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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맨션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6
오리하라 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그랜드 맨션'은 2013년에 나온 오리하라 이치의 소설이다. 이게 정말 얼마만에 만나보는 그의 작품인가? 1951년에 태어나 1988년에 '다섯 개의 밀실'로 데뷔한 오리하라 이치는 도착 3부작과 '~자' 시리즈를 비롯하여 정말 많은 작품을 썼는데 그래도 내게는 오리하라 이치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서술 트릭'이다. 분명 명실상부한 그의 대표작인 '도착의 론도'로 처음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도착의 론도' 자체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이다.
여기서 오리하라 이치는 자신이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서술 트릭을 사용할 수 있는지 가득 보여준다. 서술트릭의 효과는 결말에서 뒤통수를 맞고 반드시 다시 읽게 된다는 것인데 '도착의 론도'가 꼭 그랬다. 그렇지 않아도 서술 트릭에서 유독 강세를 보이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아니, 일본만이 유일하게 서술 트릭을 다룬 작품들이 여전히 나오고 있다. 오리하라 이치는 거기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여줬던 작가라 할 수 있었다. '도착 3부작'은 마치 서술 트릭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나를 실험하려는 듯한 인상마저 짙게 풍기는데 그만한 재능이 바탕되어 있기에 할 수 있는 실험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 나온 '그랜드 맨션'도 도착 3부작의 노선을 따른다.
즉 서술 트릭이 주가 되는 작품이다.
표지가 너무 멋지기에 아무래도 표지 이야기부터 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보았을 때 역대급 표지라 생각했다.
이 정도로 책에 대한 호기심을 부채질하는 표지가 또 있을까 싶다. 작가의 이름이 뭐든 장르가 뭐든 상관없이 닥치고 펼쳐서 읽고 싶어진다. 원래 책을 위해 만들어진 표지가 아니라고 하는데도 책 내용과 묘하게 상통한다. '그랜드 맨션'은 같은 공동 주택에 사는 서로 다른 7명을 하나의 단편마다 하나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연작 소설처럼 되어 있는데 그 중 밀실 살인을 다룬 '시간의 구멍'이 바로 표지의 그림과 상관있다. '시간의 구멍'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설정을 따왔는데 거기서 라스꼴리니코프의 역할을 맡은 미스터리 소설 수집광 청년은 정말 구하고 싶은 책이 드디어 나왔으나 수중에 돈이 없어 구할 수 없게 되자 평소 쌓아놓은 현금이 많다고 자랑하던 옆집 할머니의 돈을 훔쳐올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죄와 벌'에서의 전당포 주인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영국 드라마 '유토피아' 덕분이다. 끝까지 이 이름을 기억하려 애쓰던 '엘리스'에게 경배를!)가 바로 그 할머니인 것이다. 그는 온갖 추리 소설의 트릭을 다 꿰고 있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할머니를 밀실 살인하려 계획을 세우다 우연히 지진으로 인해 할머니와 자신의 방 사이에 있는 벽에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나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돈을 훔치려 한다. 그러니까 표지의 그림은 바로 그 벽에 난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소설의 주인공은 남자지만.
그런데 여기까지 들으면 '어째서 이 소설이 서술 트릭이라는 거야?'라고 생각하실 것 같다. 아무래도 벽에 난 구멍을 이용한 평범한 미스터리처럼 보일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분명 서술 트릭이 사용되고 있다. '시간의 구멍'은 청년의 방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서 시작되는데 완벽한 밀실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누군가 취조 받는 것을 우리는 본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면 그 모든 인물들을 우리가 착각하고 있었음을 누군가 던진 테니스 공이 뒤통수를 때리듯 알게 된다.
'그랜드 맨션'은 바로 그러한 이야기들이 일곱 개나 모여있는 것이다. 저렇게 등장인물들이 혼동되기도 하고 공간이 뒤섞이기도 하며 시간도 뒤죽박죽이 된다. 서술 트릭은 내가 코스모스라 알고 있던 우주를 뒤늦게 카오스라고 알려 둔중한 충격을 주는데 그것을 통해 과연 내가 무엇을 알고 판단할 수 있는가까지 나아가게 만든다. 즉 확실한 것은 언제나 일시적이거나 잠재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술 트릭은 가뜩이나 폐쇄된 사회라고 알려진 일본에게 그 외부로 사유의 문을 여는 좋은 통로가 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유독 일본에서 서술 트릭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서술 트릭의 매력을 잔뜩 느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랜드 맨션'이다. 사실 소설의 '그랜드 맨션'은 아파트와 같은 공동 주거 공간에 사는 이라면 결코 살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런 공간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층간 소음', '스토킹', '살인', '절도', '사기', '학대' 그리고 '방화' 가 모조리 일어나기 때문이다. 7편의 이야기는 이것들을 하나씩 담고 있는데 읽다보면 절로 '뭐. 이런 곳이 다 있어!'하게 된다. 어쩌면 오리하라 이치는 이 '그랜드 맨션' 자체를 지금 일본 사회의 은유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날로 막장으로 치닫는 중이지만 일본도 사정이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 주거 공간에서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살려면 타인에 대한 배려가 필수적이다. 이 말은 내가 타인에게로 열려있어야 그만큼 나 역시 생활의 안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생각해 보면, '그랜드 맨션'에서 일어난 모든 비극은 타인과 겨우 벽 하나를 두고 살 뿐인데도 철저히 자신의 이익과 욕망만을 관철시키려 한 것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일본이라는 사회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의 근본적인 모습이 아닐까? 그런 이기적 존재의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공간에 오리하라 이치는 슬쩍 서술 트릭을 가져온다. 믿었던 세계를 한 순간에 허물고 그를 통해 나 자신을 넘어 외부의 타자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이것이야 말로 오리하라 이치가 '그랜드 맨션'을 통해 주려는 메시지다.
서술 트릭이라는 형식 자체가 주제인 것이다.
곁다리 : 사진의 배경은 로저 워터스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해, 그 붕괴의 현장에서 핑크 플로이드의 대표적인 앨범 'THE WALL'을 라이브로 공연했었는데 그 실황을 담은 LP의 커버이다. 베를린 장벽이 그랬듯이 벽의 붕괴가 곧 구원이라는 '그랜드 맨션'의 근원적인 주제와 통하는 것 같아서 놓아보았다. 거기다 곧 아주 오랜만에 핑크 플로이드의 신작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 환영의 의미도 있다.