕분이다. 끝까지 이 이름을 기억하려 애쓰던 '엘리스'에게 경배를!)가 바로 그 할머니인 것이다. 그는 온갖 추리 소설의 트릭을 다 꿰고 있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할머니를 밀실 살인하려 계획을 세우다 우연히 지진으로 인해 할머니와 자신의 방 사이에 있는 벽에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나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돈을 훔치려 한다. 그러니까 표지의 그림은 바로 그 벽에 난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소설의 주인공은 남자지만.


 그런데 여기까지 들으면 '어째서 이 소설이 서술 트릭이라는 거야?'라고 생각하실 것 같다. 아무래도 벽에 난 구멍을 이용한 평범한 미스터리처럼 보일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분명 서술 트릭이 사용되고 있다. '시간의 구멍'은 청년의 방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서 시작되는데 완벽한 밀실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누군가 취조 받는 것을 우리는 본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면 그 모든 인물들을 우리가 착각하고 있었음을 누군가 던진 테니스 공이 뒤통수를 때리듯 알게 된다.


 '그랜드 맨션'은 바로 그러한 이야기들이 일곱 개나 모여있는 것이다. 저렇게 등장인물들이 혼동되기도 하고 공간이 뒤섞이기도 하며 시간도 뒤죽박죽이 된다. 서술 트릭은 내가 코스모스라 알고 있던 우주를 뒤늦게 카오스라고 알려 둔중한 충격을 주는데 그것을 통해 과연 내가 무엇을 알고 판단할 수 있는가까지 나아가게 만든다. 즉 확실한 것은 언제나 일시적이거나 잠재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술 트릭은 가뜩이나 폐쇄된 사회라고 알려진 일본에게 그 외부로 사유의 문을 여는 좋은 통로가 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유독 일본에서 서술 트릭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서술 트릭의 매력을 잔뜩 느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랜드 맨션'이다. 사실 소설의 '그랜드 맨션'은 아파트와 같은 공동 주거 공간에 사는 이라면 결코 살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런 공간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층간 소음', '스토킹', '살인', '절도', '사기', '학대' 그리고 '방화' 가 모조리 일어나기 때문이다. 7편의 이야기는 이것들을 하나씩 담고 있는데 읽다보면 절로 '뭐. 이런 곳이 다 있어!'하게 된다. 어쩌면 오리하라 이치는 이 '그랜드 맨션' 자체를 지금 일본 사회의 은유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날로 막장으로 치닫는 중이지만 일본도 사정이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 주거 공간에서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살려면 타인에 대한 배려가 필수적이다. 이 말은 내가 타인에게로 열려있어야 그만큼 나 역시 생활의 안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생각해 보면, '그랜드 맨션'에서 일어난 모든 비극은 타인과 겨우 벽 하나를 두고 살 뿐인데도 철저히 자신의 이익과 욕망만을 관철시키려 한 것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일본이라는 사회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의 근본적인 모습이 아닐까? 그런 이기적 존재의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공간에 오리하라 이치는 슬쩍 서술 트릭을 가져온다. 믿었던 세계를 한 순간에 허물고 그를 통해 나 자신을 넘어 외부의 타자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이것이야 말로 오리하라 이치가 '그랜드 맨션'을 통해 주려는 메시지다.

 서술 트릭이라는 형식 자체가 주제인 것이다.


곁다리 : 사진의 배경은 로저 워터스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해, 그 붕괴의 현장에서 핑크 플로이드의 대표적인 앨범 'THE WALL'을 라이브로 공연했었는데 그 실황을 담은 LP의 커버이다. 베를린 장벽이 그랬듯이 벽의 붕괴가 곧 구원이라는 '그랜드 맨션'의 근원적인 주제와 통하는 것 같아서 놓아보았다. 거기다 곧 아주 오랜만에 핑크 플로이드의 신작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 환영의 의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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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8 14: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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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8 23: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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